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란은 아이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미리 챙겨온 값비싼 장난감들을 그에게 건네줬다.그러나 박예찬은 장난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할머니, 너무 감사하지만 엄마가 낯선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박민정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그러나 아직 고영란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절대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된다.박예찬의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고영란은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예찬아, 할머니가 왜 낯선 사람이야? 우리 적어도 몇 달은 알고 지냈잖아. 할머니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어?”박예찬이 언급한 엄마가 조하랑인 줄 알았던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었다.“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추석 지내고 나면 할머니가 직접 엄마를 만나서 얘기할게. 그럼 이제 낯선 사람이 아닌 거지?”박예찬은 엄마를 함부로 대하며 괴롭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이러는 게 이해 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무려 20일을 유지훈을 데리러 온다는 핑계로 유치원을 찾아왔다.매번 거절했음에도 고영란은 늘 선물이나 음식을 가져왔다.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박민정에게 했던 무자비한 행동을 떠올리면 그런 마음마저 사라졌다.“할머니, 제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요. 누군가를 싫어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니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절대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걸요.”그 말 한마디에 고영란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리에 얼어붙었다.비수 같은 말에 상처받은 것도 있지만 그의 모습이 어릴 적의 유남준과 너무 똑 닮아있어 기분이 착잡했다.“왜 할머니를 싫어하는 거야?”슬픔에 허덕이는 고영란과 달리 박예찬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죄송해요. 저에게는 진짜 할머니가 있거든요.”혈육 간의 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박민정은 다시 한번 느꼈다.어찌 보면 고영란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건 친아들
저택으로 돌아온 후.고영란은 신중하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박민정을 설득했다.“현실이 얼마나 잔인한지 네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혼한 여자가 무슨 수입이 있겠니? 박씨 가문도 그렇고... 이제는 의지할 구석이 없잖아.”박민정은 유남준의 방 밖에 있는 발코니에 서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고영란의 말을 머릿속에 되새겼다.이혼한 여자는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뜻인가?박민정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성공한 모습을 기필코 보여주리라 다짐했다.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손에 든 물컵을 내려놓고 조하랑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민정아, 무슨 일이야?”조하랑은 과일을 먹고 있었다.“예찬이랑 얘기하고 싶어.”“그래? 잠깐만 기다려.”조하랑은 재빨리 카메라를 돌렸고 곧이어 단정한 옷차림으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박예찬의 모습이 보였다.“엄마.”박민정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고영란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물어보고 싶어 고민하던 찰나 뜻밖에도 박예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엄마, 나 오늘 엄마를 봤어.”박민정은 흠칫 놀랐다.“그런데 왜 아는 척을 안 했어?”사뭇 박예찬이 어른처럼 성숙해 보이는 순간이다.“엄마가 나한테 다가오지 않았잖아. 바쁜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방해하지 않았어.”박예찬은 일부러 고영란을 언급하며 말을 이었다.“엄마, 혹시 유치원 입구에서 엄청 나이 드신 어르신 봤어? 유치원에서 한번 만난 이후로 요즘 계속 나 보러 오거든.”줄곧 우아함을 유지하며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고영란이 나이 먹은 사람으로 표현되자 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고 모든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다.“그건 우리 예찬이가 너무 귀여워서 그래.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잖아.”그녀의 말에 박예찬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엄마, 내일 추석이잖아. 그래서 엄마를 대신해서 할머니한테 추석 안부를 전했어.”“정말이야? 고마워.”박민정은 당장이라도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유씨 가문에서는 길게 영상 통화할 수 있
유남준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욕설을 퍼붓고 싶었지만, 아이인 유지훈이 자리에 있다는 생각에 애써 감정을 억제했다.유성혁 부부는 수치심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방을 나섰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돌변했다.“남준이 저 자식은 위아래가 없는 건가? 감히 나한테 덤벼?”최현아도 분노를 못 이겨 씩씩거리며 유지훈을 끌고 나왔다.“동생이라면서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어르신이랑 지훈이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체면을 짓밟을 수가 있죠?”최현아는 유남준이 머문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방금 우릴 비웃는 거 봤어요?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유성혁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무슨 뜻이야?”“민정 씨를 다시 데려왔다는 소식 못 들었어요?”“그게 왜?”유성혁은 예쁜 박민정이 난청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보청기를 착용하는 게 불쌍하다고 여겼다.“여보, 걱정하지 마요. 오늘 받은 모욕은 반드시 되갚아 줄 거예요.”최현아는 이를 악물었다.“비밀 하나 얘기해줄까요? 민정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도련님이 아니에요.”이 일은 최현아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박민정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 싶어 지금껏 언급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에게 한 방 맞고 나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유남준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박민정은 이미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은은한 불빛이 그녀의 몸을 비추자 유난히 매혹적이었다.유남준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어머니가 뭐래?”박민정이 그를 바라봤을 땐 바지만 남은 상태였다.다부진 상체가 고스란히 눈에 보이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아이를 임신하면 4,000억을 준대요.”“그래서 동의했어?”유남준은 곧장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아니요. 전 아이를 팔고 싶지 않거든요.”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입술은 마침 유남준의 볼에 닿았다.순간 가슴이 찡해지며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는 카리스마 넘치는 CEO로 알려진 유남준이 이런 뻔뻔한 면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듯싶다.유남준은 옆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앞으로도 평생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그렇게 날이 막 밝아올 무렵에야 박민정은 잠이 들었다.추석날.유씨 가문은 늘 그렇듯 수많은 친척들이 모여 시끌벅적했다.유일하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오늘은 이 자리에 박민정이 있다는 것이다.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추측이 사실인 것처럼 사석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남준 오빠가 직접 데려왔다고? 도대체 왜?”“진짜? 저 여자가 먼저 연락한 게 아니라고?”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지던 그 시각 박민정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몸을 일으켰다.침대에서 일어나자 준비된 드레스와 한쪽에 놓인 화려한 주얼리가 보였지만 재빨리 시선을 떼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드레스를 갈아입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표정이 어두워졌다.“파티라도 하는 건가? 아무튼 전 참석할 생각 없어요.”박민정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왜? 이유를 말해봐.”유남준은 지그시 그녀를 바라봤다.“이유가 왜 필요하죠?”박민정의 질문에 유남준은 위압감을 풍기며 한 걸음 다가갔다.“이번에는 다를 거야.”박민정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가고 싶지 않아요.”‘달려졌다고? 날 괴롭히는 방법이 달라진 건가?’5년 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면전에서 얼마나 많은 핀잔을 줄지 안 봐도 뻔하다.유남준은 오늘 박민정을 데리고 직접 가족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동안 늘 서럽다고 얘기했으니까.“친구들은 남편이랑 같이 파티도 가던데 나만 혼자예요... 다들 지켜줄 사람이 있는데 나만 없고...”하지만 이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지금의 박민정은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도,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싶을 만큼 연악하지도 않았다.유남준의 손은 허공에 굳어버렸다.
“오랜만이네. 너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뻔했어.”최현아는 손을 내밀었지만, 박민정은 이를 무시하고 그저 예의 바른 웃음을 지었다.“그쪽은 변한 게 없네요.”순간 표정이 굳어버린 최현아는 손을 거두었다.“나가서 얘기 좀 할래?”최현아는 박민정보다 일찍 유씨 가문에 시집왔다.박민정이 유남준과 약혼 얘기가 오가던 와중에 최현아는 친한 언니처럼 시간 있을 때마다 찾아와 수다를 떨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후, 박형식이 세상을 뜨고 박씨 가문이 점점 무너지자, 그녀는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타고난 연기파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바깥의 오솔길을 걸으며 최현아는 상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그거 알아? 5년 전에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새 한숨도 못 잤어. 심지어 그때 지훈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유산할 뻔했다니까?”진심은 일도 없는 가식 섞인 말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야 하는 게 현실이다.“왜요? 무서웠어요?”박민정은 농담인 척하며 태연하게 물었다.“설마 밤에 찾아올까 봐 두려웠던 건 아니겠죠?”그녀는 박민정의 결혼 생활에서 발목잡는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유남준이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 실종된 적이 있었다. 그때 박민정은 유앤케이 그룹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유씨 가문의 친인척과 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모든 사람이 유남준은 죽었다고 단정하는 와중에도 희망의 끝을 놓지 않은 채 홀로 그를 찾기 위해 두바이로 떠났다.운 좋게 그곳에서 유남준의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 계약을 성사했을 뿐만 아니라 유명훈의 눈에 들어 성공적으로 유씨 가문에 시집오게 되었다.하지만 이 모든 걸 최현아가 망쳐버렸다. 그녀는 박민정이 두바이에서 부자를 꼬셨다는 루머를 여기저기 퍼뜨렸다.그 얘기를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유명훈은 곧바로 벌을 내렸고, 그렇게 박민정은 사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루 밤낮을 보냈다.이런 일은 약과에 불과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잔인한 수단과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혀왔는지 짐작할 수
최현아의 말을 되새기던 박민정은 눈앞의 정원을 바라보며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넋을 잃고 안으로 들어섰다.정원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계수나무 한 그루에서 풍기는 향이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잊었을 수도 있겠지만 박민정은 자신이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고 확신했다.어릴 적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자주 유씨 가문을 방문했다.박민정은 계수나무 아래에 서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홍색의 가옥을 바라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삐걱-!문이 천천히 열리자, 그녀는 내부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방안의 모든 가구와 물건들은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 흰 천으로 덮여있었다.최현아는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이곳으로 데려온 걸까?그녀는 의혹을 가득 품은 채 흰 천 하나를 들어 올렸다.쨍그랑!뭔가 바닥에 떨어졌다.앞으로 다가가 보니 액자 하나가 놓여있었고 허리 숙여 그것을 들어 올린 박민정은 액자 속의 사진을 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사진 속에는 똑같이 생긴 아이 둘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한 명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반면 다른 한 명은 반달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사진 맨 아래에는 자그마한 글씨체로 뭔가가 적혀있었다.[형 유남준, 동생 유남우.]유남준? 유남우?순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면서 가슴이 답답해진 박민정은 재빨리 다른 흰 천을 젖혀 사진 몇 장을 더 찾았다.여전히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어렸을 때가 아니라 성인이 된 모습이었다.정장 차림으로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른쪽 남자와 달리 왼쪽에 서 있는 남자는 캐주얼한 옷차림에 온화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비록 똑같이 생겼지만 풍기는 분위기로만 봤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역시나 이 사진 아래에도 자그마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형 유남준, 동생 유남우.]싸늘함을 풍기는 남자가 유남준,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유남우다.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밀려오며 박민정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
유남준은 망연자실한 박민정의 표정을 보며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와 재빨리 사람을 시켜 그녀를 방으로 데려갔다.방으로 돌아온 후.유남준은 옷 한 벌을 꺼내 그녀에게 걸쳤다.“확인하고 싶은 게 뭔데?”“쌍둥이 동생 있어요?”박민정은 사진을 손에 꽉 움켜쥔 채 보여주지 않았다.동생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표정이 어두워지고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한 유남준은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맞아.”박민정은 쉴 틈 없이 물었다.“왜 지금까지 한 번도 얘기 안 했어요?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유남준은 입술을 깨문 채 감정을 추슬렀으나 싸늘함을 머금은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갑자기 찾아와서 묻고 싶었던 게 고작 이거야?”박민정은 뚫어져라 그를 바라봤다.“집안일이니까 넌 알 필요 없어.”잔인한 독설은 비수처럼 날아와 가슴에 꽂혔고 선을 긋는 말을 들으니 그의 입에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한편으로는 사진을 보여주지 않고 주머니에 숨긴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알려주면 다시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을게요.”유남준의 눈빛에는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함이 가득했다.“갑자기 왜 그걸 알고 싶은 건데?”동생 유남우는 유씨 가문에서 금기시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누구도 감히 언급할 엄두가 없었다.심지어 유남우의 존재를 알고 있는 도우미마저도 행여나 말실수로 유남준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유남준은 계속하여 따졌다.“누가 뭐라고 얘기해줬어?”박민정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대충 둘러댔다.“지난번에 어머님이랑 대화하는 걸 엿듣고 쌍둥이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마침 밖에서 산책하고 돌아오면서 누군가 그 얘기를 하고 있길래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것뿐이에요.”이런 어설픈 거짓말에 유남준이 속을 리가 없다.더군다나 얼마나 다급하게 자신을 찾았는지, 얼마나 넋이 나갔는지 직접 봤기 때문에 분명히 큰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너무
연회장에서 겪은 갖가지 구설수로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지금 이 순간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그는 박민정을 깨우지 않고 그대로 품에 안았다.바로 이때 그녀의 이마가 평소보다 뜨겁다는 걸 알아챘다.“너 지금 열나.”그의 움직임에 잠이 깬 박민정은 머리가 아픈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왔어요?”“응, 너 열 나니까 의사 선생님 모셔 올게.”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런데 이때 박민정이 갑자기 그를 껴안았다.“싫어요. 해열제 먹으면 되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보름동안 임신 여부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괜히 의사가 뭔가를 알아챈다면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적극적으로 품에 안기는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은 온갖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내 말 들어.”박민정은 결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의사 선생님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제발요.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오늘 왜 이래?”박민정은 평소에 애교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특히나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에는 그 빈도가 더 줄어들었고 부탁할 일이 있을 때만 가끔 애교를 부리곤 한다.자신을 의심하는 유남준의 눈빛에 박민정은 머리를 그의 품에 파묻고 나지막하게 말했다.“아빠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아이도요.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게 무서워요.”아버지와 아이 얘기를 꺼내자, 유남준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약 가져다줄게.”그는 몸을 일으켜 해열제를 가지러 갔다.소파에 웅크리고 있던 박민정은 훤칠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왠지 모르게 허무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곧 유남준이 다가와서 따뜻한 물과 약을 건넸고 그녀는 약을 받고 꿀꺽 삼킨 후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약 먹으면 바로 괜찮아질 거야.”“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남준은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는 걸 듣고서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저녁.여전히 미열이 남아있던 박민정은 샤워하고 약을 먹은 후
유남준은 그제야 진정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뒤 그녀의 머리를 다시 살펴봤다.그러자 박민정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나도 안 아프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굳이 상대해서 뭐 해요?”“그래.”유남준은 담담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에라도 이지원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사실 박민정도 애써 쿨한 척 괜찮다고는 했지만 방금 눈앞에서 본 이지원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그런 눈빛은 진짜로 미친 사람 외에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될 만큼 충격적이었다.박민정은 돌아가기 전 원장에게 물었다.“혹시 이지원 씨는 평소에도 많이 폭력적이었나요?”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니요. 여기에 온 이후로는 말도 잘 듣고 다른 환자분들과도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약 그런 환자가 들어오면 오히려 자발적으로 피하더라고요.”박민정은 그제야 뭔가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아닙니다. 설마 방금 사모님께 손을 댔나요?”그의 물음에 박민정은 굳이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안정이 필요해 보이더라고요.”“알겠습니다.”원장은 재빨리 간호사에게 알렸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제 지인도 이쪽 분야의 전문가 의사인데 이런 환자한테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곁에 있으면 좋다고 했거든요.”사실 원장도 진작에 김인우를 통해 이지원이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하여 박민정의 말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답했다.“저희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두 사람은 그제야 그곳을 빠져나왔고 원장은 그들이 떠나가자마자 이지원의 병실에 비교적 폭력 성향이 센 환자를 안배해 뒀다.박민정이 차에 올라타자 유남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어때 보였어? 이지원이 진짜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았어?”그러나 박민정은 대답 대신 그를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다 되물었다.“남준 씨는 어땠는데요? 뭔가 이상한 점 못 느꼈어요?”그러자 유남준
간호사가 문을 열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원장한테 말했다.“원장님, 이지원 씨를 데려왔습니다.”그러자 원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서며 박민정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저는 이만 나가볼 테니까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저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감사합니다.”그렇게 대기실 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고 유남준과 박민정은 말없이 이지원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지원은 아직 두 사람을 보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수그린 채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으로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오빠, 진짜 나랑 결혼할 거야? 민정이가 알고 날 괴롭히면 어떻게 해?”박민정은 너무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이지원!”이지원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앞의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누구세요?”“내가 누구인지 기억 안 나? 나야, 민정이.”그녀의 이름이 들리는 순간 이지원은 순간 겁을 먹은 얼굴로 빌기 시작했다.“민정아,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을게. 나도 많이 반성했으니까 한 번만 봐주라. 더 이상 거짓말도 하지 않을게... 우리 한때는 친구였잖아?”그리고 박민정의 손을 잡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난 윤소현 씨처럼 감옥에 들어가기 싫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이제부터 정신 차리고 연예계에서만 활동하면서 살 테니까 제발 나 한 번만 살려줘.”그녀의 간절한 애원에도 박민정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아직 덜 미쳤나 보네!”이지원은 순간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더니 박민정을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아니야! 넌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가 진짜 박민정이라고!”박민정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그러자 이지원은 차갑게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네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이지원이잖아!”그리고 당장에라도 눈앞의 박민정을 때리려고 했다.“빌어먹을 X, 널 죽여버릴 거야!”다행히 옆에
이지원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남준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역시나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워낙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여자라 분명 이번에도 쇼한다고 생각했다.특히 이런 병은 정확하게 진단해 내기 어렵다.“그래, 같이 가자.”유남준이 단번에 가겠다고 하자 박민정은 순간 장난기가 발동해 그에게 슬쩍 물어봤다.“이지원 씨가 신경 쓰여요?”순간 유남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뭐라고?”“남준 씨 첫사랑이었잖아요. 바로 가겠다는 걸 보니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면 걱정하는 건가?”말하다 보니 박민정도 슬슬 질투가 났다.그러자 유남준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답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예전에도 말했잖아, 난 그 여자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그런데 왜 신경이 쓰이고 걱정해?”박민정은 그의 단호한 발언에 그제야 마음이 살짝 놓였다가 다시 물었다.“그런데 왜 저랑 같이 가보려고 해요?”“단순 호기심.”그가 이런 일로 호기심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박민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러고 보니 그녀도 궁금하긴 했다.“빨리 먹고 가요.”“그래.”그렇게 박민정은 아침밥을 다 먹은 뒤 유남준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비록 집에 운전기사가 있지만 유남준은 박민정과 단둘이 드라이브하는 걸 좋아했다.이지원이 지금 입원해 있다는 병원은 집과 살짝 멀었는데 차로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얼마간 달리다 보니 박민정은 저 멀리 하얀색 건물과 울타리 안에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햇볕을 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리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한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이지원도 흰색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긴 머리는 헝클어진 채 한눈에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이때 옆에 있던 환자가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이지원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 정확하게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입구에 도착해보니 병원 원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
이튿날, 아침 여덟 시쯤.박민정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유남준은 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 안에 가뒀다.“왜 벌써 깼어?”유남준의 나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박민정은 난감한 얼굴로 그의 팔을 풀려고 했지만 역시나 어림도 없었다.하여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누워 그에게 말했다.“출근해야 하니까 빨리 이것 좀 풀어요.”그러자 유남준은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더 자도 돼.”회사 대표가 굳이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박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잠이 안 와요.”순간 유남준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이더니 벌떡 일어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채 물었다.“그러면 우리 재밌는 놀이나 더 할까?”그의 말에 깜짝 놀란 박민정은 빠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아, 아니요. 그냥 잠이나 계속 자요.”그러자 유남준도 싱긋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다시 누웠다.솔직히 오랜만에 이토록 개운하게 잤다.박민정은 그의 품 안에서 갇혀있는 상태로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지만 유남준이 원하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해도 참아야 했다.아홉 시 반쯤 되자 박민정은 더는 누워있기 힘들어 유남준에게 거짓말했다.“남준 씨, 나 배고파요.”그러자 유남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러면 아침밥부터 먹자.”“네.”그제야 자유로운 몸이 된 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남준네 셰프는 요리 솜씨가 아주 훌륭했고 아침부터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박예찬, 박윤우는 이미 학교에 갔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출근했다.박민정이 내려오는 모습을 본 셰프는 재빨리 그들이 먹을 아침밥을 다시 데워줬다.유남준은 그녀가 허겁지겁 맛있게 밥 먹는 모습을 한껏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어.”“네.”한창 맛있게 먹고 있던 이때, 갑자기 박민정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김인우’라는 이름을 본 유남준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재검사받아야 하는 건가?’박민정은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