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팀장님.”그녀는 다가가서 오건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오건우는 즉시 손을 내밀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가 내민 손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비쳤다.윤하경은 가까이서 그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는데 아마 오늘 밤 그에게 아부하러 파티에 온 여자로 생각한 모양이다.“저는 한빛 그룹의 신임 부대표 윤하경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녀의 자기소개를 듣고서야 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제야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오건우예요.”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람을 깔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윤하경은 약간 긴장되었다. 오기 전에 오건우의 자료를 보지 않고 그저 말투로 보아도 이분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아냈다.이제 이 사람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윤하경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오 팀장님, 시간 되시면 이야기 좀 나눠 볼 수 있을까요?”오건우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조용했다.“죄송한데 시간이 없네요.”윤하경은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오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하경을 에돌아 자리를 떠났고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윤 부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우린 이미 오 팀장님과 여러 번 약속을 잡았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이번에 계약을 달성하지 못하면 우리는...”비서가 말을 다 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회사의 재무제표를 보았는데 만약 한빛 그룹에서 최대 고객사인 오 팀장을 잃으면 아마 회사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강현우도 비록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결국 한계가 있었다.그렇다고 앉아서 밑천만 바라고 놀고먹으면 언젠가 망하기 일쑤였다.“괜찮아요. 오늘 저녁에 기회를 찾아봐야죠.”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어요.”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가서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윤하경은 오건우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이번 만찬은 교외 호텔에서 열렸기 때문에 밤의 정원은 실내보다 훨씬 고요했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하이힐을 또박거리며 그를 따라갔다.“오 팀장님, 계시나요?”그녀의 목소리는 밤하늘에 맑게 퍼졌지만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몇 걸음 더 나아가며 다시 불렀다.“오 팀장님, 어디...”“악...”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소리 지르지 마. 나야!”“오 팀장님?”이 작은 방에는 불이 꺼져 있지 않았고 그저 정원의 가로등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윤하경은 눈을 깜빡이며 마침내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그런데 그녀는 곧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건우의 호흡이 너무 거칠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그러세요?”“시치미를 떼긴.”오건우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찼다.“네가 한 짓이야?”윤하경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뭐라고요?”“나에게 약 먹인 거 말이야.”오건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산한 눈빛으로 어두운 조명을 뚫고 윤하경을 바라봤다.윤하경은 멈칫거리다가 욕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무슨 헛소리예요? 저는 그저 계약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흥...”오건우는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간계를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윤하경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정말 제가 아니라고요.”“그럼 왜 따라왔어?”오건우의 목소리는 점점 불안정해졌다.이 질문에 윤하경은 어이를 없어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말했잖아요. 저는 그저 계약에 관해 얘기하러 왔을 뿐이라고요.”이 말을 듣자 오건우의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계약을 따내기 위해 약을 탔나 보네.”윤하경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제정신이 아니죠?”오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밑바닥에서 한 계단씩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는 갖은 속임수를 다 겪어왔다. 윤하경의 이 수단을 한눈에 간파하고는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문밖에서 두 여자의
윤하경은 속으로 울고 싶었다.‘어떻게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어.’오건우는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어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을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흐트러졌다.“나랑 하룻밤만 있어. 계약 조건은 네가 정해.”윤하경은 모욕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죄송합니다. 오 팀장님, 저는 몸 파는 사람 아니에요.”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하다 보니 그녀의 말투는 좋은 편이 아니다.오건우도 이를 악물었다. 약 효과 때문인지 윤하경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 같았다.특히 윤하경의 벌름거리는 붉은 입술이 새빨간 금단의 열매처럼 보여 한 입 먹어보고 싶었다. 한 입만 먹으면 그는 곧 해방될 것만 같았다.“3년... 아니면 기간은 네가 정해.”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기 욕망을 억제할 줄 아는 남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결국 약효과를 감당할 수 없었다.모든 모공이 지금 당장 이 여자를 품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있지만 그의 이성은 적어도 윤하경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말해준다.윤하경은 이 순간 오건우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보았다.이 작은 방은 잡동사니를 넣은 창고 같았는데 안에는 물건이 많지 않았고 텅 비어 있어 돌멩이도 보이지 않았다.“오 팀장님, 진정하세요. 저를 내보내면 의사를 불러줄게요.”그녀는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방도 비서가 들고 있어 도움을 청할 방법조차 없었다.순간, 그녀는 울고 싶었다.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오건우는 마지막 이성마저 흐트러진 채 윤하경의 빨간 입술에 키스하려고 고개를 숙였다.윤하경은 급히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손이 테이블 옆에 놓인 꽃병에 닿았다.그녀는 내심 기뻐하며 주저 없이 꽃병을 들어 오건우의 머리를 내리쳤다.오건우는 그녀를 놓아주며 체력이 바닥 나서 쓰러졌다.윤하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나가려던 순간 누군가가 발로 문을 걷어차서 열었다.문 앞에는 큰 키를 가진 남자가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계산이라뇨...”윤하경이 중얼거리며 되풀이했다.오랜 시간 동안 강현우를 요해해온 윤하경은 그가 말하는 이 계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윤하경은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제 말을 들어보세요.”그녀는 손을 문잡이에 놓으며 도망치기 쉬운 자세를 취했다.그러나 강현우는 그녀의 당황한 눈빛을 보며 오히려 눈동자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팔을 뻗어 윤하경을 쉽게 옆 테이블에 앉힌 후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남자의 훤칠한 몸매는 압박감에 넘쳤다. 윤하경은 왜 번마다 이런 일에 휘말려야 하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설명할 거 없어?”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는데 압박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말투는 또 너무 차가워서 몇 번이고 함께 잠자리를 가진 사람하고 얘기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낯선 사람 같았다.윤하경은 속으로 불평했다.“내가 우연이라고 말한다면 믿을 수 있어요?”강현우는 눈꼬리를 살짝 올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내가 믿어야 할까 아니면 말아야 할까?”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저놈이 널 건드렸어?”강현우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윤하경은 급히 부인했지만 방금 오건우가 그녀의 뺨에 뽀뽀를 했었던 것이 떠올라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저는 정말 억울해요. 원래 오늘 오건우 씨를 찾아와 계약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는데 글쎄 약에 중독됐을 줄 몰랐어요.”“결국엔 널 건드렸네.”은하경은 할 말을 잃었다. 강현우는 역시 요점을 잘 파악했다.윤하경이 말이 없자 강현우는 두 눈을 가늘게 떴는데 그 눈동자는 어두운 조명 아래 유난히 밝았고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아프게 그녀를 찔렀다.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뻗어 강현우의 허리를 잡고 애교를 부렸다.“정말 현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에요.”강현우는 몸이 경직되며 눈동자에 비친 어두운 기운이 마침내 조금 걷혔다.그는 손을 뻗어 윤하경의 옷을 벗기며 거친 손가락으로 그녀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박소희였다.그녀가 이런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아마도 강현우를 위해서일 것이다.윤하경은 강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사람이 왔어요. 여기서 해야 할까요?”비록 그녀는 방금 박소희와 대면했었지만, 박소희는 아직 그녀와 강현우가 함께 잠자리를 가진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만약 이 장면을 목격했다면, 박소희의 성격상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윤하경은 사실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다.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도 간신히 대처하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피해 가는 일들은 될수록 피하려 했다.그러나 그녀는 흥분한 기운을 숨기지 못하였다. 강현우는 오히려 윤하경이 자신을 꼬신다고 생각하였다.강현우는 씩 웃으며 윤하경에게 속삭였다.“사람이 있다고?”“더 흥분되지 않아?”‘미친놈!’윤하경은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강현우는 일부러 더 힘을 주어 그녀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몸을 스칠 때마다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윤하경은 입술을 꽉 깨물고,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간신히 애를 썼다.박소희는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강현우가 여기로 오는 걸 봤다고 하지 않았나?”“왜 아무도 없지?”윤하경은 길고 여린 손가락으로 강현우의 옷을 꼭 잡아 쥐었다.그녀는 한차례 ‘괴롭힘’을 당하고 나니 몸이 나른해졌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힘이 남아돌았다.“강현우, 제발...”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듯했다.하지만 강현우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그녀를 봐주지 않았다.“아마 갔겠지. 강 팀장님처럼 그런 사람은 이런 잡다한 방에 있을 리가 없어.”안현주는 박소희에게 말했다.“어서 가자. 강 팀장님 밖에 있을 수도 있어.”박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후, 하이힐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윤하경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현우는 이 틈을 타서 그녀의 치마 속에 손을
윤하경은 발걸음을 멈췄다.일부러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박소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윤하경은 귀찮아 그냥 무시하려 했지만 일을 더 크게 벌이기 싫어 박소희에게 애써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소희 씨.”박소희는 비록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눈길은 윤하경의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목에는 눈에 띄도록 선명한 빨간 자국이 있었는데 조금 전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강소희는 강현우를 흘끔 쳐다봤다.하지만 강현우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윤하경은 박소희가 아무 말 없이 계속 자기 목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을 보고, 아까 강현우가 미친 듯이 자신을 괴롭히던 장면이 떠올랐다.목에 빨간 자국은 강현우가 남긴 것이 분명하다.박소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강현우에게 물었다.“현우야, 아까 하경 씨랑 어디 갔었어?”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듣고 마치 웃긴 얘기를 들은 듯한 눈빛으로 박소희를 쳐다보았다.강현우가 대꾸하지 않자, 눈길을 윤하경에게로 돌렸다. 자신의 물음에 대답하라는 듯이 윤하경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녀는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박소희에게 대답했다.“소희 씨,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저 방금 화장실 다녀왔어요.”“현우 씨는 방금 어디에 계셨나요?”윤하경은 강현우를 힐끗 쳐다봤다.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나도 모르지.”박소희는 윤하경과 강현우를 번갈아 가며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그녀는 윤하경의 말을 믿지 않는 듯 보였다.윤하경은 이제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강현우에게 홀랑 당해버린 그녀는 빨리 이 이상한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소희 씨, 할 얘기 다 하셨으면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렇게 가시면 안 되죠.” 박소희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하경 씨, 현우 씨랑 꽤 친하지 않아요?”“사실 저 경성에서 사귄 친구가 별로 없어요. 오늘은 현우 씨의 파트너로 왔지만, 경환 씨도 결국 남자잖아요. 우리 어찌
평소라면 윤하경은 오 팀장님과의 관계를 더 가까이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갔겠지만 조금 전 강현우와의 약속이 생각났다.만약 강현우의 말을 어긴다면, 아마도 오 팀장님과의 계약을 따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윤하경은 우슬기에게 말했다.“내일 아침에 오 팀장님께 드릴 병문안 선물을 준비해. 내일 같이 가자.”우슬기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지금 어디로 갈까요?”윤하경은 손목에 찬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너 먼저 가. 나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우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우슬기의 모습이 사라지자, 윤하경은 지하실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강현우의 차는 찾기 쉬웠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예상 밖으로 박소희도 그곳에 있었다.“현우야, 아줌마가 나더러 너랑 같이 가라고 하셨어. 여기에 나만 버리고 이렇게 가버리면 나보고 어떻게 돌아가라는 거야?”강현우는 키가 크고 날씬한 체형이라 그 옆에 키 작고 아담한 박소희와 함께 있으면 둘이 꽤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차 뒤에 몸을 숨겨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이때 강현우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그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박소희는 잠시 멈칫하였다. 강현우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박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줌마가 너더러 나 데리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밥이라도 먹으라 하셨단 말이야.”“시간 없어.”강현우는 손목시계를 보고 차 문을 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비켜.”박소희는 비켜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나 안 비켜. 아줌마가 신신당부하셨단 말이야! 현우야, 나도 데리고 가주라.”박소희는 특별히 예쁜 타입은 아니지만 달콤하고 귀여운 건 사실이었다.다른 남자라면 박소희의 애교에 무조건 넘어갔을 것이다.하지만 강현우는 이 상황이 귀찮은지 얼굴에는 짜증으로 가득했
윤하경은 휴대전화를 들어 올려 확인했다.‘돈줄’은 간단명료하게 한마디만 보내왔다. [호텔 입구.]“후...”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었다.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작은 기대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고, 체념한 듯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역시나, 호텔 입구에 도착하니 강현우의 눈에 띄는 차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윤하경은 차분히 조수석 문을 열었다.차에 앉자마자 곧바로 차 엔진이 굉음을 내며 울렸다.그녀는 반사적으로 안전 손잡이를 붙잡고 서둘러 안전벨트를 맸다.강현우는 조용히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웃는 듯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방금 재밌게 구경했어?”“...”“제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분명 자신은 꽤 잘 숨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강현우는 콧방귀를 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대신 윤하경에게 되물었다.“박소희가 그렇게 무서워?”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무서운 건 아닌데. 그냥...”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더 이상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귀찮다고?”강현우가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눈빛이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그는 곁눈질로 윤하경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표정이 어느새 폭풍이 몰아칠 듯한 분위기로 바뀌었다.윤하경은 속으로 겁이 덜컥 났다. 자신이 아까 했던 말들을 반복해 되새겨보았다. 혹여나 말실수했을까.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원래도 빠르던 속도가 더욱 치솟았다.윤하경은 긴장한 채 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그러다 차가 급회전하자 중심을 잃고 강현우 쪽으로 쏠렸다.그 순간, 실수로 강현우의 허벅지를 짚고 말았다.그것도 아주 민감한 부위를.윤하경은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그러자 강현우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아직 도착도 안 했는데, 뭐가 그리 급해?”그의 목소리는 느릿하고 차분했다. 강현우는 씩 웃고는 속도를 조금 낮추었다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