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유남준은 멈추고 박민정이 다시 잠이 들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한편 박윤우는 도우미들에 의해 아주 고급스러운 어린이 방에 배치됐고, 고영란은 손님을 배웅한 뒤 곧바로 달려왔다.“예찬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뭐 좀 먹을래?”고영란이 다정한 얼굴로 다가오자 박윤우는 반백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이 넘치는 눈앞의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며 악녀 시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녀가 못마땅했지만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할머니, 너무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왔어요?”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다리를 직접 껴안으며 그녀의 옷에 콧물을 닦았다.고영란은 예찬이가 이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처음 본 탓에 굳어버렸다.“미안해, 할머니가 잘못했어. 할머니가 일부러 널 여기 혼자 두려고 한 게 아니야.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빨리 네 곁으로 오고 싶었는데.”박윤우는 속으로 살짝 당황했다.형이 할머니에게 이렇게 귀염받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정말요?”박윤우는 고영란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물론이지.”말을 마친 고영란이 다시 물었다.“왜 갑자기 할머니 생각이 났어? 집에서 엄마가 괴롭혔어? 너만 원하면 앞으로 할머니랑 같이 살 수 있어. 할머니가 잘해줄게.”박윤우는 마침 유씨 가문에 대해 알고 싶었다.“네, 원해요.”고영란은 순식간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에게 박윤우가 살 수 있는 더 큰 방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박윤우는 다정한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친손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저렇게 잘해 주는지 의아했다.“할머니, 나 졸려요. 자고 싶어요.”“알았어, 자.”박윤우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할머니, 여기 남아서 저 좀 지켜봐 주실 수 있어요? 무서워요.”“그래.”고영란은 당연히 거절할 리가 없었다.어린 남준의 모습과 똑같은 아이를 보며 그녀는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하지만 밤이 되자 박윤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고, 물을 떠달라,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유남우도 마침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어젯밤 파티와 달리 지금 이 순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둘만 있는 것 같았다.박민정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더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왜 발코니에 서서 양치하고 있어. 밖이 너무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해?”유남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시선을 거두며 유남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다행히 유남준은 지금 앞이 보이지 않았다.“괜찮아요, 안 추워요.”박민정은 곧바로 방으로 돌아왔다.하지만 그녀는 유남준이 앞을 못 본다는 것만 알았지, 유남준이 사방에 눈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유남우가 다가오는 순간 누군가 유남준에게 이를 보고했고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이 유남준의 얼굴을 스칠 때 전화벨이 울렸다.전화를 받자 유남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엄마 말로는 네가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할게. 민정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아니라 나야.”유남우는 유남준을 보며 또박또박 읊조리고는 전화를 끊고 눈을 밟으며 돌아갔다.그의 말에 일부러 잊고 있던 기억들이 유남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특히 박민정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남준 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어.”잘못 생각했다라...박민정 역시 샤워를 마치고 침착함을 되찾은 후 짐을 다 챙긴 다음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다 됐어요? 이제 돌아가요.”“그래.”박민정은 유남준에게서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다.두 사람은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고 유남준은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박민정 역시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에서 내리는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두 사람 모두 마음이 무거워 보였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신림으로 돌아와서야 박민정은 윤우가 사라졌고 그의 방 안에는 쪽지만 남겨진 채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형, 나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며칠 뒤에 돌아올 거야.]“윤
박윤우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때마침 뒤돌아보니 유지훈이 보였다.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있는 꼬마는 누굴까?’그러자 유지훈이 그에게 다가갔다.“예찬아, 너 왜 그래? 왜 날 무시하는 거야?”형을 아는구나.박윤우는 짜증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무슨 일인데?”진지한 박예찬과는 너무 다른 앳된 목소리에 유지훈은 당황했다.“예찬아, 너 왜 갑자기 여성스러워졌어?”“...”박윤우는 얼굴이 새까맣게 상기되어 있었다.‘여성스럽긴 누가. 넌 온 가족이 다 여성스럽냐?’“근데 그렇게 말하니까 나름 귀엽네.”유지훈은 활짝 웃었다.“나랑 놀러 온 거 맞지? 유씨 가문에는 내가 모르는 곳이 없으니 나랑 같이 가자.”박윤우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이상했다.“모르는 곳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나 유지훈이야. 유씨 가문 직계 유일한 손자, 잊었어?”유지훈은 뿌듯한 얼굴이었다.유지훈...박윤우는 그 이름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금방 기억해 냈다.형이 쓰레기 아빠 형한테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지 뭐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얘가 걔구나.’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앳된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생긴 건 봐줄 만했으나 애가 어딘가 멍청해 보였다.“아, 생각나네.”박윤우는 곧장 그를 지나쳤다.“별일 없으면 나 귀찮게 하지 마”유지훈은 실망한 얼굴로 멀어지는 꼬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찬이가 왜 갑자기 나를 무시하는 걸까?내가 잘못한 게 있나?유지훈은 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예찬아, 내가 우리 아빠가 새로 사준 드론 줄 테니까 그거 갖고 놀래?”“싫어.”박윤우는 눈앞에 있는 유지훈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다.‘난 계속 유씨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해.’“그만 따라와. 안 그러면 때릴 거야.”박윤우가 협박하자 유지훈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박윤우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가 엄마 최현아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박윤
차에 오른 후 박윤우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박민정은 오늘처럼 화가 나고 걱정했던 적이 없었기에 박윤우에게 묻지 않고 아이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차에 있던 유남준도 서다희에게 더 이상 찾지 말라고 전했다.집에 돌아온 후 유남준이 출근하고 박윤우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엄마, 미안해요. 엄마랑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갔어요.”아이는 귀여운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예전에는 이렇게 사과하면 엄마가 다정하게 용서해 줬지만 이번에는 박민정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박윤우는 잠시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위층으로 올라가 가정부 할머니에게 부탁하려던 찰나, 두 발짝도 떼기 전에 박민정이 말했다.“거기 서.”박윤우는 얌전히 자리에 섰다.“엄마, 정말 잘못했어요.”“정말 엄마랑 아저씨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박민정이 갑자기 이렇게 묻자 박윤우의 예쁜 눈동자가 움츠러들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박민정은 창백한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또다시 마음대로 집 나가면 엄마 이제 너 상관 안 해.”박민정이 이렇게 말하자 그제야 박윤우는 엄마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하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다신 안 그럴게요, 약속해요.”혼자 병원에서 치료받고 약을 먹었던 아이는 정말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엄마, 나 오늘 병원 가죠?”박윤우가 낮게 말하자 병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박민정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윤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곧 수술할 수 있을 거야.”“네, 알겠어요.”박윤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박민정을 안았다.다행히 엄마는 여전히 나를 아끼고 포기하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박민정은 윤우를 다시 병원으로 보냈다.의사가 몸 상태를 확인한 후, 박민정은 아저씨가 보고 싶다는 윤우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물었다.“윤우야, 아저씨 좋아?”박윤우는 목이 메었다.어떻게 쓰레기 아빠를 좋아할 수 있겠나.하지만 엄마는 분명 그 질문에
한수민은 박민정과는 달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딸 덕분에 안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옆에 있던 박민호가 차가운 눈빛으로 흘겨보았고 윤소현이 나가자마자 그는 한수민에게 말했다.“엄마, 쟤가 유남우랑 결혼하면 난 그래도 유씨 가문의 매제가 될 거야. 회사 하나 차리고 싶은데, 혹시...”박민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수민이 가로챘다.“윤씨 집안의 도련님 노릇이나 잘해. 하루 종일 돈 쓸 생각만 하지 말고.”박민호는 그 말에 버럭 화를 냈다.“내가 박민정한테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다 무사할 것 같아?”“그러기만 해!”한수민도 화를 내며 물컵을 세게 내려놓았고 박민호는 기운이 다 빠져서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났다.밖에 나가면 제호에서 술 마시는 것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여기서 제일 예쁜 애로.”그는 도착하자마자 많은 관심을 끌었고 그중에는 이곳 단골손님인 김인우도 있었다.김인우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박민호를 지켜보게 한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남준아.”유남준과 연락을 주고받은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유남준이 정말 기억을 잃었는지 몰랐던 그가 처음에 다가갔을 때 유남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리고 며칠 만에 연락을 해서는 조금 기억난다고 했다.“무슨 일이야?”일을 하고 있던 유남준은 김인우의 연락에 이렇게 물었다.“제호에서 박민호를 봤는데 돈이 많은가 봐. 바로 여길 대관하던데?”김인우는 이 망나니를 기억하고 있었다.한때 진주 최고의 부자였던 박씨 가문을 망쳐놓고 어떻게 지금 또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건지.키보드를 두드리던 유남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지난번 박민호에게 박민정을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했던 그는 다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아, 그래.”김인우는 다소 실망스러운 기색이었다.“참 남준아, 뉴스 봤어. 너 정말 유남우한테 다 줬어?”“일단은.”김인우는 안도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유남준이 남에게 괴롭힘당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민정 씨는 지금 어떻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유남준이 말했다.“거긴 좀 허름해서 임신한 몸으로 가기엔 불편할 거야.”“괜찮아요, 멀리서 지켜보면 돼요.”박민정이 이렇게 대답하자 유남준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그래.”그렇게 말한 후 그는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돌아갔다.방에 도착하자마자 서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 자선 회사 하나 준비해. 대표와 직원들까지 전부 준비해야 해.”약혼녀를 위해 직접 음식을 준비하던 서다희는 그의 명령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사모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여자들은 다 돈 좋아하잖아요.”“시키는 대로 해.”유남준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섞지 않았다.박민정이 아직 그에게 돈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당장 이혼하려고 들 게 뻔했다.그는 박민정이 어떤 여자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가장 큰 결점은 여린 마음이었다.서다희는 어쩔 수 없이 약혼녀를 남겨둔 채 준비를 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마음이 여린 건 박민정뿐만 아니라 은정숙도 마찬가지였다.은정숙 역시 자신의 신분이 동생으로 바뀌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유남준을 불쌍히 여겼다.그녀의 간병인과 집안의 요리사까지 전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이라 먹고 싶은 건 뭐든 만들어 주었고 주변 이웃들도 유남준에 대해 좋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그가 도로를 보수하는 일을 돕고 집에 수돗물이 안 나오는 걸 전화 한 통으로 수리를 해줬다고 한다.“은정숙 씨, 좋은 사윗감을 찾았어. 인물도 좋은데 능력까지 있네.”“그래, 앞을 못 보는 것만 빼면 매일 옷도 잘 차려입고 깔끔하잖아. 어떤 시각 장애인이 저 사람만큼 하겠어.”최근 몸이 좋아진 은정숙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서서히 유남준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변하지 않고 계속 민정이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좋을 텐데.”박민정이 가끔 집에서 곡을 쓰고 있을 때면 은정숙과 이웃 주민들이 유남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그래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다음 날 아
유남준의 사무실은 크지 않지만 벽에는 아이를 찾는 것부터 청각장애 아동 후원까지 다양한 소식들로 가득했다.박민정이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시각장애인 전용 컴퓨터와 휴대폰도 있자 마음속에 있던 의구심은 잠시 사라졌다.“그럼 일 해요. 난 방해 안 할게요.”“그래, 배웅해 줄게.”유남준은 자신을 믿는 그녀를 보며 가슴에 있던 돌덩이를 마침내 내려놓았다.“됐어요. 그냥 일 해요.”박민정은 혼자 그 자리를 떠났고 돌아오는 길에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하랑아, 나 유남준 씨 회사 갔어. 진짜 자선 기업이었어.”전에도 조하랑과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이제 그 정도가 된 거야?”조하랑은 일하면서 물었다.“사실 지금 하는 일 난 좋은 것 같아. 남을 도우면서 평범한 하루하루를 사니까.”박민정은 늘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민정아, 너 그 사람한테 마음 약해져서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건 아니지? 지금은 앞을 못 보지만 언젠가 기억을 되찾고 눈이 좋아져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어떡해?”박민정은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세상에서 제일 변덕스러운 존재가 사람이라 누구도 한결같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당장 이혼할 수도 없으니까 차근차근 한 걸음씩 나아가야지.”“그래도 네 개인 재산은 꼭 지켜. 그 사람한테 속아 넘어가지 말고.”조하랑이 당부했다.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문득 집안의 요리사와 간병인 모두 유남준의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빚이 그렇게 많은데 간병인과 요리사를 고용할 돈은 어디서 구한 걸까?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간병인과 요리사의 월급에 대해 물었고 같은 대답을 듣게 되었다.간병인은 한 달에 120만 원, 요리사는 하루에 세 끼만 만들면 되니 60만 원을 받았다.박민정은 앞으로 자신이 월급을 주겠다며 계좌 번호를 달라고 했고, 박민정이 나가자마자 그들은 곧바로 서다희에게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다행히 유남준은 이미 월급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민정에게 가장
박민정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고 박민호는 여전히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었다.“내가 그동안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지 몰라. 예전엔 내가 괴롭혔는데! 누나, 나 좀 도와줘, 유남우를 만나면 우리를 도와줄 거야.”박민정이 그의 말을 듣기 싫어서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박민호가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내가 엄마한테 속지만 않았어도 우리 박씨 가문은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무슨 말이야?”박민정이 곧바로 물었지만 박민호는 이미 술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전화를 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석후가 그의 카드를 동결한 탓에 결제할 돈이 없어 제호 클럽에서 쫓겨났고 무자비한 폭행까지 당했다.“그렇게 큰 가문이 어떻게 3년 만에 무너졌겠어? 엄마가 나보고 애인인 윤석후에게 돈을 다 송금하라고 해서 그래! 이제 윤씨 집안은 돈도 있고 힘도 있으니까 나를 무시하고 감히 내 카드까지 정지시켜서 맞아 죽게 만들었어. 김인우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박민호는 아까 있었던 일을 전부 털어놓았다.박민정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순진했다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한수민이 윤씨 집안에 시집간 건 해외로 간 후 윤 대표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그 말은 한 여사님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곧바로 다른 남자와 연락했다는 뜻이야?”박민호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말을 더듬었다.“나, 나는 모르겠어. 아무튼 유남우를 만나서 나 좀 도와줘. 난 누나 친동생이고 그래도 혈육이잖아. 내가 재기하면 누나도 박씨 가문 아가씨가 되는 거야.”박민호가 말을 마치기 바쁘게 전화는 끊겼고 박민정은 휴대전화를 꽉 움켜쥐고 가만히 서서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만 느꼈다.과거 한수민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적어도 아버지는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었다.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정민기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민기 씨, 부하들에게 부탁해서 한수민의 과거를 조사하도록 도와주면 안 될까요?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몇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