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선생님, 공주님을 반드시 구해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결과가 올 겁니다.”진서준은 그 말에 콧방귀를 끼며 물었다.“감당할 수 없는 결과라고? 그게 뭔데? 설마 우리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는 건가?”공주를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는 진서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하지만 진서준은 그자가 대한민국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했다.엘리사는 줄곧 용란에서 살아왔고 심지어 공개적으로 대중 앞에 나온 적도 없었다.엘리사의 정체를 아는 이는 분명 용란 본국 사람일 것이다.게다가 엘리사와 해리스가 몰래 금운에 왔으니 두 사람의 정체를 아는 자는 더더욱 적었을 터였다.해리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맞습니다. 서양의 혈수사들이 공주님을 납치했습니다. 혈수사들이 공주님을 잡아간 이유는 바로 우리 국왕을 협박해 황실 친위대를 용멸 계획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귀국의 무인들이 이번 대한민국 무도계 공격에 용란의 공식 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진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이런 사실은 진서준도 금시초문이었다.만약 해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엘리사 공주를 구하는 건 필수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잠깐 기다려. 내가 전화를 좀 걸어 확인해 볼 테니.”진서준은 휴대폰을 꺼내 들어 진서훈에 전화를 걸었다.이런 고위급 기밀은 진서훈 같은 호국장군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전화가 몇 번 울리자 진서훈이 전화를 받으며 농담 섞인 목소리로 꾸짖었다.“이 녀석이 자기는 안 자고 왜 이 노인을 괴롭혀? 조금만 날 배려해 주면 안 되겠냐?”진서준은 헛기침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할아버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여쭤보려고 전화했어요.”“그래, 말해봐.”“이번 용멸 계획에 용란의 황실 친위대가 참여하지 않은 게 맞나요?”진서훈은 그 말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진서준이 이 질문을 한다는 건, 분명 용란 사람들과 접촉했음을 의미했다.게다가 이번에 당당히 대한민국에 들
슉!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그 그림자는 한적한 외곽의 무인 별장 앞에서 멈춰 섰다.붉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기묘한 광택이 번졌다. 지엔은 기절한 엘리사를 어깨에 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문을 밀고 들어서자 지엔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공주님, 이제 우리 둘만 남았으니 공주님의 유혹적인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하지.”지엔은 엘리사를 거실의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엘리사 특유의 체질 때문에 그녀의 몸에서는 혈수사들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그 향기는 혈수사들에게는 마치 마약과도 같아, 결코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었다.지엔의 두목은 엘리사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지시했을 뿐 아니라 엘리사의 피를 빨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지엔과 엘리사밖에 없었다.지엔은 이 기회를 틈타 몰래 조금만 마신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혈수사가 피를 빨 때는 상대방이 그다지 큰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다만 병원에서 주사를 맞는 정도로 이빨이 피부를 무는 순간만 조금 따끔할 뿐이다.창문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달빛이 엘리사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달빛에 은빛 망토를 두른 듯한 엘리사의 모습은 책 속에서 튀어나온 공주처럼 아름다웠다.지엔은 엘리사를 바라보며 억누를 수 없는 욕망에 휩싸여 굶주린 늑대처럼 엘리사에게 덮쳤다.하지만 엘리사는 여전히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지엔은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지엔은 엘리사의 몸에는 관심이 없었다.그저 엘리사의 피를 마시는 것만이 지엔의 목적이었다.엘리사의 하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지엔은 입을 벌려 천천히 다가갔다.쾅!이 긴급한 순간, 누군가가 문을 발로 차며 열어젖혔다.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지엔은 깜짝 놀란 박쥐처럼 재빨리 엘리사에게서 떨어져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들이닥친 이를 쏘아보았다.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곡선을 자랑하고 은빛 물결 같은 머리카락
지엔은 바이올렛을 바라보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엔의 눈에는 오직 공포만이 가득했고 감히 불만 하나 내비칠 수 없었다.자기와 바이올렛 사이의 실력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이번은 그냥 경고야.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네 목을 비틀어버릴 거야.”바이올렛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지엔은 그 말에 조금의 의심도 할 수 없었다.바이올렛은 절대 농담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지엔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됐어, 넌 여기서 지키고 있어. 난 위층에서 잠깐 쉬다 오마.”바이올렛이 기지개를 켜자 그녀의 검은 가죽옷 아래로 감춰진 섹시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하지만 지엔은 감히 그 모습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그의 눈알을 뽑아버릴까 봐 두렵기 때문이었다.지엔은 결코 호들갑을 떨며 과장되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과거, 조직에 갓 들어온 한 청년 혈수사가 바이올렛의 성격을 모르고 그녀를 꼬시려고 했다가 바이올렛의 매혹적인 미소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그 사건 이후, 바이올렛은 피에 물든 장미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바이올렛은 위층으로 올라간 뒤, 잠자리에 들지 않고 검은 가죽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욕실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욕조에 물이 가득 차자 바이올렛은 그 속으로 몸을 담갔다.투명했던 욕조의 물은 금세 피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바이올렛은 눈을 살며시 감고 온몸의 모공을 열어 혈욕의 쾌감을 만끽했다.아래층에서 지엔은 엘리사에게 더는 감히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엘리사의 피가 아무리 달콤한 향기를 풍긴다고 해도 목숨과 맞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그 시각, 진서준은 엘리사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에 쥐고 추적술을 사용해 이내 그녀의 위치를 알아냈다.“이 자식은 이미 필요 없어. 그냥 처리해.”진서준이 자리를 떠나기 전, 브래드를 가리키며 말했다.브래드는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외쳤다.“날 죽이지 마. 공주의 위치를 아는 건 나뿐이야.”해리스도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엔은 이미 엘리사의 곁에 도착해 엘리사를 안고 도망칠 준비를 마쳤다.2층에 있던 바이올렛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문가에 서 있는 진서준을 바라봤다. 바이올렛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바이올렛은 눈앞에 있는 이 대한민국 사람이 자기 실력과도 비슷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실력자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대한민국 무도 종사인가?”바이올렛은 천천히 입을 열어 유창한 대한민국어로 말하며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진서준은 말없이 엘리사와 지엔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엘리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엘리사가 다친 흔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진서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때, 해리스도 다가와 이를 악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너 계획이 있다면서?”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리스는 진서준이 뭔가 치밀한 계획이라도 세운 줄 알았다.그런데 해리스가 물어볼 틈도 없이 진서준은 이미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그와 동시에 해리스도 2층에서 내려오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발견했다.바이올렛의 우아한 실루엣을 본 순간, 해리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차가운 숨을 삼켰다.“저...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어?”진서준은 해리스의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보자 몹시 궁금해졌다.“저 여자가 누구야?”“바이올렛... 당신들 대한민국 국안부에서 지의방 랭킹 26위로 지정한 혈수사입니다.”눈앞에 서 있는 이 성숙한 매력을 풍기는 여자가 지의방 랭킹 26위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진서준도 적잖이 놀랐다.바이올렛의 몸매와 외모만 봐서는 누구라도 그녀가 30대 초반의 매혹적인 여인으로 생각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해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바이올렛은 지의방 랭킹 26위를 차지하고 있는 혈수사였다. 이는 바이올렛의 실제 나이와 외모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저 여자가 몇 살인데?”진서준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지의방 랭킹 26위라면 그 실력은 대략 칠급 대종사에 해당할 것이고 대다수가 70살을 넘기지 않는 인물이다.진서준의
“그 여자는 나한테 맡겨. 넌 저놈을 쫓아.”진서준은 말이 끝나자마자 발걸음을 옮겨 바이올렛을 향해 걸어갔다.“부디 조심하세요...”해리스는 항상 진서준을 무시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진서준에 대한 진심 어린 존경심이 생겼다.“도망가려고? 나한테 물어봤어?”바이올렛은 가볍게 웃더니 이내 몸을 어둠 속으로 녹였다.순식간에 광풍이 칼날처럼 휘몰아치며 방 안의 가구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진서준은 발을 구르며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소리 없이 바이올렛 앞에 나타났다.“네 상대는 나야.”갑자기 나타난 진서준을 보자 바이올렛의 짙은 붉은색 눈동자가 갑자기 밝은 빛을 내뿜었다.“대한민국 무인이라... 오늘 밤 네게서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구나. 너무 빨리 지지 않길 바랄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실망할 테니까.”바이올렛의 목소리는 매우 매혹적이었다.“남자로서 당연히 너무 빨라선 안 되지... 천천히 즐기게 해줄게.”진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에 푸른 영기와 혈해의 힘을 불러냈다.하지만 이번에 불러낸 혈기는 예전처럼 거대하지 않았다.진서준의 몸에는 아직 숨겨진 내상이 남아 있어 오늘 밤 도대체 얼마 동안 버틸 수 있을지 진서준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하지만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진서준은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20cm나 되는 긴 손톱을 가진 손이 유령처럼 진서준의 목을 향해 갑자기 다가왔다.손톱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공기마저 완벽하게 압도되어 진공 상태가 되었다.진서준의 표정은 어떤 변화도 없었고 여유롭게 손을 들어 바이올렛의 손톱을 쳐냈다.끼익...손톱이 진서준의 손바닥과 부딪히며 강철 위를 긁는 칼 소리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길고 가느다란 손톱 중 하나가 진서준의 손바닥에 있는 혈기의 힘을 뚫고 진서준의 손바닥을 찔렀다.붉은 피 한 줄기가 진서준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왔고 그중 두 방울이 바이올렛의 붉은 입술에 떨어졌다.바이올렛은 그녀의 유연한 혀를 내밀어 입술 위의 피를 가볍게 핥고는 거의 병적인
지익...푸른 번개가 순식간에 바이올렛의 온몸을 덮쳤다.요란한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울리더니 바이올렛의 검은 가죽옷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그러자 눈처럼 새하얀 바이올렛의 몸이 진서준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옥중의 티는 바이올렛의 하얀 몸에 몇 군데 까맣게 탄 자국이 생겼다는 것이었다.그건 다름 아닌 진서준의 푸른 번개를 맞고 생긴 상처였다.눈앞의 유혹적인 몸을 보면서도 진서준의 눈빛은 변함없었다.고수의 대결에서는 한 방에 누가 강한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진서준은 자기가 바이올렛의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진서준이 필요한 건 단지 바이올렛이 해리스를 뒤쫓는 걸 저지하는 것이었다.해리스가 엘리사를 구할 수 있다면 오늘 밤의 임무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이다.“젠장!”바이올렛은 몸에 새로 생긴 까맣게 탄 자국을 보며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애송이가 날 단단히 화나게 했구나. 오늘 밤 네 몸의 피를 모조리 빨아서 널 미라로 만들어 주지.”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가볍게 웃어넘겼다.“이봐, 입은 비뚤어도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내가 막 오해하잖아? 넌 도대체 내 피를 빨아먹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내 다른 것들을 빨아먹고 싶은 거야?”진서준의 도발에 바이올렛의 눈에 차가운 분노가 피어났다.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비상시기에도 이 남자가 성희롱이나 할 여유가 있다니, 정말 간탱이가 부어도 너무 부은 것 같았다.바이올렛은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으르렁대며 진서준이 잡고 있는 손톱에 힘을 주어 빼는 대신 진서준의 팔을 향해 찔렀다.푸슉...다섯 손톱 중 가장 긴 손톱이 진서준의 손바닥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손이 찢어질 듯한 극심한 고통이 팔의 신경을 따라 진서준의 뇌로 전달되었다.그 강렬한 고통 앞에서도 진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말 한마디에 이 정도로 화났어? 너 성격이 참 더럽네. 내 하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구나.”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광 한 줄기가 측면에서 바이올렛을 향해 내
한참 동안을 도망치던 진서준은 사람이 살지 않는 허름한 집을 발견했다.진서준은 문을 박차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이가 나미를 내려놓고 그녀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이가 나미는 바이올렛의 일격에 당한 후로 쭉 의식을 잃은 기절 상태였다.진서준은 정확하게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가 나미의 가죽옷을 벗겨내야만 했다.가죽옷이 벗겨지자마자 흘러넘칠 듯한 눈부신 하얀 가슴이 거의 다 드러났다.검은 레이스로 덮여 있지 않았다면 진서준의 마음은 이미 파도처럼 요동쳤을지도 모른다.의식을 잃은 이가 나미는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가끔씩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이가 나미는 타고난 매력적인 몸매로 남자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발휘하는 여자였다.지금 이가 나미는 진서준 앞에서 알몸으로 유혹적인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진서준의 피는 순간적으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자기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슬슬 나오자 진서준은 급히 마음속으로 청심주를 외우며 서둘러 이가 나미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진서준은 이가 나미의 매혹술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었다.진서준은 이런 상태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만약 실수로 정신을 놓아버린다면 오늘 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진서준이 이가 나미의 피부를 만지자 이가 나미는 무의식적으로 진서준의 품에 안겼다.이가 나미의 피부는 그 무엇보다 더 부드럽고 매끈했다.촉촉하고 따뜻한 이가 나미의 몸이 닿자 진서준의 손은 잠시 멈추고 말았다.청심주는 이미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진서준은 이를 악물고 자기 혀끝을 세게 깨물었다.혀끝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찌릿한 고통이 밀려오자 진서준는 다시 정신을 번쩍 차렸다.진서준은 서둘러 속도를 내야만 했다. 이 인간 세상에 내려온 유혹의 화신을 이대로 품에 두고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유혹을 꾹 참으며 진서준은 이가 나미의 부러진 갈비뼈를 맞추었다.이가 나미의 상처를 다 치료한 후, 진서준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이가 나미에게 덮어주었다
허윤진의 시선에 찍힌 진서준은 바람피우다 들킨 기분이 들어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왜 그래? 윤진아, 내 얼굴에 뭐 묻었어?”진서준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어제 우리 언니 네 방에 갔었어?”허윤진은 진서준에게 바짝 붙어 물었다. 두 사람 얼굴과 얼굴 사이의 거리가 20cm도 채 되지 않았다.진서준은 심지어 허윤진이 내뿜는 따뜻한 숨결마저 느낄 수 있었다.“당연히 안 왔어. 엄마가 여기 있잖아. 사연이 눈치 보여서 어떻게 오겠어...”진서준은 한 발짝 물러서며 허윤진과 거리를 두려 했다.하지만 허윤진은 물러서지 않고 진서준이 한발 물러서면 그녀는 한발 더 다가와 결국 진서준을 벽에 몰아넣었다.진서준의 대답을 들은 허윤진은 진서준의 얼굴에 남은 키스 자국을 핸드폰으로 비추며 따졌다.“그럼 이게 누구 키스 자국인지 설명해 줄래? 연아가 한 거라고는 하지 마. 걔는 립스틱을 아예 안 바르잖아.”허윤진의 날카로운 눈빛에 진서준은 속으로 벌벌 떨었다.이 애가 평소에는 어리버리해 보였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눈치가 빠른지 이해할 수 없었다.진서준은 허윤진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허사연과 다른 사람들이 아직 이가 나미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만약 다른 여자들에게 진서준이 타고난 매혹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를 하인으로 삼았다는 걸 들킨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왜 말을 못 해? 변명거리가 생각 안 나? 어서 실토해, 그 요망한 옆집 공주가 키스 자국 주인이 맞지?”허윤진은 진서준의 옷깃을 잡아채고 또 따졌다.허윤진은 밤에 진서준에게 몰래 접근할 가능성이 가장 큰 여자는 이웃에 사는 엘리사일 거라고 추측했다.외국의 공주인 엘리사가 누구도 찾지 않고 유독 진서준을 찾는 것부터가 굉장히 수상했다.게다가 진서준 얼굴에 묻은 립스틱 색이 엘리사가 어제 바른 것과 비슷해서 허윤진은 진서준의 키스 자국이 엘리사가 남긴 것이라고 추측했다.진서준은 허윤진의 추측을 듣고 한순간 난감한 상황에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