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아, 이젠 어떻게 하려고? 남준 씨가 두 사람 언제 결혼할지 알려줬어?”하예솔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말을 이어갔다.“정 안 되겠으면 내가 박민정이 앞으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인터넷에 글을 쓸게.”이지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 테이블에 놓인 꽃을 다듬기 시작했다.“아니야.”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말했다.“그러면 분명 남준 오빠에게도 영향을 줄 거야.”그 말을 듣고서야 하예솔은 인터넷에 글을 쓸 생각을 포기했다.하예솔을 보낸 후 이지원은 가위로 싹둑 꽃을 잘랐다. 온전한 장미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예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결혼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사랑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지만, 유남준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초반에는 자신감 넘쳐서 유남준의 마음을 얻겠다며 입국했지만 이제는 여자 친구라는 신분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원은 이 모든 상황이 우스웠다.그 생각에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은 꽃병을 쓸어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꽃병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고 안에 담겨 있던 장미꽃도 여기저기 흩어졌다.유리 조각에 긁힌 이지원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그녀는 붉게 물든 손을 보더니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바닥에서 유리 조각을 줍고는 그대로 손목을 베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후 유남준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오빠, 너무 아파요. 오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 혹시 나 만나러 와주면 안 돼요?]30분 후.유남준이 부천 팰리스에 도착했다.그는 곧바로 얇은 옷가지를 입은 이지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의 손목에서 흐르는 피는 마치 매화꽃처럼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유남준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왜 자기 몸에 상처를 내?”자신에게 다가오는 유남준을 보며 이지원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고는 유남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오빠, 날 가져요. 제발, 이렇게 부탁해요. 오빠와 결혼하지 못한다고 해도 제발 오빠의 여자가 되고 싶어요.”유남준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그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릴 걸 모르고 연예인의 길을 선택했어?”유남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얘기를 들은 이지원은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돌처럼 무정한 마음을 가진 유남준이 원망스러웠다.“오빠,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돼요? 제발요, 이렇게 부탁할게요.”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한 유남준이 무자비하게 말했다.“어머니는 네가 내 아이를 낳길 바라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그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이지원이 당황했다.“분수를 잘 지키는 게 좋을 거라고.”유남준이 또 말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이지원은 멀어져가는 유남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정하게 구는 그가 원망스러웠다.분명 유남준의 아버지는 여색을 탐하는 분이셨는데 왜 유남준은 전혀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걸까?고영란도 손주를 바라고 있었지만 이지원은 유남준의 아이를 가질 기회조차 없었다.이지원은 전화로 의사를 불러 손목 상처를 처리했고 부천 팰리스에서 나온 유남준은 비서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출동한 인원들은 모두 도착해서 대기 중입니다. 일부 불법적인 수단을 활용해 진행하고 있으니 대표님께서 직접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아마 아이를 순조롭게 데려올 수 있을 겁니다.”“아마라니?”유남준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리자 서다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연지석 쪽에서 뭔가를 눈치챘는지 현지 병원 주변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 처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사이 연지석에게 들키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그 얘기를 들은 유남준은 한참 동안 고민하더니 말했다.“에스토니아로 가는 전용기를 지금 당장 준비해. 내가 직접 가서 아이를 데려와야겠어.”“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유남준은 즉시 공항으로 향했다.이지원의 자작극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진작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아이를 데려오면 박민정에게는 더 떠날 이유가 없을 것이고, 고영란도 더는 손주 타령을 하지 않을 것이다.깊은 밤.에스토니아의 V
박윤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유남준을 자극했다.“아저씨, 혹시 돈 때문에 저를 납치한 거예요? 우리 아빠는 돈이 엄청 많아요. 그리고 아빠는 저를 엄청 사랑하기 때문에 원하시는 대로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사람 하나 잘 골랐네요.”“...”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아빠가 그렇게 권력 있고 돈도 많으면서 왜 너를 잘 보호하지 않았대? 아니면 내가 널 납치할 수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박윤우가 흠칫했다.‘뭐야, 왜 이렇게 잘 대응하는 거야? 영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네.’박윤우는 대답하는 대신 갑자기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유남준이 물었다.“왜 그래?”“배가 아파요.”박윤우가 허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다행히도 유남준은 의사와 동행했다. 의사를 리무진으로 호출한 후 박윤우의 불편한 곳을 검사하게 했지만 그 어떤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대표님, 도련님의 복부를 자세히 검사해 봤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박윤우는 배를 끌어안더니 침대에서 뒹굴기 시작했다.“너무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흑흑...”“...”의사는 말문이 막혔다.유남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윤우가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차에 의료기기가 없어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없는 건 아닌가요?”“그럴 수도 있죠.”의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순간 유남준의 얼굴이 싸늘해졌다.“방금은 문제가 없다고 하더니 왜 제가 물어보자 오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의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차 안은 에어컨 때문에 차가운 공기가 맴돌았지만 의사는 식겁한 나머지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이때, 박윤우가 나서면서 분위기를 풀었다.“아저씨, 의사 선생님을 탓하지 마세요. 저는 원래 배가 자주 아프거든요, 배가 아플 때마다 아빠는 따뜻한 얼굴로 제 배를 녹여주셨어요, 그러면 바로 안 아팠거든요. 아저씨, 혹시 아빠처럼 얼굴을 제 배에 대주시면 안 돼요?”유남준은 어
박윤우는 자신의 옆에 누워 잠이 든 유남준을 힐끔 쳐다봤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를 대비해 워치폰을 챙겨 연지석에게 연락하려고 했지만 손목에는 워치폰이 없었다.게다가 입고 있던 옷도 모두 바뀌어졌다.그리고 박윤우의 워치폰에는 위치추적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져 박윤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그의 곁에 누워있던 유남준이 두 눈을 뜨며 물었다.“아직도 아파?”박윤우는 유남준이 이렇게 쉽게 깰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안 아파요. 고마워요, 아저씨!”아저씨.아저씨라는 말이 유남준에게 찝찝하게 들렸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네 이름이 뭐야?”박윤우는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연윤우예요.”연윤우라...연씨라...유남준의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박윤우는 유남준이 분명 자신과 엄마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기에 자기를 찾으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모든 정보를 다 조사해 낸 건 아닐 것이다. 아니면 왜 이름까지 물어보겠는가? 더군다나 연지석은 그와 형, 그리고 엄마의 신분 정보를 잘 숨겼었다.유남준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박윤우는 또 순수한 얼굴로 물었다.“아저씨, 제 이름 예쁘죠? 아빠가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연씨가 흔히 볼 수 없는 멋있는 성씨잖아요, 안 그래요?”‘뭐가 멋있어?’녀석은 컨디션이 좋아지자마자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왜 배가 아픈지 알아?”박윤우가 의아했다.‘뭐지? 내가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아시는 건가?’“말이 너무 많아서 그래. 말 많은 애들이 배가 쉽게 아프거든.”유남준이 그 한마디 남기고는 휴게실을 떠났다.서다희는 방에서 나온 유남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대표님, 깨셨어요?”“응.”유남준이 자리에 앉은 후 서다희는 사람 시켜 아침을 가져오라고 했다.하지만 유남준은 식사하지 않고 서다희에게 물었다.“저 아이가 몇 개월인지 알아냈어?”“45개월이요.”45개월이라...유남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만약 박
유남준은 박민정인 줄 알고 빠르게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아쉽게도 발신자는 이지원이었다.그는 귀찮은 얼굴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이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빠, 나 도와줘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은 지어낸 거란 말이에요.”인터넷에서 떠도는 소문?유남준은 갑자기 축하연 때, 뉴스에서 이지원이 표절했다고 보도된 일이 생각났다.“오늘 회사에 내 신곡, ‘세상의 한 줄기 빛’이 표절했다는 고소장이 도착했어요. 그리고 어떤 변호사가 인터넷에서 내가 표절을 일삼아 성공했다는 듯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막막해요.”그 얘기를 들은 유남준은 미간을 구겼다.“알겠어.”전화를 끊은 후 유남준은 법무팀에 연락해 허위 사실 유포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그는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을 볼 시간도, 관심도 없었다.하지만 인터넷에는 이지원이 출생 이후 어떤 지원을 받고, 외국으로 나간 후 어떤 수단으로 부잣집 남자들을 이용해 성공했으며, 또 표절하고서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그 내용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유남준이 확인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 내용도 몰랐다.그리고 이지원이 말한 고소장을 보내온 사람이 바로 박민정의 친구인 조하랑인 것도 당연히 몰랐다.조하랑이 직접 작성한 이지원의 일대기가 금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친구를 위해 복수하려면 이 정도쯤은 할 수 있었다.하지만 30분도 채 되지 않아 이지원에 관한 실시간 검색어가 모두 사라졌다.1시간 후.박민정은 회사에 출근하려고 준비하던 중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조하랑을 보석해 달라는 전화였기에 그녀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경찰서로 향했다.하지만 경찰서에 도착한 후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한껏 예쁘게 꾸민 채 대기실에 앉아 있는 이지원과 그녀의 친구, 하예솔이었다.이지원도 박민정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기선제압을 했다.“민정 씨, 나 미워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하랑아, 걱정하지 마. 내가 내일 너 데리러 올게.”박민정이 분명 유남준을 찾아갈 걸 알기에 조하랑이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민정아, 굳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마. 여기서 7일 동안 있는 것쯤이야. 두렵지도 않은데, 뭘.”“괜찮아.”박민정이 경찰서를 나선 후 택시를 탔다.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바로 소셜 미디어에 올린 이지원의 글이 보였다.[결백한 자는 해명하지 않아도 결백하다.]‘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네.’박민정은 손가락 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휴대폰을 꽉 잡았다.그녀는 먼저 회사로 향했다.하지만 비서에게 들은 바로 유남준은 CEO를 한 명 고용한 후 계속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집에서 쉬고 있다고? 처음 듣는 얘기네.’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또 택시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향했다.두원 별장에 도착한 후.경비원은 그녀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녀의 앞길을 막지 않았다.큼지막한 별장 밖은 유난히 고요했다. 주변의 경치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박민정이 입구에 들어서자 ‘쿵’하는 소리가 났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지문을 사용해 문을 열었다. 사실 자신의 지문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했다.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현관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자 바닥에 누워 있는 유남준을 발견했다.방금 난 소리는 그가 소파에서 떨어져서 난 소리였다.그리고 집 안에는 옅은 담배 냄새가 남아 있었다.“유 대표님.”박민정은 유남준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괴로운 듯 미간을 구긴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이마에는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유 대표님...”그녀는 몸을 웅크려 앉아 유남준의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 그의 이마가 뜨겁게 느껴졌다.유남준은 열이 나고 있었다.차가운 그녀의 터치에 유남준은 잠깐의 편안함을 느꼈다.하지만 박민정이 손을 떼려 하자 유남준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 때문에 박민정은 하마터면 그의 몸에 넘어질
박민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유남준이 잠잠해진 후였다.그의 이마를 만져보니 조금 전보다 더 뜨거워진 상태라 박민정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갔다.구급상자는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약품의 유통기한이 모두 지났다. 다른 비상약도 없어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낸 후 천에 꼭 싸고는 그의 이마에 올렸다.그리고 곧바로 인터넷으로 약을 주문했다.유남준에게 약을 먹일 때 그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았다. 꿀을 조금 섞은 후에야 그는 겨우 약을 목구멍에 넘겼다. 밖에서는 카리스마 있고 위풍당당한 유남준이 쓴 약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을 줄은 누가 알겠는가?박민정은 유남준을 소파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는 워낙 무거웠고, 또 그녀에게도 힘이 남아돌지 않았으니 그를 그대로 바닥에 뒀다. 그래서 에어컨 온도를 높인 후, 그에게 얇은 담요까지 덮어줬다.한참을 고생했으니 어느덧 그녀도 소파에서 스르륵 잠이 들었다.노을빛이 얼굴에 비치자 유남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팔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자 소파에 엎드려 잠이 든 박민정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는 잠깐 멈칫하다가 자기 몸에 덮인 담요와 옆에 놓인 젖은 수건, 그리고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유남준은 살며시 담요를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그때 머리가 핑 돌았다.‘내가 이렇게 심각하게 아팠었나?’“드디어 깼어요?”인기척에 박민정도 잠에서 깼다.유남준은 벌써 정신을 차렸고, 또 큰 문제가 없어 보이니 박민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오늘 내가 대표님 간호했잖아요. 그걸 봐서라도 하랑이 풀어줘요. 하랑이는 나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하랑이 대신 이지원 씨에게 사과할게요. 죄송해요.”유남준은 막 잠에서 깨었는지라 정신이 없어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아이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라니.”“하랑 씨는 왜?”박민정이 설명했다.“인터넷에서 이지원 씨가
박민정이 흠칫했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소파에 앉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몸이 많이 불편해서 그러는데, 남아서 나 간호해 줘.”“내가 간호해 주면 하랑이를 풀어줄 거예요?”“응.”유남준의 잠긴 목소리는 유난히 감미롭게 들렸다.“알겠어요.”박민정도 어차피 유남준에게 접근하려던 참이었으니 그의 제의에 수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유남준은 위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젯밤에 에스토니아로 출국한 후로 지금까지 그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말이다.“아직 요리하는 거 까먹은 건 아니지? 나 배고파.”“배달 음식을 주문할게요.”박민정이 휴대폰을 꺼내 주문하려던 참에 유남준이 미간을 구긴 채 그녀를 말렸다.“당신이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데?”“요리하려면 적어도 한두 시간 걸려요.”박민정이 말했다.“기다릴 수 있어.”유남준은 그윽한 눈망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한 시라도 눈을 떼지 않았다.박민정은 그런 그의 눈빛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그럼 지금 요리 시작할게요.”그녀의 늘씬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남준은 저도 모르게 목구멍을 살짝 움직였다.주방은 마치 금방 인테리어를 끝낸 듯이 깨끗했다. 물론 냉장고도 새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내가 떠난 후 도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인터넷으로 식자재를 주문했다.유남준은 거실 소파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는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자의 소리를 들었다. 마치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간 듯했다.몸은 힘들었지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잠시 휴식을 취한 후, 그는 휴대폰을 꺼냈다.법무팀 책임자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여론을 정리해 유남준에게 보고했다.이지원의 부정적인 여론을 보면서도 유남준은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면서 책임자에게 말했다.“조하랑 풀어줘.”그러고는 휴대폰을 껐다.이지원은 고영란의 생명 은인일 뿐, 그녀의 사생활에 관해서 유남준은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주상 엔터테인먼트는 유앤케이 그룹 산하의 회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