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이 흐른 뒤, 윤하경은 손에 쥔 검사지를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고작 얇은 종이 한 장일 뿐인데 그 무게는 천근만근처럼 느껴졌고 손끝까지 떨려, 제대로 붙잡는 것조차 힘들었다.옆에 서 있던 강현우 역시 고개를 숙인 채 결과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표정 위로 깊은 주름이 이마에 드리워져 있었다.“나... 나 진짜 임신한 거야?”윤하경은 믿기 힘들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자신의 뱃속에서 또다시 작은 생명이 싹을 틔우고 있다는 게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기뻐해야 할 일인 건 분명한데 문득 진해리가 떠오르자 마음이 흔들렸다.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윤하경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버지가 된 기쁨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무거운 그늘만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순간, 윤하경의 숨이 턱 막혔다.‘혹시... 강현우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걸까?’그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하경은 이를 악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현우 씨가 싫다면... 우리 그냥 이혼해요. 아이는 제가 혼자 키울게요.”엄마도 외할아버지도 세상에 없는 지금, 뱃속의 이 아이는 윤하경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핏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생각이었다.그런데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강현우가 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노려봤다.“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해?”이를 악물며 뱉은 목소리는 낮게 떨렸고 눈빛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네가 도망치면... 내가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윤하경은 원래 쉽게 눈물 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강현우의 말 한마디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서러움이 밀려오며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흐윽...”참으려 했지만 끝내 터져 나온 울음은 병원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강현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허둥지둥했다.“야, 아니... 울지 마. 그게,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평소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던 그였지
강현우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때 휴대폰이 진동했고 화면을 확인한 그는 배지훈이 병원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보았다. 그는 가볍게 눈썹만 치켜올린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잠시 후 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다.윤하경은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느꼈지만 막상 병원에 들어가 피를 뽑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안해졌다.차 안에서 머뭇거리던 윤하경은 차 문을 열어주려는 강현우를 바라보며 헛기침했다.“저기... 굳이 안 가도 되지 않을까요? 그냥 속이 좀 안 좋았던 것뿐 같아요.”강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괜히 마음이 쪼그라든 윤하경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피했다.“그럼... 내일 아침에 올까요? 혹시 공복이어야 하는 검사도 있을지 모르니까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하경은 비명을 질렀다.“아, 뭐 하는 거예요! 저 내려놔요!”강현우는 늘 그렇듯 기다림 따위 없는 사람이었다. 윤하경이 질질 끌며 미루자 단박에 몸을 숙여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메고는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내려놔요! 현우 씨!”윤하경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병원 복도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고 본래 눈에 잘 띄는 외모의 강현우가 여자를 어깨에 메고 걸어 들어오자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심지어 지나가던 강아지조차 빤히 올려다볼 지경이었다.윤하경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속으로만 울부짖었다.‘이대로는 정말 창피해서 못 살겠다...’곧바로 의사 진료실에 도착하자 강현우는 윤하경을 의자에 앉히듯 내려놓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검사 좀 해주세요. 몸이 안 좋아서요.”의사는 강현우를 알아보자마자 반갑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아, 대표님. 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이곳은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개인 병원, 게다가 강현우가 지분까지 가지고 있는 병원이었기에 분위기는 금세 달라졌다.곧 간호사가 들어와 피를 뽑고 각종 검사를 준비했다.한창 진행되던 중, 의사가 문득
윤하경과 강현우는 복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식당으로 향했다.강현우가 예약해 둔 자리에는 이미 음식까지 차려져 있었고 그중 대부분은 윤하경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할 틈도 없었던 윤하경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 앉아 맛있게 먹을 생각으로 젓가락을 들었다.그런데 코끝에 불현듯 역한 냄새가 스쳐 지나갔다.“윽...”속이 울렁거려 윤하경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막 자리에 앉으려던 강현우는 순간 몸을 멈추고 윤하경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따라나섰다.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윤하경은 세면대에 몸을 기대 토해내려 했지만 나오지도 않고 얼굴만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그 모습이 안쓰러워 강현우는 그녀의 등을 넓은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뭐 잘못 먹은 거야?”한참 뒤에야 속이 좀 가라앉은 윤하경은 수도꼭지를 틀어 손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고는 눈가가 벌겋게 충혈된 얼굴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하지만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다.강현우의 눈매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진해리가 약을 먹인 일들이 스쳐 지나가자 그의 입술은 단단히 다물어졌다.곧 그는 윤하경의 손목을 단단히 잡고 밖으로 향했다. 윤하경은 예상치 못한 힘에 이끌리며 당황해 물었다.“어디 가는 거예요? 식사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눈길이 테이블 위 가득한 음식으로 향하자 다시 속이 울렁거릴 것만 같았다.그제야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분명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왜 이렇게 거북한지, 윤하경은 자신도 알 수 없었다.차에 오르자 강현우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자. 괜히 진해리처럼 당하고도 모르는 일 생기면 안 되잖아.”윤하경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그의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잘생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설마... 현우 씨 바깥에도 저를 해치려고 약까지 먹일 여자가 따로 있는 건 아니겠죠?”강현우의 눈빛이 순간
배지훈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병실에서 나왔다.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져 있었고 완전히 초라한 몰골이었다.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윤하경은 그가 마지막으로 나오는 걸 보고 천천히 일어섰다. 방 안에서 벌어진 일은 소리가 커서 거의 다 들렸기에 무슨 상황인지 대략 알 수 있었다.진해리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두 집안의 문제였다. 양가 부모까지 들어왔을 때는 자리를 비켜야겠다 싶었지만 막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해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배지훈은 문 앞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윤하경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하자,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저... 지금 꼴이 한심하게 보이죠?”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처참한 몰골임은 분명했다. 자신이 아는 배지훈은 언제나 말쑥하고 거만했는데 이렇게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었다.그럼에도 윤하경은 잠시 눈길을 준 뒤, 곧 시선을 거두었고 아무 일도 못 들은 듯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발소리를 들은 진해리가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 고개를 들더니 울음으로 콧소리가 짙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저 혼자 있고 싶어요.”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스스로 감당하고 풀어내야만 했다.“아이는 아직 인큐베이터에 있어요. 지금 아이 곁에는 해리 씨밖에 없어요.”진해리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울음을 삼켰다.윤하경은 안쓰럽게 한숨을 내쉬고 병실을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배지훈이 문 앞에 서 있었고 윤하경은 배지훈의 곁에 멈춰 서서 단호하게 말했다.“정말 해리 씨를 위한다면 지금은 그냥 가세요. 더는 상처 주지 말고요.”배지훈의 몸이 휘청거렸다. 분명 키가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임에도, 지금 윤하경 눈에는 마치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애초에 이런 꼴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윤하경은
방선자는 잠시 굳어졌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저... 저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만 해리가 낳은 아이가 배씨 핏줄인 건 사실이잖아요. 설령 이혼한다 해도 아이까지 진씨 가문에서 데려가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이문주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네 아들이 바람피워도 모자라서 내연녀까지 부추겨 내 딸을 해치게 했잖아. 덕분에 애가 조산까지 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여기 와서 우리 해리 속을 긁어대? 게다가 이제는 아이까지 빼앗겠다고?”이문주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갈라졌다.“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절대 그럴 일 없어.”쾅!그 말은 진해리의 가슴속에서 천둥처럼 울렸다. 이미 진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문주의 입에서 직접 듣는 순간, 심장이 뭉개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이문주는 흥분한 나머지 모든 걸 쏟아내고 말았다.진경호가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렸다. 그제야 이문주는 자신이 실수로 진실을 말해버렸음을 깨달았다.놀란 눈길로 진해리를 바라봤지만 이미 그녀는 굳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이문주는 무언가 수습하려 다가가려 했으나, 진해리가 손을 휘둘러 침대 옆 탁자 위의 물건들을 바닥으로 쓸어내렸다.“나가! 전부 다 나가라고 했잖아!”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던 진해리였지만 그 순간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해리야...”이문주가 조심스레 다가오려 하자 진해리는 차갑게 눈을 들어 쏘아보았다.“엄마도 나가요. 다들 당장 나가줘요.”배강현과 방선자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릎 꿇은 아들을 한 차례 더 흘끗 본 뒤 결국 방을 나갔다. 진경호와 이문주 역시 찡그린 얼굴로 한동안 머뭇거렸지만 끝내 딸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병실을 비웠다.넓은 병실에는 어느새 배지훈과 진해리, 두 사람만 남았다.진해리는 눈가를 훔치고 다시 배지훈을 노려보았다.“너도 나가.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그러나 배지훈은 무릎을 꿇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진해리의 시선이 탁자 위 물컵으로 옮겨졌다.순간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어 그의 머리 위로 내던졌다.
진해리는 조급해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고 차분한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방선자는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진해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지듯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해리야, 우리 집 못난 아들이 네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어. 그래도 한 가지만 알아줘. 우리 배씨 집안은 너 하나만을 며느리로 인정하고 손녀 역시 우리 전부야. 나랑 네 시아버지랑 얘기했는데 손녀가 돌 지나면 배인 그룹 주식 10%를 우리 손녀 앞으로 넘기기로 했어.”꽤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잘못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지훈이 저지른 일이 크다는 뜻이었다.진해리의 눈빛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녀는 방선자의 손을 조용히 뿌리치고 고개를 들었다.“고맙습니다, 어머니. 하지만 그건 나중 문제예요.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우리 아이가 왜 갑자기 세상에 나와야 했는지 그 이유예요.”방선자는 순간 말을 잃고 굳어졌다. 자신이 아무리 달래고 조건을 내밀어도 진해리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란 걸 알아버린 것이다.방선자는 이를 악물고 아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네가 한 짓은 네 입으로 말해.”하지만 배지훈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고 고개를 떨군 채 침묵만 흘렀다.배강현은 얼굴이 굳은 채 아들을 노려보다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잠시 멈칫하더니 끝내 두 번째 뺨을 올리지는 못했다.그는 한숨을 내쉬며 진해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해리야, 네가 이성적인 아이라는 거 아버지도 잘 알아. 지훈이 문제는 내가 확실히 책임지게 할 거야. 우선 지훈이가 가진 지분의 절반을 너와 아이 앞으로 넘기게 할게. 나머지 절반은 훗날 네가 둘째를 낳으면 그때 줄게. 우리 배씨 집안의 큰며느리는 오직 너뿐이야. 아이를 위해서라도 섣부른 판단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진해리는 그 말이 몹시 우스꽝스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었다.“아버님, 아직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는데 벌써 둘째 얘기를 꺼내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그녀는 눈을 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