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렛을 모르는 이들이야 어쩌겠냐만, 가문 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사실이 바이올렛은 내심 두려웠다.용란 귀족들은 자존심이 높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그 귀족들의 눈에는 오직 귀족과 왕족만이 높은 지위에 자리 잡을 수 있고 평민들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천한 존재일 뿐이었다.만약 에이미 가문에게 바이올렛이 천민의 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는 틀림없이 처형당할 것이다.에이미 가문의 얼굴에 먹칠한 바이올렛을 그들이 가만둘 수 없을 것이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꾸했다.“아직도 네 신분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모양이구나. 지금 넌 내 포로야. 널 죽이는 건 내 한순간 결정이면 충분해.”바이올렛은 그 말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너와 내 입장이 같을 것 같아? 네가 날 붙잡아 놓은 것도 다른 해외 세력의 침략 일정을 내게서 얻어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우리 관계는 협력일 뿐이야!”진서준은 더 이상 이 여자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기 싫어서 바이올렛을 지나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이 벼락 맞아 죽을 놈!”닫힌 문을 바라보며 바이올렛은 지금이라도 뛰어 들어가 진서준과 밤새도록 결투를 벌이고 싶었다.하지만 이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일일 뿐,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순 없었다.그렇게 했다간 바로 다음 순간, 바이올렛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생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방으로 돌아온 진서준은 내일 서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오늘 밤 충분히 쉬어두기로 했다.동남쪽 위기는 무사히 해결됐고 해외 세력의 다음 공격이 시작될 곳은 서북 사막이 될 예정이었다.진서준이 불을 끄고 취침하려던 순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전화 건 사람이 허사연이라는 걸 보고 진서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진서준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사연아, 무슨 일이야? 집에 무슨 일 생겼어?!”진서준의 걱정이 섞인 다급한 질문을 듣자 허사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아니야, 여긴 아무
동북, 조씨 가문 저택에는 불빛이 가득했다.조기강과 조태희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국안부가 올린 게시물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조태희는 조기강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서준과 김평안이라는 두 사람, 네 검존 명성을 완전히 가로챈 셈이구나.”조기강은 무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 전혀 화내지 않았다.“명성은 그저 허울일 뿐이야. 중요한 건 무엇을 이루었느냐지. 이 둘 중 한 명은 강남에서 악명이 자자한 두 악인을 처단했고 다른 한 명은 국안부의 대종사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섬나라 강자 7명을 단번에 베어 버렸어. 이 정도면 충분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해.”동생이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자 조태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태희는 혹시나 조기강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진서준이나 김평안과 겨루려 할까 봐 걱정했었다.만약 진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안부는 분명 김평안과 진서준 편에 설 것이다.지금 조씨 가문의 위상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동북의 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이 서서히 조씨 가문을 넘어설 기세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은 세 가문이 세력을 나누는 삼국지 양상이 될지도 모른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조민영은 가문의 앞날을 위한 정치적 혼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내 검도 무디진 않았어.”조기강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북쪽 변방에 외국 이족이 출몰한다 들었는데 내일 아침에 직접 가서 한번 살펴봐야겠어.”조태희는 그 말에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 검존의 실력이 그 둘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야.”진서준과 김평안이 최근에 벌인 일들이 조기강의 자존심을 강력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조기강은 진서준과 김평안을 질투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검존 봉호가 헛되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다음 날 아침, 조기강은 동북에서 북쪽 변방 초원으로 향했다.같은 시간, 진서준도 바이올렛을 데리고 서북의 안성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진서준은 호국장 외에는 천의방에 오른 다른 강자를 본 적이 없었다.“나조차 신왕을 마주한다면 도망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서북 상황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바이올렛이 본인 안전을 위해 진서준을 설득했다.바이올렛은 사실 올림푸스의 신왕이 진서준을 제거하길 바랐다.하지만 올림푸스와 바이올렛의 조국 용란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만약 신왕이 바이올렛에게도 적대감을 품는다면 상황은 상당히 복잡해질 것이다.바이올렛이 올림푸스 신전에 대해 이토록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이 정보를 듣고 포기하길 바랐고 자기를 데리고 같이 죽으러 가는 걸 원치 않았다.“천의방 강자라고?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군.”진서준이 덤덤하게 웃으며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김평안, 제정신이야?”바이올렛은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나조차도 신왕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정도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사실 둘이 정면으로 싸운다면 진서준이 바이올렛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그렇게 실력이 상당한 바이올렛조차 신왕을 보고 도망가야 할 판이니, 진서준이 나선다고 해도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하지만 지금 넌 내 부하가 된 신세지.”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협력 관계야.”바이올렛이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진서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근처의 5성급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진서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호텔 로비에 진서준이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바로 유연비였다.유연비 옆에는 그녀와 약간 닮은 중년 남성이 함께 있었다.남자는 유연비의 아버지이자 서북 최고 가문인 유씨 가문 가주 유경풍이었다.서북을 주름잡는 유경풍은 이 순간, 동안 백발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깍듯하게 인사하는 유경풍의 얼굴에는 오로지 경외심만이 가득했다.유경풍이 이렇게까지 존경심을 표하는 인물이라면 분명
진서준이 유경풍에게 귀싸대기를 날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멍해졌다.진서준이 방금 귀싸대기를 날린 상대는 바로 서북의 왕이라 불리는 유씨 가문의 가주 유경풍이었다.이렇게 신분이 고귀한 인물에게 대놓고 귀싸대기를 날리다니, 이 남자는 정말 목숨이 아깝지 않은 걸까?유경풍은 몇 초 동안 얼어 있다가 얼굴이 선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죽고 싶어?”눈에서 분노와 살기가 거의 튀어나올 것만 같은 유경풍은 심지어 옆에 있던 신용수조차 완전히 무시한 채 진서준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을 맞다니, 이런 치욕은 유경풍이 태어나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오늘 이 중년 남자가 여기서 살아서 나간다면 유경풍 본인의 체면을 물론, 유씨 가문의 체면은 바닥에 추락할 것이다.신용수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유경풍을 말렸다.“그만해,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지.”그 말을 듣자 유경풍은 다시 멍해졌다.이쯤에서 끝내라니? 자기가 뺨을 맞았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란 말인가?“진군님, 혹시 이 자를 아십니까?”유경풍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나뿐만 아니라 너희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신용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어젯밤 동남 해변에서 고한수 일행 일곱 명을 처단한 사람이야.”“이 사람이 김평안이라고요?”유경풍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고 신용수가 이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건 이유도 알 것 같았다.하지만 유경풍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진군님, 이 자가 김평안이라 하더라도 제 뺨을 때린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저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우리 유씨 가문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연비는 아까부터 쭉 진서준을 관찰하고 있었다.거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 중년 남자는 왠지 유연비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해 보였다.신용수는 유경풍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유경풍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유경풍은 진서준을 죽이고 싶었지만 신용수가 쉽게
“진군님, 그럼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말을 마친 후, 유경풍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을 나섰다.유연비도 곧장 아버지의 뒤를 따라 호텔에서 나갔다.두 사람이 사라지자 진서준은 신용수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굳이 저를 위해 나섰습니까? 유씨 가문 정도는 제가 두려워할 자격도 없는 가문입니다.”신용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너무 날카로운 기운은 거두는 게 좋아. 그렇지 않으면 괜히 귀찮은 일만 생길 테니까.”“귀찮은 일이라뇨? 유씨 가문 따위는 문제 될 것도 없어요. 게다가 유씨 가문은 워낙 저와 오래된 원한이 있습니다.”진서준의 눈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진서준과 유씨 가문 사이에 원한이 있다는 말을 듣자 신용수는 순간 멈칫했다.신용수는 진서준이 인피면구를 쓰고 있다는 걸 몰랐고 진서준이 바로 김평안이라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다.“유씨 가문과 무슨 원한이 있는가? 우리 국안부는 국내 무인끼리의 살육을 원하지 않아.”“그렇게 엄청난 원한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유씨 가문 전원의 사죄만 요구할 뿐입니다.”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유씨 가문이 진서준에게 사죄하고 유연비를 혼내는 것, 그것이 진서준의 목표였다.하지만 유씨 가문 전체가 사죄하게 하려면 그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진서준이 유씨 가문을 짓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신용수는 한숨을 쉬며 질문을 던졌다.“복잡한 상황만 일으키지 않으면 돼. 오늘 네가 안성에 온 건 북오런 올림푸스 신전과 대항하기 위해서인가?”“맞습니다, 다만 제 실력으로는 저항하기 어려울 듯합니다.”진서준이 솔직한 생각을 털어놨다.천의방에 올라간 강자들 앞에서 진서준도 자신감이 넘쳐나긴 힘들었다.“그래도 솔직하군.”신용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때가 되면 북오런 올림푸스 신전의 신왕은 내가 맡을 테니 나머지 자들은 네가 처리하면 돼.”호국장군 신용수가 일선 전장에 나선 것도 바로 올림푸스 신전의 신왕을 겨냥한 것이었다.서북 변방의 다른 호국사들은
4대 금강은 유씨 가문이 서북의 최고 가문으로 군림할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이었다.”소문에 따르면 이 네 사람은 한때 중부의 소림사에 머물며 소림의 금강불괴공을 완성 단계까지 연마했다는데, 그들의 신체는 강철보다 단단하다고 했다.이전 봉호전에서 문호동이 수련했던 것도 바로 금강불괴공이었다.비록 문호동이 오급에 불과한 횡련 대종사였지만 육급 정점 대종사와 겨루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게다가 유씨 가문의 4대 금강은 전부 육급 정점 대종사 실력이었다.네 사람이 힘을 합치면 팔급 이하의 대종사는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적어도 현재까지 4대 금강에게 맞설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아버지가 4대 금강을 동원할 계획을 밝히자 유연비는 순간 당황했다.“아빠, 이 4대 금강은 진서준을 처리하려고 부르신 게 아니었나요?”유경풍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똑같아, 우선 이 김평안이라는 자부터 처단해야 해. 서북의 유씨 가문이 절대 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야 해.”“알겠어요, 즉시 그 네 마스터님을 모셔올게요.”...밤이 깊자 진서준과 신용수, 그리고 바이올렛은 막북의 황량한 사막 지대에 도착했다.은은한 달빛이 세 사람을 비추어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그 모습은 나라를 위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치는 열사처럼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본래 유씨 가문에서 지원이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신용수도 유경풍이 더 이상 사람을 보내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우리 셋만 남았군.”신용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신용수가 혼자 남았다 해도 그는 반드시 이곳에 왔을 것이다.호국장군으로서 전장에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그의 숙명이자 영광이었다.“무양진군님, 이따가 제가 잡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서 무양진군님을 돕겠습니다.”진서준이 신용수를 바라보며 계획을 밝혔다.하지만 신용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팔급 이상 대종사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는 게 좋
설마 이족들이 정말 공격 경로를 바꾼 건가?바로 그때, 신용수의 휴대폰이 울렸다.신용수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다시금 그의 마음속에서 떠올랐다.진서준도 긴장한 눈빛으로 신용수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야?”“무양진군님, 어젯밤 서북 사막이 조용하지 않았습니까?”“맞아, 북오런 올림푸스 신전 이족들이 공격 경로를 변경한 게 아니야?”신용수가 초조한 말투로 물었다.“아닙니다, 아마 시간 조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본래 오늘 밤에 북부 변경에서 움직일 예정이었던 해외 이족들이 어젯밤 갑자기 움직였습니다.”“뭐라고? 피해는 어느 정도야?”신용수의 목소리가 떨렸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해외 이족들의 기습이라면 북부 변경에 남아있는 호국사들이 위험에 처했을 가능성이 컸다.“피해는 크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동북 조씨 가문 검존이 어젯밤 북부 변경에 나타나셨습니다. 덕분에 검존 혼자서 대다수 해외 강자를 다 처단해 버렸습니다.”전화 건너편에서 상대방이 들뜬 목소리로 전했다.그 소식에 신용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군. 이족들이 시간을 바꾼 거라면 여기서 하루 더 기다리면 돼.”경성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신용수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전화를 끊고 나서 신용수는 진서준을 보며 웃으며 소식을 전했다.“아마도 너와 진씨 가문 그 녀석 활약 때문에 조기강이 자극을 받았던 것 같아. 그 녀석이 동북 조씨 가문에 가만히 있지 않고 홀로 북부 변경까지 갔다고 해. 조기강이 북부 변경에 갔으니 참 다행이야. 조기강만 없었더라면 북부 변경 방어선이 무너졌을지도 몰라.”진서준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타고난 천재라 불리는 인물이라면 누구든 자존심이 다 강하죠. 제가 보기에 대한민국 다른 지역에 있는 천재들도 이제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할 겁니다.”무인이라면 누구나 다 자존심이 있었다.그중에서도 타고난 천재라 불리는 자들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남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용존 진서준, 검선 김평안, 검존 조기강, 이 셋은 반드시 죽여야 해!]이 댓글은 닉네임이 해외 멸용인 유저가 남긴 것이었다.해외의 이족들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무도 포럼에서 위협을 내뱉기 시작한 게 분명했다.해외 이족들은 대한민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 세 천재를 반드시 무너뜨리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진서준은 이 댓글을 보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웃음이 나와? 멸용 조직 사람들이 진짜로 찾아올까 봐 두렵지도 않아?”바이올렛은 진서준이 태연히 웃는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해외 강자였던 바이올렛은 멸용이라는 조직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멸용 조직은 처음 결성될 때부터 초아국의 여러 세력을 휩쓸고 통합해 이후 초아국에서 가장 강력한 초능력 강자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초능력 강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의 종사와 다를 바 없었다.다만 조직 내 사람들은 자기를 종사라고 부르지 않고 선택받은 자라고 불렀다.그리고 단전의 강기는 에테르라고 불렀지만 사실 본질적으로는 대한민국 무도와 다를 게 없는, 그저 이름만 다른 강기였다.바로 이 멸용 조직이 25년 전 대한민국 천재들을 학살하려는 계획을 조직한 주범이었다.이번 용멸 계획 역시 이들이 주도하고 있었고 보해 쪽을 주요 공격 목표로 삼고 있었다.보해만 넘어선다면 곧바로 경성이 멸용 조직의 눈앞에 있을 것이다.멸용 조직 사람들은 모두 미치광이이었다.조직원의 계획은 하나같이 미쳐있었고 심지어 경성으로 직접 쳐들어가 피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계획도 세웠다.하지만 멸용 조직은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다.신용수와 또 다른 호국장군은 서북과 서남에서 수비를 맡고 있고 남은 호국장군들은 전부 보해로 향했다.다들 죽음을 각오하고 멸용 조직을 국경 밖에 막아두겠다고 결심했다.“서북쪽 이족을 해결하면 나도 보해로 갈 생각이야.”진서준은 차분하게 말했다.멸용 조직의 이번 공격 핵심이 보해에 있다는 걸 진서준도 알고 있었다.과거 진서준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람 중에도 멸용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