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은은 순간 숨이 막혔다.고문현에게 들어 올려진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변했다.그녀는 허둥지둥 고개를 흔들며 그의 손을 두드렸지만 그녀의 힘은 고현문의 눈에 웃음거리일 뿐이었다.“우리 고씨 집안에서는 배은망덕한 고양이는 기르지 않아.”추경은은 점점 더 숨이 막혔다.바로 그때 고현문의 핸드폰이 울렸다.그는 추경은을 거칠게 내팽개치며 전화를 받았다.추경은 숨을 헐떡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아무리 도망치고 숨어도 고씨 집안에서 그녀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걸 알고 있기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지금 그의 눈앞에서 도망갔다간 비참하게 죽을 게 뻔했다.고현문은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얼른 데리고 가. 여기 더럽히지 말고.”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유남준의 목소리였다.고현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고 추경은을 바라보았다.“차에 타.”“네. 네...”추경은 고현문이 이번은 넘어간다고 착각하며 순순히 차에 올랐지만 이것이 그녀의 비참한 시작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박씨 가문의 옛 저택.저녁때 박민정이 경비원에게 물었다.“밖에 아직 있나요?”“이미 갔습니다.”경비원이 답했다.‘갔다고?’박민정은 조금 의외였다.‘추경은 같은 끈질긴 사람이 이렇게 쉽게 떠났다고?’“언제 간 건가요? 혼자 갔나요?”“약 30분 전에 고급 차 한 대가 데리러 온 것 같았습니다.”경비원의 말에 박민정은 바로 상황을 눈치챘다.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유남준에게 물었다.“고현문은 어떤 사람이에요?”추경은처럼 끈질긴 여자를 쉽게 제압한 사람이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진 박민정이었다.겨우 박민정과 함께 누워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던 유남준은 그녀가 갑자기 다른 남자에 관해 묻자 기분이 상했다.“그 사람은 왜?”유남준은 변태적인 성향을 지닌 고현문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냥 단순히 궁금해서요. 이름만 들어봤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라서요.”박민정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이 가득했다.유남준은 마음이 답답
더욱 기분이 나빠진 유남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박민정의 얼굴을 감쌌다.박민정은 잠든 상태에서 얼굴에 뭔가 닿는 느낌에 유남준의 손을 한 손으로 쳐내고 다시 잠들었다.유남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볍게 그녀를 품에 안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다음 날 아침, 민수아는 뉴스를 보고 있었고 박민정도 함께 보고 있었다.뉴스에서는 강변에서 익사한 여성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나왔다.“세상이 너무 무섭네. 우리 앞으로는 밤에 일찍 돌아다니자.”민수아가 말했다.진서연이 다가오며 뉴스를 한눈 보더니 말했다.“제가 있는데 뭐가 무서워요? 제가 지켜줄게요.”하지만 진서연은 곧 뉴스에 나온 흐릿한 사진에 주목했다.“어제 밖에 있던 그 여자 아니에요?”“뭐라고?”민수아는 깜짝 놀랐다.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고 체형만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박민정도 놀란 듯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진서연이 차분히 말했다.“체형이 비슷하고 몸에 난 상처들을 보세요.”과거에 훈련을 받은 적 있는 진서연은 타인의 신체 특징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정말 그러네. 정말 추경은인가?”민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 역시 진서연의 설명에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는데 추경은과 닮아 있었다.그녀가 입고 있던 옷이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박민정은 뉴스를 계속 보는 대신 유남준을 찾아갔다.막 세수를 끝내고 내려오던 유남준은 박민정이 자신에게 달려오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왜 그래?”유남준이 부드럽게 물었다.“추경은 말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거 아니에요? 아까 뉴스에서 피해 입은 여성을 봤는데 추경은 같아 보였어요.”추경은에게 관심은 없었지만 그저 물어보는 박민정이었다.‘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죽은 거야?’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을 듣고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확인해 볼게.”“네.”유남준이 고현문에게 전화를 걸었다.고현문은 유남준의 연락에 의외라는 듯 느긋하게 물었다.“형? 저 싫어하잖아요. 그런데 아침부
박민정은 그의 말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요즘 너무 바빴어.”박민정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을 이었다.“어서 앉아. 건강은 좀 괜찮아졌어?”연지석은 천천히 다가오며 무심결에 박민정의 배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답했다.“많이 좋아졌어.”그의 시선은 다시 박민정의 얼굴로 옮겨졌고 그녀의 얼굴에 난 상처는 그의 마음을 저릿하게 했다.옆에 있던 설인하는 그제야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대표님, 두 분 아는 사이였어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회사와 외부 사람들 앞에서 설인하는 박민정을 대표님이라고 불렀다.“그래요.”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설인하가 나간 뒤 박민정은 자리에 앉아 연지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연지석이 건강을 회복하고 집안에서 그를 이곳으로 보내 사업을 확장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정말 다행이다. 이제 자주 볼 수 있겠네.”연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어떻게 지냈어?”“그냥 전과 같지 뭐. 나름 잘 지냈어.”“그렇다면 다행이야.”박민정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나 유남준이랑 다시 시작하려고.”연지석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는 물잔을 들어 흔들리는 표정을 숨기며 답했다.“그렇게 결정한 거야?”“응.”박민정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연지석은 물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평소와 다름없는 물이었지만 목을 넘어가자 유독 쓰게 느껴졌다.“네 마음이 확고하다면 잘된 일이지.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네 편이야.”“고마워.”박민정은 감사 인사를 전한 뒤 화제를 돌렸다.“그럼 이제 계약 이야기를 해볼까?”연지석이 이번에 찾아온 이유가 사업 제안을 위해서라는 걸 알기에 박민정은 그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좋아.”두 사람은 사무실 안에서 사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한편 에리는 홍보 촬영 준비를 위해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그는 박민정의 사무실에 들렀으나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 설인하에게 물었다.“대표님은요?”“대표님은 업무 중
서다희는 민수아에게 들은 이야기를 바로 유남준에게 전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에리와 계약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 적 있으신가요?”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서류를 넘기다 말고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얘기하기는커녕 혹시라도 화내게 할까 봐 어제 물어볼 생각조차 못 했는데.’마음속 깊은 감정을 서다희에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유남준이 바로 물었다.“민수아 씨가 또 뭐라고 했어?”“별건 아니고요 그냥 에리가 사모님한테 평범하게 대하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라고요.”서다희가 답하자 유남준 주위의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화 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유남준이 서다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한가하지?”서다희는 유남준의 말에 당황했다.“근무 중에 여자 친구랑 수다 떨 시간도 있고 아주 한가한 가 보네.”서다희는 말문이 막혔다.서다희는 억울했지만 유남준의 잔소리를 듣고 결국 풀이 죽은 채로 사무실을 나갔다‘다시는 대표님한테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지. 냉정하고 무정해!’...PMJ 그룹.아침 촬영을 마친 에리가 박민정이 아직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고 주변을 서성이며 진서연 쪽으로 가 물었다.“대표님 이번 프로젝트 미팅은 꽤 오래 걸리네요. 아직 안 끝났어요?”설인하가 입을 열었다.“해외에서 온 큰 클라이언트인 것 같아요. 대표님이 아는 분이라고 하시니 오래 걸릴 만도 하죠.”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박민정과 연지석이 함께 나왔다.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에리는 그 장면을 보고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본능적인 경계심인지 아니면 같은 감정을 품은 대상을 알아본 것인지 에리는 연지석을 보며 그 어떠한 호감도 느끼지 못했다.연지석의 예리한 시선도 에리를 발견하고는 설인하와 다른 여자들을 훑은 후 에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에리 씨! 명성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연지석이 에리에게로 곧장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에리도 예의 바르게 연지석의 손을 맞잡았다.연
연지석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유남준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서다희가 혀를 찼다.“에리라는 대스타를 해결하기도 전에 죽마고우가 오다니. 어렵다, 어려워.”“네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너를 벙어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유남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그는 이내 서다희에게 지시했다.“염혜란 쪽 일은 잘 지켜봐야 해. 절대 실수는 안 돼. 그리고 제일 좋은 의사를 찾아서 치료를 시켜.”“알겠습니다.”유남준이 서다희에게 지시를 내릴 때 병원에는 이미 여러 전문의가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이 전화를 받았을 때 의사가 말했다.“민정 씨, 국내 전문가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바로 염 여사님 검사를 진행해도 될까요?”“전문가요?”박민정은 전문의를 보낸 적이 없는데 모두 도착했다는 소식에 의아함을 느꼈다.“그 전문의들은 누구 지시로 온 건가요?”의사도 의아해하며 물었다.“민정 씨가 지시한 게 아닌가요? 잠시만요,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확인해 본 결과 그 전문가들은 정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박민정은 함미현에게 연락하여 그녀가 지시한 것인지 물었다.함미현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윤소현 아닐까요?”‘윤소현? 이런 일을 할 리가 없지.’박민정은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말했다.“이건 윤소현 방식 같지 않아서요. 같이 가서 확인해 보죠.”“그래요.”박민정과 연지석은 점심을 먹은 후 병원으로 향했다.연지석은 아직 회사에서 자리 잡지 못해 잠시 PMJ 그룹에 머물고 있었다.에리는 여러 번 그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매번 매니저에게 막혔다.“네가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아니야.”이미 유남준에게 당한 적이 있던 터라 매니저는 에리가 불필요한 싸움은 피하기를 원했다.“알았어.”에리는 체념하며 매니저를 따라갔다.한편 박민정과 함미현은 병원에 도착해 전문가들을 만났다.의사들은 그냥 돈이 많다고 해서 초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의사들은 박민정과 함미현을 쳐다보고는 바로 박민정에게 다가갔다.“정 대표님
함미현은 정수미가 염혜란에게 의사를 붙여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정말 좋은 마음에서 보낸 걸까?’속으로는 의심했지만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고마워요. 엄마.”“내가 해야 할 일이지. 널 이렇게 키우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안 그래도 기회만 되면 보답하고 싶었어. 다 나으면 같이 병문안 가자.”정수미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전화를 끊은 함미현이 박민정을 바라보며 물었다.“다 들으셨죠?”“네.”박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좋은 마음으로 보낸 걸까요?”함미현은 여전히 믿지 못했다.박민정도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녀 나름대로 분석했다.“정수미가 정말로 아주머니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그렇긴 하지만 제 앞에서 착한 척만 하는 거라면요?”함미현은 여전히 정수미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지 않았다.윤소현이 그녀에게 정수미의 부정적인 면을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염혜란을 살펴본 전문가들이 병실을 나왔다.그들은 함미현에게 염혜란은 치료가 가능하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그럼 얼마나 걸릴까요?”함미현이 바로 물었다.“최대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의사가 답했다.“일주일이요? 정말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선생님.”함미현은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넸다.박민정은 의사의 말을 듣고 정수미의 성의가 진심 어린 마음이었음을 눈치챘다.정말 염혜란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면 이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염혜란이 건강을 회복하면 함미현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이었고 정수미는 그 사실에 관해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의사들은 정수미의 지시로 염혜란을 치료하기 위해 해당 병원에 남아 있었다.함미현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했지만 정수미에게 전화를 건 후 병원에 남았다.다른 한 편, 정씨 가문.윤소현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엄마, 미현이는 아직 안 들어왔어요?”“양어머니 돌보러 갔어.”정수미는 자신이 의사를 보내 염혜란
함미현은 병원에서 염혜란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아직 말은 못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았다.“엄마, 정말 나를 전혀 기억 못 하는 거야?”함미현이 염혜란에게 물었다.염혜란이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갈라진 입술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해 보였다.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두려워하는 듯 구석으로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미현아.”윤소현이 문밖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왔다.윤소현의 등장으로 염혜란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함미현은 그녀에게로 향했다.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함미현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입을 열었다.“소현 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윤소현은 그녀의 겸손한 태도를 즐기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별일은 아니고 혼자서 아주머니를 돌본다고 하길래 도와주러 왔어.”“도와주신다고요?”함미현이 놀라며 손을 저었다.“아닙니다.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나쁜 년.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도와줄 리 없어. 또 민정 씨에게 해코지하려고 그러나?’“우리 사이에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이제 한 가족이니 언니로서 네 일을 모른척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윤소현은 그 말과 함께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병실로 향했다.“어이구, 아주머니 상태는 왜 아직도 이래? 일주일이면 괜찮아진다고 하지 않았어?”함미현은 윤소현을 따라 들어오며 답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의사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호전이 있겠죠.”윤소현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염혜란의 옆으로 갔다.염혜란은 윤소현을 보자마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미친 듯이 손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엄마!”함미현이 급하게 소리쳤다.윤소현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치며 비난했다.“이 미친 여자야!”놀란 윤소현이 손을 들어 염혜란을 때리려고 할 때 함미현이 급하게 그녀에게 사과했다.“소현 씨, 제발 너그럽게 봐주세요. 엄마가 아프셔서 그러는 거예요.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평소 같으면 윤소현은 절대 이런 상황을 참지 않았
윤소현은 함미현과 함께 병실에 있으면서 염혜란을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이 보낸 경호원들이 너무 철저히 지키고 있어 그녀가 염혜란에게 접근할 때마다 감시를 받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윤소현은 염혜란에게 손댈 기회가 없었다.저녁이 되어 윤소현은 함미현과 함께 간병인 실로 향했다.문 하나만 열면 바로 염혜란에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새벽쯤 윤소현은 밀려오는 잠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조심조심 염혜란의 병상 옆으로 다가갔다.염혜란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윤소현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지시했지만 직접 움직이는 건 처음이었다.“믿을만한 놈이 하나도 없어.”윤소현은 미리 준비해 놓은 약과 주사기를 꺼내 염혜란의 팔에 주사를 놓았다.통증에 의해 깨어난 염혜란은 비록 말은 하지 못했지만 소리를 질렀다.깜짝 놀란 윤소현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염혜란은 간병인을 했었고 시골 출신이라 건강을 회복한 후 체력은 임산부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윤소현의 손을 잡고 주사기를 떨어뜨렸다.그때 소란스러운 소리에 병실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이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불을 켰다.“뭐 하는 거야!”윤소현은 급히 주사기를 침대 아래로 밀어 넣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저는 그냥 일어나서 아주머니 상태를 확인한 거예요. 왜 들어오셨죠? 깜짝 놀랐잖아요.”소란스러움에 깨어난 함미현이 달려왔다.병실 안에서 염혜란이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왼손은 오른팔을 감싸고 있었다.“엄마, 왜 그래?”놀란 함미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염혜란에게 달려갔고 염혜란은 윤소현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더니 입에서 거품을 뱉어내며 쓰러졌다.윤소현은 그 모습을 보고 남몰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이 늙은 년을 처리했어!’“빨리. 빨리 의사를 불러.”함미현은 급하게 응급 벨을 눌렀다.다른 한편 박민정은 갑자기 꿈속에서 깨어났고 선잠을 자던 유남준도 그녀의 기척에 잠에서 깼다.“무슨 일이야?”박민정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