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우는 서서히 힘에 손을 더하기 시작했다.만약 지금 이대로 유남준이 죽게 된다면 김인우와 서다희가 몰래 유남준을 죽인 것으로 덮어씌우면 그만이다.유남준에게 어떤 수술을 했는지 바로 죽었다면서.“형, 나 너무 탓하지 마. 뭐나 나하고 다투려고 빼앗으려고 했던 형 자신을 탓해.”유남우는 유남준의 입과 코를 꼭 막았다.“내가 먼저 민정이를 만났고 형이 없는 것을 나도 드디어 얻게 되는 줄 알았었는데, 민정이마저 형이 빼앗아갔어.”“그것만으로 부족하여 왜 날 가만히 두려고 하지 않았던 거야? 맨날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민정이가 형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알아?”말하다 보니 유남우는 눈시울이 약간 붉어지기도 했다.“이제 다 끝났어. 형이 가고 나면 내가 형 대신 형수님 잘 챙겨줄게.”유남우는 일부러 ‘형수님’ 세 글자에 어세를 높였다.유남준에게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마냥 속이 시원하기만 했다.호흡이 가빠와서였는지 수술한 뒤로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유남준은 갑자기 눈꺼풀을 움직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유남우의 손목을 꽉 잡았다.순간 유남우는 당황하면서 이를 악물고 힘을 더했다.안타깝게도 워낙 체질이 허약한 유남우인지라 유남준이 깨어난 뒤로 더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경호원!”유남우는 주저 없이 경호원을 불러들였고 차가 멈춰서자 장한 몇몇이 올라왔다.“남우 도련님.”지시를 내리려고 할 때 유남준이 두 눈을 벌떡 떴다.차 안의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그런 유남준을 바라보면서 유남우는 차갑게 웃었다.“형, 자는 척 한 거였어?”유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척이든 아니든 오늘 형은 반드시 죽어야 해.”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서 오히려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물었다.“너 누구야? 나 집에 갈래.”순간 유남우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뭐라고?”“집으로 보내 줘. 배고파. 배고파.”유남준은 일어나서 앉더니 다짜고짜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배
유남준을 빼앗긴 뒤로 김인우와 서다희는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유남우 그 미친놈을 찾아내지 못했다.두 사람 모두 크게 다친 상황이라 부하에게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남준이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게 된다며 나 평생 지옥에서 살 거야.”방비하고 있지 않았던 자신이 무척이나 한스러운 김인우이다.그에 비해서 서다희는 그나마 이성이 좀 있었다.“아직 들려오는 나쁜 소식도 없고 대표님 괜찮을 겁니다.”“무슨 근거라도 있어요?”김인우가 물었다.“만약 제가 유남우였다면 대표님을 죽이고 저희한테 뒤집어씌웠을 겁니다. 이렇게 질질 끌지 않고 말입니다.”두 사람은 지금 온몸이 아파서 간단한 대화조차 어려운 상황이다.잠시 말하고 나서 두 사람은 각자 쉬기로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서다희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왔고, 민수아였다.민수아에게 다친 것을 들키게 될까 봐 서다희는 바로 받을 수 없었다.김인우는 다시 눈을 뜨면서 짜증이 잔뜩 서려 있는 말투로 말했다.“좀 받아요! 시끄러워 죽겠네.”만약 두 사람이 함께 유남준을 빼앗겨버린 게 아니라면 절대 서다희와 같은 방에서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서다희는 부하에게 핸드폰을 귓가에 좀 놓아달라고 했다.“수아야.”“왜 이제서야 받는 거야? 요즘 뭐 하고 다녔어? 전화도 없고 톡도 업고 나 말고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거야?”민수아가 퉁명스럽게 물었다.서다희는 부랴부랴 설명하기 시작했다.“그럴 리가... 요즘 야근하고 시간이 없었어. 며칠 지나서 너 찾으러 갈게.”“흥!”민수아는 화난 척하더니 진지한 모습으로 말머리를 돌렸다.“너희 대표님은 요즘 좀 어때? 민정이가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희 대표님과 연관된 것 같아서 그래.”서다희는 자기 역시 유남준이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었다.“수아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니 그만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야.”“알았어. 나 안 보고 싶어?”민수아는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보고 싶지. 우리
“네, 지금 바로 갈게요.”홍주영과 함께 떠난 박민정을 보고서 최현아는 혼자서 중얼거렸다.“빌어먹을 년! 유남우가 유남준 동생이라는 것도 잊었나 봐?”이때 추경은이 뒤따라 왔다.“저런 사람이랑 얼굴 붉힐 것 없어요. 워낙 뻔뻔한 년이잖아요.”최현아는 자기와 함께 박민정을 욕하는 추경은을 보고서 무척이나 기뻤다.“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제 시간 봐서 할아버님께 아가씨 얘기 잘해 줄게요. 박민정이랑 이혼도 했겠다 유남준 곁에도 이제 여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추경은은 감격해 마지 못했다.“고마워요, 올케언니.”유난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곧바로 후회를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꼭대기 층, 대표이사실.박민정은 노크하고 허락을 받고 나서야 사무실로 들어섰다.고개를 푹 숙인 채 바삐 돌고 있던 유남우는 박민정이 들어오는 것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간단하게 차려입은 박민정이지만, 메이크업조차 하지 않은 박민정이지만 유난히 빛이 났다.아쉬운 점은 오른쪽 얼굴에 있는 그 흉터뿐이다.“앉아.”유남우가 말했다.박민정은 앞으로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대표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유남우는 컴퓨터를 끄고 나서야 운을 떼기 시작했다.“말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으면 좋겠어.”엄숙하기 그지없는 유남우의 모습을 보고서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형이 요즘 수술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수술이 잘 안 됐어.”유남우는 천천히 말했다.그 말을 듣게 된 순간 박민정은 머리가 윙 해지면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럼, 지금...”말을 채 하지도 못한 채 박민정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모습을 보였다.그런 박민정의 표정 변화를 살피면서 유남우는 다소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상황이 많이 안 좋아.”“지금 어디에 있어요?”박민정은 손을 꼭 움켜쥐면서 가능한 한 이성을 유지하고자 애를 썼다.‘그래서 이혼하자고 했던 거야?’‘그냥 말하지 그랬어... 바보야...’“잠시 조용한 곳에서 휴양할 수 있게끔 데
유남우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실은 그전까지만 해도 남준 씨가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자기 안전은 뒤로하고 나부터 살리려고 하던 남준 씨를 바라보면서 알게 되었죠. 나한테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처음에는 아이들 때문에 남준 씨랑 다시 만나기로 한 거였어요. 근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느새 내 마음도 기울이고 있더라고요.”유남우는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으면서 부드러운 눈매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그 말인즉슨,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때 유남우는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괜찮아요? 병원에 갈까요?”박민정이 물었다.그러자 유남우는 손을 흔들면서 기침이 좀 줄어들고 난 뒤 텀블러를 꺼내 들어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셨다.“괜찮아. 고질병이라서 그래.”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운전기사는 유남준이 있는 장원 안으로 핸들을 꺾었다.아주 외진 곳으로 사방에 경호원이 깔려 있으며 바람이 풀잎에 스치기만 해도 유남우는 모두 알게 되어 있다.“여기야. 그만 내리자.”“네.”박민정과 유남우는 그렇게 차에서 내렸다.장원 안은 엄청나게 밝았고 두 사람이 아직 집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물건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집에 갈래! 집에 갈래! 집... 집에 보내줘...”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박민정은 심장이 바짝 조여왔다.이때 유남우가 입을 열었다.“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형 더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평범한 사람이 아니라고?’의문을 품고 문을 여는 그 순간 박민정은 바로 알 수 있었다.널찍한 거실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유남준은 엉클어진 옷차림으로 머리까지 흐트러진 것이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지금 한창 질서 없이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도우미들은 행여나 다치기라도 할까 봐 멀리 떨어져 있었다.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박민정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꽃병 하나가 박민정을 향
유남준의 현재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는 박민정이다.박민정의 말에 유남우는 걸음을 멈추었다.“안 돼.”“형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너도 봤잖아. 너랑 아이들 다칠 수도 있어. 그리고 이곳엔 의료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어. 무엇보다도 너희 두 사람 이미 이혼했는데, 형을 너한테로 보낸다고 하면 우리 집안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유남우의 설명을 듣고 나니 박민정은 자기가 조금 전에 뱉었던 말이 이상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유남준에게는 강력한 유씨 가문이 받쳐주고 있으니 이곳에서 치료를 받는 게 자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다시 판단하게 되었다.“네, 그럼, 수고하세요.”“수고라니... 우리 친형인데 동생인 나만큼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유남우는 그럴듯하게 대답했다.이윽고 유남우는 본래 직접 박민정을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으나 회사로 돌아가겠다고 박민정이 거절했다.회사로 가면 운전기사가 데리러 온다고 말이다.유남우는 곳곳마다 자기와 거리를 두려는 박민정의 태도에 달갑지 않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박민정이 자기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유남우는 다시 유남준이 있는 장원으로 돌아왔다.도착하자마자 도우미 한 명을 밖으로 불러와 물었다“오늘은 어땠어?”“도련님께서 오늘 낮에는 주무시기만 하셨습니다. 오후 3시쯤이 되어서야 깨어나셨고 깨어나자마자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겨우 진정하시고 또다시 주무고 계십니다.”도우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유남우는 그 말을 묵묵히 듣고서 유남준이 있는 방으로 천천히 다가갔다.도우미의 말대로 자는 유남준이 보였다.씻지도 않은 채 온몸이 지저분한 것이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상업계를 주름잡던 그 유남준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내려가 봐.”“네.”도우미는 내려가기 전에 방문을 닫아주었다.방안에 둘만 남게 되자, 유남우는 손을 내밀어 유남준의 팔을 다쳤다.“형.”유남준은 아주 깊게 잠들어 있었다.인기척에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유남준이다.“형!”
유명훈이 맨 앞에 앉아있었다. 고영란과 유남우는 나란히 앉아 있었고 늘 강인하기만 하던 그녀도 지금은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실려 오는 서다희의 모습에 고영란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서 비서, 어쩌다 이지경이 된 거야?”들것에 엎드린 서다희가 고개를 들어 고영란 옆의 유남우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부른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기에 서다희는 먼저 고자질 하지 않았다. “큰사모님, 어르신. 무슨 일 때문에 부르셨어요?”“남준이가 왜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한 건가? 왜 미치광이가 된 거야?”유명훈이 물었다. 서다희가 순간 멍해졌다. “미치광이요?”유남우가 걸어내려 오며 말했다. “이게 바로 서 비서님이 한 짓이에요.”유남우는 휴대폰으로 영상 하나 서다희에게 보여주었다. 영상을 보던 서다희의 눈빛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럴 리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거지?”‘결국, 수술이 실패한 건가?’유남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만약 제가 아니었다면 혹시 우리 형, 이보다 더 한 일도 겪었어야 했나요?”서다희에게 따져 묻는 유남우는 김인우의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워낙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김인우에게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영상 속 유남준의 모습을 보는 서다희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다. “저희는 대표님 머리에서 유리 조각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 유리 조각은 대표님의 기억에 가끔씩 이지만 혼란을 가져왔어요. 그 이유로 대표님은 수술을 통해 기억력을 회복하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그 수술은 후유증을 남길 수 있었어요. 바로 지적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였죠.”서다희는 유남준의 시력 회복을 위해서였다는 얘기는 숨겼다. 유남준이 괜찮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서다희의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고영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심각한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는데 왜
최현아의 말을 들은 유명훈이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다. “남준이가 누굴 마음에 뒀는데?”“그거야 물어볼 필요도 없죠. 당연히 경은 아가씨죠. 할아버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남준 도련님께서 민정 씨와 이혼할 때도 경은 아가씨를 데리고 갔다니까요.”최현아가 말했다. 유명훈은 유남준과 추경은이 눈이 맞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금의 추씨 가문은 예전과 달리 이미 쇠락하고 있었다. 게다가 추경은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으니 그녀에게는 힘 있는 친정이 없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유남준에게 어울리는 짝은 아니었다. “할아버님께서 경은 아가씨 어렸을 때부터 봐오셨잖아요. 예쁜데다 착하고 효심이 지극하기까지 한 아이예요. 남준 도련님께서 앞을 못 보는 지금이 상황에 경은 아가씨가 보살펴준다면 훨씬 마음이 놓이잖아요.”최현아에게는 그녀만의 계획이 있었다. 추경은은 의지할 곳도, 권력도 없는 아이였고 보기에도 쉽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추경은이 유남준과 결혼한다면 최현아와 유성혁은 더 이상 유남준을 경계할 필요가 없이 그저 유남우 부부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최현아의 말을 들은 유명훈의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유남준이 앞을 보지 못하고 지능에도 문제가 생겼으니 그의 곁에는 확실히 그를 보살펴줄 여자가 필요했다. 특히 그를 사랑해 줄 여자 말이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추경은이라면 유남준을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네 말이 맞아.”유명훈이 의자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그 아이에게 알려주어야 해.”“뭘요?”“우리 남준이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 그 아이가 남준이를 보살피려 하겠지 모르겠네.”“그건 물을 필요도 없어요. 당연히 도련님을 보살펴 주겠다고 할 거예요.”최현아가 확신하며 말했다. 그녀의 대답에 유명훈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좋아. 내일 그 아이에게 오라고 해. 일단 민준이를 한 달간 보살펴 보고 한 달 후에 그 아이와 민준이가 결혼할 수 있도록 말해주지.”“네,
“애초부터 위험한 수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박민정이 따지듯 물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서다희가 대답했다. “모든 수술엔 위험부담이 있어요. 민정 씨는 이젠 대표님과 이혼하셨으니 두 분 사이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러니 저도 민정 씨께 너무 많은 걸 알려드릴 순 없어요.”서다희는 유남준과 만약 수술에 실패한다면 박민정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수술마저 실패한 마당에 박민정에게 괜한 고민을 안겨 줄 필요는 없었다. 박민정은 몇 가지 더 묻고 싶었지만 서다희가 또 말을 이었다. “수아가 마음이 착해서 남을 돕는 걸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민정 씨도 집주인이라는 명분으로 과분한 부탁을 하시면 안되죠.”“수아를 통해 저에게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부탁드릴게요.”서다희가 뚝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박민정도 더 이상 그에게 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다희 역시도 무리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다. 박민정이 툭 손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눈엔 실망으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민수아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다희는 무슨 일로 찾은 거야? 너에게 뭔가 숨기고 있는 거 아냐? 내가 대신 물어볼까?”박민정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그래도 돼. 이미 충분히 물어봤어. 괜찮아.”“그럼 다행이네.”민수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다희와 유남준은 분명 일부러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박민정은 내일 기회를 봐서 다시 유남준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정말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이든 아니면 다른 문제든 그녀는 꼭 자초지종을 알아내야 했다. ...다음 날. 꽃단장한 추경은이 회사에 나타났다. 그녀는 일부러 회사에서 유씨 가문의 차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박민정도 아침 일찍 출근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일부러 박민정 앞으로 다가온 추경은이 말했다. “새언... 아, 아니. 민정 씨.”박민정은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