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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월이
나윤서는 천 년 뒤의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시스템에 의해 낯선 고대 왕조로 오게 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당시 가장 총애받지 못하던 칠황자 이헌을 도와 황제의 자리에 올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책사의 신분으로 이헌에게 접근했고, 그와 함께 피비린내 나는 황위 쟁탈전을 헤쳐 나갔다.

그를 위해 계책을 세우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때로는 그에게 닥친 온갖 위험을 몸소 막아 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허물어진 사당에 숨어 차갑게 굳은 찐빵 하나를 나눠 먹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온기를 나누었다.

수많은 시신이 쌓이고 피가 흥건한 전장에 나란히 서서, 마침내 손에 넣은 옥새를 올려다보던 날도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차갑고 도도한 데다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어린 황자가 어느새 나윤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경계하고 이용하려는 속셈이 가득했던 눈빛에도 차츰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마침내 뜨거운 애정으로 가득 찼다.

즉위식 날, 조정 대신들이 일제히 엎드려 만세를 외쳤다.

이헌은 나윤서의 손을 굳게 잡고, 조정이 발칵 뒤집히고 예부의 원로 대신들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끝내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그녀를 황후로 책봉했으며, 만백성 앞에서 평생 오직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윤서야, 짐은 그대 없이는 아니 되오. 그대가 곁에 없다면 이 드넓은 강산도 짐에게는 황량한 황무지에 지나지 않소.”

나윤서 역시 어느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헌을 사랑하게 되었다.

시스템은 임무가 끝났으니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나윤서는 용상에 앉아 자신을 향해 다정히 웃는 이헌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시스템을 거슬러 이곳에 남기로 마음먹었다.

나윤서는 그것이 두 사람의 결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위 다툼에서 패한 폐태자 이찬이 결사대를 이끌고 돌연 궁궐에 쳐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반란은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중상을 입은 이찬은 궁성의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 등 뒤로는 아득히 높은 성벽이 버티고 있었고, 앞에서는 어림군(御林軍)과 궁수들이 겹겹이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던 이찬은 광기 어린 웃음을 띠고 이헌이 감싸고 선 나윤서를 향해 목이 터져라 외쳤다.

“윤서야! 어서 손을 쓰거라!”

그 말을 남기고 이찬은 몸을 던져 담장 너머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말은 독을 바른 얼음 송곳처럼 이헌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순간 궁수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어 차가운 화살촉을 나윤서에게 겨누었다.

벼락을 맞은 듯 나윤서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헌이 홱 돌아섰다. 눈빛에는 의심과 분노, 그리고 나윤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늘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폐하 저는...”

나윤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히 입을 열자, 이헌은 한참 나윤서를 노려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망설이던 궁수들이 그제야 무기를 내렸다.

“짐은 너를 믿는다.”

이헌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헌은 나윤서와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한 침상에서 잠들지 않았고, 조정의 일을 의논할 때도 나윤서를 부르지 않았으며 나윤서에게 손을 대는 일마저 드물어졌다.

나윤서는 황제가 의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생사를 함께하며 쌓은 두 사람의 정이 적이 죽기 전 던진 모함 한마디에 무너질 줄은 몰랐다.

얼마 뒤 남쪽 순행에서 돌아온 이헌은 아름답고 가녀린 강설희를 데려와 후궁으로 들이겠다고 했다.

나윤서는 아픈 가슴을 안고 옛 맹세를 따져 물었고, 용상에 앉은 이헌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윤서를 내려다보았다.

“황후, 짐도 평생 너 하나만 연모할 줄 알았다. 설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설희는... 참 특별하다. 순수하고 연약하며, 조금도 속셈이 없다. 무엇보다 설희 곁에 누우면 마음 놓고 잠들 수 있다.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헌은 잠시 머뭇거리다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나윤서는 알아들었다.

‘무엇이 걱정되느냐고?’

‘곁에 누운 사람이 적의 첩자일까, 잠든 사이 칼을 들이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지.’

입으로는 나윤서를 믿는다고 했지만, 이헌이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의심이 서려 있었다.

그렇게 강설희는 궁에 들어와 귀비로 책봉되었고, 금슬궁을 하사받았다.

이헌의 총애는 오롯이 그녀에게 쏟아졌고, 후궁의 어느 누구도 그에 비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이헌은 강설희를 위해 번번이 나윤서의 황후로서의 존엄을 짓밟았다.

강설희가 황후의 처소에서 먹는 다과가 더 향기롭다고 하자, 이헌은 봉의궁에 우선 배정되던 음식을 금슬궁으로 돌리라 명했고, 강설희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자, 나윤서가 어화원의 돌길을 손봐 강설희를 넘어뜨렸다고 단정하고 한낮 뙤약볕 아래 그녀를 세 시진이나 무릎 꿇렸다.

또 강설희가 풍한에 걸려 기침을 몇 번 하자, 이헌은 황후인 나윤서가 후궁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탓이라며 황후로서의 권한을 빼앗아 강설희에게 임시로 맡겼다.

심지어 강설희는 나윤서가 예전에 성루에 사흘이나 매달리고도 살아남은 건 신명의 보살핌 덕분일 테니, 다시 성루에 매달려 폐하를 위해 복을 빌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이헌은 정말로 명을 내려 나윤서를 홑옷 차림으로 도성의 성루에 매달았다.

나윤서는 사흘 동안 뙤약볕 아래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햇볕은 살을 태우고 찬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수치와 절망이 나윤서를 집어삼킬 듯했다.

목숨이 위태롭고 의식이 흐려지던 순간, 오랫동안 잠잠했던 시스템이 마침내 다시 작동했다.

[숙주님의 생명력이 위험 수준까지 떨어졌으며, 영혼의 결속이 약해졌습니다. 최종 이탈 절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를 떠나시겠습니까?]

나윤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그래!’

[이탈 절차를 시작합니다. 에너지를 축적 중... 칠 일 후 실행 예정입니다.]

이제 닷새만 더 버티면 되었다.

닷새 뒤면 자신을 7년이나 붙잡아 두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이헌에게서도, 눈부시게 화려하지만 결국 감옥에 불과했던 이 궁궐에서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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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21화

    구한결은 휠체어를 타야 할 만큼 늙었지만, 나윤서의 침대 곁을 지키며 앙상해진 손을 꼭 붙든 채 흐릿해진 눈으로 쉼 없이 눈물을 흘렸다.“윤서야... 무서워하지 마. 나 여기 있어...”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린 나윤서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평생을 함께한 사랑하는 사람을 알아보고는, 입술을 달싹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한결 씨... 이번 생에... 당신을 만나... 참 행복했어...”구한결은 나윤서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다음 생에도... 우리 꼭 함께하자. 다시 내 아내가 되어 줘....”나윤서는 세월의 풍파를 겪고도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심장 모니터의 파형이 차갑고 곧은 선으로 멈췄다.“엄마!”“할머니!”병실 안은 가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구한결은 나윤서의 손을 꼭 쥔 채 그 위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그때, 수십 년 동안 나윤서의 곁을 지켜 온 이헌은 나윤서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한 번 더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윤서는 다시,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하지만 이번에 나윤서의 시선은 침대 곁에 모인 그 누구에게도 향하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돌려 침대 발치 쪽을 바라보았다.수십 년 동안 이헌이 꼼짝 않고 서 있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흐릿하던 나윤서의 눈동자에 잠시 초점이 돌아오며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해진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젊은 이헌이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고, 오랜 세월 가시지 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이헌은 천 년의 후회와 끝없는 사랑, 깊은 슬픔을 담은 눈빛으로 나윤서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이헌의 혼령이 크게 흔들렸다.‘혹... 내가 보이는 걸까?’‘윤서가 정녕 내가 보이는 걸까?’나윤서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달싹였다.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이헌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천 년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20화

    현대 의학의 힘인지, 의료진의 필사적인 응급 처치 덕분인지, 아니면 시공을 넘어 전해진 간절한 기도가 조금이나마 통했는지. 나윤서의 심장 모니터에 마침내 안정적인 파형이 돌아왔고, 출혈도 멎어 위기를 넘겼다. 몇 시간 뒤 우렁찬 아기 울음이 분만실을 울렸다. 산모와 아이 모두 무사했다.나윤서는 탈진한 채 분만실에서 나왔지만 의식은 또렷했다. 구한결은 침대 곁으로 달려와 나윤서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윤서야...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살아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며칠 뒤 나윤서의 상태가 안정되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구한결은 포근한 속싸개에 싸인 아들을 안아 조심스레 나윤서의 품에 안겨 주었다.“윤서야, 우리 아들이야. 코는 널 닮고 입은 나를 닮았어.”처음 아빠가 된 기쁨과 조심스러움이 담긴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윤서는 고개를 돌려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얼굴이 발갛게 물든 아기는 눈을 감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이상하리만치 따스한 감정이 나윤서의 지친 몸과 마음을 가득 채웠다.고통과 두려움, 죽을 고비를 넘긴 순간도 이 작은 생명 앞에서는 견딜 만한 듯했다. 나윤서의 창백하고 지친 얼굴에 행복한 엄마의 미소가 번졌다.이헌은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죽을 고비를 넘긴 나윤서의 지친 얼굴과 아기를 향한 다정한 눈빛, 두 사람의 베개를 조심스레 고쳐 주는 구한결. 평범하지만 생기 넘치는 행복이었다.이헌도 천천히 미소 지었다. 눈물과 아픔, 끝없는 후회가 어린 일그러진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았다는 안도감이 깃들어 있었다.나윤서는 살아 있었다. 건강했고, 행복했다. 설령 그 행복이 더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더라도, 나윤서가 살아서 잘 지내고, 웃고,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세월은 소리 없이 흘렀다. 이헌의 혼령은 반경 백 미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줄곧 나윤서의 곁을 맴돌았다.그는 작은 아기가 옹알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19화

    찰나의 순간, 그 형체는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나윤서는 자신이 놀란 나머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었다. “윤서야? 윤서야! 괜찮아? 다친 데 없어?”다급히 부르는 구한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구한결은 나윤서를 꼭 끌어안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정신을 차린 나윤서는 세차게 뛰는 심장과 등에 밴 식은땀을 느끼며 구한결의 품에 기댔다.“괜찮아.”나윤서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구석을 바라보았지만, 그곳에는 그저 어지럽게 널린 잔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방금 그거... 정말 환상일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은 너무도 생생했다....결혼식은 장소를 바꿔 무사히 치러졌고, 나윤서와 구한결은 정성껏 꾸민 새집에 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나윤서는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 왔고, 입덧과 잦은 졸음에 시달렸으며 입맛도 자주 바뀌었다. 구한결은 산부인과 검진에 동행하고 부은 발을 주물러 주었으며, 한밤중에도 먹고 싶다는 음식을 만들어 주며 정성껏 보살폈다.이헌은 줄곧 나윤서 곁을 지키며 임신으로 힘들어하는 모습과 어머니가 되어 가며 얼굴에 깃드는 다정한 기색을 지켜보았다.그러다 문득 예전 나윤서가 두 사람의 아이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나윤서는 아직 불룩해지지 않은 배를 어루만지며 기대에 찬 미소를 짓곤 했다. 이헌은 정사를 다지고 정적을 제거하느라 곁을 자주 비웠지만, 궁에 돌아와 그 미소를 볼 때면 지친 마음이 풀리곤 했다.그러나 그 아이는 이헌의 무관심과 끊이지 않는 암투 속에 끝내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이제 나윤서는 다른 남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새 생명을 기다리고 있었다.출산은 순조롭지 않았다.태위가 좋지 않아 진통이 길어졌고, 막바지에는 양수 색전증으로 대량 출혈이 일어났다. 의사는 분만실에서 급히 나와 기다리던 구한결과 양가 부모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산모의 출혈이 심하고, 심장도 몇 차례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18화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나윤서는 정기 건강검진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식을 들은 구한결은 잠시 멍하니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윤서를 번쩍 들어 올려 거실에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그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내가 아빠가 된다니! 윤서야! 고마워! 정말 고마워!”구한결은 나윤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 아무런 변화도 없는 그녀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댔다.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설렘이 가득했다.나윤서는 고개를 숙여 그런 구한결을 바라보았다. 한 손으로 배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에는 이제 막 어머니가 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낯설고도 따스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이헌은 두 사람의 곁에 떠서 나윤서의 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곳에는 지금 다른 남자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그 순간, 이헌은 문득 떠올렸다.자신과 나윤서에게도 한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당시 그는 막 황위에 올랐다. 아직 황권이 굳건하지 못한 틈을 타 적국의 자객이 궁중 연회에 숨어들어 그를 습격했다.그 순간, 나윤서는 망설일 새도 없이 달려들어 이헌 대신 독이 묻은 칼을 맞았다.자객은 처단했지만, 나윤서는 끝내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꼬박 한 달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그런 그녀가 의식을 되찾고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었다.“폐하, 괜찮습니까?”뒷이어 아이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윤서는 오랫동안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오를 만큼 울고도, 애써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리고는 그를 향해 괜찮다고,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거라고 말했다.그는 나윤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의 귓가에 몇 번이고 약속했다.“윤서야, 우리에겐 또 아이가 생길 것이다. 앞으로 많은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자꾸나. 짐이 너와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 주마. 다시는 털끝 하나 다치는 일조차 없도록 하겠노라.”하지만 그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17화

    어쩌면 사무치는 그리움과 후회가 어떤 경계를 넘어선 것인지도 몰랐다.놀랍게도 이헌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눈물은 그의 혼백에서 떨어져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나윤서의 손등 위로 살며시 떨어졌다.갑작스러운 차가운 감촉에 나윤서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손등에는 맑은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투명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이 피부를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나윤서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물방울을 만져 보았다. 그러고는 손끝을 코끝에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물 같았다.나윤서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서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방 안에는 나윤서 혼자뿐이었다. 창문도 굳게 닫혀 있어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이헌은 숨을 죽인 채 나윤서의 눈앞으로 다가갔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히 외쳤다.‘느꼈느냐? 윤서야! 짐이다! 짐이 바로 여기 있단 말이다!’나윤서는 텅 빈 서재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손등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물방울은 어느새 거의 말라 있었다.결국 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느꼈나 봐.”나윤서는 휴지 한 장을 뽑아 손등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관자놀이를 잠시 문지른 뒤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일을 계속했다.이헌의 눈에 서렸던 희망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그는 맥없이 구석으로 물러났다.이윽고 일에 몰두한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에서 서서히 식어 가는 커피 한 잔, 생각에 잠길 때면 미간을 찌푸리고 습관처럼 펜을 깨무는 버릇까지...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다.그런데도 모든 것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삶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고, 천 년의 세월이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무엇보다 이제 나윤서의 마음에는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이헌은

  • 천년의 세월을 건너   제16화

    그 순간, 이헌은 혼백마저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음악이 흐르기 시작하자 구한결과 나윤서는 함께 춤을 추러 나섰다.구한결은 여유롭고 우아하게 발을 옮겼다. 나윤서는 처음에는 조금 서툰 듯했지만, 이내 박자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돌았다. 구한결은 고개를 숙여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향한 눈빛은 한없이 다정하고 진지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헌은 분노와 질투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이헌은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구한결을 나윤서에게서 떼어 놓고 싶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자신이 바로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나윤서에게 알리고 싶었다.하지만 몇 번을 달려들어도 그의 몸은 허공을 가르듯 두 사람을 그대로 통과할 뿐이었다.이헌은 목이 터져라 울부짖고 욕설을 퍼부었다. 주변의 물건들에도 미친 듯이 몸을 부딪쳤지만, 아무런 흔적조차 남길 수 없었다.마침내 음악이 끝났다.그러나 구한결은 나윤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그는 몸을 살짝 숙여 나윤서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그러자 나윤서의 두 뺨이 눈에 띄게 발그레 물들었다.이헌은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나윤서도 한때는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수줍어하곤 했다.그가 몰래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출 때면,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속삭일 때면 늘 그랬다.그때 나윤서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수줍은 표정에는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다른 남자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그날 밤, 구한결은 나윤서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집 앞에 도착한 뒤에도 그는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아래, 구한결이 나윤서의 손을 잡았다.“윤서 씨.”구한결이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저 윤서 씨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제가 곁에서 아끼고 지켜 줄 수 있도록...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나윤서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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