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부류의 인간한테는 말로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예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저열한 욕망에 눈이 먼 남자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그녀가 무시하자 남자는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꺼져. 지금이라도 안 놔주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윤하경이 단호하게 소리쳤지만 상대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비죽 웃으며 말했다.“에이, 왜 그래. 다 처음엔 부끄럽지. 좀 놀아보면 괜찮아진다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윤하경은 더는 참지 않고 소리쳤다.“사람 살려요. 도와주세요!”제발 누군가라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차라리 아까 강현우 차에서 버티고 안 내리는 건데...’윤하경은 후회가 밀려왔다.“닥쳐. 소리 지르지 마!”남자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한쪽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윤하경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상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셌기에 그녀의 발버둥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 같았다.벽에 밀쳐진 채 벗어날 수 없게 된 그녀 앞에서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돈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네 옷차림 보면 딱 답이 나오잖아. 화장 떡칠에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선 뭐... 그냥 산책하는 거야?”남자는 그러면서 바지를 내리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그 입에서는 숨 막히는 악취가 풍겼고 윤하경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세게 물었다.“악!”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빼는 동시에 뺨을 올려 그녀를 세게 후려쳤다.그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에 정신이 멍해졌다.간신히 고개를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곧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쓰러진 그녀 앞에 이미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속옷까지 드러난 그의 모습에 윤하경은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건드리지 마. 넌 진짜 죽게 될 거야.”하지만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죽는다고? 너 같은 여자랑 한
윤하경은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겨우 떠오른 사람처럼 붙잡은 나무토막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현우를 꼭 껴안았다.강현우는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를 꽉 깨물고는 윤하경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뒤쪽을 돌아보니 민진혁이 그녀를 덮치려 했던 남자의 목을 발로 밟고 있었다.“사장님, 놈은 제압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남자를 노려봤다.그 눈빛에 담긴 살기는 말없이도 민진혁이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깊었다.“숨은 붙여놔. 그리고 경찰서로 넘겨.”“예. 일단 헤븐으로 데려가죠.”헤븐에 한 번 끌려간 자 중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구지호 같은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이따위 놈이 무사히 나올 리가 없었다.민진혁은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고 바로 우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건 들어왔어. 바로 처리해.”한편 강현우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윤하경을 조심스레 차량 뒷좌석에 앉혔다.몸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그의 손끝에도 그녀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강현우도 따라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갑자기 윤하경의 옷을 풀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윤하경이 가슴을 감싸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강현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으나 불쾌한 눈빛은 없었다.“다친 데 없나 보려고.”그제야 윤하경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렸고 긴장이 풀리자 금방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강현우는 그녀의 몸을 살폈고 무심코 발목을 건드렸다.“으악!”윤하경은 날카로운 통증에 숨을 들이켰고 강현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하얗고 곱던 발이 그만큼 부어오른 걸 보자 그의 이마에 또 주름이 졌다.강현우는 조심스레 샌들을 벗기고 손끝으로 부은 부위를 살짝 눌렀다.그러자 윤하경이 움찔하며 물러났다.“아파요.”그녀의 여린 목소리가 귀에 닿자 강현우는 순간 다
윤하경은 강현우 품에 꼭 안긴 채 병원으로 들어갔다.얼굴은 끝까지 그의 가슴팍에 파묻은 채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하는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 번 훑어보더니 살짝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안고 있는 게 그렇게 창피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그런 건 아니고... 혹시 폐 끼칠까 봐. 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당장 기사 나겠죠. 이런 모습 찍히면 나중에 여동생이라고 해명이라도 하셔야 할지도 몰라서요.”나름 배려심 가득한 말투였지만 강현우의 반응은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의 턱선이 딱 굳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이런 말 하는 걸 보니 입은 아직 덜 다친 모양이지.”말투는 가볍지만 묘하게 날카로웠다.윤하경은 그제야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 굳이 그와 말싸움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몇 분 뒤 강현우는 그녀를 진료실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고 의사가 간단히 살펴본 후 말했다.“다른 데는 문제 없고 발목이 삐었네요. 며칠은 푹 쉬셔야겠습니다.”그리고 곁에 있던 강현우를 돌아보며 웃었다.“여자 친구분 잘 챙기셔야겠어요.”윤하경은 순간 손을 들어 해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강현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의할 점은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둘을 한 번씩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간은 격한 활동은 삼가셔야 해요. 잠자리도 포함해서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윤하경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강현우는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못 참으면?”“...”그 순간 윤하경은 진심으로 땅속에 숨고 싶었다.‘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의사 역시 말을 잃고 안경을 고쳐 썼다.“참으셔야죠. 반드시요.”강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경을 돌아보았다.“들었지? 못 참아도 참으래.”의사의 이상한 시선이 곧장 윤하경에게로 향
“도착했습니다.”우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강현우는 짧게 대답한 뒤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고 문을 열자마자 그 안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강현우를 보자마자 웃으며 일어났다.“전 미리 알았죠. 강 대표님이 분명 절 만나줄 거라고.”강현우는 아무 표정 없이 그와 마주한 소파에 앉아서 긴 다리를 꼬고 손가락으로 반지 장식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그래서. 어디서 봤다는 거지?”남자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마주 앉았다.“강 대표님, 너무 급하신 거 아닙니까. 제가 봤다면 진짜로 본 겁니다.”그러고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다만...”남자는 손가락 두 개를 비비며 웃었다.“이 먼 길 달려와 이렇게 뵈었는데... 차비 정도는 좀...”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짓했다.곧 우지원이 서류 가방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탁자 위에 놓고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두툼하게 쌓인 현금이 가득했다.남자는 그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눈빛이 탐욕으로 붉게 번졌다.강현우는 천천히 말했다.“여기, 4억.”남자는 입맛을 다시며 가방을 힐끔 보더니 억지로 욕심을 누르고 다시 앉았다.“이 돈은 확실히 적진 않죠. 하지만 제가 알기론... 그 사람은 강 대표님한테 꽤 중요한 존재 아닌가요? 4억으론 좀 부족하지 않겠어요?”강현우의 눈매가 얕게 휘어졌고 비웃는 듯한 눈길을 우지원에게 던지자 우지원이 바로 앞으로 나서서 남자의 머리를 탁자에 꾹 눌러 박았다.“좋게 말할 때 얌전히 해. 우리가 재롱이라도 구경하러 온 줄 알아?”우지원은 강현우와는 다른 위압감이 있었다.강현우는 절제된 고압감이라면 우지원은 진짜 거칠고 날 것 그대로였다.“으악!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말할게요!”조금 전까지만 해도 껄렁대던 남자는 순식간에 꼬리를 내렸다.이 바닥에서 우지원한테 한 번 걸리면 어디가 남아날지 모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우지원은 다시 한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는 그제야 눈치를 보며 서둘러 현금 가방을 들고 도망치듯 나갔다.우지원이 그를 문밖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자 손에 작은 쪽지 하나를 들고 있었다.“대표님, 이 자식이 남기고 간 주소입니다.”강현우는 대답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본인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우지원이 슬쩍 사진을 보려다 강현우가 단숨에 그것을 집어넣는 바람에 멈췄다.“이 주소대로 사람 보내. 반드시 찾아야 해.”“알겠습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현우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우지원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하... 또 저 눈빛이네.”그는 쪽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곤 별다른 말 없이 직원들을 불러 지시하러 나갔다....그 시각 강현우가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윤하경은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든 상태였다.아마도 다친 발목 때문인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그대로 누워 잠든 듯했다.그녀의 침대 옆에 조용히 서서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강현우의 눈빛은 깊고 차가웠다.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묘한 연민이 스며 있었다.윤하경의 잠은 고요하지 않았고 작은 몸이 자꾸 뒤척였고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했다.그녀의 입술이 떨리며 무의식중에 속삭였다.“오지 마... 날 건드리지 마...”강현우가 조금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가까이서 들으려는 순간 윤하경이 갑자기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강현우는 피할 틈도 없이 그녀의 입술이 자기의 뺨에 꽝 하고 부딪혔다.전혀 계산되지 않은 사고였지만 꽤 묵직한 키스였다.깜짝 놀란 윤하경이 심장을 쓸어내리며 말했다.“언제 온 거예요? 아무 소리도 안 났는데...”강현우는 흐릿한 조명 아래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여기 내 집이야. 기억 안 나?”그러고는 그녀를 노려보듯 쳐다보며 덧붙였다.“그리고 넌... 의사 말 잊었냐?
윤하경은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짧게 대답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그냥 거기 두세요.”“그럼 식사하신 뒤에 제가 다시 치우면 될까요?”“네.” 윤하경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심심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고 이것저것 스크롤을 내렸다.그 순간, 알림창 하나가 튀어 올랐다.[속보! 강한 그룹 대표 열애설 폭로!]윤하경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강한 그룹 대표라면... 바로 강현우잖아? 열애설이라니? 혹시 강현우랑 박소희의 약혼 얘기라도 퍼진 건가?’무의식중에 알림을 눌렀고 기사 내용을 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사진 속 주인공은 박소희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강현우였다. 병원에 들어가던 그때 몰래 찍힌 사진이 그대로 기사에 실려 있었다.사진 속 강현우는 키가 크고 단정했으며 그녀를 인형처럼 안고 있는 모습이었고, 표정은 여유롭고 담담했다.다행히도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묻고 있었기에 정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장면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손가락으로 천천히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자 댓글 창엔 수만 개의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헐, 강현우 저 체력 뭐야? 여자를 안고도 전혀 흔들림이 없네.][그러니까요. 신이시여, 저 여자 대신 날 좀 안아주세요...][이 여자 누구죠? 강 대표가 누구 병원에 데려간 적 있었어요? 그것도 저렇게 포옹한 채로?][누군진 몰라도 감히 내 남편을 뺏다니... 정보 아시는 분 없나요?]그 아래엔 이미 누군가가 그녀의 정체를 추적 중이었다.윤하경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페이지를 닫고 강현우와의 카카오톡 대화창을 열었다.지난번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새로 메시지를 작성했다.하지만 막상 전송하려다 다시 손을 멈췄다.잠시 후 다시 기사 페이지를 열었는데 조금 전 그 기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의아한 마음에 강현우의 이름을 직접 검색해봤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분명히 강현우 쪽에서 언론 대응을 한 거였다. 움직임 하
백정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우슬기 씨가 그냥 윤 대표님 편 들어준 것뿐이에요. 회사엔 안 나오셨어도 업무는 다 제때 처리하셨다고요. 그런 말 한마디 했다고... 회장님이 바로 해고하셨어요.”백정연은 고개를 저었고 윤하경은 코웃음을 쳤다.윤수철이 자기를 겨냥하고 있다는 걸 대놓고 이마에 새겨놓은 수준이었다.이를 살짝 깨문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슬기 씨한테 전화해서 다시 출근하라고 해요.”백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데 회장님 쪽은 괜찮으시겠어요?”“그건 제가 말할게요.”윤하경이 막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윤수철이 저 멀리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진짜 말하면 꼭 나타나는 사람이었다.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조용히 몸을 돌려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윤수철도 따라 들어왔고 그의 얼굴은 침울하고 어두웠다.“그동안 어디 있었어? 부대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해서야 되겠어?”목소리는 낮지만 압박이 가득했으나 윤하경은 그런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의자에 당당히 앉았다.“백정연 팀장님한테 병가서 제출했는데 못 보셨어요?”윤수철은 병가 얘기에 순간 말이 막혔다.“그렇게 아팠으면 집에 가 있었어야지.”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집에요? 집에 가서 뭐 하게요? 아버지랑 주미나 씨가 짜놓은 판에 제대로 끼워서 절 팔아넘기게요?”그의 표정이 굳었다.“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윤하경은 코웃음을 치며 천천히 일어섰고 윤수철을 똑바로 바라봤다.“전 정말 가끔 궁금해요. 저랑 윤하연중에 누가 진짜 친딸인가요?”윤수철은 이를 악물었지만 금세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헛소리하지 마. 네가 네 아빠인 나도 못 믿으면 어쩌자는 거냐?”“아버지를 믿어요?”윤하경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아버지 말을 믿었으면 전 지금쯤 여덟 번은 팔려 나갔을걸요?”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지만 드러난 진실에 당황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윤 대표님, 내일 오후에 뵙죠.]윤하경은 무심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전화번호는 낯선 번호였지만 마치 명령하듯 딱딱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녀는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으려 했는데 그때 오건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잠깐 망설인 뒤 전화를 받자 익숙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윤 대표님, 설마 계약 하나 체결했다고 저를 잊으신 건가요?”“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일정이 좀 빠듯했을 뿐입니다.”갑인 입장에서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대가 갑이면 결국 공손하게 모셔야 했다.오건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오늘 오후 시간 어떠세요? 마침 저도 여유가 좀 생겨서요.”윤하경도 남은 계약 조항들을 마무리해야 하루라도 빨리 편해질 테니까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오후에 귀사로 찾아뵙겠습니다.”점심 식사를 마치고 윤하경은 이번 프로젝트를 맡은 팀원들과 함께 오건우의 회사로 향했고 대략 다섯, 여섯 명 정도 되는 규모였다.회사를 나서기 전 유리로 된 이사실 벽 너머로 윤수철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무표정하게 윤하경을 노려보고 있었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을 다물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아무리 부녀 사이라 해도 지금의 눈빛은 그저 적대 그 자체였다.오건우의 회사 회의실.윤하경이 도착하자 오건우는 이미 회의실에 앉아 있었고 그녀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윤 대표님, 정말 바쁘신가 봅니다. 제가 갑인데 이렇게 직접 재촉한 건 처음이네요.”차가운 말투였지만 어딘가 농담처럼도 들렸다. 오건우의 눈매는 매서우면서도 어딘가 매력적이었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그러자 윤하경은 조금 민망해졌다.“요즘 일이 많다 보니 죄송합니다.”그녀는 준비해 온 자료를 오건우 앞에 건넸다.“여기 검토 부탁드립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오건우는 손을 뻗어 자료를 받아 들고 하나씩 훑어 내려갔다. 문서를 보던 중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고 이어서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