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그 편지를 읽기 싫어 거절하려 하는데 박민호가 날렵하게 편지를 낚아채면서 말했다.“누나, 내가 대신 읽어줄게. 엄마가 대체 뭐라고 썼는지.”박민호는 한수민이 소송을 통해 거액의 재산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뜻밖으로 편지에는 박민정한테 남긴 말밖에 없었다.“민정아, 미안하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구나. 난 인간이 아니야, 네 엄마 될 자격은 더 없으며, 또 다행히도 네 엄마가 아니야...”여기까지 읽은 박민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왜 다행히 박민정의 엄마가 아니라고 하지?’워낙 생각이라는 걸 별로 할 줄 모르는 박민우는 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읽었지만, 끝까지 전부 한수민이 박민정에게 속죄하는 말들이었다. 계속하여 읽어가던 박민우는 드디어 제일 관심하는 재산에 관한 내용을 보았다.“나의 전부의 재산을 너한테로 물려줄 것을 변호사한테 지시했어.”여기까지 읽은 박민우는 순간 머리가 날아오는 방망이에 맞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박민우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물었다."나한테 뭐라도 남겨준 건 없어?""없는데요."간병인은 가물에 콩 나듯 병문안을 거의 안 오다시피 하는 박민우를 보면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박민우의 가슴은 실망과 분노의 불로 부글부글 끓었지만 유남우가 옆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식적으로 웃으면서 말했다."누나는 엄마가 나를 제일 이뻐 한다고, 내 편 이라고 했지? 봤어? 이게 내 편 맞아? 재산은 전부 누나한테만 남겨준다고 하잖아!"박민정도 한수민이 유산을 자기한테 남겨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간병인에게 자세하게 물어보려 하는데, 유남우가 입을 열었다."민정아, 이모님이 생전에 유산에 대한 일은 나한테 부탁했댔어. 변호사도 우리 회사직원이야. 아마도 지금쯤은 막 달려오고 있을 거야."유남우도 사실이라 증언하니 틀림없을 것이다,박민우는 한수민이 더없이 미웠다. 옛날에는 윤소현만 감싸고 돌더니, 지
유남우가 대답하기 전에 박민우가 윤소현을 보면서 빈정거렸다.“엄마의 친딸인 너는 안 와도, 사윗감인 형이 오는 건 당연한 거지. 누구나 다 너처럼 양심 없는 줄 아나?”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한 윤소현의 눈에서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박민호, 너 재주 많이 늘었다? 네가 뭘 믿고 감히 내 앞에서 까불고 있어? 내가 아니었으면 남우 씨가 너넬 도울 것 같아?” 윤소현의 반박에 박민우는 뚝 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윤소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한수민의 시신은 보이질 않았다.옆에 있던 간병인이 조심스럽게 말해주었다.“부인님의 시신은 이미 영안실로 모셨어요,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죽은 사람을 내가 왜 봐야 해? 내가 지금 임신 중인 거 안 보여? 재수 없어!”윤소현의 얼굴은 혐오로 일그러져 있었다.간병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윤소현은 바닥에 놓여있는 수납함을 발견했다. 그 안에 놓여있는 목도리와 장갑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린 채 발로 차면서 중얼거렸다.“이런 쓰레기는 여기에 왜 있어?”“방금 문밖에서 다 들었는데, 너희들 지금 우리 엄마 재산을 가르고 있어?”거액의 유산 앞에서는 또 ‘엄마’라고 불렀다.유산을 윤소현한테 빼앗길 것만 같은 박민우는 발을 구르면서 소리쳤다.“우리 엄만 죽기 전에 이미 재산 통째로 나의 누님인 박민정한테 넘겼어, 너한테 고물만치도 안 남겨줬으니깐 어서 가라.”“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가 무려 4000억이나 나눠 줬는데, 우리 엄마가 어떻게 그걸 다 남한테 다 줄 수가 있어?” 윤소현은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예전에 윤소현이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한수민은 다 용서해주었다.한수민은 그녀한테 핏줄이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하면서, 기타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적 있다. 윤소현이 이렇게 된 것은 한수민 때문이기도 하다.“윤소현 씨, 확실합니다. 부인님께서 생전에 저한테 와서 공증까지 마친 상태입니다.”변호사가 말했다.따라서 유남우는 윤소현을 보면서 말했다.“소현 씨, 넌 이미 그 사람과
소파에 기대어 움츠리고 있는 박민정은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머릿속에 유남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박민정은 금방 그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유남준은 이젠 그저 전남편일 뿐이다.시간이 너무나도 지루하게 흘렀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는 박민정은 또다시 휴대폰을 꺼내어 보았지만, 아무한테서도 연락이 안 왔다.갑갑한 그녀는 식지로 주소록을 뒤지다 자연스럽게 유남준의 이름에 멈추었다.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누르고 말았다.사립병원.내일이면 곧 수술로 들어갈 유남준은 전화벨 소리를 들었지만, 참고 끊어버렸다.이를 본 박민정은 드디어 유민준에 대한 미련을 철저히 버리려고 다짐했다.그녀는 주소록에 들어있는 ‘유남준’을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은 한수민이 죽었는지 모르는 채 병상에 누워서 이튿날의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기도드렸다.그는 최대한 이른 시간 안에 시력을 회복하여 박민정과의 재결합을 기대하고 있었다.서희는 비록 한수민이 죽은 소식을 알고 있지만, 수술받기 직전인 유남준에게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많은 부조금을 긁어모으기 위한 박민우는 장례식을 크게 치려고 많은 사람에게 알렸기에 기사까지 났다. 그는 박민정을 설득하려고 전화를 했다.“누나, 장례식에 꼭 나와 줄 거지? 아무리 그래도 엄마 딸 이잖아, 보는 눈들도 많고 하니깐, 누나가 꼭 올 거지?”“알았어,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기사를 통해 한수민이 죽은 소식을 들은 조하랑은 박민정이 걱정돼서 김 회장에게 상황보고를 한 후 박혜찬을 데리고 박씨 가문 옛 주택으로 달려갔다.“얘,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혼자 어떻게 감당하려고?”박민정과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녀가 한수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한수민의 죽음에 제일 힘들어하는 사람은 박민정일 것이다.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은 박민정은 두 아이를 저쪽에 가서 놀라고 보내면서 말했다.“너도 잘 알잖아, 나와 그 사람 사이에는 감정 따위란 건 없는 거.”“
조하랑이 박민정의 배를 살살 만지면서 따뜻하게 물었다.“요즘 검진은 제대로 받아 봤어? 애가 어때? 발로 막 차고 안 그래?”박민정이 피식 웃으면 말했다.“야, 애가 아직은 작아.”“알았어, 근데 요 며칠은 내가 네 옆에 꼭 붙어서 자도 돼?”조하랑이 그녀의 곁에 바싹 붙으면서 말했다.“되지 그럼.”박민정은 지금처럼 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바라본 적이 없었다.혼자 있으면 늘 허튼 생각을 많이 하여 너무나도 힘들었다.“그럼 지금 사람을 시켜서 입을 옷을 챙겨 오라 해야겠네.”“그래.”조하랑이 온 후부터 별장 안은 그나마 떠들썩했다.드디어 민수아가 퇴근해서 돌아와 순식간에 집안이 벅적벅적하였다. 박민정의 쓸쓸함도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두 아이 단둘이만 있으면 박민정을 걱정했다.박예찬이 동생한테 물었다.“찌질남 아빠가 왜 갑자기 엄마랑 이혼했대?”“왜긴 왜겠어, 밖에 딴 여자가 생긴 거지.”박예찬이 귀국하기 전에 유남준의 뒷조사를 한 결과에 의하면 그가 딴 재벌들과는 달리 옆에 아무 여자도 없다고 한다. 유일한 여자는 유남준의 첫사랑 이지원밖에 없다.“설마 이지원?”‘찌질남 아빠는 첫사랑에게 배신당하고도 또 같이 산단 말이야?’“몰라, 지난번에 찌질남 아빠 따라 회사까지 갔댔는데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단 말이야.”박윤우가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면서 말했다.회사란 말을 들은 박혜찬은 호기심이 동해서 물었다.“회사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나?”길치인 박윤우가 그걸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기억이 전혀 안나.”박예찬은 동생의 목석같은 머리를 두들겨 주고 싶었다.“고작 길 하나 못 기억해?”“나도 딱 두 번 밖에 간 적 없단 말이야, 그걸 나더러 어떻게 기억하라고 해? 누구나 다 형처럼 똑똑한 줄 알아?”박윤우는 자기 머리가 나빠서 형이 싫어하는 줄 알고 입이 뾰로통해졌다.‘두 번씩이나 갔으면서.’박예찬은 어이가 없어 했다.동생을 제대로 단련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은 박윤우의 머리는 보통 애들보다 훨씬 좋다.
박예찬은 카카오톡 계정에 로그인한 후, 김인우한테 영상통화를 걸었다.김인우가 의료계의 전문가들과 머리 수술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박예찬’이라는 글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핸드폰은 회의용 모니터에 연결했는데 박예찬의 비고에 ‘전생의 빚쟁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모두가 보고 있다.그는 휴대폰과 모니터의 연결을 취소한 후 밖으로 나가면서 응답을 눌렀다."무슨 일이야?" 화면에 잘생긴 녀석의 얼굴이 나타나는 순간, 김인우는 질투 난 듯 물었다.김인우가 서 있는 배경을 본 박혜찬은 물었다."아저씨, M 국에 출장 간 거 맞아요?"박예찬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김인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래, 왜? 할아버지가 또 날 찾았어?"역시, 눈치는 고물만큼도 없는 김인우였다.박예찬은 김인우의 등위의 진주시에서만 있을 수 있는 식물을 보고 그곳이 M 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아니요, 하랑 이모가 저한테 전화 왔는데 아저씨가 그쪽에서 잘 보내고 있는지 좀 알아보라고 해서요.”박예찬은 태연스럽게 대답했다.“뭐? 조하랑이 언제 나한테 관심이 있었다고.”김인우는 약간 놀라면서 조하랑이 늦게야 철들었느냐고 생각했다.“하랑 이모가 겉으로는 기가 센 척하지만, 속은 여러 터졌어요. 아저씨와 이모가 서로 안면을 익힌 지가 1년은 넘었을 텐데 어쩜 그렇게도 이모를 몰라요. 이모가 직접 묻기 쑥스러우니 저한테 시킨 거죠.”김인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너무너무 잘 있다 이모한테 전해줘. 그리고 이모는 아저씨의 이상형이 아니니깐 나한테 반하지 말라고 전해줄래?”따라서 또 한마디 보충했다.“얘, 여기에 금발에 파란 눈동자 미녀가 엄청 많다, 돈 많으면 그래도 싱글이 좋다.”통화를 마친 김인우는 조하랑이 자기를 관심한다는 말을 듣고 왜선지 가슴이 약간 설렜다. 비록 말로는 조하랑이 싫다고 했지만.박예찬은 김인우와의 통화 시간만으로 충분히 김인우의 현재 위치를 추적할 수 있었다.“단양길에 있는 사립병원에 있어.”
“잘했어. 아무나 주는 선물을 함부로 받으면 안 돼, 덫에 걸리기 쉬우니깐, 알았지?”조하랑은 박예찬을 칭찬했다.“알았어, 이모.”박예찬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오랫동안 옆에서 형의 일거일동을 쭉 살펴온 박윤우는 탄복했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어쩜 낯빛 하나 안 변할 수가 있지? 어쩜 형이 자기를 늘 이렇게 속여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서 빨리들 씻고 자야지?”“알았어, 이모.”둘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아이들을 재운 후, 세 여자는 소파에 앉아서 이것저것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박민정이 제일 먼저 피곤하다면서 방으로 들어갔다.조하랑은 참지 못한 채 민수아한테 물었다.“수아야, 넌 다희씨와 같이 있을 때 감각이 어땠어?”기억 속에 서다희는 말수도 적고 성격도 도도하여 여자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남자다.“괜찮아, 왜?”“그럼 요즘 유남준에 대한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어? 왜 갑자기 민정이랑 이혼 못 해서 안달이 났던 건지 통 이해가 안 돼서.”조하랑은 사탐 하는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실, 민수아도 이 일이 무척 궁금했었댔다. 하지만 최근에 서다희는 유남준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사실은 나도 다희 씨가 일부러 뭔가를 숨기려 하는 것 같았어. 근데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거든.”민수아가 갖은 수단을 부렸지만, 서다희는 입을 꼭 다물고 말해주지 않았다.“그렇구나.”조하랑이 소파에 기댄 채 수심에 잠겼다.민수아는 이튿날에 출근해야 하기에 두 사람은 금방 잠자러 들어갔다.조용히 잠자리에 누운 조하랑은 옆에 누운 박민정이 자지 않고 핸드폰만 만지는 것을 보고 말했다.“피곤하다면서, 왜 아직 안 자?”박민정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잠이 잘 안 와서 좀 봤어.”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넌 임신부야, 수면시간은 꼭 지켜야 해, 그만 보고 자?”“알았어.”박민정은 방금 핸드폰으로 한수민이 돌아가는데 관한 기사를 보고 나서 잠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보도에는 한
조하랑은 성격이 데면데면한 축이다. 박예찬은 오늘 동생이랑 똑같은 옷을 입었다.“윤우야, 잠시 후 연기 잘할 수 있지?”“형, 걱정하지 마.”여전히 애티가 풀풀 나는 말투로 대답했다.집에 남은 사람이 조하랑만 아니어도 이런 하책은 쓰지 않을 거다. 한데 동생이 자기와 너무나도 달라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간다.”박윤우가 박예찬의 팔을 붙잡으면서 말했다.“형, 돌아와서 무슨 일인지 꼭 얘기해줘.”찌질남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너무나 궁금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박예찬은 동생의 팔을 밀어낸 후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그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조하랑은 방문 앞에서 노크하면서 말했다.“얘들아, 나와서 과일 먹자.”박윤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이모, 윤우는 잠자고 있으니 내버려 둬요. 내가 먹을게요.”조하랑은 약간 놀라워했지만, 박윤우가 형으로 가장했는지는 몰랐다.“윤우는 괜찮은 거지? 왜 이 시간에 잠자?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박윤우는 포크로 과일을 찍어서 입으로 넣으면서 잘래잘래 머리를 흔들었다.“필요 없어요. 동생의 병은 원래 이래요. 습관적으로 잠자요.”“그렇구나.”조하랑은 종래로 박예찬을 어린애로 본 적이 없었는지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볼이 미어지게 먹고 있는 애를 보면서 물었다.“예찬아, 예전에 너 과일 싫어하지 않았나?”박윤우는 흠칫하며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배불러. 방으로 돌아가서 놀래, 부르지 마.”시간이 길면 들통날까 봐 방 안에 숨어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알았어, 녀석.”조하랑은 못 이기는 척하면서 웃었다.박예찬은 별장 안팎에 설치된 CCTV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별장을 빠져나와 길옆에 서서 택시를 불러 탔다.“아저씨, 단양길에 있는 이곳으로 데려다주세요.”어제 카메라에 찍힌 길거리 화면을 기사한테 보여주었다.몇 살 안 돼 보이는 어린이를 본 기사는 의아스러웠다.“아가야, 엄마, 아빠는?”“아빠가 그곳에서 일해요. 지금 아빠
박예찬은 택시에서 내려 즉시 김인우를 추적한 위치에 따라 사립병원을 찾기 시작했다.드디어 눈에 잘 띄지 않는 병원 대문 앞에서 여러 명의 변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박예찬은 조심스럽게 대문으로 다가갔다. 워낙 체격이 작은 어린애라서 가림물을 쉽게 찾아 끝내 대문 근처까지 접근했다.대문 앞에는 가림물이 없었다. 그리고 뒷문도 어딘지 모른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뾰족한 수가 안 생겼다. 박예찬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김인우한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때마침, 두 의사가 병원으로 들어갔다.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 박예찬은 두 의사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과연, 경호원들이 쫓아와서 앞길을 막았다.“얘! 저리 가서 놀아.”그중 무뚝뚝하게 생긴 경호원이 막아 나섰다.평범한 애들이라면 벌써 무서워서 울음보를 터뜨렸을 것이다.근데, 박예찬은 아주 태연하게 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우리 아빠는 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선생님이에요. 아빠가 나더러 오라고 했어요.”이 도발적인 상황에 경호원은 잠깐 망설이었다. 이 병원 직원들은 아직도 우에서 내린 명령을 받지 못해 애를 여기까지 데려왔나 싶어서 확인 전화를 걸려는 참이었다.“아!”갑자기 앞에 있던 애가 배를 그러안고 처참한 신음을 냈다.“왜 그래?”경호원이 급히 다가가서 물었다.“제 배가 너무 아파요… 똥 마려워요. 병원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똥 싸야겠어요. 전에 자주 왔댔어요… 나와서 아저씨랑 다시 얘기해요.”말도 끝내기 전에 박예찬은 안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어린애가 거짓말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한 경호원은 행여나 해서 뒤쫓아 갔다.화장실의 표식을 본 박예찬은 재빨리 뛰어갔다.경호원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밖으로 데리고 나갈 예산이었다.힘들게 병원까지 들어왔는데 순순히 나갈 수는 없었다.박예찬은 화장실 안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이때, 두 사람이 들어와서 작은 소리로 얘기를 나누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