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그 순간 주민혁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곧이어 들어온 두 번째 보고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다.심종연의 개인 계좌에서 소액의 해외 송금 내역이 하나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금액 자체는 아주 적었지만 수취 계좌가 개설된 은행 지점은 하필 최수빈이 머물고 있는 도시 외곽에 있었다.게다가 앞서 행방이 묘연해졌던 외국인 무장 인력 몇 명도 같은 시기에 국경 남쪽에서 일제히 자취를 감췄고 이후 국내에서 활동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흩어져 있던 증거들이 하나씩 맞물리며 결론을 분명하게 가리켰다.엘리아스는 도망친 게 아니었다. 심종연 역시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었다.두 사람은 아예 국경을 넘어 출국한 것이었고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최수빈이 있는 해외 분쟁 지역이었다.주민혁이 쥐고 있던 펜이 부러질 듯 삐걱거렸다.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동안 그가 세워 둔 모든 경계와 감시망, 매복 계획은 전부 상대가 국내에서 보복에 나설 거라는 전제 아래 마련된 것이었다. 율이를 노리거나, 자신에게 직접 달려들 거라고 생각한 전제하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는 완전히 빗나갔다.두 사람의 목적은 복수가 아닌 돈이었다. 정확히는 지역 세력 판도까지 뒤흔들 수 있는 신형 항공 소재였다.최수빈 일행이 수행 중인 연구 조사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국제 연구 협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가치를 아는 세력에게는 엄청난 이권이 걸린 먹잇감이었다.핵심 데이터, 소재 샘플, 극한 환경 실측값...그중 어느 하나만 빼돌려도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오갈 수 있었다.엘리아스는 무장 습격과 강탈에 능했고 심종연은 사람을 심고 판을 짜는 데 능했다.그 둘이 손을 잡고 곧장 분쟁 지역으로, 최수빈이 있는 연구팀을 향해 갔다.목표는 주민혁이 아니라 항공 소재였다.한편, 현재 최수빈네 쪽은 내부에는 첩자가 숨어 있고 밖에서는 포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실험 데이터까지 조작된 데다 의료소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무리할 생각 없어. 그냥 대열에 맞춰 이동하는 것뿐이야. 괜히 나서서 몸을 혹사하진 않을게.”육민성은 잠시 송미연을 바라보다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미연 씨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수빈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는 같이 가야 해.”눈빛은 다정했지만 결심만큼은 확고했다. 책임자로서 물러설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송미연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건 잘 알고 있었으나 팀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이런 위기 상황에 자신만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고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는 사람들 곁에 남아 연구 성과를 지키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송미연은 육민성의 단호한 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결국 체념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이 남자는 늘 자신의 안위보다 책임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여도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눈가에 눈물이 차올랐지만 결국 송미연이 먼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그녀가 육민성을 와락 끌어안았다.“그럼 약속해요. 무조건 내 옆에 있겠다고. 혼자 움직이면 안 되고 절대 무리해서도 안 돼요. 무슨 일이 생기든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고요.”“약속할게.”육민성도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흔들림이 없었다.최수빈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 잠시 마음이 먹먹해졌지만, 곧 몸을 돌려 이동 준비를 마저 지시했다.병실 밖에서는 보안 요원들이 이미 출발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이동 차량도 건물 아래 대기 중이었고 핵심 물자와 실험 샘플 역시 모두 포장되어 있었다.내부 첩자에 대한 조사도 여전히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었다.그 와중에 멀리서 들려오는 포격 소리는 점점 잦아졌고 폭발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송미연은 육민성에게 두꺼운 겉옷을 입혀 주고 비상약과 붕대를 챙겼다. 이동 중 붕대가 풀리거나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최수빈이 굳은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육민성과 송미연 두 사람은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한 것이었다.“무슨 일이야?”육민성이 먼저 물었다. 아직 목소리에는 힘이 조금 빠져 있었지만, 말투는 차분하고 침착했다.“국내 지원팀이 도착했어요. 본부의 새로운 지시도 가져왔고요.”최수빈은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그런데 실험 데이터가 누군가에게 조작됐어요.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고 있고요. 게다가 현지 상황도 다시 악화돼서 포격이 바로 인근까지 들어왔어요. 이제 의료소도 안전하지 않으니 당장 이동해야 해요.”그러자 송미연은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반사적으로 육민성의 팔을 붙잡았다.“이동한다고?”불안과 거부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목소리였다.“안 돼. 이제 겨우 상처가 좀 나아졌다고. 의사 선생님도 적어도 일주일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잖아. 몸에 충격이 가서도 안 되고 놀라서도 안 돼. 이동하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혹시 상처가 다시 벌어지거나 감염이라도 되면 어떡해?”송미연이 며칠 동안 육민성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간호했던 것도 그저 그가 아무 걱정 없이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이제야 겨우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데 또다시 포화 속을 뚫고 이동해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위험한 건 알아.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최수빈의 얼굴에도 난감한 기색이 떠올랐다.“포격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내부 첩자도 아직 못 찾았잖아. 여기 남아 있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해. 전투에 완전히 포위되기라도 하면 우리 모두 빠져나갈 수 없어. 민성 선배도 마찬가지고.”그러자 육민성은 송미연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시키고는 최수빈을 바라봤다.“새 거점은 어디야? 이동 경로는 안전하고? 핵심 샘플과 데이터 경호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몸이 아직 성치 않은 상황에서도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연구 성과와 사람들의 안전이었다.“이동 경로는 이미
직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최 팀장님, 임 팀장님! 빨리 와서 이것 좀 보세요. 실험 데이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이에 모두는 표정이 굳어 곧바로 실험용 컴퓨터 앞으로 몰려들었다.화면에 떠 있는 항공 소재 실험 데이터는 엉망이었다. 원래 일정하게 이어져야 할 수치 곡선 곳곳이 갑자기 끊겨 있었고 누군가 손댄 흔적도 선명했다.극한 환경에서의 내압 수치와 고온 내성 관련 핵심 파라미터까지 악의적으로 수정돼 있었다.육민성이 전선에서 가져온 원본 데이터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 탓에 실험 모델 전체가 무너져 더는 검증 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어떻게 된 거지?”최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데이터 접속 기록을 불러올수록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백엔드에 낯선 접속 기록이 있어요. 시간은 새벽 세 시쯤이고 접속 IP도 우리 내부망이에요. 흔적을 일부러 지운 것 같지만 조각난 기록이 조금 남아 있어요.”임수철의 표정도 단숨에 무거워졌다.“누군가 의도적으로 데이터를 건드린 거예요. 그것도 핵심 실험 단말에 접근할 수 있고 우리 내부 시스템 구조까지 잘 아는 사람이. 외부 해커가 암호화된 내부망을 이렇게 쉽게 뚫을 수는 없어요. 그러니 가능성은 하나뿐이죠. 내부에 첩자가 있습니다.”이 말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가뜩이나 정세가 불안한 타국에서 임무를 수행 중인 상황인데 바로 곁에 숨어든 누군가가 핵심 데이터를 조작해 연구를 망치려 하고 있다니...어쩌면 연구 성과를 노리는 적대 세력에 중요 정보를 넘기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최수빈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다.“실험 구역부터 즉시 봉쇄하세요. 핵심 데이터에 접근한 적이 있는 사람은 전부 조사합니다. 현지 협력 인력도 예외 없어요. 모든 실험은 일단 중단하고 남아 있는 데이터는 바로 백업하세요. 추가 훼손부터 막아야 합니다.”차갑고 단호한 지시가 떨어지자 모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렇게 내부 조사가 긴박하게 진행되던
송미연이 며칠째 곁을 지키며 세심하게 간호한 덕분에 육민성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관자놀이 쪽 상처도 서서히 딱지가 앉으며 아물어 갔다.타박상으로 인한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이제는 병실 안을 천천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할 필요도 없었다.그런데도 송미연은 여전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된 뒤에도 습관처럼 옆을 따라다니며 혹시라도 그가 무리하다 상처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했다.최수빈은 의료소 옆에 마련된 임시 사무 공간에서 국내 본부와 현지 협력 기관 사이의 업무를 계속 조율하고 있었다. 육민성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실험 데이터를 정리하는 한편, 항공 소재 연구의 후속 작업도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는 것이었다.그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주민혁에게 무사하다는 연락을 보냈다.주민혁 역시 늘 차분하고 침착한 말투로 답장을 보내왔다. 국경지대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은 일절 내색하지 않은 채, 걱정 말고 일에만 집중하라며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겠다고 했다.그렇게 모든 일이 겉보기에는 순조롭게 흘러가던 어느 날, 다급한 발소리가 사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현지 협력 기관의 보안 요원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최수빈에게 고개를 숙였다.“국내에서 파견된 지원팀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이쪽으로 이동 중이고 본부의 최신 지시 사항도 함께 가져왔다고 하네요. 도착하는 즉시 확인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최수빈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 서류를 정리했다. 긴장이 조금 풀린 듯 눈빛도 한결 가벼워졌다.지원 인력이 도착하면 이후 업무를 분담할 사람이 늘어난다. 육민성이 회복하는 동안 그들이 떠안아야 할 부담도 크게 줄어들 터였다. 무엇보다 지원팀이 가져올 보안 인력과 의료 자원은 이처럼 정세가 불안한 지역에서 그들의 안전을 한층 더 확보해 줄 수 있었다.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검은색 승합차 세 대가 의료소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사복 차림의 인원들이 차례로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 보니 급히 버리고 간 포장재 몇 개만 남아 있었다. 그 표면에서는 해외에서 사용하는 특수 연료의 흔적이 검출됐고 엘리아스가 이전부터 즐겨 쓰던 보급품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곧이어 국경 인근의 한 폐가에서도 최근 누군가 드나든 흔적이 발견됐다.집 안에는 지문도, 버려진 물건도 없었으나 벽 한쪽에 남은 갓 식은 담뱃재와 창밖의 짓밟힌 잡초만이 누군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었다.놀라울 만큼 깔끔하게 정리돼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이런 일에 익숙한 자의 솜씨였다.그 뒤로도 보고는 계속해서 들어왔다. 산림과 가까운 지역을 감시하던 은밀한 초소에서 밤중에 누군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것이었다.몸놀림은 민첩했고 장비도 전문적이었다. 상대는 초소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곧바로 우회해 빠져나갔고 추적할 만한 흔적은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하나, 둘, 셋...띄엄띄엄 흩어진 채, 그냥 지나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미미한 흔적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하나하나 따로 놓고 보면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는 단서들이었지만 그 모든 정보가 주민혁의 손에 모이자 결론은 하나로 좁혀졌다.엘리아스와 심종연은 떠나지 않고 아직 국내에 남아 있었다. 다만 완전히 숨어들어 이전보다 더 큰 판을 짜고 있을 뿐이었다.주민혁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 건 따로 있었다.상대가 이토록 오랫동안 지나치게 조용한 건, 그를 두려워해서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그가 방심할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질 순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순간을 말이다.그리고 주민혁의 신경을 가장 확실하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최수빈뿐이었다.이러한 생각이 들자 그는 곧바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상대가 이미 최수빈의 해외 파견 사실은 물론, 그녀가 정세가 불안한 지역에 머물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최수빈 쪽에서 일부러 일을 벌여 자신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