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Author: 윤지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

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

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

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

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

“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

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

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

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

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

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

보청기도 꼈고 약도 먹었는데 왜 여전히 아무것도 안 들릴까?

유남준이 전화 와서 이혼하러 갈 날짜를 정할 때도 지금처럼 안 들릴까 봐 너무 걱정됐다.

박민정은 택시 타고 근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가 기초적인 검사를 해봤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외이도에 피가 말라붙어버렸다.

그날 재활 치료를 받고 나서야 청력이 겨우 회복됐다.

“어떻게 된 거죠? 병을 앓은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박민정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난청이었어요.”

의사는 이제 스무 남짓한 꽃다운 소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안에 들어올 때 그녀가 이런 병에 걸렸다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의사는 애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민정 씨,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 병 이대로 가다가 정말 청력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땐 보청기를 쓰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에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목에도 큰 돌멩이가 낀 것처럼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자 의사가 문 쪽을 바라봤다.

“혼자 오셨어요? 가족이나 친구는 함께 안 왔어요?”

가족?

그녀를 싫어하는 엄마와 다 늙은 영감에게 시집보내려는 남동생, 그리고 3년 동안 쭉 그녀를 증오해 온 남편 유남준까지, 한 사람씩 뇌리를 스치더니 결국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었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빠 못 가겠어. 어떻게 우리 민정이 두고 떠나?”

그때 박형식은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에 각종 의료기기를 꼽고 있었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지만 한사코 눈 감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면 민정이에겐 더 이상 가족이 없으니까...

박민정은 쓰디쓴 마음을 뒤로한 채 결국 의사에게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

병원을 나서니 밖에 또다시 가랑비가 내렸다.

진주시는 올해 왕년보다 비가 더 잦았다.

병원 문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닐었는데 유독 박민정만 혼자였다.

그녀는 빗속을 정처 없이 걸었다.

앞으로 청력을 잃을 수 있단 생각에 그녀는 시골로 내려가는 차표를 사서 줄곧 자신을 돌봐왔던 가정부 은정숙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어느덧 밤 9시가 다 되어갔다.

박민정은 오래된 벽돌집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며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동안 유남준을 챙기느라 매번 성급하게 은정숙을 뵙고 왔다.

노크할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따뜻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은정숙은 그녀를 보자 온화한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민정아...”

은정숙의 따스한 미소를 본 순간 박민정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두 팔 벌려 은정숙을 꼭 끌어안았다.

“아줌마...”

은정숙은 건강상의 이유로 여태껏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다.

박민정에게 그녀는 친엄마보다 더 가까운 존재이다.

은정숙은 마치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감지했는지 가볍게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민정이 무슨 일 있어?”

박민정은 나약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저번에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말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민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아줌마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뵈러 왔어요...”

은정숙은 그녀가 말하길 꺼리니 더 캐묻지도 않았다.

“아줌마도 우리 민정이 많이 그리웠어.”

은정숙은 온몸이 흠뻑 젖은 그녀를 얼른 집안으로 데려와 따뜻한 물에 샤워시켰다.

그날 밤.

박민정은 은정숙의 품에 안겨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정숙은 그녀를 안고 보니 너무 말라서 뼈밖에 안 남았다는 걸 알아챘다.

뼈가 다 만져지는 민정의 등에 손을 올려놨다가 저도 몰래 파르르 떨려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민정아, 남준이는 지금도 잘해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남준 석 자를 듣는 순간 박민정은 목이 꽉 메었다. 늘 그랬듯 아줌마를 속이며 남준 씨가 엄청 잘해준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려 했지만...

아줌마도 결코 어리석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는 저 자신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을 속일 필요가 없다.

“남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만 놓아주려고요. 남준 씨랑 이혼할 생각이에요.”

은정숙은 화들짝 놀라서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때 박민정은 유남준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겠다고 그녀에게 수없이 말했었다.

은정숙은 아무 말 없었고 박민정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줌마, 나도 아줌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영원히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외롭게 지내는 것.

유남준 말로 평생 외롭게 늙어가는 것 말이다.

사랑받을 수 있다면 누가 영원한 고독을 택하겠는가?

은정숙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바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인생은 아직 길어. 남준이를 떠난대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널 엄청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삶을 살 거야.”

박민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에 윙윙대는 소리가 아줌마의 다독임을 그대로 뒤덮어버렸다.

짝사랑만 십몇 년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런 그녀를 대체 누가 또 사랑해 줄까? 사랑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눈물이 흘러내려 이불을 축축이 적셨다.

다음날.

박민정은 비몽사몽으로 눈을 뜨더니 왜 여기 있는지 어리둥절해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6화

    “왜 그래요? 입맛 없어요?”박민호가 걱정스럽게 묻자 최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 것 같아요. 먼저 한잠 자고 밥은 점심쯤에 먹을게요.”“그래요. 얼른 한잠 자요.”박민호가 서둘러 말했다.자리에서 일어선 최민아는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밀려와 거의 쓰러질 뻔했다.그녀는 단지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세를 바로잡은 뒤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침대에 누운 최민아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박민호는 익숙하게 집 안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마쳤다.예전에는 정리나 설거지 같은 건 손도 대지 않던 그였다.손에 물 한 방울 묻히기 싫어했던 그가 이렇게 된 건 다 최민아 덕분이었다.처음엔 당연히 하기 싫어했지만 최민아는 단호했다.말 안 들으면 현관문에 세워두거나 설거지 안 하면 잠도 제때 못 자게 했다.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박민호도 차츰 익숙해졌고 이제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게 되었다.정리를 마친 박민호도 잠깐 쉬기로 했다.그들의 일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이었기에 낮에 잠을 보충하는 것은 필수였다.박민호가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 위에서 최민아가 잠꼬대하기 시작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꼭... 제가 꼭 고쳐드릴게요. 제발... 저 두고 떠나지 마세요.”흐릿하게나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박민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최민아를 바라보았다.“민아 씨.”박민호가 조용히 불렀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녀의 얼굴은 불에 덴 것처럼 새빨갰다.‘전기난로가 너무 강했나? 난 딱 적당한 것 같은데?’박민호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그녀의 이마는 펄펄 끓을 정도로 뜨거웠다.‘난로 때문이 아니야!’박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열 나잖아요!”그가 이마에서 손을 떼려는 순간 최민아가 손을 들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아빠, 엄마... 가지 마세요.”최민아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자 그는 순간적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5화

    “그럼 지금 볼 수 있을까요? 보고 싶어요.”진서연은 약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정민기는 병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아직 입원 중이라는 걸 진서연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요. 저녁에 화상 통화해도 괜찮을까요?”정민기가 다정하게 물었다.진서연도 더 이상 어리광 부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좋아요. 저도 이제 일해야 해요. 그리고 보스한테도 민기 씨 괜찮다고 말씀드려야 해요. 보스도 저처럼 많이 걱정하셨거든요.”정민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으로 통화를 종료했다.진서연은 곧장 박민정에게 정민기가 며칠 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이유를 이야기해 주었다.박민정도 처음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지만 상황을 파악한 뒤 진서연에게 말했다.“이제는 정말 안심해도 되겠네?”진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네. 이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최근 며칠 동안 진서연은 제대로 잠도 못 자며 지냈다.“그런데 좀 고민돼요. 보스, 제가 민기 씨한테 너무 부족한 사람 아닐까요?”진서연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전에는 정민기와 자신이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정민기는 이제 정씨 가문의 후계자이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집안의 딸일 뿐이었다.“서연아, 어울리고 말고는 집안 환경이 다가 아니야. 진심으로 서로를 좋아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거야.”박민정의 말에 진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됐어. 이제 걱정 내려놔.”박민정이 덧붙였다.진서연은 요즘 들어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걱정이 많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보스, 정말 감사합니다.”“우리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눈이 펑펑 쏟아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며 처마 위며 눈이 두껍게 쌓였다.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또 다른 도시에서 박민호가 전기난로를 하나 사 들고 돌아왔다.최민아는 어젯밤에 돌아온 후 아직 자고 있었다.박민호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 전기난로를 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4화

    “때가 되면 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돼 버렸네요.”정민기의 말에 진서연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정씨 가문의 후계자면서 왜 우리 보스 경호원을 했던 거예요?”정민기는 한동안 침묵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저는 사생아예요. 후계자 자격을 얻게 된 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형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에요.”진서연은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그래서 처음에 제 정체를 숨겼던 거예요. 서연 씨가 제 출신 때문에 저를 싫어하게 될까 봐.”사생아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정민기는 어릴 적부터 그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정씨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정민기는 생계를 위해 위험한 일들을 하며 살아야 했다.그러다 운 좋게 연지석을 만나 그의 곁을 따르게 되었고 박민정의 경호원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조용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렸다.그런 안정감 때문에 가문의 암투를 잠시 잊고 있어 돌아갔을 때 형의 거짓된 모습에 속아 넘어갈 뻔했던 것이었다.진서연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제가 사생아라고 싫어할까 봐 일부러 숨긴 거라고요?”정민기는 대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그러자 진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솔직하게 얘기해 줄게요. 저 사실 남자 얼굴 봐요. 저는 민기 씨 얼굴이 좋아요. 그리고 몸매도요... 사실, 그냥 몸이 좋아서 반했던 거예요.”직설적인 진서연의 말에 정민기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마음속의 짐이 많이 덜어진 기분이었다.‘어쩌면 이 모습 때문에 내가 서연 씨를 좋아하게 된 걸지도...’진서연은 단순하고 솔직해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마음을 재지 않아도 됐다.진서연과 함께 있으면 정민기는 마음이 편했다.“그런데 말이에요...”진서연이 이어서 말했다.“뭐요?”정민기가 긴장한 듯 물었다.“이제 자격지심 가져야 할 사람은 저 아닐까요? 민기 씨는 정씨 가문 후계자고 저는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잖아요.”진서연은 자신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3화

    “마음대로 해봐요.”고영란이 자리를 뜨려 하자 유지욱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그동안 두 아이 키우느라 고생 많았어.”과거의 유지욱은 아이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그는 집에 가정부도 있으니 육아가 그리 힘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두 아이가 다 컸어도 여전히 걱정거리가 많았고 그제야 그는 엄마 노릇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영란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밖에 나오자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고영란의 뒤를 따르던 집사가 급히 우산을 들어 바람을 막아주려 했지만 고영란은 고개를 저으며 손짓했다.“됐어. 이 정도 바람쯤은 굳이 막지 않아도 돼.”집사는 조용히 우산을 내렸다.찬 바람을 그대로 얼굴로 맞으며 걷는 고영란의 마음속은 오히려 묘하게 평온해졌다.그녀는 오랜 세월 유씨 가문에서 묵묵히 헌신해 왔다.하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고 남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지금 와서야 유지욱이 조금 변한 듯해 보였지만 고영란에게 그 변화는 너무 늦어버린 일이었다....유남우의 스캔들 기사는 결국 덮지 못했다.다음 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박민정도 그 기사를 봤지만 특별히 놀라지는 않았다.그녀는 유남우가 하루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기만을 바랐다.그때 진서연이 다가와 기사를 보더니 말했다.“기사에 나온 저 여자 말인데요 아침 일찍 교통사고 났대요. 지금 병원에 실려 가서 응급실에 있다고 하던데 살아는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박민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잘 몰라요. 인생이란 게 늘 예측 불가잖아요.”박민정은 더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진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보스, 혹시 정민기 씨한테서 전화나 문자 같은 거 받은 거 있어요?”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아직 아무 연락도 없었어.”그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2화

    호텔 방 안, 유남우는 침대에 반쯤 기대 누워 있었고 그 앞에는 한 여자가 울고 있었다.온몸이 멍투성이인 여자는 덜덜 떨며 애원했다.“둘째 도련님... 제발 저 좀 놔주세요.”유남우는 지루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나른하게 말했다.“오늘 있었던 일, 다른 사람 귀에는 들어가지 않길 바라.”여자는 순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곧장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이제 나가도 돼.”여자는 얼른 바닥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고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처음에 그녀는 돈줄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유남우는 생각과 달랐다.그녀는 후환이 두려워 유남우가 술에 취한 틈을 타 다른 사람을 시켜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찍게 했다.호텔 밖으로 나온 그녀는 다급하게 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사진 절대 유포하면 안 돼!”“어? 왜 이제 말해? 이미 언론사에 다 넘겼는데?”상대방의 말에 그녀는 핏기가 가셨다.“미쳤어? 진짜 나 죽일 셈이야?”전화를 끊은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켰다.인터넷에는 이미 유남우와 함께 찍힌 사진이 기사로 올라와 있었다.그 순간 그녀는 더는 진주시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짐을 챙기고 택시를 잡아 공항으로 향했다.같은 시각 유남우는 여전히 호텔 방 안에 있었다.그의 눈은 공허하게 떠 있었다.그때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아버지 유지욱에게서 온 연락이었다.[남우야, 기사는 어떻게 된 거야? 그 여자는 또 누구고?]유남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기사?’그는 포털 사이트를 열어 헤드라인을 훑어보았다.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뉴스를 발견했다.핸드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이 여자, 정말 미친 거 아냐?’오늘 그는 술에 취할 생각으로 바에 가 자신이 다른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그때 한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는 그 여자와 함께 호텔로 들어왔다.하지만 그는 곧 그 여자에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2061화

    반사적으로 손을 빼낸 홍주영은 하민재의 눈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안 될 것 같아요. 그래도... 결혼하고 나서 같이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하민재는 겁먹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뒀다.“그래요. 주영 씨 의사 존중해야죠. 일도 힘들었을 텐데 얼른 쉬어요. 저는 제가 알아서 잘게요.”홍주영은 고개를 저으며 이불을 펴주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그녀가 떠난 뒤 하민재는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연지석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왜 전화 안 받아?]밥 먹을 때 홍주영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두어 연지석의 연락을 제때 받지 못했다.그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형, 무슨 일이야?”“왜 이제야 전화 받아?”연지석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방금 들어왔어. 핸드폰을 한쪽에 두고 있어서 제때 확인을 못 했어.”하민재의 답에 연지석은 그제야 안심하는 듯했다.“정민기 쪽 일은 이번에 네가 아니었으면 힘들 뻔했어. 앞으로 네가 필요로 할 때 정씨 가문에서 뭐든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 거야.”“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말이야.”연지석의 말에 하민재는 담담하게 답했다.정민기는 표면적으로는 연지석이 고용한 경호원이었지만 사실 세 사람은 친구였다.“그래.”연지석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 하민재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형, 혹시 나중에 진주시에 다시 올거야?”연지석은 한참 침묵을 유지하고 나서야 하민재의 질문에 답했다.“네가 결혼할 때에는 가야지.”“그럼 다행이고. 시간 될 때 자주 내려와. 그런데...”하민재는 말을 흐리며 옆방을 슬쩍 바라보다 오랜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결혼을 무사히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그게 무슨 말이야?”하민재의 뜻을 눈치챈 연지석이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혹시 홍주영 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연지석은 속으로 안타까워했다.자신이나 하민재나 좋아하는 여자가 하필이면 다 유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