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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Author: 이야기보따리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별일 아니면 방해하지 마.”

소예지는 평소보다 한층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꾸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이지 지금은 한눈팔 여유조차 없었다. 꼬박 두 시간을 쏟아부어 겨우 배양해 낸 생체 샘플이었고 자칫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휴대폰을 실험대 위에 툭 던져놓고 다시 연구에 몰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니터 속 데이터를 꼼꼼히 체크하던 소예지는 어느덧 새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연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쯤에서 그만하고 쉬어.”

강준석이 직접 실험실까지 찾아와 그녀를 말렸다. 소예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데이터를 넘겼다.

“예상했던 결과랑 똑같아.”

강준석이 데이터를 빠르게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

“메틸수은은 분자 크기가 작아서 혈액을 타고 쉽게 뇌까지 침투해 뇌세포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혈액-뇌 장벽마저 붕괴해 환자의 증상이 나타나는 거고.”

그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이렇게 또 하나의 난제를 풀었다는 사실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충혈된 눈과 창백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 좀 쉬어.”

소예지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도 얼른 쉬어.”

연구동을 나서자 시원한 밤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스쳤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숨을 고르던 그때, 다시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역시나 고이한이었다. 소예지는 짧은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제 들어와?”

감정을 읽기 어려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오늘 연구소 기숙사에서 잘 거야.”

소예지는 짧게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에게선 연락이 오지 않았고 그녀는 간단히 샤워를 마친 뒤 침대로 들어가 곧바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최현숙의 전화를 받았다.

“예지야, 오늘 저녁에는 집에 와서 밥 먹으려무나.”

따뜻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소예지의 마음도 덩달아 포근해졌다. 며칠째 시어머니가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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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 오빠, 예지 씨도 저쪽에 있네. 같이 올라가자고 불러봐.”심유빈이 사람 좋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고이한 역시 이미 그 자리에 서 있는 소예지를 알아본 터라,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여긴 웬일이야?”그러자 소예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쳤다.“내가 어디 있든 당신과는 상관없잖아?”그 순간, 윤혁이 다가왔다.“고 대표님,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윤 팀장님, 오랜만이네요.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고이한이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윤혁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희는 이 교수님 대신해 세미나에 참석하러 왔습니다.”그 말을 들은 심유빈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소예지 같은 애가 이 박사님을 대표해? 이 박사님 제자라면 하나같이 의학계의 거물인데?’하지만 고이한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회의 끝나고 시간 괜찮으시면 위층에서 한잔하시죠.”“고 대표님 제안이라면 영광이죠.”윤혁은 손목시계를 슬쩍 확인한 뒤, 소예지를 향해 말했다.“우리도 슬슬 올라가자.”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려 한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길은 잠시 윤하준에게 머물렀고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윤혁을 따라 자리를 떴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유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역시, 저 둘 단순한 사이는 아니야.’하종호도 이 자리에 있는데 소예지는 그에게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는 행동이었다.심유빈은 괜히 기분이 상했다. 예전의 소예지는 그저 집 안에만 있던 가정주부에 불과했는데 요즘은 점점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심유빈은 슬쩍 고이한을 바라봤다.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고 마치 자신의 아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듯한 태도였다.‘그래 당연하지. 이한 오빠 곁엔 언제나 각계 최고의 인재들이 넘쳐나니까. 소예지 같은 여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겠지.’세미나는 예상대로 형식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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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유빈은 미소만 지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빠도 알아?”고수경이 물었다.“알지.”“하, 제 분수도 모르고 자기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괜히 우리 오빠한테 말썽 부리고 난리야.”고수경은 소예지를 욕했다....다음 날 아침.소예지는 집에서 평가 시험을 치르고 오전 열 시 전에 시험지를 윤혁에게 보냈다. 윤혁은 곧장 그것을 의대 교수들에게 넘겨 그녀가 졸업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있는지 심사받게 했다.소예지는 곧장 박시온의 변호사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심 변호사님, 귀국하셨나요?][죄송합니다. 제가 돌아가려면 이틀은 더 걸릴 것 같네요.][알겠습니다. 오시면 꼭 연락 주세요. 뵙고 싶습니다.][네, 소예지 씨.]소예지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그때 강준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매곡마을 사건 승소했어. 화학공장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마을 주민들도 보상금을 받아냈어. 네가 이번 사건의 일등 공신이야.]소예지는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고생 많았어, 선배.][이따 다시 얘기하자.][응, 운전 조심해.]그 후 윤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후 두 시까지 의대에 직접 와서 시험 전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연락이었다.소예지는 바로 차를 몰아 의대로 향했고 삼십 분쯤 지나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교무처로 가서 서류를 작성했다. 그곳에 윤혁도 있어 둘은 잠시 잡담을 나눴다.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세 시가 되었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소예지는 차선을 지키며 평소처럼 규칙적으로 주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검은색 SUV 한 대가 그녀의 차 앞으로 확 끼어들었다. 소예지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핸들을 틀어 피했지만 SUV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이나 연달아 위협 운전을 했다. 다행히 뒤에서 경찰차가 나타나자 SUV는 속도를 내며 달아났다.가슴이 철렁한 소예지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윤하준에게 메시지를 보내 고하슬을 대신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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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예지가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서?”“너무 무리하지 마. 몸이 더 중요하니까.”고이한은 그녀가 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조기 졸업 시험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하지만 소예지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 더미에 파묻힌 소예지의 가녀린 어깨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운 듯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나 고이한은 정작 그녀가 더 야윈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서서 무심하게 말했다.“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네가 원하는 거, 내가 다 들어줄 수 있는데.”“이한 씨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 절대 줄 수 없어.”소예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단호하게 받아쳤다.고이한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계를 흘끗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자정은 넘기지 마.”저게 걱정하는 걸까? 아니, 그저 고이한 특유의 지배적인 태도일 뿐이었다.소예지는 그를 무시한 채 책장을 넘겼다.한편, 집으로 돌아온 심유빈은 가정부에게 약을 발라달라고 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고수경이 보낸 메시지였다.[유빈 언니, 자? 나 언니한테 할 말이 있어.][아직 안 잤어. 무슨 일이야?]곧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고 심유빈은 가정부를 내보낸 뒤 통화를 수락했다.“어, 수경아.”“언니, 나 하준 오빠 차에 있던 그 머리끈이 누구 건지 알아냈어.”“그게 누구 건데?”심유빈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새언니 거야.”고수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 말에 심유빈은 놀랐다.“그게 어떻게 예지 씨 거야?”“맞다니까! 저번에 새언니를 축하해 주던 날에 봤는데 새언니가 그거랑 똑같은 머리끈을 하고 있었어.”고수경은 확신에 차 있었다.심유빈은 지난번에 윤하준이 소예지를 몰래 도와줬던 일이 떠올라 애써 고수경을 달래 주었다.“수경아, 그게 진짜 예지 씨 거라고 해도 별거 아닐 거야. 혹시 하슬이가 실수로 차에 두고 간 걸

  • 전처분이 의학계를 휩쓸고 다니십니다   제127화

    심유빈은 턱을 괴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았어.”그러더니 무심하게 말했다.“아까 내 동생한테서 들었는데 예지 씨가 이번에 조기졸업 시험을 본다면서? 학부를 빨리 끝내고 싶다던데, 오빠도 알았어?”고이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그래?”“그리고 양 박사님이 이번에 팀을 새로 꾸리면서 예지 씨의 이름을 명단에서 뺐대. 오빠, 혹시 예지 씨를 다시 넣어줄 생각 없어? 그래도 오빠 아내잖아.”고이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양 박사님께 넣지 말라고 부탁했어.”심유빈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그럼 예지 씨가 화내지 않아?”“이번 연구에 예지 어머니의 샘플을 사용해서 날 많이 원망하고 있어.”심유빈은 미소를 지은 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럴 만도 하지. 아무래도 그건...”“무슨 얘기 하고 있어?”이때 하종호가 다가오며 말을 끊었다.고이한은 그와 간단히 인사했고 하종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심유빈을 바라봤다.“괜찮아요? 아까 뉴스를 봤는데 진짜 아찔하더라고요.”“괜찮아요. 저도 팬이 그렇게까지 과격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손목이 좀 부은 정도예요.”심유빈은 말하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하종호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다.“다음부턴 조심해요. 외출할 땐 경호원을 꼭 데리고 다니고요.”잠시 후, 윤하준도 도착했다.“이안이 오늘은 떼 안 썼어?”하종호가 농담하듯 묻자 윤하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새 장난감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했지, 뭐.”심유빈은 곁눈질하며 말했다.“하준 씨도 이제 슬슬 여자 친구 만들어야겠어요. 그래야 이안이를 돌봐줄 사람이 생기죠.”하종호는 윤하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보탰다.“그런데 너, 너희 외숙모의 자선 사업에 투자한다면서?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조용히 의학 쪽까지 손을 뻗은 거야?”윤하준은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앞으로는 이쪽이 큰 흐름일 거야.”그 말에 잔을 들고 있던 고이한은 멈칫했고 심유빈도 눈빛이 흔들렸다.윤하준이 정말 단순히 사업적 이유로 의학계에 투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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