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러자 추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어이구, 네가 구지호를 차버렸다던데 사실이야?”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성운 씨,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셨죠?”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다를 떨려고 온 게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바로 강현우와의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수억 원 규모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운영이 한결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장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된다.온지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얼른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성운 씨, 아까 드시기로 한 술이 아직 석 잔 남아 있는 거 기억하시죠? 제가 직접 따라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온지우는 추성운을 다른 자리로 끌고 가며 윤하경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윤하경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잔을 손에 들고 강현우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강현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저 좀 불편한데 여기 좀 눌러주세요.”그 여자는 말하면서도 경계 어린 눈길로 윤하경을 힐끔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며 윤하경을 째려봤다. 이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물었다.“그래? 어디가 불편한데? 여기? 아니면 여기?”그는 말하며 그 여자의 허리 주위를 천천히 어루만졌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윤하경을 쳐다보지 않았다.강현우의 태도는 윤하경에게 굴욕을 주려는 듯 보였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숨소리가 가빠졌다.“현우 씨, 정말 나쁜 남자야.”윤하경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도 꽤 많은 상황을 겪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여전히 낯부끄럽게 느껴졌다.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윤하경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저기, 강 회장님, 사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계약 건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지금
윤하경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금세 파티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이전에 구지호의 기분을 신경 쓰느라 이들과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술잔을 드는 모습을 처음 보며 놀랐고 농담을 던졌다.“하경 씨, 오늘 정말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 이렇게 큰 판을 깔아주시다니요.”윤하경은 대꾸하기도 귀찮아했다.‘몇억 원짜리 계약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그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고 강현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에 윤하경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큰 잔의 술을 급하게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입가에서부터 턱,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쇄골과 드레스 속으로 스며들었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고 아무도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볼 때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몇 잔의 술이 넘어가며 윤하경의 얼굴엔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윤하경은 멈추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잔씩 더 마셨다. 몇 잔을 더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강현우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순간 윤하경은 동작을 멈췄다.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구지호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윤하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오늘 밤 계약하러 간다더니 이런 데 와서 술 마시고 있었어? 윤하경, 넌 자존심도 없어?”술기운에 흐릿했던 윤하경의 눈빛은 단숨에 차갑게 변했고 차분히 입술을 다물었다.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 씨, 일단 개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저한테 와서 계약 이야기하시죠.”비즈니스와 관련된 말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서 조롱의 뉘앙스를 읽어냈다.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큰 키와 존재감은 방 안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윤하경을 바라봤다.“응?”윤하경은 손을 떨며 침착하게 말했다.“담배 한 대만 주실래요? 부탁드릴게요.”그녀는 몸이 떨려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강현우는 잠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가져왔다.“먼저 구급차부터 부르는 게 순서 아닐까?”윤하경은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핸드폰을 꺼내 구조를 요청했다.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강현우는 보상금이라며 1억짜리 수표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윤하경은 강현우가 우연히 구지호의 차를 들이받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주차장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 그 차를 들이받다니,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강현우의 무심하고 태연한 태도를 떠올리면 그게 정말 우연 같기도 했다.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주미나가 걱정할까 봐 결국 구지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차 안에서 구지호는 화가 나서 계속 윤하경과 강현우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건 고의야! 내가 고소할 거야!”윤하경은 그런 구지호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계속 떠들면 지금 당장 널 차 밖으로 던질 거야. 병원까지 걸어가고 싶어?”강현우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윤하경은 속으로 구지호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강현우와의 몇억짜리 계약이 무산된 상황에서 구지호가 더더욱 원망스러웠다.병원에서 구지호가 깁스를 마친 뒤, 주미나가 병원에 도착했다.“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더니 구지호를 힐끗 보며 담담히 말했다.“아줌마, 저한테 묻지 마시고 지호한테 물어보세요.”구지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뻔뻔해도 윤하경에게 강압적으로 굴다가 강현우의 차에 치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 결국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냥... 사고였어요.”그러자 주미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널 들이받은
윤하연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아빠, 언니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가볍게 웃었다.“네가 챙겨준다면 더 고맙겠지.”그녀는 태연하게 식탁 한쪽에 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아빠, 그 말은 좀 아니죠. 하연이는 집에서 먹고 자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뭔가 해야 마음 편하지 않겠어요?”그 말에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윤수철에게 말했다.“맞아요, 여보. 하경이가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잖아요.”윤수철은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며 매섭게 윤하경을 노려봤다.“먹기 싫으면 나가!”하지만 윤하경은 더욱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왜 제가 나가요? 제가 여기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면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잖아요.”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윤하경은 곁눈질로 서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빨리 앉아. 아빠를 더 화나게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만 친딸인 줄 알겠어.”그리고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뭐 하세요? 제 그릇이랑 숟가락 빨리 가져다주세요. 동생 하연이한테 직접 가져오라고 할 순 없잖아요?”‘동생’이라는 단어를 그녀는 일부러 강하게 강조했다.윤하연은 머뭇거리며 조용히 식탁에 앉았지만 윤하경이 자리를 잡은 이후로 식탁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윤하경만이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끝내 침묵을 깬 것은 임수연이었다.“하경아, 어제 구지호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괜찮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보며 웃었다.“궁금하시면 직접 가보시죠.”임수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금세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그녀는 집사에게 말했다.“좋은 식재료 좀 사 와요. 보양식 끓이게. 하경이 너랑 하연이가 오후에 병문안 다녀오면 좋겠다.”윤하경은 그녀를 빤히 보며 비웃듯 말했다.“저는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하연이가 가서
온지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모임이 있는데 강현우도 온대. 같이 갈래?]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당연히 가야지.]그녀는 어릴 때부터 역경이 닥칠수록 더 강해지는 성격이었다. 강현우가 협력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상, 윤하경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온지우가 보내준 주소를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정성껏 메이크업을 한 뒤 계약서와 기획안을 챙겨 목적지로 향했다.1층으로 내려가던 그녀는 소파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임수연과 윤하연을 발견했다.“엄마, 만약 지호 오빠가 언니랑 약혼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임수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는...”그 순간,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두 분, 남의 걸 어떻게 빼앗을지 의논하실 때는 좀 더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시는 게 어때요? 제가 들으면 얼마나 서로 민망하겠어요.”윤하경은 계단을 내려가며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며 만족스럽게 웃었고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뻔뻔하다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사실 그들이 거실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평소 주말이면 윤하경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윤하경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윤하경은 두 사람 앞에 다가가며 웃음을 지었다.“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요. 구지호 같은 사람은 제가 아쉬워할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몰래 숨어서 속닥일 필요 없어요.”그녀의 독설에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윤하경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나섰다.목적지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회장이었는데 입구에서 바로 직원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전관 대관이라 초대장이 필요합니다.”윤하경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잠
윤하경은 강현우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의 혼란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화끈거렸다.하지만 강현우는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그를 변태라 부를 수도 없으니 그녀는 그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저희 회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 계약을 체결하면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진심으로 임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지만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러자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또한, 어떤 요구사항이든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어떤 요구사항이든 가능하다고?”윤하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강현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강현우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며 탁탁 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며 점점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진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이 계약 사인 못 할 이유는 없지.”그 말에 윤하경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곧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멈칫했다.“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그녀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조건이요? 말씀만 해주시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내 조건은, 너야.”윤하경은 당황한 나머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말했다.“네?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저를 여자 친구로 만들겠다는 건가요?”강현우는 입꼬리를 비웃듯이 말아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이때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네게 하루 시간을 줄게. 생각해 보고 계약서 들고 내 방 808호로 와.”그
한참 후, 방문이 열렸다. 강현우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표정엔 전혀 놀라움이 없었다. 마치 그녀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샤워를 마친 그는 흰색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교차한 앞섶 사이로 느슨하게 묶인 허리띠 때문에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은근히 드러났다.평소에는 깔끔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어 늘 날씬하고 단정한 느낌을 줬지만 그의 몸은 정반대였다. 탄탄한 가슴과 복근은 그의 꾸준한 운동을 증명했다. 이런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시선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강현우는 문 앞에 선 윤하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결정했어?”윤하경은 입술을 꼭 다물고 손에 든 계약서를 내밀었다.“조건이 있어요. 돈은 오늘 안으로 입금돼야 하고 한 달 동안만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강현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어들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그녀를 벽에 밀치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키스했다.그의 익숙한 향이 그녀를 감쌌고 윤하경은 순간 놀라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현우의 입꼬리는 더 올라갔다.그는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려 엉덩이를 받친 채 방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능숙한 스킬은 윤하경을 더욱 당황하게 했고 그저 그의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이번의 강현우는 지난번보다 더 거칠고 열정적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열정에 윤하경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결국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강현우가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이제야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일렀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우는 그녀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으며 다시 시작했다. 그때의 상황은 그녀가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다.그렇게 사랑을 나누면서도 강현우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리 감정이
강현우와의 짧지만 뜨거웠던 만남이 떠오르며 윤하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온지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하경아, 왜 내 연락 씹어? 그리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긴 객실 구역인데. 강현우는 지금 뒤쪽 파티룸에 있어. 내가 데려다줄게.”윤하경은 당황하며 변명하려 했다.“잠깐만 지우야, 나...”하지만 온지우는 그녀에게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객실 구역을 빠져나가, 곧 다른 건물로 향했다.밖으로 나오자 해가 기울어 있었고 윤하경은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즉, 그녀는 강현우의 방에서 거의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강현우가 있는 파티룸은 멀지 않았다. 온지우는 성급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문을 열었고 방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그중 강현우는 카드 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불과 몇 시간 전의 격렬했던 순간이 무색할 만큼, 그는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의 선명한 근육은 매력적이었고 차분한 분위기는 여전히 돋보였다.강현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잠시 윤하경의 손목에 머물렀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고개를 돌리자,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다.“어때?” 온지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추성운이 웃으며 말했다.“현우 형님이 있는데 누가 이길 수 있겠어? 하경 씨, 한 판 해볼래? 지면 내가 대신 내줄게.”윤하경이 대답하려던 순간, 강현우가 무심하게 말했다.“네 차례야. 카드 내.”추성운은 건성으로 카드를 한 장 내려놓으면서도 시선을 윤하경에게서 떼지 않았다.온지우는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윤하경을 강현우 쪽으로 살짝 밀며 말했다.“현우 형님 카드 실력은 최고야. 하경아, 가서 형한테 좀 배워봐.”그러고는 자신이 똑똑한 선택을 했다는 듯 윤하경에게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