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점심은 약속대로 고이한이 직접 준비했다.소예지는 그가 주방에 들어가면서 아이패드까지 챙겨 가는 모습을 보고 조금 의아했지만 이내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레시피를 보면서 처음부터 하나씩 만들어 볼 생각인 모양이었다.도와주겠다고 해도 고이한은 한사코 거절했다. 심지어 주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기에 소예지는 결국 방해하지 않기로 하고 휴대폰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그네에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며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동안 젤리는 발치의 풀숲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신이 나서 쫓아다니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삼십 분쯤 지나자 주방 쪽에서 제법 그럴듯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소예지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대체 뭘 만들고 있기에 이런 냄새가 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까지 간 소예지는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문틀에 가볍게 기대어 안을 들여다봤다.고이한은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 조리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짙은 회색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탓에 탄탄한 팔뚝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갈치에 소금으로 밑간을 하는 표정은 업무를 볼 때 못지않게 진지했다.소예지가 가만히 살펴보니 이제 갈치만 구우면 요리가 거의 끝나는 모양이었다.그때 기척을 느꼈는지 고이한이 뒤를 돌아봤다. 문 앞에 서 있는 소예지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배고파? 갈치만 구우면 돼. 십오 분이면 다 돼.”“도와줄까?”“괜찮아. 당신은 지금 찬물 만지면 안 돼.”소예지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아침에 배가 아팠던 걸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고이한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조리대로 시선을 돌렸다. 밑간해 둔 갈치에 밀가루를 얇게 묻힌 뒤 달군 팬에 하나씩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냄새가 주방 가득 퍼졌다.그 말대로 십오 분쯤 지나자 식탁 위에는 세 가지 요리와 국 하나가 차려졌다.소예지는 완성된 음식
고이한이 낮게 웃었다.“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어떻게 벌을 줘도 달게 받을게.”소예지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됐다. 더는 상대하지 않는 게 낫겠다.’그녀는 묵묵히 남은 만둣국을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나 요리 안 한 지 오래됐어. 점심은 당신이 해.”‘애초에 아주머니를 일부러 하루 더 쉬게 한 사람이 누구인데.’당연히 그 정도 책임은 져야 했다.고이한은 별다른 불만 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집에 식재료는 있어? 있으면 내가 할게.”“없어.”소예지도 조금 전 냉장고를 확인해 봤지만 당장 제대로 된 한 끼를 만들 만한 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그럼 이따 마트에 가서 장 좀 보자. 점심에는 어디 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먹고. 어때?”고이한이 자연스럽게 제안하자 소예지는 잠시 생각해 봤다.마침 젤리 사료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고 오늘은 저녁 연회 전까지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오랜만에 마트를 천천히 둘러보며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도 나름 기분 전환이 될 것 같았다.“좋아.”아침 식사를 마치고도 시간은 아직 일렀다.고이한이 자진해서 주방을 정리하는 동안 소예지는 통유리창 앞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다큐멘터리를 틀었다. 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화면에 집중하는 그녀의 발치에는 젤리가 느긋하게 엎드려 있었다.밤새 내리던 비는 완전히 그쳤고 열린 창문 틈으로 선선한 아침 바람이 이따금 거실 안까지 스며들었다.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편안했다.평온한 일상이란 어쩌면 이런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주방 정리를 끝낸 고이한이 물었다.“커피 마실래? 내가 내려 줄게.”“좋아.”소예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이한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에는 성능 좋은 커피 머신이 있어 직접 내린 커피도 웬만한 카페 못지않게 맛이 좋았다.잠시 후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온 고이한은 한 잔을 소예지에게 건넨 뒤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소예지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마셔 봤
고이한의 품에 안겨 있던 젤리는 팔다리를 몇 번 마구 버둥거리다가 바닥에 내려오자마자 온몸을 세차게 털어 댔다.사방으로 물방울이 튀는 바람에 가뜩이나 흠뻑 젖어 있던 고이한의 꼴은 더욱 엉망이 됐다. 회색 운동복은 물에 푹 젖어 몸에 달라붙었고 여기저기에는 젤리가 남긴 선명한 발자국까지 찍혀 있었다.그 모습을 본 소예지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정작 사고를 친 젤리는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듯 두 사람 주변을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조금 전 물속에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했지만 지금 저렇게 팔팔한 걸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옷 다 젖었네. 돌아가서 다시 샤워해야겠다.”고이한도 자신의 몰골을 내려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그러게. 가자.”두 사람은 젤리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소예지는 돌아가면 진흙투성이가 된 젤리부터 씻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는 길에 그 이야기를 꺼내자 고이한이 어차피 자신도 젖은 김에 젤리를 먼저 씻겨 주겠다고 나섰다.정원 한쪽에는 젤리를 씻길 수 있도록 따로 마련해 둔 공간이 있었다.소예지가 목욕용품을 챙겨 오자 고이한은 쪼그려 앉아 엉겨 붙은 털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풀어 가며 진흙부터 씻어 냈다. 소예지가 옆에서 반려견용 샴푸를 덜어 털에 발라 주면 고이한이 거품을 내 꼼꼼하게 문질렀고 소예지는 다시 물을 뿌려 씻어 냈다.두 사람이 손발을 맞추자 생각보다 금세 목욕이 끝났다.젤리도 조금 전 사고로 기운을 뺀 탓인지 웬일로 얌전히 앉아 두 사람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이른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정원에서 함께 젤리를 씻기는 모습은 누가 본다면 영락없이 평범하고 다정한 가족의 한때처럼 보였을 것이다.목욕을 마친 뒤 소예지는 젤리를 집 안으로 데려가 드라이어로 털을 꼼꼼하게 말려 주었다. 보송보송해진 젤리는 기분이 좋은지 카펫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소예지의 손길을 느긋하게 즐겼다.그사이 고이한도 자기 집으
소예지와 고이한은 나란히 별장을 나섰다.밤새 비가 내린 뒤라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고 상쾌했다. 촉촉한 흙냄새에 싱그러운 풀 향이 은은하게 섞여 있었고 아직 이른 시간이라 단지 안도 무척 조용해 간간이 아침 운동을 나온 노인들만 눈에 띄었다.두 사람은 별장 단지의 공용 정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았고 젤리는 신이 나서 앞쪽을 뛰어다니다가도 이따금 뒤를 돌아 두 사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그렇게 나란히 걷고 있으니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앳된 티를 벗지 못했던 소녀는 어느새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그사이 많은 것이 달라졌고 두 사람 역시 수없이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졌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주 오래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때 고이한의 크고 따뜻한 손이 자연스럽게 소예지의 손을 감싸 쥐었다.고이한은 곁눈질로 슬쩍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소예지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손을 빼지는 않은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발밑의 길만 바라봤다.처음에는 반응을 떠보려는 듯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던 고이한도 그녀가 거부하지 않자 입가에 슬며시 웃음을 띠었다. 이내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소예지의 손을 완전히 감싸 쥐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봤다.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소예지의 보폭에 맞춰 느긋하게 걸었다.쉽게 얻은 시간이 아니었다.그래서인지 고이한은 이렇게 함께 걷는 평범한 아침조차 놓치고 싶지 않은 듯했다.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가고 아침 햇살은 빗물에 씻긴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길 위로 얼룩진 그림자가 드리운 가운데 두 사람은 손을 맞잡은 채 고요한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소예지의 마음도 어젯밤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감정들이 밤새 내린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듯 어느새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추워?”고이한이 고개를 돌려 물었
소예지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아직 잠기운이 남아 흐릿한 시야 너머로 커튼 사이에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고이한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몸 위에는 그의 정장 재킷이 덮여 있었고 고이한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잠들어 있었다.한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눈을 감고 있는 얼굴 위로 희미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으며 다른 한 손은 혹시라도 그녀가 잠결에 뒤척이다 떨어질까 걱정한 듯 여전히 허리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예지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고이한의 곁에서 그렇게 깊이 잠들 줄은 몰랐다.지난밤 그의 품에 기대어 있다가 잠든 것까지는 어렴풋이 기억났지만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그대로 아침까지 푹 자 버릴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소예지는 고이한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자마자 허리에 얹혀 있던 그의 손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를 소파 안쪽으로 끌어당겼다.깜짝 놀란 소예지가 고개를 들어 바라봤지만 고이한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아무래도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인 모양이었다.소예지는 잠시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다가 다시 그의 손을 바라봤다. 밤새 이런 불편한 자세로 자신을 지켜 주며 잤다면 고이한도 몸이 성할 리 없었다. 차라리 지금 깨워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 제대로 자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그녀는 허리를 감싼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그러나 막 소파에 앉는 순간 고이한이 인기척을 느낀 듯 천천히 눈을 떴고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마주쳤다.“일어났어?”잠에서 막 깬 탓에 낮게 잠긴 목소리에는 아직 짙은 잠기운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소예지를 알아보자 흐릿하던 눈빛도 조금씩 맑아지고 표정 역시 한결 부드러워졌다.소예지는 흐트러진 머리
소예지는 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마셨지만 아랫배의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결국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쿠션을 끌어안은 채 묵묵히 통증을 참았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이한은 다시 소파에 앉아 긴 팔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소예지가 자신의 가슴에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까지 잡아 주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다.“움직이지 마.”고이한이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옆에 있어 주기로 했잖아.”그러고는 넓은 손바닥을 블라우스 위로 소예지의 아랫배에 가만히 얹었다.소예지의 몸이 순간 굳었다.하지만 따뜻한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묵직하게 당기던 통증을 서서히 누그러뜨리자 소예지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도 조금씩 힘이 풀렸다.창밖에서는 어느새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공기에는 눅눅한 습기가 배어 있었지만 빗소리로 가득한 밤의 거실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고이한은 소예지가 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그의 턱이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닿았지만 소예지는 눈을 감은 채 더는 밀어내지 않았다.그런데 잠시 후 옷 위에 얹혀 있던 고이한의 손이 블라우스 자락 안으로 들어와 맨살에 직접 닿았다.소예지의 눈이 화들짝 뜨였다.‘이 사람이 정말!’“예전에도 이렇게 해 줬던 것 같은데.”고이한이 몸을 살짝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이렇게 해야 당신이 좀 더 편해지잖아.”말하는 사이 따뜻한 손바닥이 아랫배를 감싸듯 덮었다. 천천히 온기를 전하듯 부드럽게 쓸어 주자 갑작스러운 접촉에 소예지의 온몸이 순간 예민해졌다.맨살에 닿은 그의 손이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그러자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 소예지는 고이한의 손이 웬만한 핫팩보다 크고 따뜻해서 훨씬 낫다며 농담처럼 말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건 예전이었다.“약속할게.”고이한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가라앉았다.“그냥 따뜻하게 해 주기만 할 거야. 다른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