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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월이
“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가을이의 다급한 외침이 나윤서의 회상을 끊었다.

뒤이어 이헌을 곁에서 모시는 고무성이 황급히 봉의궁 안으로 들어섰다. 잔뜩 굳은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지금 당장 금슬궁으로 오시랍니다!”

나윤서는 손에 들고 있던 향 조각을 내려놓고 태연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고무성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귀비마마께서... 그게... 폐하께서 방금 금슬궁에 가셨다가 낯선 사내가 귀비마마를 침상에 짓누르고 있는 걸 보셨답니다! 옷도... 흐트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귀비마마께서는 대성통곡하시며,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가 자신을 겁탈하려 했다고 하셨사옵니다. 죽음으로 맞선 끝에 간신히 몸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하시더이다. 이에 크게 노하신 폐하께서 그 사내를 붙잡아 모진 고문을 가하셨는데,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내가 그만... 마마께서 자신을 시켜 귀비마마를 겁탈하게 하셨다고 자백했사옵니다!”

고무성은 숨을 고른 뒤 다급히 덧붙였다.

“마마! 소인은 마마께서 결코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분명 누군가 마마께 누명을 씌운 것이옵니다! 어서 폐하께 가셔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시옵소서. 폐하께서는 아직도 마마를 마음에 두고 계시니, 분명 마마의 말씀을 들어 주실 것이옵니다!”

고무성의 말이 끝나자, 나윤서의 마음은 그저 차갑게 식어 있을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해명이라? 정말 믿는다면 해명이 필요할까?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설명해도 무슨 소용인가?’

나윤서는 아무 말 없이 소매를 여미고 고무성에게 말했다.

“가자.”

금슬궁 안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고, 숨 막히도록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설희는 찢어진 잠옷 한 벌만 걸친 채 흐트러진 머리로 이헌의 품에 안겨 흐느끼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가 연신 들썩이는 모습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듯, 보는 이마저 안쓰러워할 만큼 애처로웠다.

이헌은 굳은 얼굴로 강설희를 한 팔로 감싸 안고 있었는데, 눈에는 분노가 들끓었고 다른 손은 핏줄이 불거질 만큼 꽉 쥐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가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나윤서가 막 전각에 들어서자 찻잔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퍽!”

찻잔이 그녀의 이마 한쪽을 세차게 때리며 산산조각 났다. 뜨거운 찻물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뒤섞여 뺨을 적셨다.

극심한 통증에 몸이 휘청했지만, 나윤서는 꼿꼿이 서서 손을 들어 닦지도 않았다.

“나윤서!”

이헌의 고함이 전각을 뒤흔들었다.

“어쩌면 그리도 심보가 고약하단 말이냐! 이제야 알겠구나. 아까 그토록 짐을 귀비의 처소로 보내려 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느냐? 짐의 눈으로 이런 광경을 보게 만들어, 설희를 버리고 냉궁(冷宮)에 가두도록 꾸민 것이냐! 황후의 몸으로 이토록 비열한 술수를 써서 후궁을 해치려 들다니! 참으로 역겹구나!”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 묻은 비수처럼 날아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나윤서의 가슴을 다시금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나윤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속눈썹에 묻은 핏물과 찻잎을 닦았다.

그러고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조용히 무릎을 꿇어 이마를 바닥에 댔다.

“신첩이 죽을 죄를 지었으니 벌을 내려주십시오.”

변명도 하소연도 없이 죄를 인정하는 말뿐이었다.

이헌은 멍하니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반박도 울부짖음도, 발악도 없었다. 나윤서는 섬뜩할 만큼 차분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을 인정하듯 담담한 나윤서의 태도는 격렬한 항변보다 이헌을 더 놀라게 했다.

“정녕... 네 짓이었구나.”

이헌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상심을 억누르는 듯한 그 목소리에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나윤서, 대체 언제부터 이리도 잔악해진 것이냐? 아니면 짐이 처음부터 그대를 잘못 보았던 것이냐? 그대는 원래부터 이토록 악랄한 심성을 지닌 여인이었던 것이냐!”

나윤서는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헌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이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 마지막 온기마저 사라지고, 오직 냉혹한 제왕의 결단만이 남았다.

“황후 나씨는 심성이 악독하여 계략을 꾸며 후궁을 해하려 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허나 오랫동안 짐을 섬긴 정을 생각하여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죽을죄는 면해 주되, 벌까지 피할 수는 없느니라! 여봐라!”

이헌이 매섭게 명했다.

“황후의 예복을 벗기고 궁문 밖으로 끌어내어 곤장 여든 대를 쳐라! 이를 본보기로 삼아 다시는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가 없도록 하라!

“폐하!”

고무성과 가을이가 동시에 경악하여 외쳤다.

여인의 몸으로 곤장 여든 대를 맞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설령 목숨을 건진다 해도 평생 몸이 성치 못할 터였다.

금군들이 다가와 나윤서가 걸친 두터운 예복의 겉옷을 거칠게 벗겨 냈다. 속에 받쳐 입은 수수한 홑옷만 남자, 금군들은 그녀를 붙잡아 궁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나윤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금군들이 거칠게 끌고 가는 대로 몸을 맡긴 채 문턱을 넘다가, 마지막으로 전각 안을 돌아보았다.

이헌은 강설희에게 몸을 기울인 채 밝은 황색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고 있었다. 무어라 낮게 달래는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했고, 강설희는 그의 품에 기대 가늘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윤서의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려 왔다.

‘두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물어도 답해 줄 이는 없었다.

나윤서는 궁문 밖의 싸늘한 돌바닥 위에 엎드려졌다. 이내 무거운 곤장이 바람을 가르며 사정없이 내려쳤다.

“하나!”

“둘!”

“셋!”

곤장이 떨어질 때마다 살이 터지는 둔탁한 소리와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이 이어졌다.

입안에 짙은 피 맛이 번졌지만, 나윤서는 입술을 악물 채 끝내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통증 속에서 의식은 흐려졌지만, 지난날의 기억은 또렷하게 눈앞을 스쳤다.

이 세계에 막 왔을 무렵, 나윤서는 냉궁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떨던 말수 적고 우울한 소년 이헌에게 몰래 음식과 약을 가져다주었다.

황위 다툼이 가장 치열하던 때, 이헌은 화살을 맞아 크게 다치고 고열에 시달렸다.

나윤서는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사흘 밤낮 이헌을 간호했다.

이헌이 즉위한 뒤, 처음으로 나윤서의 손을 잡고 궁궐의 높은 성벽에 올랐던 날도 떠올랐다.

이헌은 발아래 펼쳐진 드넓은 강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서야, 보아라. 짐이 너를 위해 손에 넣은 천하란다.”

이헌이 처음 금슬궁에서 밤을 보낸 날도 떠올랐다.

그녀는 밤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이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날이 밝아서야 돌아온 이헌이 건넨 말은 고작 한마디였다.

“황후라면 사사로운 마음보다 대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 뒤로도 강설희 때문에 꾸지람을 듣고, 외면당하고, 하나둘 권한을 빼앗길 때마다 나윤서의 마음은 조금씩 닳아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성루에 매달려 있었던 때였다.

한낮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매서운 찬바람을 번갈아 견디는 동안,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짓밟혔다.

성루 아래를 오가는 백성들은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렸으며, 간간이 터져 나오는 비웃음은 형벌보다도 더 깊이 그녀를 할퀴었다.

“일흔여덟!”

“일흔아홉!”

“여든!”

마지막 곤장이 떨어지자, 나윤서는 목구멍에서 피가 치밀어 올라 한 입 가득 토했다.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정신을 잃기 직전,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윤서야!”

이헌의 목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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