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우가 나간 후, 방 안은 이지원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그 사람들이 떠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이지원은 상처로 뒤덮인 피 웅덩이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쓰러졌다.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왜 좋은 건 다 박민정이 가져가는지, 왜 자기는 자신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녀가 누리는 걸 누릴 수 없는 건지.심하게 다친 이지원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상태로 바닥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김인우의 부하들은 이지원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일부러 힘들게 만든 것이다.그녀는 고통 속에서 하루를 보냈다.얼마나 지났을까, 곧 기절하려는 순간 문이 다시 열렸다.이지원은 본능적으로 빌었다.“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남자가 반짝이는 가죽 구두를 신고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이지원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머리를 조아렸다.“인우 오빠,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내가 이렇게 빌게.”“이지원, 나야.” 마침내 눈앞에 있던 남자가 익숙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지원은 행동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준 오빠, 오빠는...”차마 눈이 멀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말했다.“전 유남준이 아니라 유남우입니다. 저번에 만난 적 있는데요.”그때 이지원은 그를 유남준이라고 생각했다.이지원 역시 눈앞의 남자가 유남준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을 방금 알아차렸다.“남준 오빠 쌍둥이 동생이에요?”“네.”“나한테 원하는 게 뭐죠?”유남우 역시 박민정을 돕기 위해 자신을 처리하러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우리 거래하는 건 어때요?” 유남우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이지원은 유남우의 온화한 태도 속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그를 두려워했다.“무슨 거래요?”김인우의 표적이 되어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그녀는 지금 상황보다 더 나쁜 거래는 없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이 유남준을 떠나도록 도와주면 당신을 구해줄게요.” 유남우는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밝혔다.이지원은 유남우가 왜 이런
“걱정 마세요. 제 아이는 유씨 가문에 들이지 않을 테니. 가능하다면 유남준 씨를 설득해서 빨리 이혼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고영란은 다시 한번 그녀의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걱정 마, 남준이가 기억을 되찾으면 내가 이혼하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고영란은 박예찬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그녀는 하던 일도 멈추고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고영란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박민정 곁을 떠나자 윤소현은 다가와 짐짓 살가운 척 물었다.“괜찮아?”한편으로는 박민정의 입에서 미래의 시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사람들 앞에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다.“괜찮아요.”그런데 박민정이 딱 한 마디로 대답할 줄이야.윤소현은 굴하지 않고 물었다.“아줌마랑 친해지기 어렵지?”“잘 모르겠어요.” 박민정은 단호하게 말했다.윤소현은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냉정할 줄은 몰랐기에 더 가식 떨지 않았다.“박민정, 난 곧 남우 씨와 결혼할 거고 앞으로 유씨 가문은 남우 씨 손에 들어올 텐데 조금 더 나를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어?”박민정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말했다.“전 정말 고 여사님에 대해서는 몰라요. 유남우 씨와 결혼할 사이면 궁금한 것도 그 분께 물어보면 될 것 같네요.”윤소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유남우에게 물어본 적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유남우는 겉으로는 상냥해도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유남우가 왜 자신과 약혼을 하겠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박민정으로부터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한 윤소현은 유남우를 찾으러 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우를 보게 됐다.유남우의 훤칠한 키가 사람들속에서 눈에 띄었고, 그는 와인 잔을 손에 든 채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윤소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꽃꽂이를 하고 있는 박민정을 발견했다.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쁜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유남우의 시선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유남준의 눈만 괜찮았으면 유성혁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박민정에게 치근덕거리지 못했을 것이다.사실 박민정이 처음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결혼식장에서 박민정에게 첫눈에 반했다.보기 드물게 너무 예쁜 여자였다.결혼을 하니까 오히려 다른 느낌이 있었다.“유 선생님, 자중하세요.”박민정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부끄러워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유성혁은 물러서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지금의 유남준은 폐인이야. 당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몰래 내 여자가 된다면 내가 잘해줄게.”박민정은 정말 유씨 가문에 약혼식 준비 중에 사촌의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할 괴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어 그냥 자리를 떴다.그러나 유성혁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가 한 손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며 손을 대기 시작했다.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고 박민정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팔을 뿌리쳤다.“저리 가요!”유성혁은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어디서 깨끗한 척이야? 내가 좋아해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안 그러면 평생 유남준 그 폐인이랑 살아야 하잖아!”이 소동으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하러 왔다.그중에는 도우미도 있었고 먼 친척들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구경만 할 뿐 도와주지 않았다.이제 유씨 가문의 실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유성혁은 아들이 있는 유일한 세대였고 어르신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그에게 밉보이면 국물도 없이 쫓겨날 것이다.여자인 박민정은 당연히 유성혁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몇 번을 거듭한 끝에 결국 그에게 제압당했다.박민정은 이런 상황이 가장 두려웠다. 게다가 모두가 보는 앞이었지만 다들 구경만 할 뿐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유남우도 일이 있어서 부름을 받고 나갔고 유씨 가문으로 오는 거라 정민기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술을 마신 유성혁은 주변에 나서서 박민정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자 더욱 대담하게 굴었고 곧바로 박민정의 옷으로 손을 뻗었다.박민정의 옷이 찢어지려는 순간, 여러 사람이 사
유남우가 말을 하려는데 유남준이 곧장 옆을 스쳐 지나갔다.그는 곧바로 방금 전까지 남아 있던 도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성혁 도련님께서 술에 취해 큰 사모님을 추행했는데, 도련님이 강물에 던져버렸어요.”박민정을 추행했다고?유남우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아무도 안 말렸어요?”도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온화한 유남우를 향해 말했다.“아무도 감히 말리지 못하고 다들 겁에 질려 있었어요.”“소현이는요?”도우미는 머리를 긁적였다. “못 봤나 보네요.”유남우는 단번에 깨달았다. 못 봤을 리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애초에 윤소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약간의 혐오감까지 생겼다.두 사람이 계획하고 있던 약혼 파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못 본 척한다고?...박민정은 유남준을 따라 두 사람이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유남준은 아직 그녀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속 그녀를 안아주었다.“앞으로는 그런 곳에 가지 말고 집에 있어.”박민정은 조금 진정이 됐는지 이렇게 답했다.“고마워요.”오늘 유남준이 오지 않았다면 유성혁은 어쩌면 더 심한 짓을 했을 것이다.유남준은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우린 부부라는 걸 기억해. 네 남편으로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이 말을 들은 박민정은 지난번 유남준이 누군가를 시켜서 자신을 미행하고 촬영한 것을 용서하기로 했다.“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말해줘요. 그렇게 빙빙 돌려서 비꼬듯 말하지 말고.”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남준은 곧바로 답했다.“알았어, 약속할게.”말을 마친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일어나 침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준비를 했다.유남준도 덩달아 일어서며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다.“그래도 거실에서 자요.” 박민정이 말하자 유남준은 다소 무력한 표정으로 문 앞에 멈춰 섰다.한편 얼어붙은 강물에 유성혁은 옷이 벗겨진 채 덜덜 떨며 입술마저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너희들, 내가 다 기억할 거야! 딱 기다려!”
은정숙은 박민정에게 요즘 몸이 많이 좋아졌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이번엔 윤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곳에 있던 간호사는 아이가 잠들었다고 말했다.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자 막 연결된 화면 너머 박민정은 화려하게 꾸며진 아이 방을 보았다.“예찬아?”박예찬은 꼬마 어른처럼 반듯한 정장을 입고 카메라 앞에 나타났다.“엄마, 미안해요. 아까 너무 바빴어요.”“지금 하랑 이모 집에 있어?” 박민정이 묻자 박예찬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렇게 덧붙였다.“정확히 말하면 하랑 이모 아빠가 저한테 집을 선물해 줬어요.”조석천은 예찬이를 유난히 좋아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이제는 아이와 체스를 두는 재미에 푹 빠진 터라 예찬이가 박민정과 통화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석천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예찬아, 누구랑 통화하는 거니? 얼른 와서 할아버지랑 체스 두자.”솔직히 요즘 너무 바빴다.조석천은 그와 체스를 두고 책을 보는 것도 모자라 다른 어르신, 사모님들이 모인 곳에 데려가서 자랑을 하곤 했다.박예찬은 컴퓨터를 닫고 거실로 갔다.조석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이미 지고 있는 장기를 바라보았다.“예찬아, 너 할아버지한테 거짓말한 거 아니지? 듣기로 요즘 휴대폰으로 체스를 둘 수 있다고 들었는데, 휴대폰으로 나와 체스를 둔 거니?”박예찬과 벌써 열 판을 두었지만 그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네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졌다는 것은 정말 창피한 일이었다.“할아버지, 그래도 납득이 안 되시면 다시 한번 해요. 제 몸을 수색하셔도 됩니다.”박예찬은 사실 할아버지에게 양보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가 워낙 예리해서 자신이 일부러 봐주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것이다.체스를 두는 기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경기 정신이 있어야 했다.조석천은 손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기가 사준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다. 휴대폰 하나 들어갈 자리 없었고 체스를 빨리 두는 탓에 커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분명
조하랑은 조석천과 김훈이 단 몇 마디로 자신의 인생 대사를 결정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이제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미리 말하는데 예찬이는 그 사람 아들이 아니에요. 그때 가서 쫓아내도 날 원망하지 마세요.”“쓸데없는 소리. 내일 예쁜 옷이나 사 입고 이만 가 봐. 나랑 예찬이 체스 두는 거 방해하지 말고.”조석천은 딸은 내다 버려도 그만이지만 똑똑한 손자를 제대로 키우고 싶었다.조하랑은 얼굴이 잿빛이 된 채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이 이 사실을 모를까 봐 박민정에게 따로 전화를 걸어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유성혁의 사건으로 박민정은 더는 일을 도우러 가지 않았고 고영란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집안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건이었으니까.유성혁은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실수로 강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박민정은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유남준에게 물었다.“이제 김인우 씨 기억나요?”유남준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했다.“잘 기억이 안 나.”“기억나면 나는 거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건 무슨 말이죠?” 박민정은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보기엔 김인우 씨는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온 마음을 다하는 조하랑이 감정 기복이 심하고 배은망덕한 김인우를 만나면 손해 볼 게 분명했다.“응, 내 생각도 그래.”유남준은 곧바로 거들었다.멀리 김씨 저택에 있던 김인우가 재채기를 했다.그래도 김인우의 친구인 유남준이 자신의 말에 동조할 줄 몰랐던 박민정이 계속해서 말했다.“그럼 하랑이를 괴롭히면 어떡해요?”유남준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조하랑은 박민정의 친구인데 김인우가 괴롭히게 놔둘 그가 아니었다.“왜 그럴 일이 없어요? 그 사람 잘 알아요? 아까는 기억 안 난다면서요?”말문이 막힌 유남준이 곧바로 둘러댔다.“느낌이 그래.”늘 실질적인 능력으로 일을 처리하던 유씨 가문의 책임자가 이제는 직감에 의존하기
유명진은 박민정처럼 참한 여자가 자기 집안으로 시집온 게 안타까웠다.하지만 집안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유남준과 고영란은 집안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이제부터 남준이랑 둘이 잘 지내.”말재주가 없었던 유명진은 진심을 담아 말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유명진이 간 뒤 박민정의 친엄마 한수민과 남동생 박민호가 미리 도착했다.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두 번째 남편 윤석후의 팔짱을 낀 한수민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오늘 딸이 약혼한다는 말을 전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약혼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한수민은 다른 사람들의 축하 속에도 이렇게 조롱했다. “유씨 가문과 결혼하는 건 우리에겐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데 민정이가 감당할지 모르겠네요. 감당하지 못하면 이혼하겠죠?”그런데 그 말이 예언이 되어 그들이 정말 이혼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유남준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조하랑과 박예찬이 오기를 기다렸다.조하랑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는데, 이상하게도 예찬이는 오지 않았다.“하랑아, 예찬이는 어디 있어?”박민정은 조금 걱정이 되었고 조하랑은 등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빠가 자랑하려고 데려갔으니까 잠깐은 못 올 것 같아.”남들에게 예찬이를 자랑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아버지를 너무 잘 아는 조하랑이었다.“참, 너희 집 그분은?” 조하랑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유남준은 보이지 않았다.사실 오늘 이 자리에 그녀는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유씨 가문 같은 막강한 재벌가 앞에서 조씨 가문은 고래 앞의 새우였다.하지만 이제 곧 김인우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덕을 보게 된 것이다.“조하랑 씨 맞죠? 우리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조하랑과 인맥을 쌓으려는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조하랑은 그들을 상대하면서 다소 미안한 듯 박민정을 돌아보았다.박민정이 괜찮다며 가라고 해서야 조하랑은 그 귀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
약혼식이 시작된 후 윤소현은 무대 위에서 가족들한테 감사를 올렸다. 특히 그녀가 엄마 얘기를 꺼낼 때, 한수민의 눈동자는 기대를 품은 채 반짝거렸다.한수민이 앞으로 다가가려 하자 박민정은 그녀를 덥석 잡았다.“유씨 집안에서 오늘 윤소현 친엄마, 정수미를 모셨어요.”약혼식 준비를 도왔으므로 진행 순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은 나름 호의로 한수민한테 귀띰해 주었다.그 말을 듣자 한수민은 얼굴색을 확 달리하였다.윤소현은 어제 분명히 자신한테 정수미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윤소현의 엄마 신분으로 하객들 앞에 설 거라고 했는데, 설마 윤소현이 자신을 속였을 리가...한수민은 박민정이 거짓을 말한 거라 잠시 생각했지만 이윽고 짧은 머리에 빳빳한 제복 차림을 한 정수미가 식장에 나타나자 할 말을 잃었다. 정수미는 윤소현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그녀의 외모는 훌륭한 편이 아니지만 몸에서 풍기는 세련되고 똑 부러진 분위기는 한수민처럼 맨날 호사만 누리는 사모님한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정수미는 국제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가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는 윤소현의 눈에는 온통 숭배와 긍지로 가득했다.평소 한수민을 대하는 건성건성 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인정하는 엄마는 정수미가 유일했으니까.“엄마가 올 줄 알았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정수미를 와락 끌어안았다.무대 위에서 한창 깊은 모녀 정이 연출되고 있는 그 시각, 하객석에서는 낮은 소리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아까 윤소현이 자기 딸이라고 자랑을 잔뜩 늘어놓은 한수민은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윤소현 씨의 아버지가 윤석후 아니에요? 그럼 엄마는 한수민 아닌가요?”“맞아요, 아까도 저희한테 자기가 윤소현 엄마라고 했잖아요.”“알긴 뭘 알아. 한수민은 그냥 소현이 계모야. 아빠 체면을 봐서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거지, 진짜로 엄마인 줄 알았어?”“그럼 어떡해요? 방금 선물을 다 한수민 씨한테 줬는데. 다시 가져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