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3화

Author: 윤지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

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

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

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

“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

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

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

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

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

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

“아빠. 보고 싶어요.”

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

그녀는 코끝이 시렸다.

“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

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

“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

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

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

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은정숙 아줌마였다.

“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

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잘 지내요.”

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

“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

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

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

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잔소리를 듣자, 눈물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덮었다.

“아줌마. 어릴 때처럼 저 데리러 와줄 수 있어요?”

은정숙은 어리둥절했다.

박민정이 이어서 말했다.

“15일이요. 저 데리러 와주세요. 같이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은정숙은 왜 굳이 15일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 15일. 아줌마가 너 데리러 갈게.”

최근 병원에서 박민정에게 재검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예의 차려 거절했다.

어차피 이미 떠나기로 했는데 치료에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박민정은 자신의 은행 통장을 보면서 몇천만이 남은 잔액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떠난 뒤 은정숙에게 노후 자금으로 줄 생각이었다.

최근 며칠 동안 진주시에서는 비가 그친 적이 없었다.

연지석은 종종 그녀를 보러 왔다.

연지석은 그녀 혼자 베란다에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걸 자주 보았다.

그리고 박민정의 난청이 심해진 걸 발견했다. 자신이 문을 두드려도 대부분 그녀는 듣지 못했었다.

가끔은 그녀가 자기 입 모양을 뚫어지게 쳐다보고서야 뭐라 말하고 있는지 알아듣기도 했었다.

“민정아. 이틀 뒤에 강가에서 불꽃축제 한다는데, 같이 갈래?”

박민정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진주시에는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이 있었다. 매주 토요일, 강가에서 불꽃축제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예뻤다.

커플이 진주에 와서 이 불꽃놀이를 보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결혼한 후, 한 박민정은 유남준과 데이트 신청을 했었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거절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보다 그들은 불꽃놀이를 보러 갈 기회가 더 많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토요일.

두 사람은 시간에 맞춰서 8시의 불꽃놀이를 보러 갔다.

“펑-”

화려하게 부서지는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지석아. 고마워. 오늘 나 굉장히 즐거워.”

연지석은 옆자리의 앙상하게 야윈 박민정을 보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응. 나 마침 올해는 쭉 진주에 있을 거니까 매주 같이 불꽃놀이 보러 오자.”

박민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 시간 뒤면, 모든 게 끝난다.

연지석이 데려다주겠다는 걸 거절한 뒤 그녀는 혼자 강을 따라 걸었다.

오늘,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많은 사람 사이에서 박민정은 유남준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세히 다가가 보면 낯선 얼굴이어서 박민정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매번 밖에 나올 때마다 박민정은 유남준과 비슷한 사람을 보면 그로 착각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맞은쪽 길의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예능계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는데 그건 이지원의 인터뷰였다.

기자가 물었다.

“지원 씨. 이번에 돌아오신 게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서라는데, 소원을 이루어셨나요?”

카메라를 쳐다본 이지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말했다.

“오늘 저녁 8시에, 저랑 같이 진주의 불꽃놀이를 봤어요.”

영락없는 공개 열애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 순간, 스크린에서는 이지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평생의 사랑」

평생의 사랑...

박민정은 평생토록 유남준만 좋아해 봤다.

왜 좋아하게 됐을까?

박민정의 기억 속, 그건 십여 년 전의 어느 오후였다. 그녀가 혼자 박씨 집안에 있을 때 마침 옆에 있는 흰 셔츠를 입은 유남준을 봤다.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자, 그녀를 도와준 유남준이 신처럼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유씨 집안 부모님들이 아빠와 유남준이 크면 유남준에게 시집오라고 우스갯소리를 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많았다. 인제 와서는 박민정도 자기가 왜 유남준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

그 시각.

유남준은 그 뉴스를 보지 못했다.

일을 마친 그는 버릇처럼 핸드폰을 살폈으나 박민정의 소식이 없자 얼굴이 어두워졌다.

핸드폰을 꺼버리고 옆에 버렸다.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대표님. 알아냈습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연지석, 박민정 님의 소꿉친구인 것 같습니다.”

유남준의 기억 속에도 그리고 언론에서도.

박민정의 소꿉친구는 늘 유남준이었다.

비서의 말에 의하면 연지석은 박민정이 시골에서 자랄 때 알게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박민정이 자신을 알기 전에 그를 알게 된 것이다.

유남준은 도화살 가득한 남자를 떠올리고는 얼굴을 구겼다.

“대표님. 김인우 씨가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분부했다.

“오늘 바쁘다고 전해.”

비서는 어리둥절했다.

유남준은 최근들어 퇴근만 하면 김인우 같은 재벌들과 유흥을 즐겼으면서, 오늘은 왜 아닌 거지?

유남준은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갔다. 그러고는 운전해서 박민정이 묵던 모텔로 갔다.

하지만 도착하고 나서야 박민정이 이사 간 지 이미 며칠이나 됐다는 걸 발견했다.

유남준은 갑자기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살폈다.

박민정에게 전화를 칠 결심을 내린 순간 전화가 울렸다. 이지원이었다.

“뭔데?”

“남준 오빠. 듣기로는 민정 씨 어머니가 민정 씨 결혼 준비 중이라고 하던데요?”

유남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2)
goodnovel comment avatar
고해린
민정이가 잘못한것도 아닌데.. 왜 다들 민정이 한테만..
goodnovel comment avatar
hyoungum kim
너무 가슴이 아프다 아무리 좋아하는사람과 같이 살아도 좋았던 추억이 없었다는게 이혼후에야 소꿉친구를 만나 겨우 불꽃놀이보고 즐거운게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10화

    박민호는 몸을 낮춰 슬픔에 잠긴 최민아 곁에 앉아 조용히 위로했다.“너무 슬퍼하지 마요. 분명 두 분 별일 없으실 거예요. 우선 계속 찾아봐요. 이렇게 계속 울고 있으면 힘이 다 빠져서 나중에 제대로 찾지도 못하면 어떡해요.”그의 따뜻한 목소리에 최민아는 조금씩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민호 씨 말이 맞아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박민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요. 우리 다시 힘내서 찾아봐요.”하지만 두 사람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박민호는 몸을 휘청거렸다.그가 앞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최민아가 깜짝 놀라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민호 씨!”걱정스러운 그녀의 외침에, 박민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겨우 중얼거렸다.“왜 그래요?”“방금 쓰러질 뻔했어요!”최민아의 눈빛엔 놀람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박민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래요? 아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가 봐요. 괜찮아요. 지금은 두 분부터 빨리 찾아야죠.”그러나 그의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보자, 최민아는 더 이상 그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하다고 직감했다.“우리 일단 집에 돌아가요. 민호 씨, 요즘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요.”사실 박민호는 며칠째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그녀 부모님을 돌보느라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쉰 적이 없었다.“아니에요. 아직 괜찮아요. 버틸 수 있어요.”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이미 그의 몸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최민아는 그의 말을 더는 듣지 않았다.“안 돼요. 지금은 무조건 집에 가서 쉬어야 해요.”결국 그녀는 단호하게 박민호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지금은 푹 쉬세요. 부모님 일은 내가 경찰에 가서 신고할게요. 민호 씨는 쉬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알겠죠?”박민호도 더는 고집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그 말에 최민아는 안도하며 집을 나섰고 박민호는 그녀가 떠나자마자 소파 위에 쓰러진 채 곧 깊은 잠에 빠졌다.얼마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09화

    최민아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고마움과 미안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먹먹해졌다.지금 그녀의 손에는 거의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일단 그 돈을 받기로 하고 월급을 받으면 꼭 갚을 생각이었다.그녀는 돈뭉치를 조심스레 챙겨 부엌으로 가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그런데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쯤 부모님도 벌써 일어나 계셨을 텐데, 오늘따라 방문이 굳게 닫힌 채 조용했다.아직 주무시는 건가 싶어 그녀는 깨우지 않고 조용히 아침을 다 차린 뒤, 조심스레 방 앞으로 가 가볍게 노크했다.“엄마, 아빠... 아침 드세요.”몇 번을 불렀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순간 최민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방문을 밀어 열었다.방 안은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아빠! 엄마!”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집 안 구석구석을 뒤졌다. 욕실, 주방, 베란다까지 모두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부모님의 모습은 없었다.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다시 부모님 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민아야, 아빠랑 엄마는 더 이상 너를 힘들게 할 수 없어서 조용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단다. 우리를 찾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아라.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아. 민호랑도 잘 지내고 싸우지 말고 빨리 결혼도 하렴. 사랑한다, 내 딸아.]종이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고 눈물이 종이를 타고 조용히 떨어졌다.“아빠, 엄마... 대체 무슨 소리예요? 지금 어디로 가신 거냐고요!”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한 채, 그녀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의 번호를 눌렀다.하지만 예상대로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아무도 받지 않았다.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어떡해, 어떡하지...”최민아는 울먹이며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지만 어느 누구도 부모님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급히 옷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08화

    “방금 남준 씨도 들었죠? 제 생각은 충분히 전달됐어요.”박민정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유남준과 시선을 마주쳤다.그녀의 눈에는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녀는 에리에게 어떤 기대나 여지도 준 적 없었기에 마음은 오히려 편안했다.유남준의 깊고 짙은 눈빛 속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갔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알겠어. 내 아내가 워낙 매력적이니 누가 좋아한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갑작스러운 칭찬에 박민정의 볼이 발그레해졌다.두 사람은 그렇게 인파 속을 나란히 걸었다.“눈이다!”주변에서 누군가 크게 외쳤다.박민정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흩날리는 커다란 눈송이를 보는 그녀의 두 눈이 반짝였다.“정말 예쁘다...”유남준은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그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춰버리길 간절히 바랐다.한겨울, 도시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낭만적인 풍경이었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저 귀찮고 성가신 현실일 뿐이었다.박민호는 저녁이 되면 바깥 나가기가 싫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매일 밤 밖으로 나섰다.며칠째 계속 밤늦게 나가는 그를 두고 최상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민호는 요즘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거냐?”최민아는 서둘러 그럴듯한 핑계를 둘러댔다.“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민호 씨가 해외 회사랑 일한다고요. 외국은 설날도 없고 시차도 다르잖아요.”“하지만 매일 이러면 너무 힘들지 않겠냐?”남편의 말에 안순자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민호한테 몸조심하라고 해라. 밤낮이 바뀌면 몸이 상하기 쉽다.”최상철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건강이 우선이지. 돈은 다 부차적인 거야.”두 사람은 최근 병을 앓고 나서야 건강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자신들이 딸 곁을 오래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그들은 딸과 함께할 미래의 사위가 그녀 곁을 든든히 지켜주길 바랐다.그 마음을 아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07화

    “네가 이해해 준다면 그걸로 됐다.”하정철이 나지막이 말했다.에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자기 방으로 향했다.조미연이 급히 따라가 뭔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남편이 그녀를 막아섰다.“이제 좀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줘. 우리가 부모라고 해서 평생 그 애 인생을 대신 결정해 줄 순 없어.”조미연은 실망이 서린 눈빛으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에리도 어디 나무랄 데 없는데 왜 좋은 여자 만나 가정을 꾸리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처음부터 연예계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하정철은 배우라는 직업을 썩 탐탁지 않게 여겼다.“차라리 나처럼 의사를 하고 같은 직종의 여자를 만났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그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마음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에리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방 안에 홀로 남은 에리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창밖 어둠이 짙게 내려앉을 무렵, 마침내 그는 용기내어 박민정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박민정과 유남준은 도심의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몇 번 와본 적은 있는 곳이었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둘러본 건 처음이었고 오늘은 모처럼 시간이 나 박민정이 먼저 산책을 제안했던 터였다.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옆에서 화면을 힐끗 본 유남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전화받아봐. 무슨 일인지 궁금하네.”그는 오히려 박민정보다 더 신경 쓰는 눈치였다.박민정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어차피 그녀도 이 기회에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었다.“민정아...”에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전해졌다.“오늘 정말 미안했어.”“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니까.”박민정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마침 나도 할 말이 있어서 잘됐어.”에리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가 오늘 자신의 고백에 대한 답을 하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응... 얘기해.”“네가 정말로 날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히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06화

    유남준은 사실 에리에게 그는 박민정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자신과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인물이라 확실하게 경고하고 싶었다에리의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민정아, 다음에 또 보자. 오늘 식사는 내가 낼게.”그러자 유남준이 지지 않고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들어올 때 계산했어요.”유남준은 라이벌에게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에리는 민망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서둘러 부모님과 함께 자리를 떴다.그들이 떠나자마자 박민정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들에 정신이 혼란스러웠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박민정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유남준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제 내가 했던 말을 믿겠어?”박민정은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에리가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건 아닐까요?”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기 절정의 남자 스타가 자신처럼 나이도 많고 평범한 여자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지금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기를 속이는 거지.”유남준이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아니면 누군가에게 짝사랑 받는 기분을 즐기는 건가?”박민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헛소리하지 마요.”그녀는 단지 자신감이 부족했을 뿐이었다.“내가 생각보다 매력이 있나 싶었던 거죠.”유남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했다.“돈이란 게 원래 강력한 힘을 가지니까.”박민정은 그의 말뜻을 이내 알아차렸다.그는 에리가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돈을 보고 접근한 거라고 돌려 말한 것이었다.박민정은 곧장 반박했다.“나랑 레이가 처음 만났을 땐 우리 둘 다 가난했어요. 그때도 나한테 참 잘했는데, 설마 그때도 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유남준은 말문이 막혀 짜증이 난 듯 물잔을 들어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계속 상대의 호의를 받아줄 거야?”아까 에리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105화

    “엄마, 그만하세요.”에리가 박민정을 감싸며 말했다.“제 문제예요, 민정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에리는 어려서부터 말 잘 듣고 착했지만 연애와 결혼 문제만큼은 고집이 셌다.조미연은 아들이 다른 여자를 두둔하는 걸 보자 질투심이 더 치솟아 화살을 박민정에게 돌렸다.“이름이 박민정이라고 했죠?”조미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아가씨 남편은 아가씨가 우리 에리랑 이렇게 엮인 거 알아요?”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면서요? 우리 에리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데 젊은 남자 다루는 법은 잘 알겠네요? 이 일 남편한테 알려지면 어쩔 건데요?”평소 같으면 박민정도 가만있지 않았겠지만 상대는 에리의 엄마였다.“아주머니, 저랑 에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흥분했다고 저한테 너무 막말하시는 것 같네요. 그리고 에리도 이제 20대인데 그 정도 판단도 못 하겠어요?’박민정이 또렷하게 받아쳤다.에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박민정과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엄마, 가요.”그는 어머니의 팔을 끌었다.조미연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박민정에게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자신이 어린 후배에게 훈계받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박민정을 차갑게 흘겨보았다.“말은 따박따박 잘하네요. 나는 아가씨 같은 여자 많이 봤어요. 집은 버릴 수 없고, 그런데 우리 에리도 탐나고. 남편이 우리 에리만 못하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제가 왜 댁 아드님보다 못한 거죠?”차가운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크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묵직한 위압감을 품고 있었다.모두 고개를 돌리자, 깔끔한 코트를 입은 유남준이 걸어 들어왔다.그는 막 고객과 통화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마침 이 장면을 본 것이었다.“누구시죠?”조미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며 물었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유남준은 곧장 박민정 옆에 서서 그녀를 품에 감쌌다.“저는 이 사람 남편입니다.”그는 신분을 밝힌 뒤 조미연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