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은 그를 부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바로 용건을 말했다.“지석이에게 상처 입혔어요?”유남준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거짓말하지 마요." 박민정이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네? 진짜로 때린 거에요?”박민정은 믿을 수가 없었다.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연지석을 때렸고 심지어 중상을 입혔다고?박민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유남준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유남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박민정이 연지석 때문에 자신을 때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비록 아프지는 않지만, 그는 달갑지 않았다.그냥 남자잖아? 때리면 때리는거지. 묻어버리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유남준은 입으로는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민정아, 남자끼리는 갈등이 있는게 정상이야. 게다가 우리는 연적이라 싸우는 게 이상하지 않아.”"그냥 싸움이라니? 민기 씨 말로는 지석이는 아직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했어요."박민정은 화가 치밀어 다시 주먹으로 내리쳤다.유남준은 피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민정이 이렇게 다른 남자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지금 당장 연지석 곁으로 날아가서 그를 죽여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앞으로는 안 할게."하지만 여전히 입은 살아 있었다.박민정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근육이 많아서야 그를 때리는 것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연지석이 그에게 맞아 병실에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고는 이대로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매섭게 꼬집었다.마침내 유남준의 안색이 달라졌다.“민정아, 아파.”그렇게 꼬집는 건 정말 좀 아팠다."그냥 꼬집는 것도 아픈데, 지석이는요?”"걔가 나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걔가 아니었다면 나는 외국에서 죽었을 텐데, 당신은 그때 뭘 했는데요?”"뭘 했냐고요.”박민정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힘껏
집에 돌아온 박민정은 사 온 음식을 윤우한테 요기하라고 건넸다. 그러고는 유남준한테 눈길도 주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유남준은 그녀가 일시적으로 삐쳐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 박민정은 말 한마디 없었다.윤우도 그들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감지하고 신이 나서 어깨춤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엄마 성질을 건드린 모양인데? 쌤통이다, 쓰레기 아빠한테 이런 날이 다 오다니, 하하하!'밥 먹을 때 윤우는 일부러 박민정한테 반찬을 집어달라, 먹여달라 하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녀의 관심이 온통 자신에게 쏠려있다는 걸 유남준한테 과시하듯이 말이다.“엄마, 저 닭고기 먹고 싶은데 너무 멀어. 엄마가 먹여주면 안 돼?”“어, 그래.”박민정은 내내 윤우만 챙겼다. 유남준이 손을 뻗어 음식을 집으려 했다.던 젓가락으로이 몇 번을 집어도이 음식이 나집히지 않아못하고 빈 젓가락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는 불평 없이 묵묵히 밥을 먹었다.식사가 끝나고 온 가족이 TV를 보고 있는데 거실에서는 박민정과 윤우의 말소리만 들렸다.그녀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윤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아저씨도 이젠 알겠죠? 엄마의 영원한 보배는 저예요. 아저씨는 언제 누구한테 대체될지도 모르는 임시용일 뿐이라고요.”가뜩이나 불안한데 윤우까지 한술 더 뜨니 유남준은 더 심란하여 미간을 좁혔다.“그 입 좀 다물어.”“싫은데요!”윤우는 그를 향해 혀를 내밀며 메롱을 했다. 하지만 또 이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엄마 성질을 은 어떻게 건드린 거예요?”웬만하면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순한 성격의 박민정이 화를 냈다는 것에 윤우는 호기심이 동했다.유남준은 일일이 설명해 주기가 귀찮아 눈을 흘겼다.“어린놈이 뭘 안다고 캐물어.”“누가 어린놈이에요, 흥!”윤유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엄마가 쓰레기 아빠를 멀리하기만 하면 그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자리에 바로 앉아 TV를 시청했지만 프로그램들이 하나같이
“그러면 사과하고 배상하고 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씻으러 갈 거니까 이 손 놔요, 어서.”박민정은 가차 없었다. 유남준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놓았지만 손등에는 옅은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그녀가 욕실로 들어간 후, 유남준은 서다희한테 전화를 걸었다.“연지석에 대해 알아봐, 지금 위치가 어딘지.”저편에 있는 서다희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겼다. 설마 설날부터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대표님, 며칠 전에 알아봤는데 연지석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여지를 좀 남겨두는 게 어떨까요?”“사람을 보내서 안전하게 지켜줘, 죽지 않도록.”유남준의 말을 들은 서다희는 너무나 놀랐랍고 잘못 들은 줄로 알아,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네?”“민정이가 연지석의 일에 대해 알아버렸어. 나한테 배상하고 사과하래. 네가 대신 예전에 뺏어왔던 프로젝트 몇 개를 도로 던져줘, 그걸로 배상하고 사과한 셈 치자.”이 정도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건 유남준도 난생처음이다. 그가 착한 자선가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서다희는 이제야 그 원인을 알았다.‘역시 사모님 때문이군.’“알겠어요, 바로 조치하겠습니다.”“할 때 증거를 남겨놓는 걸 잊지 마. 민정이도 알 수 있게끔.”유남준이 마지막에 당부했다. 그가 사과하겠다는 말은 절대 진심일 리 없었다.“네.”...왕년의 섣달그믐날은 모두 은정숙과 함께였지만 올해는 그녀도 없고 임신도 하여, 박민정은 샤워를 마치고는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잠이 든 지 얼마 안 되어 커다란 인영이 방으로 들어와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화들짝 놀란 박민정은 눈을 번쩍 떴다. 어둡고 은은한 무드 조명이 유남준의 얼굴을 비추었다.“어떻게 들어왔어요?”분명히 문을 잠갔는데?유남준은 그녀를 꼭 껴안고 묻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연지석 일은 이미 서 비서한테 말해놨어.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박민정은 그가 왜 연지석을 죽음의 변두리까지 몰고
하지만 박민정은 윤우까지 데려갔다가 유씨 집안 사람들한테 두 아이가 그 집안 핏줄임이 들키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특히 고영란은 예찬이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하여 그녀가 막 거절하려고 하는 그때, 윤우가 한발 먼저 재빠르게 대답했다.“좋아요, 아저씨. 그런데 날 집에 데려가면 이젠 아저씨가 제 새아빠가 되는 거예요?”윤우는 호기심으로 어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새아빠라는 단어에 유남준의 낯빛이 복잡하게 변했다.그러거나 말거나 윤우는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새아빠, 우리 새아빠 집에 가요.”한창 우유를 마시고 있던 박민정은 입안의 우유를 뿜어낼 뻔하였다.“윤우야, 막 부르면 안 돼!”그제야 윤우는 장난기를 거두고 말했다.“엄마, 우리 아저씨랑 같이 그 집으로 가요. 매일 여기 있으려니 너무 심심해요. 의사 아저씨도 나한테 자주 밖으로 나가 기분 전환하라고 그랬어요. 그래야 아픈 것도 덜 하다고요.”윤우가 자신의 병에 대해 얘기하며 요구할때 박민정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알았어. 가자, 그럼.”유남준이 이대로 마음이 변치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두 아이의 신상에 대해 그한테 알려줄 날이 올 것이고,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세 식구는 옷을 갈아입고 별장에서 나왔다.그들을 데리러 온 이한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저번에 왔을 때는 경황이 없어 윤우를 찬찬히 살피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윤우는 유남준의 어릴 때 모습과 너무나 닮아있었다.기사한테 차 문을 열게 하여 세 사람이 차에 타고난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고영란이 최근에 몰래 조사하고 있는 누군가가 설마 이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아침에 그의 딸 이혜림한테서 온 집에 돌아오고 싶다는 메시지를 상기하며 손에 든 휴대폰을 더 꽉 쥐었다. 그리고 결심을 내렸다.‘아빠가 어떻게든 널 돌아오게 만들 거야.’...차 안에 앉은 윤우는 컨디션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윤우는 유씨 집안에
밖에 서 있는 박민정과 윤우는 정말로 한 쌍의 아름다운 모자였다. 이목구비가 또렷한엄마와 귀엽고 깜찍한 만찢남 아들.친척 중 어떤 사람은 슬그머니 나와 둘을 살펴보기까지 했는데, 아이가 정말 유남준을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그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감지한 윤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역시 쓰레기 아빠 집에는 좋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윤우는 박민정을 올려다보며 얘기했다.“엄마, 나 오줌 마려워.”“그래? 엄마가 화장실로 데려다줄게.”박민정은 윤우를 데리고 근처 화장실로 갔고, 도착하자 윤우는 말했다.“엄마는 먼저 돌아가서 아저씨를 기다려. 아저씨가 나와서 우릴 못 찾으면 어떡해. 내가 길 아니까 이따 엄마 찾아갈게.”화장실이 별로 멀지도 않은 것 같아 박민정은 승낙했다.“그러면 나와서 엄마를 못 찾겠으면 전화해, 알았지?”윤우와 예찬이는 모두 아이용 스마트 워치를 착용하고 다녔다.“응, 알겠어.”윤우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다른 한편, 홀 안에는 유남준의 친척들이 대부분 와 있었지만 유독 유남우만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유남준의 사촌 형 유성혁도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 유남준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전에 박민정을 희롱하다가 유남준에 의해 차가운 강물에 던져져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던 그 일이 있고 난 뒤, 최현아는 그와 이혼하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쳤지만 그가 온갖 다짐을 하고 손이 발이 되게 빌어서야 이혼소동을 가까스로 무마하게 되었다.그 생각에 유성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또한 박민정이 어떤 아이와 같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최현아한테 얼른 나가보라고 했다.최현아가 나가보니 무심하고도 도도한 표정의 박민정이 홀로 바깥에 서 있었다. 그녀의 외모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남편이 한때 그녀한테 홀렸었다는 생각만 하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번뜩이면서 거만한 얼굴로 하이힐
한낱 모델일 뿐인 최현아의 시어머니는 이 집안에서 존중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영란은 달랐다. 그녀의 친정은 KC 그룹이고 오빠와 동생들은 정재계는 물론 불법 조직까지 주무르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어, 그들앞에서 자신은 개미 목숨과도 다름없었다. 최현아는 고영란을 시어머니로 두지 못한 것이 너무 한스러웠다. 그랬다면 자신의 아들유지훈은 진작에 유씨 집안 지분을 갖고도 남았을 것이다.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최현아는 예의 바르게 고영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곁에 있는 윤소현을 향해서도 미소를 지었다.윤소현도 그녀를 보며 방긋 웃었다.“형님.”“그래.”최현아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인사를 받고는 떠났다.그녀가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윤소현은 박민정을 싫어하는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나중에 최현아와 몰래 관계를 잘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윤우가 보이지 않자 고영란은 물었다.“너랑 같이 온 그 애는 어디 갔어?”“윤우는 화장실에 있어요.”박민정이 대답하자 고영란은 화장실이 있는 쪽을 기웃거리며 지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화장실로 들어간 윤우는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와 홀로 들어갔다.유씨 일가 친척들이 워낙에 많은 데다 아이를 데려온 친척들도 꽤 되어 사용인은 윤우를 보고도 막지 않았다. 윤우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홀 안으로 들어갔고, 사람들 속에서 쓰레기 아빠가 한창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한테 꾸지람을 듣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저 사람이 내 증조할아버지겠지? 저 할아버지도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닐 거야.”윤우는 작게 중얼거리며 비싼 정장 차림으로 유명훈 곁에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는 유지훈한테로 시선을 돌렸다.유지훈의 자신만만하고 우쭐대는 모습은 마치 그가 이 집의 주인인 것만 같았다.“쪼그만 게.”전에 예찬이가 유지훈에 대해 얘기해 준 적이 있었다. 예찬인 척 이 저택에 왔을 때도 지훈이와 마주쳤었다. 윤우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할머니와 할어버지는 보
윤우는 사실 그리 더럽고 지저분한 일을 할 애가 아니었다. 그저 유남준의 바지에 물을 묻혔을 뿐이다. 유남준의 바지를 닦는 척하며 윤우가 말했다.“엄마가 그러는데 새아빠 노릇은 원래 친아빠보다 하기 힘든 거래요.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잘 닦아드릴게요.”모두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고 늘 엄숙한 얼굴로 웃음을 아끼던 유명훈도 웃음을 참느라 코가 벌렁벌렁했다.그러나 여전히 이성은 남아있었다.‘저 애는 누굴까, 남준의 아들인 건가?’유남준한테 물어보려는 그때, 곁에 앉은 유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먼저 물었다.“예찬아, 너 방금 우리 삼촌을 뭐라고 불렀어?”예찬이라고?윤우는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커다란 눈동자로 유지훈을 보며 말했다.“난 예찬이 아니야. 연윤우라고 해.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같이 있기로 했으니까 이제 나의 새아빠가 되는 거야.”지훈이는 윤우의 말을 듣고 더 어리둥절했다.예찬이와 똑같이 생겼는데 왜 예찬이가 아니라고 하는 거지?자세히 보니 앞에 있는 아이와 예찬이가 유일하게 다른 점은 낯빛이 더 창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찬이처럼 정색한 말투가 아니었다.유명훈은 둘의 대화를 듣고 더 의문이 들었다.“네 엄마가 누구냐?”“박민정이에요, 할아버지.”윤우가 대답하자 유명훈의 지팡이를 쥔 손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그럼 넌 누구야? 네 친아빠는 또 누구고?”윤우가 재차 입을 열려는데 유남준은 그의 덜미를 번쩍 들었다.“얘를 밖에 내보낼게요.”“거기 서!”유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우를 향해 걸어왔다.이때 유남준한테 잡힌 윤우가 겨우 고개를 들며 말했다.“새아빠, 나절로 갈 수 있어요.”드디어 윤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된 유명훈은 아이의 얼굴이 유남준의 어릴 적 모습과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너... 너 대체 누구의 아이야?”윤우는 속으로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전 연지석과 박민정의 아들이에요.”유명훈이 미간을 좁히며 캐물었다.“연지석은 또 누구야?”“연지석은 이 세상에서 제일 대단하.
유씨 집안이 오늘처럼 떠들썩한 적이 없었다.지훈이는 조그마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도끼눈을 하며 윤우를 가리켰다.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최현아가 아이에게 저런 말을 했을 줄이야,하며 혀를 끌끌 찼다.난감하여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최현아는 얼른 아들을 꾸짖었다.“지훈아, 너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엄마가 언제 그랬어! 엄마는 예전에 남준 삼촌의 아내가 집에 없으니까 아이가 못생긴다는 얘기였지.”하지만 지훈이는 고작 몇 살짜리 아인지라 어른들의 빙빙 돌려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지않아 최현아의 말에 대뜸 반박했다.“아니야, 엄마가 전에 삼촌이 정상이 아니라고 아이를 못 낳는다고 그랬어!”최연아는 당장 달려가서 아들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네가 잘못 들은 거야!”애지중지 키워진 유지훈은 버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훈한테 쪼르르 달려가더니 그의손을 잡고 흔들며 떼를 썼다.“증조할아버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도 모르는 저 애 어서 내쫓아요. 분명히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에요. 나쁜 놈, 사기꾼이에요, 저랑 집안 후계자 자리를 뺏으려고 온 거라고요.”말을 마치자마자 또 사납게 윤우를 삿대질하며 소리쳤다.“이 집안 후계자는 나야, 넌 나랑 뺏을 생각 마!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여버릴 거야, 못 믿겠으면 해봐, 어디!”윤우는 입이 막혀있었지만 지훈이가 하는 짓을 보고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예찬이가 한 말이 맞았다. 지훈이는 그냥 딱 네 살 수준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꼬마였고,그들 쌍둥이와 싸울 상대가 전혀 아니었다.윤우는 지훈이의 말을 신경도 안 썼지만 곁에 있는 어른들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유명훈은 지훈이의 말에 멍해졌다. 평소 아이가 장난을 많이 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후계자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것은 네 살짜리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순간 화가 난 유명훈은 유성혁 내외를 쏘아보며 역정을 냈다.“너희들 대체 애 교육을 어떻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