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내가 언제 당신을 저주했다고 그래?”박민정이 죽길 원하는 사람이 단순히 저주만 할 리 없었다.“남준 씨가 보낸 꽃은 하얀색과 노란색이더군요. 그런 꽃들을 집 문 앞에 배열해 놓는 건 저더러 죽으라는 뜻이 아닌가요?”박민정은 임신해서 그런지 감정 기복이 심했다. 하지만 하얀색 꽃과 노란색 꽃은 제사를 지낼 때 많이 사용되는 꽃이니 화가 날 법도 했다.유남준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고 박민정은 화가 솟구쳐 올랐다. 예민해서 호의를 오해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박민정은 민수아한테 물었다.“수아야,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걸까?”민수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니, 안개꽃은 그렇다 쳐도 누가 국화를 선물로 준다고 그래!”“화내면 나만 손해야. 됐어, 신경 쓰지 않을래.”박민정은 심호흡하면서 어릴 적 우울증을 진단받았을 때 의사 선생님이 말한 대로 천천히 화를 삭였다. 박민정은 박윤우를 먼저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서 유남준한테 따질 생각이었다.정민기는 별장 앞에 차를 대기시켰고 박민정은 박윤우를 차에 태우면서 당부했다. 박윤우는 들어가려는 박민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엄마, 아빠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니까 화내지 마.”“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박민정은 박윤우를 달래며 손을 흔들었고 차가 멀어질 때쯤, 유남준한테 전화를 걸었다.“서 비서가 곧 갈 거야.”조금 전 유남준은 서다희한테 당장 박민정의 별장으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했었다.“서 비서가 여길 왜 오는데요? 또 이혼서류에 사인하라고 보낸 건가요?”“어제 일은 내가 당신을 오해했어.”유남준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당신이 아이들을 잘 보살피고 지금처럼만 있어 준다면 이혼할 생각 없어.”몸살이 다 나은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고 예전에 어쩌다가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유남준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문제의 화살을 박민정한테 돌리면서 자신과는 아무 상관
서다희가 박민정을 향해 말했다.“죄송해요, 사모님. 이 꽃들은 대표님께서 어젯밤에 저한테 부탁한 거예요.”박민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한쪽에 있던 민수아가 목청을 높이며 물었다.“혹시 복수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서다희는 목소리를 낮추어 민수아한테 말했다.“그런 거 아니니까 가만히 좀 있어. 나 일하는 거 안 보여?”민수아는 화가 나서 말했다.“일을 이 따위로 한다고? 감히 민정이한테 이런 꽃을 선물해?”민수아는 한 그룹의 대표가 어떻게 아내에게 이런 꽃을 선물하냐고 어이없어했는데 알고 보니 민수아의 약혼자 서다희가 고른 꽃이었다. 서다희는 예전에 민수아한테 자신이 유남준의 비서실장이라고 자랑도 했었다.“어제 너무 피곤해서 수하한테 맡겼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민수아는 서다희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말했다.“지금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수아야, 날 몰아세우지 마. 넌 내 여자 친구잖아.”서다희는 민수아의 말을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편드는 거야?’사실을 알게 된 박민정은 그제야 화가 풀렸고 두 사람을 말렸다.“오해였다는 걸 알았으니 두 사람 다 그만해요.”서다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죄송해요. 나머지 꽃다발을 다 버리라고 할게요.”이때 박민정이 입을 열었다.“잠깐만요. 버리면 너무 아까우니 꽃잎을 반신욕 하는 데 쓸게요.”그러자 서다희가 대답했다.“그럼 더 좋고요.”민수아는 박민정의 기분이 나아져서 다행이라고 여겼다.“민정아, 저녁에 같이 반신욕 하는 거 어때?”박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좋아.”두 사람의 말을 들은 서다희는 반신욕을 하는 민수아의 모습을 상상했다.‘수아를 다시 데리고 올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서다희는 떼어낸 꽃잎을 다 정리한 뒤에야 해운 별장으로 향했고 가는 길에 수하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사모님이 한수민을 만나러 간 날 병실을 지키던 간병인한테서 들었는데요, 한수민은 사모님이 자신의 친
유남준은 차가운 어조로 대답했다.“안 가.”유남준은 갑자기 울려 퍼진 벨 소리에 박민정이 걸어온 전화인 줄 알고 냉큼 받았다.“남준 오빠, 새언니가 나 혼자 남겨두고 두원 별장을 나가서 심심해. 오빠 집에서 지내면서 챙겨줄 테니까 보디가드한테 문 열라고 해줘.”추경은이 별장 앞에 서 있었다.“필요 없어.”유남준은 전화를 끊고는 휴대폰을 서다희한테 건넸다.“얘 번호를 차단해 버려.”“알겠어요.”서다희가 추경은의 전화번호를 차단했기에 추경은이 다시 전화를 걸어도 연결되지 않았다. 박민정이 출근했다고 생각한 추경은이 호산 그룹으로 향했지만 도착한 뒤에야 박민정이 휴가를 냈다는 소식을 접했다.“빌어먹을 년, 휴가는 왜 낸 거야?”추경은은 박민정의 사무실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경은아, 방금 뭐라고 했어?”추경은은 깜짝 놀라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유남우의 차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느꼈다. 유남우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추경은은 등골이 오싹했다.“아무 말도 안 했어. 새언니가 갑자기 휴가 냈다는 게 이상해서 와본 거야.”유남우는 피식 웃더니 추경은한테 다가갔고 추경은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추경은은 유남우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유남우는 악독한 수법으로 소문난 유남준한테 가려졌기에 아무도 유남우가 소름 끼치는 사람인지 몰랐었다.어릴 적부터 착하고 다정한 유남우 곁에는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고 인기가 많았다. 추경은도 한때는 유남우를 사랑했었지만 그 일이 일어난 뒤로 유남우를 피하게 되었고 마주치면 몸이 덜덜 떨려왔다.“네가 형수님을 돌보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형수님이 왜 휴가를 냈는지 모른다고?”유남우의 질문에 추경은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말했다.“새언니가 아무 말 없이 가버려서 나도 몰라.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짐을 싸더니 바로 나갔어. 아마 남준 오빠랑 싸운 것 같아.”‘싸웠다고?’유남우가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그래? 왜 싸웠는지는 모르고?”추경은이 고개를 절레
이때 유남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화 안 났으니까 걱정하지 마. 안 가도 돼.”추경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치를 살폈다.“네가 형을 좋아한다면 곁에서 챙겨줘야 하지 않겠어? 만약 두 사람이 좋은 감정을 가지고 만나게 되면 진심으로 축복해 줄게.”추경은은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진짜?”“당연하지. 그런데 하나 주의할 게 있어.”유남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박민정은 건드리지 마. 만약 박민정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내가 직접 너에게 벌을 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추경은은 유남우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새언니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유씨 가문의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준 사람이니 늘 고맙게 생각해.”“앞으로 형과 박민정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나한테 연락해.”“그렇게 할게.”추경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남우는 뒤돌아 나갔고 추경은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추경은이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유남우와 다시 마주치기 전에 회사를 급급히 빠져나가 택시에 앉았다.휴대폰 문자 알림음과 함께 문자가 떴다.“박민정은 지금 박씨 가문 옛 저택에 있어.”최현아가 보낸 문자였다. 어제 박민정이 별장을 나간 뒤로 종적을 감추었기에 추경은이 진주시에 대해 잘 알고 박민정을 꿰뚫고 있는 최현아한테 알아보라고 부탁한 것이다.추경은은 운전기사를 재촉했고 차는 저택으로 향했다.“나한테서 도망갈 생각하지 마.”한편 박씨 가문 옛 저택.집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저택 안을 청소하다가 박형식이 쓰던 서재의 문을 열었다. 기억을 더듬으며 서재의 서랍 제일 아래층을 열어 박형식이 아끼던 사진을 찾아냈다.그것은 네 식구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한수민이 기어코 박민정을 빼놓고 찍었지만 박형식은 박민정을 달래기 위해 포토샵으로 박민정의 사진을 가족사진에 붙여 넣었다.박형식은 한수민한테 들키지 않고 매일 가족사진을 보기 위해 서랍의 제일 아래층에 넣어뒀던 것이다.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추경은은 머뭇거리다가 문 앞에 앉았다.“새언니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여기에 있을 거예요.”“마음대로 하세요.”박민정은 저택으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은 사과를 한입 베어먹고는 최근에 어떤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지 검색했다. 막장 드라마는 박민정을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마음에 드는 드라마가 없는지 박민정은 뉴스를 시청했다.“지난주 YN 그룹의 주가가 하락세를 보였고 7일이 지난 오늘, 회장 윤석후가 자신의 지분을 모두 넘겨 IM 그룹이 YN 그룹을 인수한 것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IM 그룹이라고?”박민정은 귀에 익은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이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발신자는 박민호였다.“누나, 기사 난 거 봤어? 윤석후 회사 망했잖아.”윤석후는 박민호가 박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각종 트집을 잡으며 깔보다가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박민호가 흥분할 만했다.“봤어.”박민정은 박민호가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한수민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민호는 박민정의 친동생이 아닐 것이다.“윤석후 그놈이 나한테 회사를 경영할 줄 모른다고 하더니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회사가 윤석후 회사를 인수했잖아. 속이 다 시원하네.”박민호가 말을 이었다.“누나, 윤씨 가문에서 배상금은 줬어?”“몇백억밖에 못 받았어.”“내가 윤씨 가문한테 준 돈만 해도 1200억인데 고작 몇백억이라고? 누나 혼수랑 예물까지 하면…”박민정은 박민호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네가 멍청해서 그런 거잖아.”박민호는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재산을 넘겼었다.“엄마가 시킨 대로 한 건데 왜 나한테 그래? 윤석후는 착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결국 내가 재산을 물려받을 거라고 해서 믿었던 거야. 엄마가 윤소현을 위해서 그랬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박민호는 생각할수록 화가 솟구쳐 올랐다.“며칠 전에
에리의 말에 박민정은 재빨리 패드로 검색했고 2라운드 진출 명단을 확인했다. 총 3라운드까지 진행되는데 마지막 라운드에서 시합에 참여한 곡을 공개해 투표 순위에 따라 1등을 선발하고 일주일 뒤에 결과를 발표할 것이다.“고마워. 금방 확인했어.”“이번 주말에 시간 돼?”에리는 부모님께서 진주 공원 근처에 벚꽃이 가득 피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공원의 안쪽에는 캠핑장도 있어서 아이들을 데려가면 좋아할 것 같았다.“주말에는 애들이랑 캠핑하러 가기로 했어.”박민정의 말에 에리가 웃으며 대답했다.“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가자. 내가 있으면 든든하잖아! 너 진주 공원 가봤어? 공원 뒤쪽에 있는 산에 벚꽃이 피어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박민정은 진주 공원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다.“너랑 같이 가면 어쩐지 더 위험해질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에리처럼 유명한 연예인이 관광지에 나타난다면 팬들이 모여들 것이다.“걱정하지 마. 마스크랑 선글라스만 끼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거야.”박민정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아이들한테 물어보고 다시 연락할게.”오후 5시.박윤우가 돌아온 뒤, 박민정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었다.“얘들아, 오늘 에리 삼촌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우리랑 같이 캠핑 가고 싶대. 삼촌이랑 가고 싶어?”박민정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두 아이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박윤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박예찬은 동의했다. 이때 박윤우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엄마, 나는 에리 삼촌 말고 아빠랑 가고 싶어.”박예찬도 뒤질세라 말했다.“엄마, 에리 삼촌이랑 가도 괜찮아. 예전부터 자주 같이 놀았는데 뭐가 문제야?”박민정은 쌍둥이 형제의 말에 고민이 깊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소란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고 박민정은 밖으로 나갔다.“무슨 일이지?”알고 보니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민수아가 문 앞에 자리 잡고 앉아 있던 추경은과 마주치면서 말다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언니
박민정은 멈춰서더니 보디가드를 향해 풀어주라고 손짓했다.“달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경은 씨가 저를 보살피러 온 건 고맙지만 저의 손님한테 무례를 범한 건 사과해야죠.”추경은이 유씨 가문에 금방 들어왔을 때, 박민정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박민정을 모욕하고 연못에 빠뜨려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박민정은 당했던 것을 몇 배로 추경은한테 돌려주면서 괴롭힐 생각이었다. 추경은은 박민정이 일부러 그러는 줄 알면서도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새언니, 죄송해요. 욱해서 실례를 범했어요.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게요.”“알겠으니 따라와요.”박민정 뒤를 따라 들어가던 추경은은 주먹을 꽉 쥐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박민정이 남준 오빠랑 이혼하면 내가 오빠랑 결혼할 거야. 박민정,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한편, 주방.박윤우와 민수아는 식탁 위에 수저와 반찬을 올려다 놓았다. 추경은이 식탁 앞에 앉으려 하자 박민정이 앞을 막아섰다.“경은 씨, 저를 보살피러 왔다는 분이 손님과 같이 식사하면 안 되죠. 우리가 식사를 마친 뒤에 드세요.”추경은은 식탁 옆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민수아와 싸운 후, 얼굴이 얼얼했고 두통이 밀려왔다. 민수아는 추경은이 유남준의 친척인 것을 알고 있었고 박민정이 허락해서 추경은이 들어왔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 별장에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기 때문이다.“수아야, 밥 다 먹고 약부터 바르자. 서랍 안에 연고가 있을 거야.”박민정의 말에 민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박윤우는 식사하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에리 삼촌과 캠핑하기 싫다고! 조용히 아빠를 불러서 아빠랑 엄마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려고 했단 말이야.’“윤우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민수아의 질문에 박윤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수아 이모, 주말에 캠핑하러 가기로 해서 기분 좋았었는데요… 형이랑 엄마만 같이 가니까 아쉬워서 그래요.”박민정은 사람이 적어서 재미없다는 뜻인
유남준은 박윤우의 애교에 넘어가지 않았다. 애교를 싫어하기보다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다 큰 남자아이가 애교를 부려?’“안 가.”유남준은 YN 그룹을 인수한 후 각종 서류를 검토하느라 바빴다. 박윤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싫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에리 삼촌과 민기 삼촌이랑 같이 텐트를 칠 수밖에요. 저희 다섯이 재밌게 놀게요. 아, 에리 삼촌은 엄마가 해준 요리만 고집한다면서요?”‘에리가 누구지?’유남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대답했다.“시간 나면 가볼게.”유남준의 말에 박윤우의 두 눈이 반짝였다.“약속한 거예요!”“그래. 일찍 자.”유남준은 전화를 끊었고 박윤우는 미소를 지으며 두 눈을 감았다.‘몸이 덜 아프니까 살 것 같아. 모레면 다 같이 캠핑하러 가서 너무 기뻐.’저택에서 지내게 된 추경은이 유남우에게 문자를 보냈다.“모레 새언니가 진주 공원에 캠핑하러 간대.”시간은 빠르게 흘러 캠핑 가는 날 아침이 되었다. 박민정과 민수아는 네 박스에 필요한 물건을 가득 채웠고 박스를 건네받은 정민기가 짐을 차에 실었다.“민정아, 무슨 보디가드가 힘이 이렇게 세대? 저 큰 상자를 혼자서 네 개나 들다니…”“힘뿐만 아니라 싸움도 잘해.”박민정은 연지석이 배정해 준 보디가드 정민기를 곁에 두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너무 멋져!”민수아는 진주 공원에서 톱스타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정민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때 추경은이 박스를 끌고 나왔다.“새언니, 저도 같이 진주 공원에 가도 돼요?”“미안해서 어쩌죠? 차에 남는 자리가 없어서요. 가고 싶으면 알아서 가세요.”박민정의 말에 정민기는 일부러 남는 자리에 박스를 하나 올려두었다. 그 모습을 본 추경은은 어이가 없었지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저는 택시 타고 갈게요.”박민정은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윤우야, 얼른 출발하자.”먼저 김씨 가문에 가서 조하랑과 박예찬을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박윤우는 옷을 입다가 무슨 문제가 생긴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
김인우는 유남준의 마지막 한마디까지 다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그러면 지금 하랑 씨가 형수님이랑 같이 있다는 거지?”“응.”김인우가 왠지 자신이 방금 했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것 같아 유남준은 다시 한번 주의를 줬다.“결혼 전에는 아무 여자나 끼고 놀아도 상관없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마당에 좀 조심해야 하지 않겠어?”김인우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황당하다는 듯이 그에게 답했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버릇 고친지가 언젠데, 예전의 내가 아니야.”“응, 그러면 다행이고.”“그러면 지금 하랑 씨는 병원에 있는 거야?”“응.”유남준은 대답하자마자 전화를 끊었는데 보아하니 오늘에도 독수공방해야 할 것 같았다.김인우는 그길로 빠르게 조하랑 보러 병원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가는 길에 방금 유남준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설마 하랑 씨가 오해한 건가?’그러다가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기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이 멍청한 놈, 그때 통화하는 걸 분명 옆에서 다 들었던 거야!”그는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이지원의 영상을 자기한테 보내라고 했다.드디어 병원에 도착했다.조하랑이 막 잠들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누구세요?”박민정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간호사인가? 내가 가볼게.”“응.”박민정이 슬리퍼를 신고 문어구에 다가가 문을 열어보니 눈앞에 김인우가 서 있었다.“형수님, 하랑 씨 여기에 있나요?”김인우는 다급하게 물었다.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살짝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제가 들어가도 될까요?”그러나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조하랑은 김인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다가와 차갑게 말했다.“아니요. 민정아, 너는 일단 먼저 자. 내가 나가서 말할게.”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를 한번 쏘아보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갔고 김인우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하랑 씨, 진짜 오해예요.”그러나 조랑
김인우는 집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조하랑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이 맺힌 채로 급히 박예찬과 김훈에게 달려가 물었다.하지만 김훈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그가 이번 기회에 정신 좀 차리길 바랐다.“나도 몰라. 하랑이가 방에 없다고? 화장실 간 거 아니야? 화장실은 찾아봤어?” 김훈이 일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김인우는 인상을 찌푸렸다.“거기도 없어요.”“그거 참 이상하네.”김훈은 걱정스러운 척하며 말했다.“그럼 멀뚱멀뚱 서서 뭐 하는 거냐? 어서 찾아봐야지. 지금 임신 중이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만두지 않겠다.”박예찬도 거들었다.“오늘 아줌마가 좀 안 좋아 보이긴 했어요. 혹시 가출하신 거 아니에요?”그 말에 김인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는 곧장 조하랑을 찾아 나섰다.한편, 조하랑은 이미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박민정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둘은 정수미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들어가 조용히 대화를 이어갔다.“하랑아, 너 그냥 이렇게 온 거야? 가족한테는 말 안 했어?”조하랑은 고개를 저었다.“응. 그냥 조용히 나왔어. 지금은 누구 얼굴도 보기 싫어.”“그래도 집에 한 통은 전화해. 안 그러면 걱정하실 텐데.”박민정이 말했다.“괜찮아. 다들 내가 자는 줄 알 거야. 내일 아침에 슬쩍 들어가면 돼.”조하랑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임신 후로 김인우와는 방도 따로 쓰고 있었기에 자신이 방에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알겠어.”박민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후 조심스레 물었다.“그런데, 하랑아. 너 아까 말한 그 여자, 혹시 누군지 짐작은 가?”조하랑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난 김인우 주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박민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럼 내가 남준 씨한테 한 번 물어볼게. 혹시 오해일 수도 있으니까.”“응, 좋아.”조하랑도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건 원치 않았다.박민정은 조하랑 앞에서 유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유남준도 막
조하랑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걱정 마, 민정아. 나 그냥 좀 화가 났을 뿐이야. 아직은 냉정해.”그리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기분이 나빠서 그래. 내가 지금 그 사람 아이까지 품고 있는데 저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어떻게 안 상하겠어.”박민정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잠시 후, 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민정아, 나 네가 있는 곳으로 가도 될까?”“당연하지. 내가 데리러 갈게.”박민정은 임신한 친구의 감정이 요동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걱정된 마음에 바로 나섰다.하지만 조하랑은 코끝이 붉어진 채 대답했다.“아냐, 이미 차 탔어. 지금 가는 중이야.”그녀는 더 이상 그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김인우가 눈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둘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던 지라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알겠어. 그럼 내가 문 앞에서 기다릴게.”“응, 고마워.”...한편, 김인우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있는 꽃집을 발견했다.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는 직접 차에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품에 형형색색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차에 다시 올라타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가자. 좀 빨리 가 줘.”예전에도 김인우는 여자를 위해 꽃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건 대부분 비서가 대충 주문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꽃다발은 그가 직접 고르고 색을 맞춰 정성껏 고른 것이었다.운전기사도 그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번지는 미소를 보고는 감탄하듯 말했다.“사모님은 참 복도 많으시네요. 이사님께서 뭐든 다 챙기시니.”김인우는 입꼬리를 높이 올리며 웃었다.“당연하지. 내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사람이잖아. 그 정도는 해야지. 사실 하랑 씨가 임신하지 않았더라도 난 여전히...”하지만 마지막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그는 조하랑을 보기 위해 한 걸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