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만약 편정우의 실험실에 투자한 곳이 정말 그런 회사라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뇌–기계 인터페이스 기술은 단지 의학 분야에만 머무는 연구가 아니었다. 향후 우주항공이나 고위 기술 산업 전반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이 큰 프로젝트였다.“윤하준 씨, 혹시 그 회사가 고 대표랑 연관 있는 건 아니겠죠?”소예지는 빙 돌리지 않고 곧장 물었다. 그녀는 고이한이 운영하는 계열사들의 세부적인 사업 포지션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윤하준은 한참을 생각한 끝에 고개를 저었다.“내가 아는 한, 노바스페이스와 고 대표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요. 고 대표 쪽은 최근 몇 년간 의료 기술이나 AI 분야에만 집중해 왔고요. 왜요, 혹시 고 대표가 편 교수 쪽에 다시 손을 뻗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고 대표가 운영하는 MD도 뇌과학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어요. 예전에 편 교수에게 직접 접촉한 적도 있었고요.”“그래요?”윤하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그럼, 편 교수님은 그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신 것 같아요?”소예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윤하준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실 몇 년 전부터 고이한의 사업 확장은 상당히 거칠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에는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기 힘들 만큼 바쁘게 움직였고 정치권 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아 수도권을 오간다는 소문도 있었다.비록 세 사람은 어릴 적부터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의 사업이나 정치적 행보에 대해 서로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다.“편 교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연구의 독립성과 순수성이에요.”소예지는 차분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투자 배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연구 자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고 대표는 교수님이 원하는 투자자가 아니에요.”그 말에는 분명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윤하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잠시 말을 고르던 그는 결국 덧붙였다.“정식 계약 전에 전문가에게 투자사의 배경 조사는 꼭 받아두는
편정우를 호텔로 데려다주는 길에 소예지는 그와 함께 실험실 장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음, 핵심 장비들은 전부 상태가 괜찮네. 몇 가지만 재조정하면 바로 사용 가능하겠어.”소예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지유선 연구소는 전체적으로 설비 수준이 매우 우수했다. 소예지는 문득, 하늘에 있는 지유선이 이 모습을 본다면 분명 이 실험실이 다시 연구에 사용되는 걸 진심으로 기뻐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호텔에 도착하자, 편정우는 이틀 안으로 시간을 조율해 달라고 부탁했다. 윤하준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예지는 잠시 일정을 살핀 뒤 다음 날 오후로 약속을 잡았고 장소는 벨모아 호텔 회의실로 정했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실험기지에 들렀다. 그곳에서 마주친 양정화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고 편정우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소예지의 향후 계획을 금세 눈치챘다.양정화는 편정우에 대해 아주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학번이 두 기수 아래였고 편정우는 대학 2학년 때 유학을 떠난 터라 직접 마주할 기회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소예지의 아버지 소영욱, 그리고 이성열과 함께 의과대학의 전설적인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양정화는 진심 어린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소예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희 아버지랑도 막역한 사이라던데? 듣기로는 네가 결혼한 뒤 6년 동안 그분 실험실에서 연구도 했다고?”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편 교수님은 제게 정말 많은 걸 가르쳐주셨어요. 저에겐 스승이자 인생의 선배 같은 분이에요.”“소예지, 너 정말 대단하다.”양정화는 솔직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누구 도움 없이 스스로 여기까지 왔다는 게 정말 존경스러워.”칭찬을 아끼지 않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듯 다시 물었다.“그런데 6년이나 연구를 해왔는데 어떻게 고 대표는 그걸 몰랐던 거야?”소예지의 시선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어딘가 쓸쓸했다.“그땐 가정을 지키는
의심할 여지 없이 편정우는 의학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그러니까... 편 교수님 실험실을 재가동하는 데 소예지 씨도 그 팀에 합류할 생각인 거죠?”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대답했다.“네. 제가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편 교수님 덕분이에요. 그분 밑에서 시작한 연구도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요.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윤하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찻잔을 한 번 내려다본 뒤, 이윽고 입을 열었다.“임대료는 괜찮아요. 그보다... 나한텐 좀 더 좋은 제안이 있어요.”“어떤 제안이요?”소예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실험실에 지분 투자자로 참여하는 거예요.”그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덧붙였다.“난 연구 성과도 필요 없고 특허나 논문에 이름을 올릴 생각도 없어요. 그냥 예지 씨 연구가 조금이라도 더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랄 뿐이에요. 내 방식으로 예지 씨를 응원하고 싶어요.”그 말에 소예지는 한순간 멍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윤하준을 바라보고만 있었다.하지만 이내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마음만은 정말 고마워요. 다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윤하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놀라움과 함께 어딘가 아쉬운 감정이 스쳤지만 그는 곧 미소로 그것을 감췄다.“내가 너무 앞서갔나 봐요. 예지 씨 입장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네요.”소예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미안해요, 하준 씨.”그녀가 말한 ‘미안함’의 의미를 윤하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감정의 주도권은 그가 쥐고 있었고 그녀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여기까지 와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받아달라고 말하는 건 어쩌면 지나친 요구였을지도 모른다.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낀 윤하준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우린 친구 사이잖아요. 친구끼리 도와주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소예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
소예지는 몇 초간 놀란 얼굴로 서 있다가, 이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교수님, 저 그 실험실 소유자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예요. 한 번 물어볼 수 있어요.”그 말을 들은 편정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거 정말 잘됐구나. 그 일은 너한테 맡길게. 이미 실험실을 재가동하기로 결정한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어. 하기로 한 건 반드시 실행해야지.”편정우는 평생을 연구에 몰두해 온 사람답게 태도는 언제나 신중했고 결정은 늘 단호하고 깔끔했다.“네, 그럼 제가 그분과 만남을 잡아볼게요.”소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편정우를 호텔로 데려다준 뒤, 소예지는 시간을 확인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딸을 데리러 갔다. 차를 몰며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다행이라고 느껴진 건 이번 교수님의 실험에 고이한이 전혀 얽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요즘 고이한은 연구개발 분야에서 투자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었고 만약 그가 편정우의 실험실이 이미 2년 전부터 뇌-기계 인터페이스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 분명 어떻게든 손을 뻗어 협업을 시도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에 편정우가 그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건, 이제 고이한이 더는 이 일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물론 앞으로 어떤 자리에서 다시 그를 마주칠 가능성은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연구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그날 저녁, 소예지는 딸을 품에 안고 집 안의 온기를 천천히 음미했다. 바깥에서는 아무리 바쁘고 지쳐도 이 작은 집만큼은 그녀가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다음 날 아침, 소예지는 딸을 등굣길에 데려다주던 중 우연히 윤하준과 마주쳤다. 그 역시 이안을 데리고 막 차에서 내리는 참이었다.“이안아!”“하슬아!”두 아이는 반갑게 손을 잡고 웃으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소예지와 윤하준은 아이들의 뒤를 따라 나란히 걸었고 아이들이 교문 안으로 들어가자 윤하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박사님, 혹시 전화번호 알려주시면 안 돼요?”“맞아요! 부탁드릴게요!”장난스럽게 외친 건 몇 명의 남학생들이었고 하나같이 청춘이 넘치는, 잘생긴 얼굴들이었다.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달아오르며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소예지가 정중히 거절하려 입을 열려던 순간, 무리 너머에서 낮고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 박사님의 강연,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모두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그곳에는 서늘한 분위기를 두른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를 풍기는 인물이었다.그리고 그 모습을 알아본 누군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헉, 저 사람... 소 박사 전남편, 고이한 아니야?”“진짜네... 저 사람이 여기까지 온 거야?”고이한은 천천히 학생들 사이로 걸어 나와, 아까 떠들썩하게 굴던 남학생들 쪽으로 냉정한 시선을 던졌다.“학문적 토론은 좋지만 소 박사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 실례 아닙니까.”그 강한 눈빛에 몇몇 학생들은 움찔하며 어색하게 웃고는 슬그머니 물러났다. 사실 그들도 딱히 나쁜 의도는 없었다. 그저 너무 인상적인 강연자에게 가벼운 장난을 던졌을 뿐이었다.고이한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뒤, 다시 덧붙였다.“소 박사님은 잠시 후 중요한 회의가 있습니다. 이만 다들 돌아가세요.”소예지는 학생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미안해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 나눠요.”아쉬움에 고개를 떨군 학생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사람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편정우와 허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소예지는 두 사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고이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따라가려 했지만 소예지가 갑자기 돌아서며 단호하게 말했다.“더는 귀찮게 따라다니지 마. 편 박사님은 당신과 협력할 생각 전혀 없으니까.”그 말에 고이한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편정우가 물었다.“너희... 이혼했다면서? 그런데
소예지는 편정우를 호텔까지 안전히 안내한 뒤, 로비에서 잠시 쉴 틈도 없이 임재석과 업무 보고를 나누었다. 최근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 일정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며 약 삼십 분가량 대화를 이어간 뒤에야 임재석이 자리를 떴고 그제야 소예지는 홀로 호텔 1층 로비의 응접 소파에 몸을 기댔다.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녀는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요를 즐겼다. 유리창 너머로 붉게 물든 석양이 로비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며 그녀의 어깨 위로 금빛을 드리웠고 소예지의 옆모습에는 잔잔한 빛이 내려앉았다.그때였다.누군가 맞은편 소파에 조용히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소예지는 대수롭지 않게 그저 기다리는 손님이겠거니 생각한 채 눈을 감고 그대로 있었지만 어딘가 낯익고도 강렬한 시선이 피부에 닿는 듯했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정면에서 마주한 자리에 한 쌍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순간 소예지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그는 보일 듯 말 듯한 얄미운 웃음을 띤 채 입을 열었다.“박사 학위 받았다고 들었어. 축하해.”소예지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냉랭하게 응수했다.“당신 축하 따위 필요 없어. 그런 가식은 집어치워.”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떠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고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특유의 여유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편 박사님이 귀국해서 실험실을 다시 여신다고 하더군. 하지만 내 연구소에 남는다면 당신을 위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어. 생각해 볼만하지 않을까?”소예지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이 남자, 정말 끝까지 뻔뻔하네.’모든 것을 돈과 조건으로만 판단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포장해 상대를 흔들려 드는 그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쓸데없는 말은 이제 그만둬. 당신이 어떤 조건을 내걸든 나는 절대 그곳에 남지 않아.”소예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며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은 채 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