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설표 특전대가 지금의 실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건, 절반은 진 교관님이 주신 약제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야. 그리고 진 교관님이 왜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묻는데, 사실 작년에 진 교관님은 이미 명성이 자자했어.”이 마지막 한마디에 모두가 조금 헷갈렸다.“작년? 작년에 진 교관에 관해 난 전혀 들은 적이 없는데?”“그건 진 교관님이 특전대 사람이 아니고 국안부 소속 천재였기 때문이야.” 소정태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고인권의 표정이 급변했다.“국안부 천재라고?”“우리도 예전에 국안부에서 훈련했잖아. 근데 저런 인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어.”“그건 진 교관님이 작년에 대한민국에서 급속도로 떠오른 새 얼굴이기 때문이야. 국안부 내에서 진 교관님은 상경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모든 일에 임했어.”소정태가 진서준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뭐라고? 국안부 상경이라고?”이상아와 다른 사령관들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국안부는 국내 강자가 모여 있는 곳이었고 그중에는 실력이 대단한 절세 강자도 적지 않았다.그곳에서 상경직을 맡은 인물이라면 분명히 천재 중의 천재일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진서준은 지금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작년 국안부 봉호전은 다들 알고 있겠지?”소정태가 또 말문을 열었다.“굉장한 강자들이 나온 것으로 들었어.”“그중에 한 명은 여섯 번 연속 승리하며 매번 경지를 뛰어넘는 전투를 했다고 들었어.”“그 사람 봉호는 용존이라고 하던데...”그 말이 끝나자 모두가 한순간 조용해졌다.다들 어젯밤에 들었던 용의 울음소리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고인권 일행의 의혹과 경악이 뒤섞인 눈빛을 보며 소정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너희 예상이 맞아. 진 교관님은 바로 그 국안부 용존이야. 어젯밤 용의 울음소리도 진 교관님이 경지를 돌파할 때 나왔던 소리야.”우르릉!모두가 벼락에 맞은 듯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었다.진서준은 아무래도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경지를 돌파하는 소리가 이렇게 요란하다니
“왜 이렇게 기뻐해?”진서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자 허윤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 아이들이 이렇게 멋진 모습을 보이니까 당연히 기쁘지.”진서준은 웃으며 설명했다.“아이들은 개뿔, 너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많아.”허윤진이 눈을 굴리며 말하자 진서준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래도 내가 가르친 사람이야.”“그렇게 아이가 좋아?”허윤진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한마디를 던졌다.“응?”진서준은 허윤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냥 네가 애 하나 낳으면 되잖아.”허윤진이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내가 어떻게 애를 낳아?”진서준은 웃기면서도 당황했다.조금만 상식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그럼 누구랑 낳고 싶어?”허윤진은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당연히 허사연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진서준은 더 이상 이 화제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국경에 가는 데 한 이틀 정도 걸릴 거야. 그동안 필요한 게 있으면 소 사령관에게 부탁해. 안 부끄러워해도 되니까 시름 놓고 말해.”“알겠어.”허윤진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축 처진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비록 허윤진은 이미 허사연과 합의를 이뤘지만 사회적인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따갑게 쏘아보고 있었다.“진 교관님!”점심을 먹을 때, 고인권과 이상아를 비롯한 7대 특전대의 모든 사령관이 진서준 주변에 모였다.진서준은 이들이 무슨 용건인지 짐작할 수 없어 평온하게 이들을 바라보았다.“진 교관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안목이 없어서 그동안 교관님을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사령관들의 목소리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한편으론 깊은 존경을 표하는 눈빛도 보이고 있었다.말을 마친 후, 일곱 명은 동시에 진서준에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식당 안의 7대 특전대 전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진 교관님. 제가 겁도 없이 감히 교관님을 도전하려 했습니다.” 한어준도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찾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이다.“진 교관님, 아까 소정태가 말하길 교관님이 잠시 후에 라스 국경으로 가신다고 했는데, 혹시 약초를 찾으러 가는 건가요?”고인권의 질문에 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소 사령관님이 말하길, 설표 특전대 사람이 국경에서 내가 필요한 약초를 봤다고 하더라고요.”“무명산인가요?”고인권이 한마디 더 던졌다.“맞아요, 그 산에 관해 들어본 적 있어요?”“예전에 제가 국안부에서 훈련하던 시절에 그 산기슭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고인권의 눈에 두려운 기색이 스치는 걸 보자 진서준은 의아해했다.강철처럼 강인한 흑기린 사령관이 무서워하는 게 있다는 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그 무명산은 꽤 불길한 곳이었습니다. 그때 우리 사람 중 한 명이 경고를 무시하고 밤에 혼자 산에 올라갔죠. 다음 날, 그 사람이 돌아왔을 때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더라고요. 우리가 아무리 물어도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미쳐버렸습니다. 그래서 전투부에서는 그 무명산을 누구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는 금지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국안부 사람들마저 그 산을 피하려고 하더라고요.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으려 하던 게 기억에 남았습니다.”이 말을 들은 허윤진은 진서준의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진서준, 우리 가지 말자. 너무 위험해.”“안 돼, 서라 체내 독은 더 이상 지체되면 안 돼.”진서준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산 안에 뭐가 있든 난 무조건 갈 거야.”“하지만 소 사령관님도 말했잖아. 그게 천년홍련이 맞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만약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야?”허윤진은 여전히 진서준을 설득하려 했다.“천년홍련이 아니더라도 난 가야 해.”진서준은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진 교관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 지역은 저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무명산 기슭까지 바로 데려다 줄 수 있습니다.”고인권이 자
라스 국경, 하얀 눈으로 덮인 땅.여기엔 사람들이 잘 나타나지 않았고 설령 있다고 해도 국경을 순찰하는 군인이 대부분이다.그런데 갑자기 무명산 기슭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걸 보고 진서준과 고인권은 모두 놀랐다.“이상하네요, 여기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고인권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댔다.“지난번 사고가 발생한 이후로 국안부와 특전대는 무명산을 금지구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야외 훈련을 할 때도 이런 곳은 절대 선택하지 않아요.”고인권은 갑자기 섬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혹시 뭔가 불길한 귀신 같은 건 아닐까요?”진서준은 고인권을 보고 잔잔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불길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들이 불을 지를 일은 없겠죠. 불꽃과 천뢰는 본래 불길한 악령 같은 존재에게 큰 위협이 되는 겁니다.”고인권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더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진 교관님, 그럼 세상에 정말 괴물이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그렇죠, 확실히 이 세상에 괴물은 존재해요. 하지만 일반인은 그런 존재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어요. 설령 마주친다 해도 대다수는 존재를 의식할 수 없을 겁니다.”진서준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 존재들은 대개 황야나 깊은 산 속처럼 극단적인 장소나 음산한 곳에서나 나타납니다.”“그럼 이곳에도 그런 존재가 있을까요?”고인권은 슬슬 이 무명산이 무서워졌다.“진 교관님,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실 저는 괴물이나 그런 미지의 존재가 정말 두렵습니다...”고인권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고백했다.고인권은 흑기린이라는 명성이 자자한 특전대의 사령관이었지만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진서준은 고인권을 비웃지 않고 오히려 진지한 말투로 공감했다.“사람이 괴물이나 귀신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무명산의 위치는 이제 파악했으니까 내일 산에 오를 때 사령관님은 아래에서 날 기다리세요. 난 혼자 올라가도 됩니다.”고인권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제가 진 교관님의 발목을 잡으면 안
가장 침착해 보이는 오영수도 입을 열었다.“고인권, 너 진짜 유머 감각이 없구나.”세 사람은 고인권의 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고인권은 그들의 반응을 보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왜냐하면 고인권은 이 세 사람에게서 예전의 자기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고인권도 처음엔 이 세 사람과 똑같은 생각이었고 소정태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었다.“너희가 안 믿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고인권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진서준에게 소개했다.“진 교관님, 이 세 사람은 예전에 제 전우였고 지금은 전신전에 소속돼 있습니다.”“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진서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당당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고인권이 농담이라고 인정하지 않자 장국주는 눈살을 찌푸렸다.“고인권, 너 진짜 농담하는 거 아니지?”“내가 농담하는 것 같아?”고인권이 불쾌한 말투로 되물었다.“젠장!”장국주는 참지 못하고 욕을 날렸다.“너희 8대 특전대가 언제부터 이렇게 수준이 떨어졌어? 아니, 청년을 총교관으로 뽑아? 정 뽑을 만 한 사람이 없으면 날 초빙해도 되잖아. 내가 이 녀석보다 실력이 약할 것 같아?”장국주는 본인도 8대 특전대 출신이었기에 8대 특전대가 애송이를 교관으로 초빙할 정도로 망가지는 모습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오영수와 양복준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리며 불쾌해했다.“진 교관님 실력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어. 아무리 설명해도 너희는 믿지 않을 테니까. 근데 너희가 직접 그 실력을 보게 되면 진 교관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게 될 거야.”고인권은 세 사람의 불쾌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 있게 말했다.“쯧쯧...”장국주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자, 이제 앉아서 좀 쉬자.”오영수가 고인권과 진서준을 임시로 설치한 텐트로 안내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고인권은 오영수를 바라보며 물었다.“너희 세 사람은 왜 여기 온 거야? 이곳은 금지구역이잖아.”“임무 수행 중이야.”오영수는
“난 진 교관님에게 길을 안내하려고 여기 온 거야.”고인권의 해명에 장국주는 순간 멈칫했다.“이 녀석에게 길을 안내한다고? 고인권, 너 미친 거 아니야? 이곳이 어떤 곳인지 너도 잘 알잖아.”오영수도 순간 얼굴이 굳어졌고 눈에 걱정이 스쳤다.“이곳은 이미 특전대와 국안부에서 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곳이야. 너희가 여기 온 것도 문제지만 우리 셋이 오더라도 윗선에 보고해야 해.”이곳에서 많은 특전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죽은 전사는 전부 철저히 훈련된 훌륭한 전사였다.특전대 전사 하나만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그건 특전대에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된다.“전신전 전주님이 내년에 널 전신전에 배치할 거라고 말한 적 있어.”양복준이 고인권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전신전에 들어가는 건 네 꿈이잖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그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마.”고인권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었다.“전신전은 이제 가고 싶지 않아.”고인권은 진서준의 능력을 보고 난 후, 지금은 진서준과 함께 훈련하는 게 꿈이었다.진서준과 함께라면 전신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전혀 아쉬울 게 없었다.“너 진짜 치매라도 왔어?”장국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설마 아직도 그때 전신전이 널 선택하지 않고 날 선택해서 나한테 화난 거야?”옛날에 두 사람은 같은 특전대에서 공인하는 경쟁 상대였다.그러다가 결국 장국주가 고인권을 이기고 전신전에 성공적으로 들어갔다.고인권은 흑기린에 남게 되어 흑기린의 사령관이 되었다.비록 흑기린 사령관 직위가 조금 더 높긴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최종 목표는 전신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난 화난 게 아니라 새로운 목표를 찾은 거야.”고인권의 눈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오영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새로운 목표라는 건 설마 이 녀석을 따르겠다는 건 아니겠지?”“맞아. 진 교관님과 함께라면 내 실력은 너희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갈 거야.”고인권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미쳤네, 이 녀석 제정신이 아니야
“알아요, 사령관님이 저분들과 굉장히 깊은 우정이 있다는 게 느껴지네요.”진서준은 친구 사이의 우정에 감탄하며 말했다.진서준도 이렇게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형제들이 있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생각했다.“우리 네 명은 전부 흑기린에서 있었고 전신전에서 사람을 모집할 때 저 녀석들이 차례로 들어갔습니다. 실력이 가장 약한 제가 바보처럼 흑기린에 홀로 남아 사령관직을 맡게 되었습니다.”고인권의 눈에 살짝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근데 지금은 전신전에 가지 않은 게 참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신전에 들어갔다면 진 교관님을 만날 수 없었으니까요.”고인권은 진지하게 속내를 털어놨다.“잃은 게 있으면 얻은 게 있기 마련이죠.”진서준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응했다.“이제 우리도 쉬죠. 내일 아침에 내가 산으로 올라갈 테니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어요.”촛불이 꺼지고 두 사람은 침낭에 들어갔다.한편, 오영수 일행은 다른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고인권 저 녀석이 왜 갑자기 미친 거지? 어떻게 저런 애송이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수 있어?”장국주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이를 악물며 말했다.“너도 적당히 해. 그냥 몇 마디 말에 속은 거겠지. 임무가 끝나면 윗선에 보고해서 저 녀석을 잘 설득하게 해야 해.”오영수는 자기 견해를 밝히며 말을 이었다.“요새 쭉 힘들었잖아. 오늘은 일찍 자자. 오늘 밤도 교대로 숙직을 서고 상황이 있으면 즉시 호출하는 걸로 하자.”두 사람은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고 한 사람은 바깥에서 숙직을 섰다.무명산은 매우 험준한 산이었다.산을 오르고 내리는 길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이 길만 지키면 그들이 쫓고 있는 묘족마을 사람이 도망가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밤이 깊어졌고 하늘의 먹구름이 달을 가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눈송이가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함박눈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이 빌어먹을 날씨, 짜증 나.”장국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눈이 너무 많이 내려 시야가 확보되지 않
“산에서 마음대로 나올 수 있다니, 누군가 이걸 풀어놓은 게 분명하구나.”진서준은 눈앞의 악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아마도 장국주와 그 일행이 추적하고 있던 묘족마을의 살인범일 것이다.묘족마을은 단지 독충과 독을 만드는 것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악귀와 같은 존재에 관해서도 상당한 연구를 해온 곳이었다.악귀는 갑자기 나타난 이 청년이 자기가 내뿜는 악기에 영향을 받지 않자 붉은 눈동자 속에 인간이 보일 법한 놀라움이 스쳤다.“크르릉!”“귀신처럼 짖긴 뭘 짖어? 아 맞다, 넌 원래 귀신이었지.”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악귀는 순간 분노를 터뜨리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악기의 기운이 더욱 강렬해졌다.악귀의 눈은 당장이라도 피를 흘러나올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악귀는 두 손을 쭉 뻗어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몸을 한 번 휘두르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그 직후, 공기 속에서 연달아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무도를 익힌 고수라 하더라도 지금은 그저 흐릿한 그림자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진서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자기를 향해 돌진하는 악귀를 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장청의 힘이 진서준의 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왔고 진서준의 손바닥은 옥처럼 빛나며 자줏빛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진서준이 손바닥을 휘두르자 번개가 순식간에 자신에게 달려드는 악귀를 감쌌고 악귀의 살기를 산산이 부숴버렸다.악귀의 비명 속에서 그 형체는 서서히 흐려져 가더니 몇 초 뒤에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함박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그 악귀가 이 세상에 왔다 간 흔적은 전혀 남지 않았다.진서준의 뒤에서 세 명의 인물이 급히 달려왔다.“이게 무슨 일이야? 국주가 왜 기절했지? 방금 그 귀신 울부짖는 소리는 대체 뭐였어? 넌 또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말해, 우리가 오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국주는 왜 기절한 거냐고?”양복준은 진서준을 노려보며 질문 폭탄을 던졌다.사실 양복준도 진서준을 아니꼽게 보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장국주가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