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은, 어르신께서 너에게 자중이 뭔지 가르쳐 주신 적 없어?”유남준이 얇은 입술로 입을 열었다. 그의 가벼운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날카로운 칼날과 같이 그녀의 마음을 후벼팠다.그리고 추경은은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남준 오빠, 이건 오해예요. 전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유남준이 그동안 그녀의 만행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추재훈의 체면을 생각해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보니 이 여자는 정말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그런 뜻이 아니라면 더 조심했어야지.”다른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막상 자신이 좋아하던 유남준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추경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자신이 성급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추경은이 다급하게 해명을 늘어놓았다.“미안해, 오빠, 그리고 새언니. 부모님이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나에게 이런 걸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어. 정말 미안해. 오늘 밤은 내가 밖에서 당신들을 위해 밤을 지새울게. 나 오늘 안 잘 거야.”그렇게 말을 마치고 추경은은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마치 박민정이 그녀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박민정은 추경은의 뻔뻔한 태도에 감탄하며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유남준이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물었다.“어디 가?”“잠깐 나가보려고요.”“밖에 비 와. 나가지 마. 별로 볼 것도 없어.”“비가 온다고요?”손을 뻗어보니 과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유남준은 비록 앞을 볼 수 없지만 청력은 일반인보다 더 좋아진 모양이다.하지만 유남준과 달리 박민정은 줄곧 보청기에 의지하고 있다. 손끝에 닿은 빗물을 느끼며 고개를 내밀자 김인우 앞에 서서 흐느끼며 무언가를 하소연하고 있는 추경은이 눈에 들어왔다.이미 자리에 누운 박윤우와 박예찬 두 형제는 방금 유남준이 추경은을 쫓아내는 것을 보며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더 상승했다.“정말 비가 오네요. 이만 자요.”박민정이 가장자리에 누웠다.그리고 두 아이는 두 사람 사
이쯤 되니 김인우는 진심으로 추경은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진주산 정상은 도심에서 한 네댓 시간 거리 떨어져 있는데 인제 와서 사람을 불러오라니...김인우가 추경은을 떠나보내려고 하는 그때, 조하랑이 램프를 들고 텐트 밖에 나타났고 그녀의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여기에는 어쩐 일이에요?”어리둥절한 김인우가 물었다.“어르신께서 전화하셨어요.”“할아버지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합니까?”그러나 조하랑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추경은도 곁에 있는 것을 보아 말을 꺼내기 난감해져 김인우에게 눈짓했다.“무슨 일입니까, 그냥 말씀하세요.”그러자 조하랑도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어르신께서 인우 씨가 왜 제 텐트 안에서 저와 함께 자고 있지 않냐고 물으셨어요.”순간 난처해진 김인우가 추경은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먼저 나가주면 안 될까?”“알겠어.”추경은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반강제로 자리를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그냥 말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난처해지니까 사람을 내보내?“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또 뭐라고 하셨어요?”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김인우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훈이었다.“예찬이가 곁에 없어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저희와 얘기 좀 나누재요. 그래서 저희더러 먼저 함께 누워있으라고 하셨고요...”“이 늙은 영감탱이가 진짜.”김인우는 어이가 없었다.그러나 조하랑도 어쩔 수 없었다.어르신은 정말 진심으로 그녀에게 잘해 주셨고 그동안 어딜 가든 항상 맛있는 먹거리와 재밌는 물건을 선물해 주시곤 했다.게다가 그저께 경매에 나갔는데 조하랑이 예쁘다고 한 목걸이를 사기 위해 역대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해 인기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정말 친할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어서 받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할아버지께서 또 이상한 생각 하시겠어요.”그 말에 김인우도 마지못해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왜 이제야 전화를 받는 것이냐?”핸드폰 저 너
같은 시각, 바깥에 쫓겨난 추경은은 추위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라는 김인우의 답이 없자 초조해진 추경은이 참다못해 김인우의 텐트 앞으로 걸어갔지만 텐트의 지퍼가 모두 안에서 닫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그리고 램프까지 꺼진 것을 보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 추경은이 발을 동동 굴렀다.하지만 조하랑이 이곳에서 자고 있다는 건 추경은에게도 남은 텐트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여 그녀는 재빨리 그 텐트를 찾아 안으로 쏙 들어갔다.침낭을 가져오지 않았더니 산이 엄청 추워요.추경은은 텐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몇 벌로 겨우 몸을 녹일 수 있었다.살면서 정말 오늘처럼 비참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하필이면 옆 텐트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다름 아닌 서다희와 민수아였다.“젠장...”이에 추경은은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한편, 박민정은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며 두 아이를 재우고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바깥에는 매서운 바람이 윙윙 휘몰아쳤고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이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침낭 안에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이리저리 뒤척였다.“이리로 올래?”유남준이 갑자기 말을 건넸다.“네?”유남준 역시 박민정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먼저 제안을 건넸다.“와서 내 옆에서 자.”“싫어요.”그러나 박민정은 고민할 겨를도 없이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유남준도 별로 권하지는 않았다.그렇게 다시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고, 2분, 10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박민정이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남준 씨, 자요?”“아직.”“남준 씨도 무서운 거예요?”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갔다.“무서워하지 마세요. 세상에 귀신은 없어요.”유남준은 그녀 자신을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를 위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박민정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원래는 무섭지 않다고
확인해보니 조하랑이 묵고 있는 텐트에서 들려온 소리였다.아직 그 텐트 안에 있는 사람이 추경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박민정이 있다는 것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하랑아, 왜 그래?”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튀어나온 사람은 뜻밖에도 추경은이었다.추경은은 놀란 눈으로 텐트 안을 가리키며 황급히 말했다.“안에 뱀이 있어요.”그녀의 비명소리에 다른 텐트 안의 사람들도 잇달아 깨어났고 하나둘 텐트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입니까?”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정민기였다.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니 일찍 일어났을 텐데도 다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것을 보고 텐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러자 추경은은 박민정은 아예 안중에도 없는 듯 정민기를 향해 달려갔다.“민기 오빠, 텐트 안에 뱀이 있어요.”물론 박민정도 추경은의 이런 행동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녀는 어젯밤 조하랑이 선심을 써 추경은과 함께 묵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추경은이 뛰쳐나왔다면 조하랑은 아직 안에 있다는 말인데 만약 뱀에게 물리면 어떡한단 말인가?“하랑아.”박민정이 텐트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그러나 조하랑은 안에 없었고 지퍼를 열자마자 텐트 안의 맹독성 우산뱀만 한눈에 보일 뿐이다.그녀는 곧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서더니 재빨리 텐트 지퍼를 다시 잠가버리고 추경은을 돌아보며 물었다.“하랑이는요?”그러나 추경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조하랑이 얼굴을 붉히며 김인우와 함께 그의 텐트 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민정아, 내가 설명할게. 우리 둘 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그러자 김인우가 눈살을 찌푸렸다.“설명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엄연히 약혼 사이인데 같이 자는 건 정상이잖아.”그 순간, 조하랑이 김인우의 발을 콱 밟아버렸다.바깥 기척에 잠이 깬 서다희와 민수아도 텐트 안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무슨 일이에요?”민수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조하랑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박민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텐트 안을 가리켰다.“안에 독사
몸을 피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렸기에 박민정은 즉시 자리에서 물러섰다.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박민정의 몸은 커다란 품에 안겨 있었다.눈 깜짝할 사이에 유남준은 어느새 박민정 앞에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껴안았다.유남준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단지 방금 박민정이 말한 반대 방향으로 그녀가 있는 위치를 판단했고 다행히도 그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그리고 뱀의 위치도 알 수 없었기에 박민정의 앞을 통째로 막아야 했다.그리고 유남준의 품에 안긴 박민정은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그러나 뱀도 박민정에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시각, 정민기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추경은을 발로 걷어차 뱀의 자리로 내던졌기 때문이다.추경은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하마터면 뱀의 몸에 부딪힐 뻔했다.그리고 뱀은 갑작스러운 큰 충격에 놀라 쏜살같이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추경은은 흙과 풀을 한입 가득 머금고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순간적으로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어떻게 감히 나를 걷어차요?”그러나 그녀의 투정에도 정민기의 눈동자는 그저 싸늘하기만 했고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저의 직책은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지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추경은은 그 말을 듣고 더욱 목이 메었다.방금 만약 조금이라도 틀어졌다면 그 뱀은 틀림없이 그녀를 물었을 것이다.이 경호원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단 말인가?조하랑과 다른 이들도 조금 전의 위험한 상황에서 천천히 빠져나왔고 그들 역시 추경은에 대해 조금의 동정심도 품지 않았다.“추경은 씨가 민기 씨를 탓할 면목이 있습니까? 원래 가려던 뱀을 왜 굳이 소란을 피워서 다시 돌려놔요? 뱀이 정말 민정이를 물어뜯기라도 바랬습니까?”조하랑도 정말 합세하여 그녀를 몇 발 걷어차고 싶었다.이에 민수아도 동참했다.“너 마음이 너무 악랄하신 것 아니야? 크게 말하면 안 된다니까 일부러 더 크게 소리를 질
그러나 박윤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했다.“몰래 봤어.”“...”박예찬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박윤우는 유남준의 휴대폰 잠금화면과 배경화면을 모두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사진으로 설정해놓았는데 기존의 간단한 배경화면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어차피 아빠는 보지도 못하는데 별말씀 안 하실 거야.”박윤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박민정은 유남준의 품에서 나와 낭패한 꼴을 하고 있는 추경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진심으로 나를 구하려고 했든, 아니면 나를 해치려고 했든 상관없어요. 그런데 만약 경은 씨가 내 아이를 다치게 했다면 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바로 그녀의 보물이다.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녀는 반드시 열 배로 갚아줄 것이다.한편, 박민정의 기세에 놀란 추경은은 즉시 고개를 떨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저는 정말 새언니를 해칠 생각은 없었어요.”김인우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방금 박민정이 정말 독사에게 물렸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추경은, 이번 일은 네 잘못이 확실해. 반성하도록 해.”그러자 추경은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알았어.”우산뱀이 일으킨 소란으로 더 이상 산에서 머물기가 어려워졌고 사람들은 아침을 먹고 해가 떠오른 후에 곧바로 산에서 내려갔다.추경은은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돌아가서도 쫓겨나지 않기 위해 특히 더 말을 잘 들으며 고분고분 행동했다.“새언니, 조심하세요. 넘어지면 안 돼요.”그러자 조하랑이 다가와 그녀를 밀어냈다.“저리 비켜요. 나중에 또 우리 민정이 밀어버리지 말고.”화가 났지만 추경은은 상황을 보고 얌전히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박민정의 몸 상태로 산을 내려갈 땐 확실히 부축을 받아야 한다.하지만 다행히도 길은 평탄했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래의 여관에 도착하게 되어 모두가 짐을 풀고
유남준이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또 무슨 일 있어?”“오늘 그렇게 위험했는데 왜 절 구해주셨어요?”박민정이 그를 꼿꼿이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유남준이 정말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현재의 기억은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그녀를 매우 혐오하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왜 몸을 바쳐 그녀를 구했단 말인가?박민정의 물음에 유남준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솔직히 그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러니까 몸의 본능이 박민정이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네가 내 아이를 배고 있으니 당연히 네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지.”유남준이 냉담하게 대꾸했다.그러자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박민정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그렇군요, 그럼 돌아가세요.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들어가 쉬세요.”“응.”유남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서다희가 그의 곁으로 와 그를 차에 태웠다.박민정과 민수아도 각자 집안으로 돌아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이 부른 산부인과 의사들이 도착해 박민정의 건강을 체크해 주었는데 아이는 건강했고 그녀의 건강에도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의사들의 말을 몰래 듣고 있던 추경은은 그들이 떠나자마자 박민정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새언니,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잘할 테니 제발 저를 집에 보내지 말라고 오빠를 설득해주세요. 네?”추경은은 말을 이어가며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새언니, 그거 알아요? 저희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전 추씨 가문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문의 어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제가 계속 유씨 가문에 빌붙기를 원했죠. 그런데 만약 제가 사촌 오빠에게 쫓겨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추씨 가문에는 더 이상 제 자리가 없을 거예요.”“그뿐만 아니라 추씨 가문에 있으면 제 사촌 오빠와 언니들이 분명히 저를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괴롭힐 거예요.”그녀는 계속하여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
“누군가 일부러 저를 깎아내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추경은이 박민정과 민수아에게 해명을 늘어놓았다.그러나 두 사람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박민정도 곧바로 채널을 돌리고 민수아와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았다.이 상황에 추경은 혼자 무릎을 꿇고 있으니 그들의 공간과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듯했고 그녀는 답답하고 달갑지 않았지만 꾹 눌러 삼킬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녀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추재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통화버튼을 누르니 전화 건너편에는 그녀를 향한 욕설이 난무했다.“추경은, 남준이 돌보라고 보냈더니만 넌 김씨 가문에 가서 뭐 하는 거냐? 그리고 너 때문에 우리 추씨 집안 명성이 바닥이 났어.”추경은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간 후에야 답했다.“할아버지, 이건 모두 오해예요. 누군가가 유언비어를 퍼뜨린 거예요.”“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결국, 네가 꼼꼼하지 못한 탓이지.”추재훈은 한없이 냉담했다.“죄송합니다, 할아버지.”“그렇다면 지금 남준이와 있는 건 어떠냐?”추재훈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지금 추씨 집안과 유씨 집안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게다가 두 집안의 실력 차이도 워낙 큰지라 추경은이 유씨 가문에 들러붙지 않는다면 그들 추씨 집안의 길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추경은은 차마 진실을 말해줄 수 없었다.“이 일은 너무 서두르면 안 돼요. 박민정이 아직 유씨 가문의 혈육을 품고 있잖아요.”추재훈도 자연히 이 도리를 알고 있다.“경은아, 할아버지가 너에게 뭐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가장 좋은 때란 말이다. 박민정이 임신하고 있어야 네가 유남준에게 접근할 수 있지.”유남우는 이미 윤소현과 약혼을 마쳤다.그러니 유남우는 당연히 건드릴 수 없고 유남준은 달랐다. 그는 이제 눈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유씨 가문의 리더도 아니다.그렇다면 추은경의 미모라면 유남준의 환심을 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네, 알고 있습니
“엄마, 아빠랑 이혼 잘하셨어요.”유남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유남준 앞을 지나치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내가 능력이 없어서 이번에도 졌네.”유남준은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봤다.유남우는 사실 그가 어떻게 반격할지 걱정되기보다 이번에도 졌다는 게 더 분통했다.밖으로 나온 뒤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라도 걸고 싶었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연락처를 훑어보다가 홍주영에서 멈칫하더니 결국에는 통화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핸드폰을 다시 꺼야 했다.실내 안.거실은 유난히 조용했고 유지욱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남우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는데.”고영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가 말하는 ‘예전’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고영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모습에 유지욱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래?”“아니에요.”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다시 말을 이었다.“이번 달은 될수록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그리고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는 대로 다시 가서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요.”고영란은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이혼하고 싶은데 지금 이혼하려면 한 달씩이나 기다려야 했다.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이 한 달 동안에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좀 생각해 보고요.”말을 마친 뒤 유지욱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한편.박씨 가문의 옛 저택.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걱정되어 한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비록 서다희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때,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박민정이 다급히 차창 밖을 내다보니 유남준의 차도 마침 도착해 있었다.박민정은 빠르게 차에서 내린 뒤 유남준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괜찮아요?”그러자 유남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당연하지, 다희가 나 괜찮을 거라고 알려줬잖아.”박민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
유석진의 입에서 갑자기 자기 둘째 아들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영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또한 왜 두 아들 사이에 지금 저런 모순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유남준도 괜히 고영란이 중간에서 난처하게 된 것 같아 일부러 유남우를 빤히 바라보며 유석진에게 말했다.“이번 일은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에요. 큰아빠가 아무리 남우랑 같이 벌인 일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별로 무겁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위협감이 느껴졌다.순간 유석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때, 그의 며느리인 최현아가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끼어들었다.“남준 씨, 그래도 한 가족인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그러자 유성혁도 한마디 거들었다.“남준아, 우리도 잘못했단 걸 알고 있어.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많아서 상황판단이 안 될 때가 많아.”유석진도 사실 지금 자존심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지금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말해주면 내가 다 들어줄게.”사실 유남준은 이 말만을 기다렸다.“금방 인수한 시내 중심에 있는 그 건물을 저한테 넘겨주세요.”그 땅은 유명훈의 땅이고 죽기 전 유석진에게 물려준 유산인데 지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살 수 없을 정도로 값이 올랐다.유석진이 이 땅의 주인이 됨으로써 그곳의 상권을 손에 쥔 거나 다름없었는데 나중에 아무 건축물을 세워 올려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건 안되지!”역시나 유석진이 단번에 거절했다.그가 오랫동안 눈독 들였던 땅이었는데 유명훈이 죽어도 물려주지 않으려 해서 여태껏 애를 먹고 있었다가 이제 겨우 손에 들어온 땅이고 또 자기만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그러면 조만간 IM 그룹의 변호사를 만나셔야겠네요.”유남준은 더 이상 그와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유석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안 도우미에게 외쳤다.“모셔다드려!”그렇게 도우미들은 그들을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거실에는 유남준 가족들만이 남게 되었다.유지욱과 고영란은 눈앞의 두 아들에게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유남준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유석진 가족들은 조용히 자축하고 있었다.최현아도 너무 기뻐했지만 유독 유성혁만 우울한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아빠, 그래도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꼭 이래야 할까요? 남준이가 잡혀가도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 다시 풀려나서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요.”그러자 유석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왜 쓸데없는 일을 벌써 걱정하고 그래? 간이 그리도 콩알만 해서 큰일 하겠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유성혁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다만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유지훈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저는 할아버지가 한 행동이 맞다고 봐요.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자 유석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껄껄거리며 웃었다.“하하, 역시 우리 손자가 똑똑하다니까. 네 말이 맞아. 사람은 무조건 자기가 일 순위여야 해. 절대 네 바보 같은 아빠를 닮아서는 안 된다.”그러자 유지훈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저도 알고 있어요.”그리고 유석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그러나 그들은 너무 일찍 기뻐했던 게 오후가 되자마자 유남준은 바로 풀려났다.그길로 옛 저택으로 오게 되었고 동시에 유석진네 식구들과 유남우를 전부 집으로 불러 모았다.이 시각, 유지욱도 마침 그곳에 있다가 눈앞의 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남준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아빠, 제가 지금부터 저 사람들의 실체에 대해 다 밝히려고요.”그리고 서다희가 한 무더기의 자료와 증명서를 건네주자마자 그는 유석진네 식구들에게 뿌려줬다.종이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다가 전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유석진은 그중 한 장을 주워 읽어보고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말했다.“남준아, 다 오해야.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겠니?”그러자 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되물었다.“우리 회사에 심어둔 사람들을 제가 다 데려올까
유남준은 사실 진작에 유남우와 유석진 쪽에 사람들을 붙여서 그들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었지만 도대체 무얼 하려는지 궁금해서 일단 내버려두고 있었다.이튿날, IM 그룹으로 세무국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러자 서다희가 눈살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대표님을 감옥에 보내려고 아주 별짓을 다 하네요. 이런다고 그 사람들한테 득이 되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특히 유남우는 왜 자기 친형을 왜 이렇게까지 괴롭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사해 보니 역시나 회사 장부에 문제가 있었고 회사 자금을 불법으로 돌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그러나 이 모든 게 다 그들이 일부러 만들어낸 가짜 장부들이었다.그렇다고 해도 유남준은 회사 법인으로서 조사를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연행되었다.가면서도 서다희에게 당부했다.“민정이한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줘.”서다희는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굳이 말하지 않아도 뉴스에서 하루 종일 보도될 예정이라 아마 얼마 안 돼서 알게 될 것이다.역시나 박민정은 출근길에 그에 관한 뉴스 기사를 보게 되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이때, 고영란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민정아, 남준이한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그러나 박민정도 아직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저도 방금 기사를 봐서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장 다희 씨한테 전화해 볼 테니까 어머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래.”고영란은 착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유지욱과 이혼하겠다고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들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서다희는 빠르게 박민정에게 전화해서 유남준이 시킨 대로 알려줬고 모든 일은 다 대비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박민정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이때 서다희가 한마디 더 했다.“그런데 이 일은 절대 고영란 사모님한테 말하지 말아 주세요.”“알겠어요.”어쩌면 유남우 귀에도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나이니까 더 이혼하자는 거예요. 굳이 남은 인생을 당신한테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요!”고영란은 말을 마치자마자 안방에 들어갔다.그러나 유지욱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그러다가 문득 여태껏 이혼에 대해 거론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심술부리는 원인이 분명 아버지 재산 때문인 것 같았고 며칠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이튿날.유명훈의 장례식은 계속 진행되었고 박민정의 친구들도 모두 오게 되었다.“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손연서의 말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다른 손님들도 하나둘씩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는데 장례식의 침울한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최현아는 눈웃음을 살살 지으며 한쪽에서 사람들과 유명훈의 유언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지욱과 고영란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그렇게 유명훈의 장례는 총 3일 동안 진행 후 끝났다.고영란은 담담한 얼굴로 박민정과 유남준, 그리고 유남우에게 말했다.“나랑 네 아버지는 이만 갈라서려고 해.” 순간 모든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옆에 서 있던 유지욱의 안색도 좋지 못했다.그는 원래 유명훈의 장례가 끝나면 계속해서 여행이나 다니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영란한테서 이혼 통보를 받게 되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분명 일시적으로 심술부리는 거라 생각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진심인 것 같았다.“지금 애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해, 진짜 이혼하려고?”“네.”고영란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오랫동안 고민했던 일이고 지금처럼 사는 게 저는 너무 괴로워요. 지금 당장 법원에 갑시다.”고영란은 지금 그들의 의견을 구하려는 게 아니다.유지욱도 자존심이 꽤 센 사람이라 단번에 그러자고 하더니 두 사람은 법원으로 출발했고 두 아들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자식들도 이미 다 컸고 자기 혼인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박민정은 유남준과 같이 돌아가는 차 안
고영란도 유석진의 고함에 깜짝 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리고 여태껏 모든 집안일을 아내한테 떠넘긴 채, 홀로 밖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유지욱이 원망스럽기만 했다.한 사람에 대한 단념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라 이런 실망감이 천천히 쌓이면서 식어가는 것이다.보아하니 오늘 저녁에도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유지욱이 도착해보니 유씨 가문의 모든 친척이 다 모여있었다.그리고 이미 상복으로 갈아입은 고영란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왜 진작에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어?”그의 물음에 고영란은 실망 가득한 얼굴로 답했다.“제가 말해주지 않았다고요? 한 달 전에 전 분명히 아버님 건강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와서 회사 일 좀 도와드리라고 귀띔해 줬어요.”“난 네가 우리 아버지 재산 때문에 나더러 오라는 줄 알았지.”유지욱의 말에 고영란은 큰 충격을 받고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두 주먹을 꼭 쥐고 말했다.“유지욱 씨, 정말 어이없네요. 맞아요, 제가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원인이 아버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지욱 씨한테도 나눠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그 재산이 전부 아주버님한테 넘어갔네요?” 그러나 유지욱은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다.“그깟 돈 몇 푼 가지고 왜 그래? 우리가 모두 한 식구인데 주면 줬지.”유지욱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님들을 맞이하러 떠났다.그리고 유석진과도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에 고영란은 제대로 마음이 상했다.박민정도 손자며느리로서 유남준과 같이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우연히 시부모님이 서로 말다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녀는 사실 유씨 가문에 시집온 이후로 시아버지인 유지욱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유지욱은 젊었을 때부터 고집불통에 집안 사업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저 매일 여행이나 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걸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유지욱과 고영란은 1년 중에도 만날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준에게 살짝 다가가 그에게 말했다.“남준 씨, 가서 어머님 좀 위로해 주세요.”여자
유남준의 아버지, 유지욱은 계속 외국에서 살다보니 이 자리에 없었다.그러자 고영란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지욱 씨는 지금 당장 오는 게 불가능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비행기 탔다고 했으니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예요.”그러자 유석진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그러면 지욱이가 도착하고 나서 다시 말할 테니까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아요.”순간 고영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악물고 말했다.“이 집에 들어와서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줬는데도 제가 아직 외부인인가요? 저는 오늘 아버님께서는 왜 그리도 자식들을 편애하시지 꼭 물어봐야겠어요!”“제 아들들이 능력이 뛰어나면 이런 불공평한 대우도 다 받아들여야 하나요?”여태껏 유명훈은 많은 주식을 갖고 있었다.비록 유남준이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유명훈의 지분이 그대로 유석진네로 넘어가게 되면 유남준의 자리가 위태로워진다.더구나 유남우도 그의 재산이 필요한데 말이다!게다가 유명훈은 오랜 세월 동안 주식 말고도 분명 많은 재산을 모았을 텐데 그 돈마저 전부 저 사람들에게 넘어가는 모습을 고영란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유석진은 유명훈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여태껏 지욱이를 잘 붙잡아 두지 못한 제수 씨를 탓해야죠! 지욱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고영란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유남준이 그녀를 말렸다.“엄마, 그만해요.”여태껏 유명훈이 유석진네만 편애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던 그이기에 지금 아무리 그와 말싸움해도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유남우도 불쾌했지만 애써 덤덤한 척 그녀에게 말했다.“엄마, 형 말이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결정하신 대로 받아들이면 되니까 싸울 필요 없어요.”이 시각, 침대에 누워있던 유명훈은 호흡이 점점 더 가빠져 헐떡거리기 시작했다.그런데도 눈앞에서 자식들이 자기 재산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다.“지욱이...”그는 힘겹게 유지욱을 불렀다.유지욱은 평소에도 그의 말을
최현아는 손까지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지만 박민정은 그저 냉담한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세요?”그러자 그녀는 뻘쭘해진 손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일은 무슨, 윤소현이 드디어 판결받았다고 해서 축하해주려고 왔지.”박민정은 분명 다른 속셈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 최현아와 그의 시아버지는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럴수록 더 수상했다.“감사합니다. 다른 일 없으면 저는 이만 일 하러 갈게요.”말을 마치자마자 박민정이 뒤돌아서니 역시나 최현아가 빠르게 그녀의 팔을 부여잡았다.“민정아,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까지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박민정은 이제 와서 한 식구라는 그녀의 말이 그저 가소로웠다.“도대체 할 말이 뭔가요?”그리고 슬슬 짜증 나기 시작했다.“최근에 할아버지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동서랑 남준 씨가 그립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도 보고 싶은가 봐. 혹시 오늘 밤 할아버지 뵈러 같이 가지 않을래?”최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사실 박민정도 할아버지의 건강이 여태껏 좋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도 아마 자신이 얼마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네, 알겠어요.” 최현아는 그제야 박민정의 팔을 놓아줬지만 그녀가 떠나가자마자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껏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재수 없는 것, 운발로 지금 자리에 올라앉은 주제에.” 차에는 낯선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박민정한테 화낼 필요 없어.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할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할아버지의 주식이랑 모든 돈을 너한테 넘길 수 있도록 잘 구슬리는 거야.”그러자 최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나도 알아, 저번에 이미 할아버지랑 말해봤다니까? 유남준 씨랑 민정이는 괜히 고고한 척하면서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상황이라 우리 쪽에 전부 몰리게 되어있긴 한데, 난 지금 성혁 씨 얼굴만 봐도 짜
조하랑은 그제야 화가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그러면 왜 저 여자한테 찾아갔어요?”“당연히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러 갔죠. 그리고 이지원에 대해 정신감정도 의뢰했거든요. 만약 진짜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거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이 모든 게 다 쇼하는 거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어요.”김인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다가 조하랑을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예전에 제가 지원이한테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했는지 하랑 씨도 잘 알잖아요. 만약 저를 구해줬던 사람이 형수님이었단 사실을 진작에 알았다면 절대 그 애를 도와주지도 않았을 겁니다.”“지금은 그저 마땅히 받아야 할 벌만 받았으면 좋겠고요.”조하랑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제가 오해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저는 인우 씨가 또 그새를 못 참고 다른 여자한테 찝쩍거린다고만 생각했어요.”그녀의 말에 김인우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못 참고 되물었다.“하랑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순간 조하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누, 누가 질투한다는 거예요? 그저 저를 배신한 인우 씨한테 화나고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나한테 실망했을 뿐이라고요!”“알겠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리고 의사도 임산부가 흥분하면 아이한테 안 좋다고 말했잖아요.”말을 마치자마자 김인우는 다정하게 조하랑을 품에 안았는데 순간 그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진 채 온몸이 굳어버렸다.당연히 김인우도 눈치채고는 빠르게 물었다.“왜요, 부끄러워요?”“그, 그럴 리가요...”조하랑은 말까지 더듬으며 애써 덤덤한 척했다.“저도 안을 줄 알거든요?”그리고 똑같이 김인우를 꼭 안아줬는데 이번에는 김인우가 속으로 움찔했다.추운 밤, 그렇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꼭 껴안아 줬는데 거리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계속 그들에게 멈춰졌다 가곤 했다.조하랑도 어느새 그걸 느꼈는지 재빨리 김인우를 밀쳐냈다.“됐어요. 이제 병실로 돌아가 봐야 하니까 인우 씨도 그만 돌아가요.”“저랑 같이 안 가고요?”김인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