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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윤지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

“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

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불임 치료...

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

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

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

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

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오늘...”

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골프장.

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

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

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

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

“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

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

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

“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

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남준의 절친으로서 그는 박민정을 너무 잘 안다. 가녀린 척, 착한 척만 해대면서 남준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천한 년!

이혼할 수 있다면 진작 했겠지, 뭣 하러 3년이나 버텼을까?

“그 귀머거리가 해주겠대?”

김인우의 물음에 유남준의 두 눈이 확 어두워졌다.

“걔가 먼저 하자고 했어.”

김인우가 하찮다는 듯이 웃었다.

“홀리는 수작이네. 이런 여자들 나 너무 많이 봐왔어.”

그는 또다시 배시시 웃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준아, 오늘 내가 이벤트 하나 준비했는데.”

유남준이 의아해할 때 김인우가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연핑크 색 운동복 차림에 예쁘게 치장한 이지원이 유남준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곧장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고 김인우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이만 빠질게.”

그가 떠난 후 이지원은 유남준에게 함께 좀 걷자고 제안했다.

골프장을 나서니 한때 다녔던 두 사람의 대학교가 저 앞에 보였다.

남자를 잘 아는 이지원이기에 박민정 얘기를 꺼내지 않고 둘만의 추억을 되새겼다.

“오빠 이 길 기억나요? 전에 우리 사귈 때 자주 걸었었잖아요. 그때 오빠가 내 손 꼭 잡고 영원히 걸어가자고 했는데.”

여기까지 말한 이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남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계속 내 손 잡고 걸어갈 수 있어요?”

손이 닿은 순간 유남준이 본능적으로 피했고 이지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나간 일은 이젠 기억 안 나.”

공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일하기까지...

유남준에겐 그저 인생에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일 뿐 미션 수행과 별다를 게 없었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이지원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아직도 나 원망해요? 그땐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빠 떠날 생각 없었다고요. 나 오빠 사랑해요, 아주 많이... 이 몇 년 동안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아요? 우리의 추억을 회상하며 더 우수해져야지, 더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와서 오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야지 하면서 수없이 되뇌었다고요.”

유남준의 정교한 눈썹이 문득 일그러졌다.

“난 이미 결혼했어.”

“알아요, 민정 씨가 오빠랑 이혼할 거잖아요.”

이지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를 내게 돌려줘서 민정 씨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저도 몰래 팔을 벌려 유남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거 알아요? 나 민정 씨 너무 미워. 진짜예요. 민정 씨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갈라져 있은 거잖아요.”

사람들은 흔히들 지난 일을 잊는 듯싶다.

이지원이 애초에 먼저 유남준과 헤어지고 박민정이 그 후에 유남준과 약혼했다. 이지원은 이 일을 깜빡하고 있었다.

박민정, 박민정...

유남준의 머릿속에 그녀의 온화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울먹이며 유남준에게 물었다.

“남준 오빠, 나 안아줄 수 있어요?”

하지만 바로 그때 박민정의 남동생 박민호가 두 사람의 정략결혼 조건을 전부 무너뜨리고 유남준이 박씨 일가에 준 돈과 박씨 일가가 유씨 일가에 준 모든 것까지 본인이 통째로 삼켰다.

하여 유남준은 매정하게 돌아서며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박민정의 가여운 모습에 유남준은 저도 몰래 이지원을 뿌리쳤다.

이지원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김인우가 재빨리 달려왔고 그녀도 그제야 눈물을 멈췄다.

김인우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여전히 수중의 서류를 유남준에게 건넸다.

“남준아, 이거 봐.”

펼쳐보니 재산양도 협의서였다.

“민정 씨가 변호사 통해서 보내온 거야. 너희 두 사람 3년 동안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이래.”

보상?!

김인우는 본인이 말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위자료를 얻어내려고 급하게 집 나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웬일인가?

유남준도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박민정이 재산을 전부 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럴 수가!

맨 마지막에 적힌 재산양도 금액 100억을 본 순간 실소가 새어 나왔다.

‘박민정, 너 대체 날 뭐로 본 거야?’

“고작 100억으로 박씨 가문을 내 손에서 빼내려고? 이 돈이면 내가 용서해 줄 거라고 여긴 거야?”

유남준은 김인우와 이지원 앞에서 대놓고 맹비난을 해댔다.

김인우도 그제야 알아채고 따라서 피식 웃었다.

“귀머거리가 종일 무고한 척하더니 몰래 100억이나 숨겨뒀네. 걔 남동생이랑 밑 빠진 독 같은 걔네 엄마는 이 사실 알아?”

옆에 있던 이지원은 김인우와 유남준이 박민정을 능멸하는 걸 빤히 지켜봤다.

남준 오빠가 민정이를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그 둘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으니... 하지만 인제 보니 결혼 3년이 아니라 평생을 가도 유남준처럼 우수한 남자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박민정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다.

박민정은 아예 그녀의 라이벌로 될 자격이 없다.

...

그 시각 어두컴컴한 모텔 안.

박민정이 비몽사몽 눈을 떴는데 머리가 엄청 아프고 주위가 유난히 조용했다.

병세가 악화하였다는 걸 그녀는 바로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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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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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윤
단체로 한 사람을 욕하네...미친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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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박민정은 증명해 냈다. 난청이라도 피아노, 춤, 노래 모두 그녀는 정상인보다 모자라지 않았다.이 기사는 마치 빛 같았다. 연지석은 그렇게 천천히 일어설 수 있었다.연지석이 자세하게 말하는 그 빛 났던 순간들은 박민정 본인도 잊기 직전이었다.연지석은 그녀를 묵을 곳으로 데려다주었다.박민정은 웃으면서 그한테 말했다.“고마워. 나도 원래의 날 잊기 직전이었어.”연지석은 그녀와 밥 먹으러 갔다.하루 종일 함께 있으면서도 그는 섬세하게도 박민정이 결혼한 후의 일들은 묻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날짜를 확인해보니 이혼이 예정된 5월 15일과는 열흘 좀 넘게 남아 있었다.한수민과의 약속이 문득 생각이 났다.그녀는 어느 아침, 돌아간 아빠를 보러 갔었다.돌아가신 아빠의 묘비 앞에서, 자상한 사진 속의 아빠를 보며 박민정은 목이 메왔다.“아빠. 보고 싶어요.”여린 바람이 가볍게 박민정의 볼을 스쳤다.그녀는 코끝이 시렸다.“아빠. 만약 지금 아빠를 보러 가면 무조건 저한테 화내시겠죠?”그는 묘비에 붙은 나뭇잎을 하나하나 떼여냈다.“저도 제가 조금 더 강해야 한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죄송해요...”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박민정은 발걸음을 옮겼다.그녀는 떠날 때 유골함을 샀다.그러고는 사진관에 가서 일하는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 속에서 흑백사진을 찍었다.이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그녀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넋을 놓았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은정숙 아줌마였다.“민정아. 요새 어떻게 지내?”박민정은 은정숙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잘 지내요.”은정숙은 한숨을 내쉬고는 잔소리했다.“누가 너더러 나한테 몰래 돈 보내랬니? 그 돈, 나는 필요 없다. 뒀다가 너 써. 나중에 사업 같은 거 할 때나...”지난 몇 년간, 박민정은 몰래 그녀에게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시골 사람이다 보니 그리 많은 돈을 쓸 일도 없었고 모두 저축해 두고 있었다.전화 저편에서 은정숙의 관심 어린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4화

    이지원은 인터뷰를 마친 후 한수민을 찾아갔다.그리고 한수민과 박민정 동생이 600억을 위해 박민정을 늙은이에게 시집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대답이 없자 이지원은 말을 얹었다.“민정 씨 어머니 말로는 민정 씨가 먼저 600억을 요구했다더라고요.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그리고 아직 두 분 숙려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정식으로 결혼하는 대신 식만 올리기로 했다고요.”...박민정은 엄마와 동생이 자기 의견은 모조리 무시한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신혼을 준비 중인 건 꿈에도 몰랐다.한수민은 그녀가 절대 죽을 용기도 없고 절대 죽지 못하리라 생각했다.어릴 때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떠나기를 선택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도 같을 것으로 생각했다.동생인 박민호는 진즉에 그 600억을 받아서 새로운 회사를 준비 중이었다. 그는 박민정에게 단 조금의 죄책감도 없었다.그리고 이날, 박민정은 한수민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최 사장님이 좋은 날짜 받아오셨어. 이번 달 15일이야. 나흘 동안 잘 준비해서 시집 가면 돼. 이번에는 꼭 이 남자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알았지?”박민정은 이 두 메시지를 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15일. 기쁘고 즐거워야 할 날이었다. 그녀가 유남준과 이혼을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려는 날이기도 했다. 박민정은 자신이 또 잊을까 봐 이날을 노트에 기록해 뒀다.그리고 그녀는 친필로 유서를 써 내렸다.필을 들었지만 뭘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에 그녀는 윤정숙과 연지석에게 말을 남겼다.다 쓴 뒤 그녀는 유서를 자신의 베개 밑에 넣어뒀다.사흘 뒤.14일에는 비가 크게 내렸다.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놨는데 온종일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모두 한수민이 걸어온 전화였고 그녀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내일이면 결혼식이니 그녀더러 집에 들러 최 사장에게 시집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박민정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새로 맞춘 붉은 드레스를 입고 예쁘게 화장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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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82화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81화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80화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9화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8화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7화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6화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5화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74화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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