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에게 맡긴다면 내가 투항하는 거나 다름없어.”“하지만 난 네가 걱정돼. 차이더리스 가문에는 천의방 강자가 네 명이나 있다고 들었어.”서지은이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걱정 마, 천의방 강자를 한두 명만 죽여 본 것도 아니야.”진서준은 여전히 태연해 보였다.하지만 천의방 강자를 죽일 때 진서준은 천용 반지의 힘을 빌린 거였다.지금은 아직 반지의 힘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여서 천의방 강자와의 대결에서 이길지 질지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이 이렇게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자 서지은도 더는 진서준의 기세를 누르는 말을 하지 않았다.“그럼 꼭 조심해야 해. 절대 다치지 말고.”“응, 걱정 마.”“아참, 오늘 밤은 안 돌아갈 거야.”서지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며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진서준은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상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인데 이럴 때 머뭇거리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었다.“시간도 늦었으니 일찍 쉬는 게 좋겠지?”진서준이 장난스럽게 웃었다.“그래.”뜨겁고 바쁜 밤을 보낸 뒤, 서지은은 달콤한 잠에 빠졌다.진서준이 휴대폰을 집어 들고 확인해 보니 황예은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이 시간에 전화한 이유가 뭐지? 혹시 초아국 놈들이 또 뭔가 시킨 건가?”시간이 너무 늦었기에 진서준은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그리고 별다른 일 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 서지은은 진서준을 끌고 또 한바탕 아침 운동을 했다.한 번 제대로 맛을 본 소녀는 때로 남자보다도 더 탐욕스러울 때가 있는 법이었다.다행히도 진서준의 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기에 버티는 데 문제는 없었다.여기 미녀가 서지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일반 남성이었다면 정말 힘들 뻔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진서준은 황예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자 진서준이 먼저 해명했다.“어젯밤에 바빠서 전화 못 받았어. 초아국 쪽에서 또 연락 왔어?”“아니야.”황예은
하지만 상대가 예의를 차리게 된 건 진서준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었다.김혜민은 어쨌든 김연아와 배다른 동생이었다.“사과할 필요 없어. 사실 너랑 큰 관계도 없는 일이야.”진서준은 손을 내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어떻게 관계가 없겠어?”김혜민이 즉시 되물었다.“나 때문이 아니었으면 너랑 리앙이 그렇게 깊은 원한을 맺을 일도 없었잖아.”김혜민은 모든 책임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너 없어도 나랑 그놈은 언젠가 부딪칠 운명이었어.”진서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그 녀석의 목표는 애초에 진씨 가문이야. 내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게다가 진서준은 그 개조인들이 분명 차이더리스 가문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진서준의 말을 들은 김혜민은 왠지 모르게 씁쓸해졌다.“다른 볼일 없으면 나 나가볼게.”진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어디 가는데?”김혜민이 무심코 물었다.“사람 좀 찾아야 해서.”“누구 찾는데?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네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아니야.”진서준이 고개를 저었다.진서준이 강남에 온 목적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였지만 알고 있는 거라곤 이름뿐, 얼굴이나 키조차 전혀 몰랐다.이런 상태에서 아버지를 찾는 건 바다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내가 도울 수 없다고 왜 단언하는데?”김혜민이 발끈했다.“김연아랑 서지은까지 집안 힘을 총동원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어.”진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강남을 주름잡는 두 가문이 찾아도 못 찾는 사람인데 김혜민이 무슨 방법이 있겠어?“흥, 내가 아는 정보 전문가가 있어.”김혜민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래? 누구인데?”진서준이 흥미를 보였다.“그 사람 별명이 서욱 두목이야. 강남에 한 번이라도 나타난 사람이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다 가지고 있어.”“진짜야? 그렇게 대단해?”진서준이 반신반의했다.“당연하지. 서욱 두목은 정보로 먹고사는 사람이야.”김혜민이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자 믿어볼 만한 것 같기
“다른 곳은 몰라도 서욱 두목님한테는 당연히 규칙이 있지.”경호원이 쌀쌀하게 대답했다.“나 시간 없어. 돈 줄 테니까 정보나 줘.”진서준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공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돈 내고 사는 건데 저렇게 거만하게 구는 건 아무리 봐도 기분 나쁜 일이었다.김혜민이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그만해, 진서준. 그냥 좀 기다려보자.”사실 김혜민도 여기 온 건 처음이었다.그저 친구한테서 도서욱의 정보력은 최고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허허, 성질 한번 급하구먼?”그제야 도서욱이 찻잔을 내려놓고 진서준을 바라봤다.“그래, 뭘 알고 싶은데?”“사람을 찾고 있어.”“누군데?”“진요한.”그 이름을 듣자 도서욱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설마 네가 찾는 진요한이 경성 진씨 가문의 그 사람이야?”이 반응에 진서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이 남자는 역시나 정보망이 있긴 한 모양이다.“맞아. 그 남자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진서준의 질문에 도서욱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물었다.“너랑 그 사람이 무슨 관계인데?”“그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정보만 말해.”진서준이 단칼에 질문을 잘랐다.“이 정보 절대 싸지 않을 거야.”도서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비싸다고? 설마 그 남자가 아직 신농 금지구역에 있다는 말 하려는 건 아니겠지?”진서준이 코웃음을 쳤다.“어라? 너 신농 금지구역까지 알고 있네?”이번엔 도서욱이 놀랄 차례였다.눈앞의 녀석이 생각보다 아는 게 많았다.“하지만 넌 아직 멀었어. 진요한은 더 이상 신농 금지구역에 없어.”도서욱이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뭐? 그럼 어디에 있는지 알아?”진서준의 심장이 요동쳤다.과연 그토록 찾고 싶었던 아버지의 단서를 잡을 수 있을까?“정보를 주는 건 좋은데 네가 얼마를 낼 수 있어?”도서욱이 노골적으로 물었다.“그건 네가 가진 정보 가치에 따라 다르지.”“난 항상 먼저 가격을 정하고 그다음에 정보를 줘.”도서욱의 대답에
“나쁜 결과를 감당하라고?”도서욱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이봐, 네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봐.”도서욱은 애초에 진서준과 김혜민이 둘뿐인 걸 보고 쉽게 한탕 해먹을 생각이었다.어차피 돈을 뜯어내도 저 둘이 어쩔 수 없을 것이다.설마 주먹으로 해결하겠다고?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도서욱 뒤에 서 있는 경호원 네 명은 내공 무인으로서 실격이 대단한 사람이었다.게다가 복도에는 무려 백 명이 넘는 경호원이 대기 중이었다.이 애송이가 미치지 않고서야 혼자서 이 모든 사람을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내가 화내기 전에 네 여자 데리고 꺼져. 안 그러면 너희 둘 다 이곳에서 무사히 못 나갈 줄 알아.”도서욱이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 진서준 뒤에 서 있는 여자는 꽤 탐나는 미모였다.하지만 도서욱도 너무 욕심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이미 400억을 손에 넣었으니 이런 돈이면 원하는 여자를 전부 구할 수 있었다.게다가 상대방이 순식간에 400억을 쏜 걸 보면 신분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괜히 사태를 심각하게 끌고 가 불필요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도서욱 뒤에 서 있던 경호원이 네 명이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며 진서준과 김혜민을 위협했다.그 모습을 본 진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지막으로 경고했다.“진짜 안 돌려줄 거지?”“계속 떠들어 봐. 곧 이 방을 기어서 나가게 될 테니까.”도서욱은 여전히 코웃음을 쳤다.“야, 우리 사장님 말씀 못 들었어? 당장 꺼져.”경호원의 호통에 진서준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결국 힘으로 설득할 때가 온 것이다.진서준은 앞으로 나서더니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철썩!따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따귀를 맞은 경호원은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입안에서 이빨이 피와 함께 튀어나왔다.“이 개자식이 감히 먼저 공격한다고?”도서욱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분노를 터뜨렸다.“저
“너... 너 대체 사람이야, 귀신이야?”진서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다가가기만 했다.“오지 마. 오면 쏠 거야.”도서욱은 허둥지둥 품에서 작은 권총을 하나 꺼냈다.총이 등장하자 김혜민은 깜짝 놀라 외쳤다.“진서준, 조심해.”총은 여러 무기 가운데서도 차원이 다른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보통 사람이라면 총구 앞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 심지어 무술을 익힌 무인이라 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으면 반응하기 어려웠다.“네가 아무리 강해도 총 앞에서는 꼼짝 못 하겠지.”도서욱이 비굴한 웃음을 짓자 진서준의 눈빛이 한없이 차가워졌다.“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누군가 내 머리에 총을 들이대는 거야.”“그럼 당장 꺼져. 안 그러면 진짜로 쏠 거야.”도서욱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진서준은 미동도 없이 그저 천천히 걸어갔다.“한번 쏴 봐. 하지만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진서준이 전혀 위축되지 않자 도서욱은 이를 악물고 방아쇠를 당겼다.탕!총성이 울려 퍼졌다.“진서준!”겁에 질린 김혜민이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다음 순간, 도서욱과 김혜민은 동시에 얼어붙었다.고속 회전하며 날아가던 총알이 진서준의 눈앞에서 멈춰 선 것이다.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총알을 꽉 움켜쥔 것처럼 보였다.도서욱은 눈앞의 광경이 믿을 수 없어 말문이 턱 막혔다.사람이 어떻게 총알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진서준은 손을 뻗어 떠 있는 총알을 집어 들어 손끝에 힘을 줬다.우두둑!총알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그 순간, 도서욱의 정신도 완전히 박살 났다.도석욱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더니 곧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형님,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총도 통하지 않는데 대체 무슨 수로 저 사람을 이길 수 있겠는가?결국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이미 기회를 줬지만 네가 스스로 걷어찼지.”진서준이 싸늘하게 말했다.“형님, 제가 진짜 잘못했습니다. 방금 속여서 가져간
“네?”도서욱은 얼이 빠졌다.‘아니, 예전에도 사람 죽이는 짓 많이 해놓고 오늘은 갑자기 사람 죽이라니까 그게 자기를 해치는 거라고?’“너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는 있어?”도서욱의 멍한 표정을 보자 소 마스터는 이를 악물고 분통을 터뜨렸다.“모르는데요? 유명한 놈인가요?”도서욱은 머리를 긁적였다.“그냥 좀 싸움 잘하는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소 마스터님 상대는 절대 못 되죠.”도서욱은 애써 비위를 맞추려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 헛발질했다.“개소리 집어치워!”소 마스터는 도서욱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나 같은 놈 백 명이 덤벼도 저분한테는 한 끗도 안 먹혀.”머리를 처맞은 도서욱은 화를 버럭 내려다가 그 말에 입을 떡 벌렸다.“네? 백 명이 덤벼도 안 된다고요?”“헛소리 말고 똑똑히 들어. 그분이 누군지 알아? 그분은 바로 전설 속의 용존이야. 단 일격으로 육급 대종사 둘을 처단한 괴물 같은 존재라고. 동북 지역을 주름잡는 두 명문대가조차 머리를 조아리게 한 절세 천재란 말이야. 그런 사람을 내가 죽이라고? 네가 미친 거야, 아니면 날 미치게 하려는 거야?”소 마스터는 혈압이 치솟아 도서욱을 한 대 더 패 죽여버리고 싶었다.“뭐라고요? 그놈이 바로 그 전설적인 용존이라고요?”도서욱은 말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졌다.용존의 이름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만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 그 전설적인 존재를 직접 봤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그 앞에서 행세하고 심지어 사기를 쳤다고?순식간에 도서욱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손등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도서욱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었다.“소 마스터님, 그럼...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장 사람 데리고 가서 무릎 꿇고 빌어. 용존께서 널 용서하지 않으면 넌 오늘부로 끝장이야.”소 마스터는 단호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 바로 사람 모아 거기 가서 사죄드리겠습니다.”도서욱은 급히 부하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진서준이 경성 진씨 가문의 후예였다니, 그건 왕족이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진서준 씨,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만족했다면 이제 어떤 정보를 살 건지 말해보시죠.”블랙은 안경을 살짝 고쳐 쓰며 말했다.“진요천의 현재 위치입니다.”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건 좀 어렵겠는데 일단 해볼게요.”블랙은 도서욱과는 달랐다.먼저 일을 처리하고 그다음에 가격을 부르는 타입이었다.블랙은 키보드를 두드리며 한참을 검색했고 이윽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쉽지 않네요. 가장 최근 정보가 두 달 전입니다. 진요한이 강남에 있었다고 나오네요.”“뭐라고요? 강남이라고요?”진서준의 눈이 번뜩였다.“맞아요. 하지만 그건 두 달 전 얘기입니다. 지금도 거기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블랙이 고개를 저었다.두 달이라면 꽤 긴 시간이었기에 이미 구지범에게 딴 곳으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컸다.“진요한은 혼자 있었나요? 아니면 누군가 같이 있었나요?”진서준이 다시 물었다.“정보에 따르면 처음엔 누군가 함께 있었고요.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사라졌고 결국 강남엔 진요한 혼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정확한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되고요.”블랙은 어깨를 으쓱였다.“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진요한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면 무조건 먼저 저한테 알려줘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 겁니다.”진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아버지를 찾을 수만 있다면 돈이 문제가 될 리 없었다.“돈은 이제 별로 필요 없어요. 대신 당신이 용존이라면 제 부탁 하나만 들어줘도 되나요?”블랙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뭔데요? 법률이나 도의에 어긋나는 거만 아니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어요.”진서준이 단호하게 말했다.“강남 동성구의 깡패 조직 두목이 예전에 날 개 패듯이 팼어요. 저를 대신해서 그 자식 좀 혼쭐 내주세요.”이 말을 듣자 진서준은 순간 멈칫했다.“부탁이란 게 겨우 이것인가요?”대단한 일이라도 시키려나 했더니 고작 사람 하나 혼내주는 거였다.“이게 쉬운 일인가요?
독사의 구역에 도착한 후, 진서준은 김혜민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차에서 기다릴래? 좀 있다가 난장판 될 텐데 너까지 보호하기 힘들 수도 있어.”이번에 온 이유는 블랙을 위해 이곳의 조직 두목을 혼내주기 위해서였다.상대 쪽은 수가 많았지만 진서준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다만 일반인을 상대로 죽을 정도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적당히 손봐주기만 하면 됐다.“괜찮아, 난 너랑 같이 안 있을게. 그냥 구경꾼 모드로 있을 거야.”김혜민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진서준은 살짝 눈썹을 추켜세웠다.“그래, 알았어. 이따가 꼭 조심해.”진서준이 굳이 말려도 김혜민이 말을 들을 것 같진 않았으니 차라리 스스로 조심하라고 하는 게 나았다.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동성구에서 가장 큰 술집으로 향했다.한낮인데도 불구하고 술집 안에는 이미 청년들이 꽤 있었다.귀를 찢을 듯한 음악과 어지러운 조명 속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들이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딱 봐도 열기로 가득한 분위기였다.이런 환경이 진서준은 영 익숙하지 않았다.대학 시절에도 이런 곳엔 오지 않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업무상 어쩔 수 없이 몇 번 온 게 전부였다.진서준은 들어서자마자 직원에게 다가갔다.“너희 사장 독사 있어?”직원은 진서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에 경계하며 물었다.“넌 누구야? 우리 사장을 왜 찾는 거야?”“당연히 볼 일이 있어서지.”“무슨 일이든 일단 나한테 말해.”직원이 차갑게 대응했다.“너한테는 말해봤자야. 내가 두들겨 패야 할 사람이 너희 두목이거든.”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직원은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우리 두목을 패겠다고?”“그래. 그러니까 전화해서 얼른 오라고 해. 10분 안에 안 오면 이 술집을 박살 내버릴 테니까.”진서준의 싸늘한 말투에 직원의 얼굴이 굳어졌고 바로 소리쳤다.“이 자식이 깽판 치러 왔네? 거기 경호원 없어?”곧이어 덩치 큰 남자 네 명이 다가왔다.“이 녀석이 지금 소란을 피우려고 해.
“뭐라고? 불법적인 일이 우리 가게에서 일어난다고? 말도 안 돼.”성현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넌 전신전 소속이잖아. 그런데 네 오빠인 내가 어떻게 법률을 어기는 일을 하겠어?”“그럼 이 사람들은 왜 부른 거야? 집단 폭력도 불법이거든.”성미영은 차가운 시선을 보이며 성현도와 따졌다.“미영아, 이건 내가 싸우려던 게 아니야. 저 녀석이 일부러 시비 걸러 온 거라고.”성현도는 진서준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놈이 일부러 우리 찻집에 난입해 행패를 부리고 상철을 두들겨 패서 머리에 혹이 다 나버렸어. 난 단순히 정당방위를 위해 부른 거라고.”성미영이 등장하자 성현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솔직히 실력만 놓고 보면 성현도는 성미영보다 한참 부족했다.게다가 성미영은 전신전 소속인지라 저 남녀가 군부 조직인 전신전을 적으로 돌릴 리 없었다.군대를 건드리는 순간, 무조건 좋은 결과는 있을 수 없었다.“진서준, 도대체 무슨 일이야?”성미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어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성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내려놨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난 사람을 찾으러 왔어. 하씨 가문 하경범이 이 위층에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어.”진서준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그리고 또 하나, 저 위에서 불법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도 하더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이 말에 성현도의 표정이 단숨에 험악해졌고 즉시 반박에 나섰다.“헛소리 마. 우리 가게는 단순한 찻집이야. 불법적인 일 따윈 없어. 근거없는 소문을 왜 털어놓고 난리야?”“미영아, 저 녀석한테 속지 마. 난 네 사촌 오빠야. 내가 그런 불법적인 짓을 할 사람이겠어?”성미영이 곧바로 진서준에게 물었다.“진서준, 너 증거 있어?”“직접 올라가 보면 다 알게 될 거잖아?”진서준이 가볍게 말했다.“오빠, 위층으로 가자.”성미영이 단호하게 말했다.“그, 그건 좀 곤란해. 위층엔 귀
순간, 장내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모든 시선이 진서준에게 쏠렸고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다들 진서준을 그냥 얼굴만 반반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고수였다.성현도의 부하 중 최고 실력자조차 상대가 되지 않았다.성현도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렸고 상철을 향해서 욕설을 날렸다.“쓰레기 자식, 이런 애송이 하나도 못 이겨?”부하가 지면 망신당하는 건 결국 성현도 자신이었다.이대로 체면을 구긴 채 끝낼 수는 없었다.이대로 넘어가면 앞으로 르벨 재벌 2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게 뻔했다.“이봐, 네 실력이 괜찮은 건 인정할게.”성현도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근데 너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어? 천 명은? 잘 들어. 내 부하는 수도 없이 많아. 너 같은 놈 하나 처리하는 데 전화 한 통이면 충분해.”진서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다시 말하지만 난 그냥 하경범을 찾으러 온 거야. 그 녀석만 넘기면 오늘 일은 없던 걸로 해주지.”“없던 걸로 한다고?”성현도가 그 말에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너 지금 누굴 상대로 협상하려 드는 거야? 난 성씨 가문의 직계야. 날 건드리면 상대해야 할 건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가문 전체라고.”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이 남자들은 전부 성씨 가문의 경호원이었고 실력도 만만하지 않았다.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무려 50명 이상이었다.한순간에 텅 비어 있던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찼다.“저 자식 끝났네. 이 정도 성씨 가문 인원이라면 아무리 강해도 버틸 수가 없지.”“그러게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잖아.”“왜 쓸데없이 성현도를 건드린 거지? 스스로 무덤을 판 거잖아.”구경꾼들은 이 광경에 각자 다른 감정을 보였다.누군가는 동정을, 누군가는 아쉬움을, 또 누군가는 짙은 흥미를 보였다.“사연아, 넌 좀 쉬어. 이놈들은 내가 처리할게.”진서준이 앞으로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거구의 사내가 찻집 안으로 들어왔다.남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상철아, 저놈 다리 하나 부러뜨려서 내던져.”성현도가 진서준을 가리키며 명령했다.“알겠습니다.”상철은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진서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서준아, 내가 할게.”허사연의 눈에는 불꽃 같은 전투욕이 타올랐다.“조심해. 저 녀석은 횡련 종사야.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진서준이 조용히 귀띔했다.“알았어. 설령 못 이긴다고 해도 어차피 네가 있잖아?”허사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진서준이 곁에 있는 한, 허사연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이봐, 사내자식이 여자 뒤에 숨는 게 말이 돼?”상철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봐, 껑충이. 여자를 얕보지 마. 일단 이기고 나서 말해.”허사연이 상철을 도발했다.“아가씨, 그런 기생오라비 말고 날 따르지 그래? 밤마다 널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는데?”상철이 음흉하게 웃었다.“죽고 싶어 환장했구나.”얼굴이 싸늘해진 허사연이 주먹을 날렸다.강렬한 펀치가 공기를 가르며 폭발음을 일으켰고 그 위력은 철판도 뚫을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상철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가만히 서 있어도 넌 날 어쩔 수 없어.”“닥쳐!”허사연이 분노에 차 주먹을 그대로 상철의 얼굴로 내리꽂았다.상철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며 대머리 정수리로 받아냈다.쿵!둔탁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주먹이 상철의 머리를 강타했으나 대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사연이 몇 걸음 물러섰다.순간 손에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고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손을 확인하자 하얀 피부였던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올랐다.상철은 자기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더니 빙그레 웃었다.“아가씨, 이제 내 실력을 알겠지?”그 모습에 허사연의 승부욕이 다시 불타올랐고 콧방귀를 뀌며 다시 달려들었다.이번에는 다리를 높이 들어 올려 상철의 머리를 내려찍었다.‘머리가 단단하다고 자랑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가 싸움 실력이 이렇게 대단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완전 여성판 이소룡이었다.“너, 너희들 정말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기나 해? 어디서 대놓고 싸움질이야?”종업원은 순간 놀란 뒤 분노에 찬 얼굴로 진서준와 허사연을 가리켰다.찻집이 문을 연 이후로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진서준과 허사연이 첫 사례였다.주변의 구경꾼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싸움 좀 하면 뭐해? 여긴 성씨 가문의 구역이야. 성씨 가문에서 한마디만 하면 저 남녀는 오늘 밤중으로 사라지겠지.”“어휴, 저 여자 너무 아까워. 저렇게 예쁜데 왜 죽지 못해서 안달이지?”“여자는 살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무조건 죽을걸.”사람들은 저마다 수군거리며 이미 진서준과 허사연의 결말을 예상하는 듯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내가 널 때린다 해도 얌전히 맞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허사연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종업원에게 다가갔다.“오지 마!”종업원은 겁에 질려 연신 뒷걸음질 쳤다.“어떤 미친놈이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야?”그 순간, 2층에서 한 사람이 내려왔다.모두가 일제히 시선을 돌려 그 사람을 확인하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성현도가 오늘 여기 있었네?”누군가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저 둘 끝장났네. 성현도는 악명 높은 냉혈한이야.”그 청년은 바로 찻집의 사장인 성현도였다.성현도는 르벨 재벌 2세 사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친구에게는 무조건 의리를 지키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했다.성현도의 고문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고 게다가 무인으로서 무공 실력도 상당했다.“사장님, 저 남녀가 와서 난동을 부렸어요.”종업원은 성현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사장이 나온 걸 확인한 허사연은 주먹 한 방에 종업원을 기절시켜 버렸다.“뭐야?”성현도의 눈이 가늘어졌고 표정이 험악해졌다.자기 앞에서 대놓고 부하를 때리다니,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도발이었다.“아가씨, 우리 처음 보는 사이 맞지? 우리
그리고 오후 2시가 되자 진서준은 허사연을 데리고 조호가 말한 천국찻집으로 향했다.겉모습만 보면 이 찻집은 진짜 전통찻집 같았고 규모도 꽤 컸다.하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1층과 2층까지는 정말 평범한 찻집처럼 꾸며져 있었고 누가 봐도 이상한 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하지만 3층으로 올라가려면 회원권이 있어야 하거나 사장이 직접 허락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다.“손님, 아가씨,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진서준과 허사연이 차를 마시러 온 줄 안 종업원이 빠르게 달려와 안내하려 했다.“그럴 필요 없어. 난 하경범을 찾으러 왔거든.”진서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네?”종업원이 순간 얼어붙었다.“혹시 하씨 가문의 하 도련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맞아.”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손님은 누구신지...”종업원이 신중하게 물었다.진서준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그냥 복수하러 왔다고 전해.”그놈 아버지라고 하는 건 자기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고 친구라고 하기도 기분이 더러웠다.그 말에 종업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손님, 여기서 장난치지 마세요.”하경범은 르벨에서 유명한 재벌 2세였다.이 찻집의 사장과도 막역한 사이였고 여기서 일하는 직원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왜? 못 믿겠어?”진서준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손님, 하 도련님에게 복수하려던 사람은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종업원이 경고하듯 말했다.“그런 농담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그 말을 듣자 진서준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전해. 그 하경범이 두들겨 맞고 나자빠지게 했던 진서준이 왔으니 당장 기어 나오라고 말이야.”진서준의 뻔뻔한 태도에 종업원은 어이가 없었다.“좋습니다. 손님이 그렇게 죽고 싶다면 제가 기꺼이 도와드리죠.”종업원은 바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문제 발생했습니다. 난동자가 있습니다.”쿵! 쿵!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건장한 남자 스무 명이 들이닥쳤다.전부 검은
진서준과 허사연은 차를 타고 조호의 회사로 향했다.이 회사는 그냥 겉치레일 뿐, 진짜 돈이 들어오는 곳은 유흥업소들이었다.유흥업소를 얕잡아보면 안 된다.운 좋게 돈 많은 도련님들이라도 걸리면 하룻밤에 수억 원이 순식간에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진서준 씨!”진서준이 들어서자 조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조호는 진서준 옆에 있는 허사연을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숙이고 감히 더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잡담은 그만하고 하경범을 잡아가는 제일 좋은 타이밍만 말해.”진서준이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말에 조호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매일 오후마다 하경범은 천국찻집이라는 곳에 갑니다.”조호는 재빨리 대답했다.“보통은 경호원 몇 명만 데리고 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얼씨구? 저런 인간이 매일 차나 마시러 간다고?”진서준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그게... 진서준 씨, 사실 그곳은 이름만 찻집이지 실제로는...”조호는 옆에 여성이 있다는 걸 의식해서 말을 흐렸지만 진서준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그냥 인기 많은 인터넷 셀럽이 가득한 고급 유흥업소일 것이다.“진서준 씨, 듣자 하니 그 찻집의 주인은 성씨 가문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진짜로 움직이실 거라면 하경범이 이동 중일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겁니다.”조호가 조심스럽게 조언했다.“응? 성씨 가문이 이런 사업도 해?”진서준은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진서준은 오영수에게서 성미영에 대한 정보를 들은 적이 있었다.정의로운 성격의 성미영이 자기 가문에서 이런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네, 듣기로는 성씨 가문의 한 직계 후손이 운영한다고 합니다. 여자에 미쳐 있는 놈이라 르벨의 돈 많은 도련님들과 꽤 친분이 깊다고 하더군요.”조호는 본인이 아는 정보를 전부 쏟아냈다.“좋아, 대충 알겠어.”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조호의 회사를 나온
진서준이 허사연의 캐리어를 들어주며 옆방으로 걸어갔다.그 뒷모습을 보며 도지아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인간은 원래 모여서 사는 걸 선호하는 동물이다.사회를 벗어나서 혼자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가족도 친구도 없이 너무 오래 지내다 보면 결국 감정 없는 시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그렇게 되면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없어질 것이다.“어제 전화할 때 그랬었지? 이번에 너 자기 출신을 찾으러 온 거라고.”호텔 방으로 돌아온 후, 허사연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너 원래 경성 진씨 가문 사람이잖아?”“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예전에 말해주셨어. 사실 우리 아버지는 어릴 때 길에서 주워 온 아이였다고.”진서준은 허사연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허사연은 진서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허사연이라면 이 비밀을 절대 밖으로 흘리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뭐라고? 아버님이 주워 온 아이라고?”허사연이 깜짝 놀랐다.“그래.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이야. 가족 중에서도 할아버지가 나한테만 알려주셨지.”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 오영수가 내 등에 있는 용을 보고는 내가 용맥의 일족이라고 했어. 그래서 오영수를 따라 여기 와서 오영수 셋째 삼촌에게 내 출신에 관해 알아보려 했던 거야.”“네 등에 용이 있다고?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데?”허사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둘이 알몸으로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은데 허사연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다.“내가 체내 혈기를 모을 때만 그 용이 나타나거든.”진서준이 설명을 이어갔다.“그런데 오영수 삼촌이 아직 돌아오질 않아서 일단은 여기서 며칠 기다려야 해.”“아니, 그럼 오씨 가문에서 널 안 재워줬어?”허사연이 의아해했다.명문대가인 오씨 가문에 빈방이 없을 리가 없었다.“그날 오영수를 찾아갔는데 마침 오영수 할아버지가 위중했어. 그리고 그 집안엔 그 어르신을 그냥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지.”진서준이 담담하게
“진짜 예쁜 새색시 숨겨놓고 있었네?”허사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누구라도 자기 남자 방에 예쁘고 몸매가 완벽한 여자 하나가 같이 있는 걸 보면 의심 안 할 수가 없었다.게다가 지금은 아침이었다.설마 이 여자가 아침에 막 찾아온 건 아니겠지?“사연아, 오해야. 내가 제대로 설명할게.”진서준은 머리가 띵해졌고 뇌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아가씨, 오해하지 마세요. 어제 저랑 진서준이 같은 방에서 잔 건 맞지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 밤새 한숨도 못 잤다니까요?”도지아가 황급히 해명에 나섰다.“네? 밤새 안 자고도 아무 일 없었다고요?”허사연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설마 밤새 불태우느라 못 잔 건 아니겠죠?”허사연의 농담과 진담이 뒤섞인 말에 진서준은 헛웃음만 나왔다.“사연아, 이쪽은 도지아야.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일단 들어와. 천천히 설명할게.”허사연이 방에 들어오자 진서준은 서로에게 소개했다.그러고는 이 방에서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다.“도지아는 황예은이 소개해 준 환자야. 다리 치료를 부탁받았거든. 종아리를 봐봐. 이틀 전에 내가 직접 발라준 연고가 있어.”허사연이 내려다보자 확실히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그리고 도지아가 밤새 안 잔 건 원기를 수련하느라 그랬던 거야. 너도 예전에 수련한다고 며칠씩 안 잔 적 있잖아?”허사연은 오해가 풀리자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내가 뭐 어쨌다고 그렇게 호들갑이야?”“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그러는 거잖아.”진서준이 빠르게 대답했다.“뭐야? 내가 그렇게 의심 많고 질투 많은 여자로 보여?”허사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아, 아니지. 우리 사연은 누구보다 속이 넓은 부드러운 여자지.”진서준이 급히 정정했다.“됐어, 너 겁먹은 거 너무 귀엽다.”허사연이 피식 웃었다.“넌 여기 좀 쉬고 있어. 내가 방 하나 잡고 올게.”진서준은 더 머뭇거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진서준의 뒷모습을 보며 허사연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다.“도지아 씨, 진서준이
“내가 가면 안 돼?”사실 진서준은 거절하려 했었다.르벨은 안개가 짙게 깔린 늪지대 같은 곳이라 진서준조차도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그러니 허사연이 온다면 다칠 가능성이 컸다.하지만 거절하면 허사연이 상처받을 게 뻔했다.“당연히 되지. 지금 위치 보낼게.”진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위치를 보냈다.자기 여자를 지킬 자신도 없으면서 강자들을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자기야, 잘 자.”허사연이 애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일찍 자.”진서준이 다정하게 답했다.전화를 끊고 나니 진서준의 졸음이 싹 가셨다.진서준은 창가로 다가가 이 화려한 도시를 내려다봤다.“오씨 가문, 안씨 가문, 하씨 가문... 너희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든 난 전부 박살 낼 거야. 이번엔 반드시 나와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내고 말겠어.”진서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그렇게 별다른 사건 없이 밤이 지나갔다.다음 날 아침.진서준이 막 눈을 뜨자마자 도지아의 흥분한 외침이 들려왔다.“진서준, 됐어. 나 생겼어!”도지아는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는데 밤새 잠을 자지 않은 게 분명했다.진서준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너 아직 처녀 아니었어? 대체 어떻게 임신한 거야?”“미친놈아, 임신은 개뿔, 무슨 헛소리야?”도지아는 얼굴이 빨개지며 진서준을 노려봤다.“그럼 왜 아침부터 난리야?”진서준이 되물었다.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침부터 흥분해 날뛰지 않을 것이다.“어제 네가 준 수련법 기억나지? 나 벌써 원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됐어.”자기가 대단하다고 여긴 도지아는 자랑스럽게 선언했다.고작 하룻밤 만에 원기를 형성한 건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뭐? 그렇게 빠르다고? 너 타고난 천재 맞네?”진서준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보통 무인은 원기를 익히는 데만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그것도 매일 꾸준히 수련할 경우에만 발생하는 일이었다.심지어 재능 있는 자들도 한두 달은 족히 걸린다.그런데 도지아는 단 하룻밤에 이 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