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호는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밤, 윤하경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뿐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이 터지면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연회장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고 하객들은 충격과 흥미를 동시에 느끼며 속삭이기 시작했다.‘이렇게 강렬한 스캔들은 처음 보네.’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윤하연은 당황한 나머지 미친 듯이 무대로 뛰어올라 구지호를 붙잡았다.“지호 오빠, 이건 아니야! 난 분명히...!”그러나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윤하경은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단숨에 그녀의 얼굴에 쏟아부었다.“말 안 해도 알아. 네가 한 짓이니까.”윤하경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그렇게까지 구지호가 좋으면 같이 살아. 저렇게까지 뻔뻔하게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정도라면...”그녀는 한걸음 물러서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둘이 잘해봐. 나는 빠질게.”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굽 높은 힐을 또각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녀의 뒷모습은 배신당하고도 품위를 잃지 않는 강인한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그 모습을 본 주미나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하경아, 가지 마!”윤하경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하지만 지호 오빠는 지호 오빠고 아줌마는 언제까지나 저에게 소중한 분이에요.”주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떨었다.“...하경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그러나 윤하경은 단호했다.“만약 이 일이 아줌마 친딸에게 일어났다면 그래도 참으라고 하시겠어요?”그 말에 주미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그 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연회장 끝 쪽에 서 있는 강현우와 마주쳤다. 그는 두 팔을 가볍게 접은 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강현우는 별다른 말도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
윤하경은 차 안에서 강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뭔가 바쁘게 작업하고 있었다.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강현우가 기사에게 말했다.“차 세워.”이번에는 기사도 알아듣고 즉시 차를 멈췄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몸을 돌려 강현우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녀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강현우의 차는 빠르게 사라졌다.“...”강현우의 변덕스러움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화가 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을 보자마자 예상대로 ‘윤수철’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어차피 그녀를 꾸짖거나, 다시 구지호와의 약혼을 진행하라고 강요하거나 전화할 이유는 뻔했다. 부녀 관계라고는 하지만 진심으로 위로해 줄 리 없었다.이제 와서 기대할 것도 없으니 굳이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윤하경은 본가로 가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향했고 소지연을 불러 뜨끈한 샤부샤부를 함께 먹기로 했다.얼마 후, 소지연이 큼직한 식재료 봉투를 들고 문을 두드렸다.“빨리 좀 받아 줘, 팔 빠질 것 같아.”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아니 대체 얼마나 많이 산 거야?”소지연은 웃으며 말했다.“네가 좋아하는 건 다 챙겼지.”소지연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며 너무 대놓고 윤하경의 표정을 살피자 윤하경은 바로 눈치를 챘다.“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소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오늘 약혼식에서 구지호랑 윤하연 얘기 들었어. 네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응. 네가 들은 그대로야.”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재료를 주방으로 옮기며 말했다.“근데 이건 네가 다 손질해야 해. 난 먼저 씻고 올게.”사실 그녀는 씻고 싶었다기보다, 몸이 온몸이 쑤셨다. 강현우와
윤하경은 원래 며칠 동안 조용히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돌아가서 임수연과 윤하연이 꾸며놓은 상황을 지켜보며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윤수철이 직접 찾아왔다.그의 첫 마디부터 듣기 거북했고 윤하경은 혀끝으로 얼얼한 뺨을 꾹 눌렀다.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윤수철을 바라보았다.“참 재미있네요. 오늘 경성 전역에서 저를 웃음거리로 만든 건 윤하연인데 정작 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먼저 저한테 화를 내러 오셨다고요? 윤수철 씨, 오늘 모욕을 당한 건 저예요. 그런데 저한테 손찌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으며 흥분한 탓에‘아버지’라는 호칭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라고 불리 울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너 지금 나를 뭐라고 불렀어?”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윤하경을 노려보았고 윤하경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죠?”“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딸이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위로 대신 손찌검을 해요? 제가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받은 게 대체 뭐죠? 단 한 번이라도 저를 위해 싸워주신 적이 있긴 한가요?”그녀의 날 선 말에 윤수철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고 숨소리조차 거칠어졌다.윤하경의 눈가가 붉어졌지만 그것은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체념과 서러움 때문이었다.“윤하연이 자기 형부 될 사람 침대에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하연이를 때리셨나요? 저는 아버지 딸이 아닌가요? 이게 사람 할 짓인가요?”그녀의 매서운 질문이 이어지자, 윤수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윤하연이 오늘 사진을 공개한 게 아니라고 해도 구지호 침대에 기어들어 갔고 구지호의 아이를 가졌잖아요!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은 아니잖아요.”그녀는 차갑게 고개를 들었다.“제가 궁금한 건 저랑 윤하연 중 누가 진짜 아버지의 친딸인가요?”그녀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윤수철의 얼굴에 순간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어요. 오늘부로
윤하경은 119를 불렀다. 원래 따라갈 생각은 없었지만 의료진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임수연이 울면서 뛰어왔다.“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그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며 소란을 피웠다. 윤하경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가만히 앉아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아버지가 너를 찾아갔을 때까지 멀쩡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했길래 이렇게 쓰러지신 거야?”임수연은 윤수철의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다가 마침내 윤하경을 발견하곤 손가락을 뻗어 그녀를 가리켰다.“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윤하경은 서두르지 않고 립스틱을 마저 바른 후, 거울을 닫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임수연을 바라보았다.“제가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다고요?”그녀는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제 약혼자를 유혹해서 잤고 심지어 아이까지 가진 딸을 둔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쓰러질 만하죠.”임수연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기분 나쁜 듯 콧방귀를 뀌더니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남자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놓고 네 동생을 탓하는 거야?”윤하경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그래요, 당신네 집안은 원래 남의 가정 깨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있잖아요. 누구도 못 따라갈 능력이죠.”임수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네가 못난 거야. 구지호는 우리 하연이를 사랑해. 그게 현실이야.”그러자 윤하경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그럼 그 사랑, 가문 족보에도 적어 넣어야겠네요. 대대로 남의 가정 깨는 재능을 잘 이어가세요.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사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었다.“너, 정말 입을 찢어버려야 정신 차리겠구나!”그녀가 달려들 듯 몸을 움직이자, 윤하경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병원을 나가려 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병원비는 당신이 내세요.”임수연은 잔뜩 흥분한
“듣자 하니 임 여사님이 하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윤씨 가문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임 여사님은 남의 가정에 끼어드는 걸 참 잘 아시겠죠. 그럼, 당신 딸이 형부라는 사람의 침대에까지 갔다고요? 그 집안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니 집안에서 물려받은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요.”강현우는 입꼬리에 미소를 띠며 날카로운 말을 내뱉었다.“하하하.”윤하경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강현우가 이렇게 직설적인 성격인 건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임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강현우에게 뭐라고 할 용기는 내지 못하고 대신 윤하경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좋아, 네 아버지가 깨어나면 내가 꼭 얘기해서 너를 제대로 혼내줄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가리며 피식 웃었다.“그 시간에나 딸이나 잘 가르치세요. 하연이가 과연 구씨 가문에 무사히 시집갈 수 있을지... 아이까지 가졌으면서 시집가지 못한다면 윤씨 가문의 망신이죠.”그런 다음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강 대표님, 괜찮으시면 저 좀 태워주세요.”그녀는 일부러 그렇게 말하며 강현우를 자극했다. 임수연은 강씨 가문의 지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강현우와 구지호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니까.강현우와 윤하경이 엮인 걸 보고 아마 임수연은 그녀의 성격상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윤하경은 그런 임수연을 보며 기뻐했고 일부러 강현우와 눈빛을 교환하며 그녀를 자극했다.강현우는 윤하경을 잠시 힐끗 보더니 마치 그녀의 속셈을 읽어낸 듯 말했다.“그래, 나야말로 영광이지.”강현우는 윤하경을 삼켜버릴 듯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심지어 손을 윤하경의 허리에 가볍게 얹으며 공기 중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속으로 생각했다.‘연기가 조금 과하네.’“강 대표님, 윤하경에게 속지 마세요.”임수연은 이를 악물고 비꼬며 말했다.“쟤는 항상 가련한 척, 연약한 척하면서 자기 동생까지 함정에
“뭐해요?”윤하경이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으려 했지만 강현우는 살짝 몸을 비켜 그걸 피했고 모든 세팅을 마친 뒤에야 핸드폰을 다시 윤하경에게 건넸다.윤하경이 핸드폰을 받아보니 강현우가 이미 구지호를 차단해 놓았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한 후,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강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차단 안 해? 볼 때마다 짜증 날 텐데. 다시 사귀려고?”윤하경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무슨 소리예요.”강현우는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눈빛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보였다. 윤하경은 짜증 섞인 웃음을 지으며 뒤로 몸을 기댄 채 그를 바라봤다.“현우 씨는 그런데 왜 병원에 있었어요?”그제야 윤하경은 두 사람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원에서 하필 이때 강현우를 만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강현우는 그런 윤하경을 가만히 쳐다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윤하경은 강현우의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듯 느껴져 불편했다.그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세요.”강현우는 그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기계적으로 기사에게 윤하경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윤하경은 차에서 내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문을 열었더니 그곳엔 강현우가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강현우는 윤하경을 아래위로 쳐다보며 말했다.“고맙다는 말 한마디로는 너무 형식적인 거 아니야?”윤하경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그녀는 문 앞에서 고개를 들며 그를 쳐다봤다. 복도의 따스한 조명 아래, 윤하경의 얼굴이 빛을 받아 더욱 빛났고 그녀의 길고 곱게 휘어진 속눈썹은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강현우의 마음을 자극했다.강현우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적어도 커피 한 잔은 대접해야 하는 거 아니야? 혹은 다른 걸로.”
강현우가 손을 뻗어 셔츠의 단추를 풀자 도드라진 목선이 드러났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당기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네가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말해봐.”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손끝은 멈추지 않았다. 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렇게‘정력 넘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외모나 능력은 누구나 인정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너무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라, 그동안 강현우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누구와도 두 달 이상 관계를 이어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그런 남자에게 더 이상 자신을 내어주는 건 결국 위험할 뿐이라는 걸 알았다. 관계는 그저 일시적인 것이고 강현우처럼 매력적인 남자는 한 번 경험하고 나면 그만인 법이었다.어차피 나중에 상처만 받을 테니까, 더 이상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잠시 머뭇거린 후, 윤하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우 씨는 곧 약혼하지 않으세요? 저는 윤하연 같은 여자가 되기 싫어요.”윤하경은 강현우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그러자 강현우가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순간 당황한 윤하경은 진해리와의 사건을 떠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 그게 아니라...”“그러니까, 네 뜻은 내 애인이 아니라 약혼녀가 되겠다는 거야?”윤하경은 그 말에 얼어붙었다. 강현우의 생각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윤하경, 너도 나름 매력이 있긴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는 마.”그의 눈빛에서 욕망이 사라지면서 그는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 윤하경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자기를 과대평가한 윤하경에 대한 비아냥거림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맞아요, 그런 운은 저에겐 없으니까요. 현우 씨는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아요.”강현우 집안은 경성에서 유명한 집안이었기에 결혼 상대는 반드시 진씨 가문과 같은 큰 가문이어야 했다.진해리는 분명 강현우의 미래의 부인감이었다. 예쁘고
기사는 차에서 내려 구지호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구지호는 술에 취해 있었고 큰 덩치를 가진 기사에게 끌려가면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넌 누구야?”구지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기사를 쳐다봤다.“올라가지 마세요.” 기사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아? 이거 놔!”기사는 말하지 않고 구지호를 끌어내어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더니 그를 택시 안에 밀어 넣고 돌아와서 정중히 강현우에게 말했다.“대표님, 집에 보냈습니다.”강현우는 손끝으로 얇은 입술을 문지르며 잠시 윤하경의 창문 쪽을 바라봤다.잠시 후, 그는 기사에게 말했다.“가자. 배지훈이 있는 곳으로.”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차를 떠났다. 강현우는 차에서 내린 후, 클럽으로 직행하여 한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고 강현우는 불쾌하게 얼굴을 찡그렸다.그는 술병을 발로 차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누워 있는 배지훈을 노려봤다.“뭐야? 거기서 숨어 있으려고?” 강현우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표정했다.그는 술상 위에서 위스키 한 병을 하나 집어 들고 목을 축인 후 그대로 배지훈 옆에 앉았다.배지훈은 비틀거리며 눈을 뜨더니 흐릿한 조명 속에서 강현우를 바라봤다.“왜 왔어? 진해리가 아프다며 병원에 갔다고 하지 않았어?”강현우는 짧게 대답했다.“해리는 나보다 널 더 원할걸?”“하...” 배지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술병을 다시 집어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이제 나랑 끝났어.” 그는 잠시 멈추고 강현우에게 술을 건넸다.“너라면 괜찮아. 해리가 네 곁에 있으면 난 걱정 없어.”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나를 뭐로 보는 거냐?”배지훈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강현우는 일어날 때 술병을 탁자 위로 던지며 말했다.“진해리는 내일 퇴원할 거야, 네가 데리러 가. 너희들 문제는 너희가 해결해, 나는 남이 버린 걸 고를 생각 없어.”그는 말을 마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