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몇 글자로 시간과 장소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잃었다.구지호의 스캔들이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고 있었고 그동안 주미나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왔다.심지어 나중에는 문자를 보내, 이번 일과 윤하경이 관련 있는지 따져 물었다.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짧게 답장을 보냈다.[그럼 제 기사는 아줌마랑 관련 있나요?]그 후로 주미나는 아무런 답장도 보내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주미나를 원망하지 않았다.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는 선택을 하게 마련이었다.주미나가 그랬고 윤수철도 그랬다. 그리고 이제는 윤하경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퇴근을 앞둔 저녁 무렵,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발신자 정보를 확인한 윤하경은 살짝 놀랐다.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구정수가 왜 연락했는지 알 수 있었다. 구지호의 스캔들이 터지면서 여론이 악화하자 결국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게 뻔했고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하경아, 나야. 혹시 시간 좀 낼 수 있어?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윤하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죄송해요, 아저씨. 오늘 저녁 약속이 있어요.”그녀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상류층 세계에서 불필요한 적을 만들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의를 차린다고 모든 걸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구정수는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하경아, 넌 똑똑한 애야. 이번 일은 분명 지호가 잘못했어. 그래서... 너희 아버지 말했던 병원 투자 건 말이야. 내가 이사진에 이미 논의해 보겠다고 했어.”그는 사업을 오래 해온 만큼, 협상의 타이밍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엔 상대를 잘못 골랐다. 윤하경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죄송해요, 아저씨. 제 아버지는 제 도움이 필요 없을
이곳에 온 이상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지만 너무 빠른 전개 아닌가? 그런데 강현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윤하경의 말을 들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윤하경은 혼자 거실에 남겨진 채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차에, 마침 집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윤하경은 그녀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저... 실례지만 강 대표님 방이 어디예요?” 집사는 2층을 가리키며 답했다. “계단 올라가서 오른쪽 두 번째 방이에요.” “감사합니다.” 윤하경은 정중하게 인사한 후, 계단을 올라갔다. 강현우가 방에 없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런 상황도 처음이 아니었고 괜히 어색해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 되뇌며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후, 타월을 두른 채 방을 나왔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그녀는 결국 옷장에서 그의 가운을 꺼내 입었다. 옷이 너무 커서 마치 아이가 어른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았다. 소매를 한 번 접으며 거울을 확인한 후, 그녀는 천천히 거실로 내려갔다. “현우 씨?” 거실은 이상하게도 시끌벅적했고 윤하경은 걸음을 멈춘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하하하! 강현우, 네가 이렇게 숨겨놓은 여자가 있었다고?”말하는 사람은 추성운이었다. 몇 번 본 적 있는 인물이었기에 윤하경도 얼굴은 익숙했다. 하지만 거실에는 그뿐만이 아니라 배지훈 그리고 진해리도 있었다.윤하경은 순간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었다.“진, 진해리 씨... 저는 저...” 그녀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변명하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의 차림새가 모든 오해를 부추기고 있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을 리가 없겠지. 오히려 변명하면 더 이상해질 뿐이야.’ 결국,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강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헐렁한 가운, 드러난 하얀 피부,
강현우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지만 윤하경은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그를 밀어냈다. “잠깐만... 진해리가 있어요.” 그녀의 말을 들은 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내려다봤고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낮고도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용히 하면 되겠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거칠었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미친놈!’윤하경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녀의 입술을 덮었고 뜨거운 숨결이 모든 망설임을 삼켜버렸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은 힘을 잃고 축 늘어져 버렸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윤하경의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거실은 텅 비어 있었고 멀리서 정원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창문 너머로 보니 진해리와 다른 사람들이 바비큐를 굽고 있었다. ‘이 상황... 너무 이상한데?’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피해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진해리가 그녀를 불렀다. “하경 씨! 여기 와서 같이 먹어요! 고기 다 익었어요.”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그녀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괜찮아요. 저는...” 그러나 진해리는 그녀의 팔을 잡고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이끌었다. 정원에는 바비큐 그릴과 넓은 테이블이 있었고 다양한 음식과 술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예정된 자리였고 강현우는 추성운, 배지훈과 함께 담담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윤하경은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 최대한 조용히 구석으로 가려 했지만 진해리는 그녀의 손에 닭꼬치를 쥐여주었다. “제가 구운 거예요. 한 입 먹어봐요.” 닭꼬치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그녀에게 진해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난 당신한테 화 안 났어요.” 그녀의 말에
추성운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윤하경과 강현우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알았어. 뜨거운 밤 보내. 방해하지 않도록 난 이만 가볼게.”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문 쪽으로 향했다. 떠나기 전, 윤하경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내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경 씨, 저번에 저한테 빚진 거 있죠?” 추성운은 윤하경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윤하경이 약혼을 한다는 소식에 한동안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약혼도 실패하고 강현우와 엮여 있는 시점에 추성운은 더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순간 윤하경은 멍해졌다가, 그가 말하는 것이 전에 술집에서 자신을 도와준 일이라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차갑게 시선을 던졌다. 추성운은 그 시선을 느끼고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쉿’이라는 제스처를 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윤하경과 강현우뿐이었고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윤하경은 강현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슬그머니 도망칠 타이밍을 찾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문득 바닥에 떨어진 붉은 흔적이 눈에 띄었다. 시선을 따라가자, 강현우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옆에는 깨진 술병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설마 손을 베인 건가?’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서 있었다. 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손에서 피 나잖아요.” 그제야 강현우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이런 태도에 윤하경은 더욱 답답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약 있어요?”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녀가 이런 말을 할 거라는 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에 괜
강현우는 담배를 꺼내 불을 끄고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별일 아니야, 그냥 가.” 그 말이 끝나자 그는 일어나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하경은 그 자리에 남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이 남자!’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강현우의 별장을 떠났다. 차에 타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그녀는 윤수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 집 주소는 이미 다 알려졌고 이제 더 이상 조용히 있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윤하경은 윤수철 집으로 돌아가서 임수연과 윤하연이 또 뭔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확인해 보려고 했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고 유 집사는 윤하경이 돌아온 것을 보고 놀라며 다가왔다. “하경 씨, 괜찮으세요?” 유 집사는 윤하경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그저께 하연 씨가 회장님한테 하경 씨 집 주소를 알려줬어요. 회장님이 하경 씨를 찾아가 문제를 일으킬까 봐 정말 걱정했어요.” 하도 상처를 많이 받았던 윤하경은 유 집사의 진심 어린 걱정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유 집사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죽을 가져왔다. “빨리 드세요. 내일 회사에 가져다드리려고 미리 끓여 놓은 건데.” 윤하경은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거절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어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그런데 윤하연은 어떻게 제 주소를 알았나요?”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은 소지연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원래는 평온한 피난처였는데 지금은 사방에서 바람이 새는 기분이었다. 유 집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연 씨가 조용히 있을 성격이 아닌 건 분명해요. 하루 종일 집에서 시끄럽게 굴기만 하니까요.” 말을 마친 유 집사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불행한 일을 겪다니... 임수연이 회장님을 빼앗고 이제 그녀의 딸까지 하경 씨의 약혼자를 빼앗으려 하고
“아줌마, 오늘 많이 힘드셨죠? 내일 하루는 푹 쉬세요. 병원에 가셔서 잘 진료받으세요. 그리고 이번 달 보너스는 두 배로 드릴게요.”윤하경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유 집사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얼른 가서 쉬세요.”그 말을 듣고 있던 윤하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윤하경이 유 집사에게 보너스를 주는 게 아니라, 완전히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윤하경은 윤하연을 슬쩍 힐끗 쳐다본 뒤,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하연아, 언니는 너의 꿈이 빨리 이루어지길 바랄게. 얼른 부유한 집안에 시집가길.”윤하연은 늘 약한 척하며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 하며 말해봤더니 의외로 꽤 기분이 좋았다.그렇게 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엉덩이를 살짝 흔들며 계단을 올라갔다.윤하연이 더 화가 날수록 윤하경은 더 즐거웠다. 계단을 올라가던 그 순간, 아래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윤하경은 짧게 눈을 감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다음 날 아침, 유 집사가 윤하경을 갑자기 깨웠고 윤하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아줌마, 오늘 쉬기로 했잖아요?”유 집사는 윤하경의 이불을 가볍게 두드리며 답했다.“저야 그렇게 귀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쉴 필요 없어요.”“일어나세요, 회장님이 돌아왔는데 지금 하연 씨를 벌하고 계세요.”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그녀는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정말요? 아빠가 윤하연을 벌한다고요?”그것은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윤하연이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윤수철이 그녀에게 큰소리로 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윤하경은 그 상황을 놓칠 수 없었다.윤하경은 급히 화장실에 들어가 씻고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실에서 윤하연이 무릎을 꿇고 있었고 윤수철은 소파에 앉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임수연은 한쪽에
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그동안 윤수철은 한 번도 윤하경을 위해서 나선 적이 없었다. 언제나 윤하경은 모든 책임을 떠안았고 윤하연은 늘 울면서 자신이 피해자라는 듯 행동했다.그런데 오늘, 윤수철이 처음으로 윤하경을 위해 나섰다. 윤하경은 잠시 당황해서 커피잔을 든 손을 멈추더니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저는 그 사과 받을 자격 없어요.”임수연은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 몰랐는지, 급히 윤하연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팔을 살짝 눌렀다.“하연아, 아빠 말 들어. 하경이에게 사과해.”하지만 윤하연은 이미 여러 번 윤하경에게 당한 후였기에, 이번만큼은 절대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무릎을 꿇었지만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지호 오빠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어.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뭐가 잘못된 건데?”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 윤하연은 마치 자신이 구지호와 사귀는 게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 사실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윤하경은 윤하연의 말에 답하기도 아까운 듯 한숨을 쉬었다.“윤하연, 너 정말 뻔뻔하네. 내가 구지호랑 사귄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네가 이렇게 말하는 건 정말 대단해.”임수연은 윤하연의 고집을 보고 팔꿈치로 살짝 그녀의 팔을 찔렀다. 윤하연은 잠시 망설였지만 여전히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윤수철은 그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는지, 손에 든 물컵을 바닥에 내던졌다.그러자 윤하경은 그 장면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하... 역시 아빠는 변한 게 없어. 내가 물컵을 맞을 때는 한 번도 이렇게 가볍게 던지지 않았는데.’윤하경은 아무렇지 않게 등을 기대며 다시 앉았고 그때 윤수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너 정말 실망이야. 오늘 사과 안 하면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야.”윤하연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얼어붙었다.“아빠, 무슨 말씀이세요?”윤수철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이빨을 꽉 물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윤하경은 늘 결정을 신속하게 내렸다. 윤하연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해도, 윤하경은 절대 어리석지 않다.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윤하연이 USB를 놓고 간 그 순간, 그 장면이 찍힌 것이다. 만약 이 사건이 커지면 결국 윤하연이 더 창피를 당할 것이다.임수연이 잠시 말을 막고 반박하려는 찰나, 그 옆에 있던 윤수철이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그만해! 너는 언제까지 우리 가문을 이렇게 망신 주려고 하냐?”임수연은 더 이상 변명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며 윤하경에게 사과했다.“내가 잘못했어. 언니 용서해 줘.”윤하경은 별로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다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서 떠나려 했다.하지만 아직 문을 나서기 전, 윤수철이 그녀를 불렀다.“하경, 잠깐만. 서재에 와서 얘기 좀 하자.”윤하경은 속으로 좋은 얘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하, 이런 연극을 아침부터 하더니 결국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그녀는 뒤돌아보며 짧게 말했다.“미안하지만 저는 곧 출근해야 해요.”윤수철은 말없이 잠시 숨을 들이마시고는 조용히 말했다.“그 집 문제야. 정말 얘기 안 할 거야?”윤하경은 잠시 생각을 멈추고 그런 제안이 갑자기 나온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그 집을 넘겨줄 생각이 하나도 없더니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분명 무언가 요구가 있겠지.’“알았어요.”그 말을 남기고 윤하경은 윤수철의 서재로 향했고 소파에 앉아, 윤수철이 무엇을 더 하려는지 지켜보며 기다렸다.10분 후, 윤수철이 서재로 들어왔다. 병원에 다녀온 후라 그런지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그는 책상에 앉고 나서 윤하경을 바라보았다.“빨리 말해요. 오늘 좀 바빠요.”윤수철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어제 구씨 가문에서 전화가 왔어. 우리 회사에 투자하겠다고 하더군.”“그래서요?”구정수가 윤수철에게 전화했다는 사실에 윤하경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하지만 조건이 있어. 네가 나서서 그 사건은 오해였다고 해. 윤하연과 구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