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란은 손자를 돌보는 일에 꽤 관심이 있었다. 평소 그녀는 부인들과 차를 마시거나 피부 관리를 하고 가끔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연우를 데리고 가서 며칠 동안 놀게 할게요.” 박연우를 데려가면 박민정은 두 곳을 오가느라 바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내가 참석하고 회의가 끝난 후 너희와 함께 돌아갈게.” 고영란의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네.” 박민정은 고영란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면 오늘 더 흥미로운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박민정은 8시 반에 호산 그룹에 도착했고 회의 자료를 준비하던 중 유남우에게 불려갔다. “민정아, 큰형 일에 대해 들었지?”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침에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남준 씨를 찾으셨다더군요. 연우를 데리고 옛 저택에 가서 남준 씨를 돌보라고 하셨어요.” “오늘 아침에 너에게 전화했는데 형의 실종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금방 돌아오다니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네.” 유남우가 말했다. ‘전화?’ 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제가 왜 당신의 전화를 받지 못했죠?” “아마 너무 일찍이라 아직 자고 있었던 것 같아. 반쯤 잠에 취해 전화를 끊었을지도 몰라.” 유남우는 그녀가 핑계를 댈 만한 이유를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아침에 유남준이 했던 ‘스팸 전화’ 발언이 떠올랐다. 유남우를 ‘스팸 전화’라고 칭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걸까? 박민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랬나 봅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홍주영이 문을 두드렸다. “둘째 도련님, 곧 회의가 시작됩니다.” “좋아.” 유남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오늘은 영업부의 월간 실적 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최근 영업부장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기에 유남우는 그 성과에 대해 걱정이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에
“그럼, 최 부장님. 정말로 그들과의 계약 해지를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건 상당한 손실인데. 차라리 프로젝트를 박 부장님께 돌려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진서연은 순진해 보이는 큰 눈으로 말했다. 최현아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박민정은 진서연의 연기를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진서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돌려드려도 고객들이 다시 받아줄지 모르겠네요.” “어서 나가!” 최현아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진서연을 내보내려 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묘한 재미를 느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고영란은 눈을 살짝 좁히며 진서연이 나가려는 순간 불렀다. “잠깐, 그냥 가지 말고 있어 봐요.” 진서연은 순진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 잡고 서며 문을 닫아 최현아가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했다. 고영란은 그녀의 얘기를 들은 후 최현아를 향해 물었다. “최현아 씨, 박민정 씨의 프로젝트를 빼앗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고영란은 오늘 회의에 참석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오지 않았다면 회사 안에 이런 불순한 인물이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고현아가 아직 아무 말도 하기 전에 다른 부서의 부장들이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고 이사님, 저희도 좋은 프로젝트를 최 부장님께 뺏겼습니다.” 그들은 유성혁이 최현아에게 프로젝트를 몰아주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빼앗겼다고 표현했지만 고영란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우리 호산 그룹이 최 씨 가문의 소유가 되었나요?” 고영란의 말에는 차가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런 불공정 경쟁은 호산 그룹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이는 큰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최현아는 고영란의 반박에 대꾸할 엄두도 못 내고 눈빛으로 유성혁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성혁은 최현아를 지키기는커녕 마치 남인 척하며 질책했다. “현아야, 네 행동이 옳지 않아. 네가 비록 유 씨 가문의 며느리일지언정 호산 그룹에선
내부자는 자신이 이미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부장님, 저를 오해하신 게 아닐까요?” 박민정은 그녀와 더는 말다툼하지 않고 최근 확보한 증거들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좋게 헤어지자고요.” 결국 내부자는 호산 그룹을 떠났다. 전에 최현아가 가로챘던 프로젝트들이 다시 5팀으로 돌아오자 5팀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박민정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다. 그녀는 언제나 말한 것을 지키며 직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박민정은 고영란을 찾아갔다. 고영란은 박민정이 도착하자 환한 미소로 맞았다. “민정아, 여기 와서 앉아.” 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 “요즘 몸은 괜찮니? 매일 이렇게 일하는데 힘들지 않아?”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도 아기가 잘 자라고 있다고 하셨어요. 몸도 피곤하지 않고요.” 고영란은 박민정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최현아 사건, 네가 계획한 거지?” 박민정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유성혁 씨가 제가 맡은 좋은 프로젝트를 모두 최현아 씨에게 넘기고 저희 5팀에는 골칫거리만 넘겼거든요.” 고영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고했다. “잘했어. 그렇지만 앞으로 조심해야 해. 네 큰아버지 쪽 사람들은 소심하고 복수심이 강해. 틀림없이 체면을 되찾으려 할 거야.”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조심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뒤에는 내가 있어. 내가 살아 있는 한 너와 남준이 불안할 일은 없도록 할 거야.” 고영란은 진지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회사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눈 후 함께 박연우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고영란의 차가 유치원 앞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차를 바라보았다. “저거 호산 그룹 차 아니야?” “한정판 차량에 경호원까지... 호산 그룹 고위층 아이도 이 유치원에 다니나?” 아이를 데리러 온 다른 학부모들은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다들
다행히 여기 부모들도 그저 잠깐 호기심을 보이다가 자신의 아이들이 나올 때쯤이면 모두 흩어졌다. 박연우가 차에 타자 차 안은 금세 웃음소리로 가득 찼고 그렇게 웃음 속에서 옛 저택에 도착했다. 고영란은 박연우의 귀여운 행동에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오랜만에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윤소현도 와 있었다. 고영란이 박민정과 박연우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본 윤소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 “응.” 고영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윤소현에게 예의를 갖췄다. 윤소현은 박민정을 힐끔 본 뒤 고영란에게 물었다. “어머니, 박 아가씨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박 아가씨?’ 고영란은 이 호칭이 불쾌했다. 하지만 윤소현의 집안 배경을 의식하여 부드럽게 말했다. “박민정은 우리 유 씨 가문에 두 아이를 낳아줬어. 지금 배에 있는 아이도 유 씨 가문의 자식이야. 앞으로는 박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큰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구나. 너무 멀게 대하지 말고.” 윤소현은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신분도 지위도 자신보다 낮은 고아 출신의 박민정을 왜 큰형님이라 불러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고영란은 무슨 생각으로 박민정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걸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불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박민정을 부르지 않은 채 홀로 소파에 앉았다. 고영란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박민정과 박연우에게 말했다. “곧 식사가 준비될 거야. 너희는 잠깐 쉬고 있어.” “네.”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연우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할머니, 저 아빠 볼 수 있어요?” 아빠가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닐 것만 같았다. 고영란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볼 수 있을 거야.” 유남준의 변한 모습을 너무 빨리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게 충격이 될까 걱정되었다. “네, 알겠어요.” 박연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할머니는 옷 갈아입고 올 테니 잠시 후에 같이 밥 먹자.” 고영란은 미
“아!” 윤소현이 뒤늦게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아파, 이 못된 녀석, 네가 감히 나를 물다니!” 그녀는 손을 들어 박연우를 때리려 했다. 하지만 박민정이 어떻게 그녀가 자기 아이를 때리도록 놔두겠는가?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재빨리 잡아 막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임산부였기에 서로 밀리지 않았다. 박연우는 입안에 느껴지는 피 맛을 무시한 채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윤소현의 팔을 놓지 않았다. 평소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모습을 본 집안의 사용인들도 충격에 휩싸여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2층에서 옷을 갈아입던 고영란이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놀라 서둘러 내려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박민정과 윤소현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과 박연우가 여전히 윤소현의 팔을 물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들이야?” 고영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박연우는 윤소현의 팔을 놓았다. 박민정과 윤소현 역시 싸움을 멈추었지만 윤소현은 특히나 팔에 심한 상처를 입어 피가 맺혀 있었고 박연우가 있는 힘껏 물었던 탓에 자국이 선명했다. 고영란이 다가오자 윤소현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박연우가 울먹이며 먼저 말했다. “할머니, 이모가 우리 아빠가 멍청이가 됐다고 했어요. 바보가 됐다고요.” 그의 고자질하는 모습에 윤소현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소현을 바라보았다. “윤소현, 네가 이모로서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윤소현은 억울한 듯 자신의 팔을 보여주며 말했다. “어머니, 이거 보세요. 이건 그 아이가 문 거예요.” 박민정은 아이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윤소현 씨,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물었겠어요?” 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반박했다. “제가 말한 게 틀렸나요? 형님은 분명히 지력에 문제가 생겨서 바보가 되셨잖아요. 거짓말한 것도 아
한편 저택에서는 고영란이 박연우를 달래며 말했다. “아가, 울지 말렴. 네 아빠는 그냥 아픈 것뿐이고 곧 괜찮아지실 거야.” 박연우는 어린아이의 티를 내며 눈물을 흘리며 묻지만 속으론 할머니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순진하게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이죠? 그럼 아빠를 볼 수 있나요? 아빠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보고 싶어요.” 고영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민정아, 이거...” “우리 이따 저녁 다 먹고 아빠 보러 가자.” 고영란은 유남준이 바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박민정은 이를 알고 있다. 박민정은 앞으로 박연우에게 유남준의 병이 나아서 괜찮아졌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저녁 먹고 바로 가보자.” 박민정의 말에 고영란은 결정을 내렸다. 박연우는 이내 슬픈 표정을 풀고 순순히 저녁 식사를 했다. 드디어 아빠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고영란은 박연우와 박민정을 데리고 유남준이 있는 곳으로 갔다. 현재 유남준은 예전에 그가 거주하던 곳에서 머물고 있으며 예전의 사용인들이 돌보고 있어 본가에서보다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민정 일행이 도착했을 때 유남준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준은 식사했니?” 고영란이 사용인에게 물었다. “이미 드셨습니다.” 사용인이 대답했다. “그래, 밥을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네.” 고영란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연우는 엄마 뒤에서 아빠의 모습을 살펴보며 정말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정말 수술 후유증이 이렇게 심한 건가 싶었다. 아빠가 지금 이런 상태라면 엄마에게 부담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아빠.” 박연우는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불렀다. 박민정은 혹시라도 유남준이 바보인척하는 게 들킬까 봐 박연우를 조용히 데리고 나왔다. “아빠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방해하지 말고 그
이렇게 행동하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은 그녀가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 줄 알았다.그는 저도 모르게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 “나 혼자 여기 있는 것도 불편해.”그처럼 일하는데 깔끔하고 차가운 성격의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박민정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여기는 남준 씨 집이잖아요. 왜 불편해요?”“우리 집은 두원 별장이잖아?”유남준이 박민정에게 물었다.박민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전에는 그는 두원 별장이 두 사람의 집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한다. “네, 그래요. 그럼 잠시 같이 있어 줄게요.”박민정은 지금의 유남준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그녀가 남는다고 하자 유남준은 일어나 실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임산부가 앉기 좋은 의자를 찾아 그녀더러 앉으라고 했다.“앉아, 너무 오래 서 있지 말고.”의자에 앉은 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고마워요.”유남준은 또 방으로 가서 과일과 먹을 것을 가져다 박민정에게 주었다.박민정은 그의 방에 이렇게 많은 음식이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왜 먹을 게 이렇게 많아요? 다 도우미가 준비한 거예요? 근데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요?”박민정이 먹을 것을 보며 물었다. 어떤 거는 심지어 유남준이 싫어하는 음식이었다.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되게 이뻤다.“네가 온다고 해서 내가 몰래 사 오라고 한 거야. 안 그러면 네가 얼마나 심심하겠어. 게다가 임산부는 원래 빨리 배고파진다고 들었어. 당연히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그는 이제 시력이 회복되고 건강도 거의 회복되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남편의 책임을 져야 하고 임신 중인 박민정을 잘 보살펴야 한다.이렇게 많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 박민정은 더없이 기뻐했다. 테이블 위에 먹을 것을 한 무더기 올려놓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신나요.”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유남준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먹을 것뿐만 아니라 예쁜 옷까
다른 사람 눈에 박민정은 행복하기보다는 안쓰럽게 보였다. 유남준을 돌보는 도우미조차 참지 못하고 몰래 속닥였다. “큰 도련님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사모님도 불쌍해. 이혼했는데 아직도 아이를 데리고 와서 도련님을 돌봐야 하니 말이에요.”“그니까요. 안쓰러워 죽겠어요. 정말 착하신 분이시니 하지 저 같으면 안 해요.”“바보예요? 큰 도련님이 누구인데요. 부잣집 아들은 바보라도 다른 정상적인 남자들보다 나아요. 사모님이 그걸 모르겠어요? 고 대표님께서 많은 돈을 줬을 거예요.”“...”도우미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다가 박민정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박민정은 이들을 신경 쓰지 않고 새 옷을 입고 액세서리를 하고 나갔다.최현아는 도우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회사에서 잘렸다. 박민정이 바보 유남준을 돌보러 왔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일부러 밖에서 박민정을 기다리며 시비를 걸려 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박민정이 유남준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이제야 나왔네? 너 혹시 바보 같은 놈이랑 하지 말아야 할 일 한 거 아니야?”최현아가 비아냥거렸다.박민정은 가로등 밑에 서 있는 최현아를 보고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갔다.최현아는 거머리처럼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 “왜, 내 말이 맞았어? 바보를 돌보는 기분은 어때?”다들 바보라고 하는데 사실 유남준은 바보도 아니고 눈도 멀지 않았다. 박민정은 최현아가 진실을 알면 지금보다 더 화를 낼 것으로 생각했다.“좋은 것 같아요. 적어도 바보는 절 배신하지는 않을 거니까요.”박민정의 말에는 다른 뜻이 있다. 최현아는 무엇을 눈치챘는지 대뜸 말했다. “무슨 말이야?”“그냥 들은 그 뜻인데요?”박민정이 말했다. 최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설마 우리 성혁 씨 얘기는 아니겠지? 우리 여보는 유남준 씨처럼 첫사랑 그런 거에 문에 먼 사람이 아니야.”박민정은 그녀와 옥신각신하기 귀찮아서 그녀 곁을 지나갔다.그녀가 서둘러 가는 모습을 보고 최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