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신지아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윤형우는 찬란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게 아주 유용할 만한 정보가 하나 있는데, 들어볼래?”신지아는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레 물었다.“이나은, 임신 안 한 거죠?”윤형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알고 있었어?”신지아는 담담히 대답했다.“그냥 짐작만 했을 뿐이에요.”겉보기엔 굽 없는 신발을 신고 네일아트도 포기하며 영락없는 임산부처럼 굴었지만 몇 번 마주치며 찬찬히 살펴본 이나은은 도무지 제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임산부 같지 않았다.그날도 그랬다. 변도영이 길을 막아서자마자 이나은은 헐레벌떡 그의 곁으로 뛰어왔다. 자신의 임신 기간을 돌이켜보면 배에 울림이 갈까 봐 뛰는 건 고사하고 큰 몸짓조차 조심스러웠는데 말이다.혹여 넘어져 아이를 잃게 되면 어쩌려고? 이나은이 정말 그 아이를 무기 삼아 변씨 가문을 손에 넣으려 했다면, 자신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몸을 사리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이 일에 대해 그녀는 그저 짐작만 했을 뿐, 굳이 깊이 파고들진 않았었다.게다가 최근 워낙 많은 일들이 터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윤형우가 그녀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사람을 시켜 하민재의 휴대폰을 해킹해서 이 진단서를 찾아냈어.”신지아가 건네받아 확인해 보니 이나은의 진료 기록이었다.역시나 결과는 음성. 임신이 아니었다.“처음엔 병원 시스템을 해킹했는데 이나은의 기록이 아예 없더라고. 누군가 지웠거나 다른 곳으로 빼돌린 모양이야. 변씨 가문 사람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를걸.”윤형우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 쌍으로 배신당한 걸 알면, 우리 변도영 도련님 기분이 어떨지 참 궁금하네.”신지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신지아는 차를 몰고 변씨 저택으로 향했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저택 옆 잔디밭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이나은이 신지아를 모해했다는 증거들이 법원에 제출된 직후, 업계와 사교계는 두 사람을 둘러싼
다음 날, 날씨는 잔뜩 흐렸지만 신지아의 기분은 꽤나 맑았다.아침 일찍 의사를 찾아가 윤형우의 검진 결과를 묻자, 의사는 윤형우의 모든 신체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이틀 뒤면 퇴원해도 좋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던 것이다.신지아가 보기엔 윤형우가 아직 좀 허약해 보이긴 했지만 의사의 확언을 듣자 줄곧 마음을 짓누르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사 온 신지아가 병실로 돌아왔을 때, 윤형우는 이미 깨어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조용히 비켜주려던 찰나, 그녀를 발견한 그가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했다.“그래, 알겠어. 나중에 또 연락하자.”전화를 끊은 그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다가와 그녀의 손에 들린 보온통을 바라보았다.“매일 아침 누군가 챙겨주길 기다리는 기분, 정말 최고인데. 오늘은 뭐야?”신지아가 보온통을 열자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거야? 오늘 딱 좁쌀죽이 당겼는데. 역시 지아가 최고야.”신지아는 그가 자신을 즐겁게 해주려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보통 아픈 사람들은 몸이 불편해 예민해지기 마련이라, 예전에 변도영이 아플 때면 그녀는 어떻게든 그의 기색을 살피며 기분을 맞춰주려 애썼다.하지만 윤형우의 병실 생활은 정반대였다.그녀는 그의 병세가 걱정되어 마음을 졸이는데, 정작 환자인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끊임없이 장난을 걸어 긴장을 풀어주었으니 말이다.가끔은 그의 천연덕스러운 미소에 그가 지금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신지아는 웃으며 그의 두 뺨을 감싸 쥐었다.“어쩌겠어요, 제가 그만큼 형우 씨를 사랑하는걸.”윤형우가 물었다.“그럼 나중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계속 날 사랑해 줄 거야?”“당연하죠.”신지아는 당당하게 대답했다.“형우 씨가 뚱뚱해지든 홀쭉해지든 무조건 사랑할 거예요.”“눈물 나게 감동인데. 그럼 나 이번 생이 끝나도 저승에서 망각의 차 같은 건 안 마실게. 다음 생에도 널 찾아가야 하니까.”신지아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지, 나은 언니가 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신지아의 뒷조사를 해왔던 거야?”정신을 차린 변하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쏟아진 정보들이 너무나 방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었다.서류에는 그녀가 전혀 몰랐던, 상상조차 못 한 진실들이 담겨 있었으니까.이나은이 교통사고를 설계해 신지아를 해치려 했다는 증거들 외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증거가 하나 더 있었다.그것은 이나은과 하민재가 나눈 대화 기록이었다.이나은: [신지아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던데?]하민재: [맞아요. 며칠 전 산부인과 검진을 왔었는데, 담당 의사 말이 벌써 3개월이라더군요.]이나은: [도영이 애야?]하민재: [네.]신지아가 검진을 받은 직후, 하민재 역시 아이 아빠가 변도영이 아닐까 의심해 몰래 친자 확인을 진행했고 결과는 변도영의 자식이 확실했다.[그래도 누나, 별 신경 쓰지 마요. 형은 누나밖에 모르잖아요.][그 여자가 애를 앞세워 형을 낚아보려는 모양인데, 우리 형이 그런 거에 흔들릴 사람 아니잖아요.]화면 너머 하민재의 태도는 지극히 무심했다.마치 남의 집 불구경이라도 하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5분 후, 이나은이 답장했다.[며칠 뒤에 귀국할게.][환영이죠! 이번엔 며칠이나 있을 예정이에요?][아예 정착할 거야.][정말요?]이어지는 내용은 두 사람이 귀국 일정을 논의하는 대화였다.명시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대화 기록을 통해 이나은이 이미 신지아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심지어 이나은의 갑작스러운 귀국조차 신지아의 임신 때문이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그러니까 처음부터 이나은이 해치려 했던 건 신지아가 아니라 그 무고한 아이였다.변하늘은 복잡해진 마음으로 변도영을 바라보았다.변도영은 이미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지, 별다른 격한 반응 없이 태연한 기색이었다.“나은 언니가 노린 게 신지아 배 속의 아기였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이나은이 아무리 신지아를 증오한다 해도 아이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지 않은가.
변도영은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다 끝내 삼켜버렸다.이윽고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지아가 변씨 가문에 시집온 건 양가의 결정이었어. 그때 우리 사이는 이미 위태로웠으니 이별의 책임을 온전히 그 사람 탓으로만 돌릴 순 없어. 원래대로라면 지아는 더 나은 미래를 살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지. 아버지는 냉정하셨고 어머니는 홀대하셨어. 하늘이마저 너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사건건 대들었지. 얼마 전엔 아이까지 유산했고 나 역시...”변도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나도 그 사람을 너 못지않게 원망했었어. 할머니가 아니었으면 지아는 진작에 이 집구석에서 나갔을 거야.”예전에 변도영은 왜 신지아가 임신 사실을 숨겼는지 줄곧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이진을 만나 신지아의 입장이 되어보니 알 것 같았다. 아마 그 무렵부터 신지아는 이미 이별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결코 이나은 때문에 홧김에 떠나려던 게 아니었다.오히려 그 결심은 꽤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이런 말을 하는 건, 설령 지아의 잘못이었다 해도 네가 한 일들로 이미 그 대가는 충분히 치러졌다는 뜻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멈춰. 다시 선택할 기회는 언제든 있으니까 더는 잘못된 길로 자신을 내몰지 말라고.”변도영의 말이 멎자 이나은은 마치 얼음 구덩이에 떨어진 듯한 기분에 휩싸였고 입가에 머물던 마지막 미소마저 사라졌다.“늦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변도영이 무심하게 말했다.차에 올라탄 이나은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는 이미 저택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평소라면 그녀를 배웅하며 멀리서 지켜봐 주었을 그였지만 지금 보이는 그의 뒷모습은 냉정하기만 했다.변도영이 신지아를 두둔했다는 질투보다 그녀를 더 괴롭히는 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떨림과 불안이었다.왠지 그의 말 속에 뼈가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설마 하민재가 계획을 발설했나? 아니, 그럴 리 없어.’하지만 이나은은 금세 그
그 시각 침실에서 변하늘은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이나은이 왜 승낙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자신과 고미애가 계속 거들었으니 이나은이 단호하게 거절하면 변도영이 억지로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설령 당시 이나은이 고의로 교통사고를 조작해 신지아가 유산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이나은은 신지아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기껏해야 실수일 뿐이라 이렇게까지 큰 소동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애초에 신지아가 변도영을 가로채 둘을 헤어지게 했으니 몇 년간 힘들게 지낸 이나은이 화풀이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변하늘은 본인이었어도 고우빈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누군가 억지로 갈라놓으면 화가 나서 보복할 것 같았다.고우빈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휴대폰을 꺼내어 몇 마디밖에 없는 대화창을 보며 속이 답답해졌다.마지막 몇 개의 메시지는 전부 그녀가 고우빈에게 보낸 것인데 상대는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원래도 싸늘한 태도를 보였던 고우빈은 지난번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 이나은 편을 들었던 이후로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화가 났다.고우빈까지 신지아 편을 들자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변하늘은 잠시 생각하다가 변도영의 서재로 향했다.어리석은 오빠를 다시 한번 설득해 볼 참이었다. 신지아에게 아직 미련이 남은 것과 별개로 자신에 대한 이나은의 마음만 믿고 이런 식으로 괴롭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저러다 후회하지.’변도영은 이나은을 배웅하느라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변하늘은 무심코 그의 책상 위 서류를 훑어보았다.그러다 무언가를 보고 순간 굳어버렸다.정원.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마당은 대낮처럼 밝았다.변씨 가문 기사가 차를 문 앞에 세운 뒤 이나은을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기다리는 중이었다.변도영의 표정은 차가웠다.아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그는 배웅하는 발걸음도 매우 빨랐다.이나은이 뒤따르며 말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아직도 몸이 불편해?”웃으며 다가가 남자의 정장을
가족 모임이 끝난 후 박수미는 도우미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가는 내내 도우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자네도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것 같나?”박수미의 말에 도우미가 멋쩍게 웃었다.오늘 가족 모임을 보며 마음이 무척 복잡했다.신지아는 변씨 가문에서 5년 동안 며느리로 지내며 임신해 아이를 가졌으나 변씨 가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중에 유산했을 때 박수미와 변도영을 제외한 변씨 가문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 범인을 감싸주기까지 했다.오랜 시간 곁에서 박수미를 모시며 그녀가 신지아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 변도영은...‘평소 이나은 편만 들다가 왜 갑자기 신지아를 도와주는 거지?’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건 변씨 가문의 일이고 도우미인 그녀가 함부로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도우미가 입을 열지 않아도 박수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다. “내 곁에 오래 있었으니 변씨 가문 사람이나 다름없지.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박수미의 말을 듣고 도우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도련님과 신지아 씨 사이가 좋지 않기는 해도 도련님은 착한 분이세요. 무엇보다 신지아 씨가 도련님 아이를 유산했으니 이나은 씨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공개적으로 사과하라고 할 줄은...”그전까지 변도영이 이나은에게 보였던 태도를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이나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하고 그 일을 변씨 가문 가족 모임에서도 언급하며 이나은에게 물러설 틈을 주지 않았다.예전의 변도영은 이나은이 조금이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박수미가 기절해 응급처치받는 사이, 신지아와 마음 편히 만날 수 있도록 변씨 가문 사람들을 막았을 때 사실 변도영이 신지아를 꽤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다.하지만 좋아해도 이나은에게 저런 태도를 보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박수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혼자만의 환상이 깨졌다는 걸 알았겠지.”의아해하는 도우미 표정에 박수미가 말을
말을 마친 변도영은 어안이 벙벙하고 창백해진 이나은의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떠났다.로비로 돌아온 신지아는 걸음을 멈추고 윤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고마워요.”윤형우가 아니었다면 정말 죽을 뻔했다.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수 없지만 윤형우는 매번 그녀가 가장 힘들고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것 같았다.게다가 그가 이나은의 속셈을 폭로할 줄은 몰랐다.신지아의 기억 속 윤형우는 여자들 사이의 갈등에 관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예전에 신지아가 윤형우를 도와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때도 그의
솔직히 말하면 중개인이 던진 말은 그를 흔들어놓았다.‘만약 그때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지아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더라면, 지아와 변도영의 결혼은 막을 수 있었을까... 만약 조금 더 강하게 나갔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왜 그래요? 많이 꼬였나요?”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멈춰 있자 신지아는 머리카락이 지퍼에 완전히 낀 줄 알고 되레 걱정스레 물었다.“안 되겠으면 그냥 가위로 잘라버리세요.”그렇게 되면 옷은 못 쓰게 되겠지만 말이다.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우빈은 시선을 황급히 거두고 조금 전의 잡념을 밀어냈다.그는 조심
특수한 자리라 기사 동행이 어울리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그런 상황을 대비해 변도영은 양준명에게 초과 수당은 물론 세 배의 급여까지 챙겨주곤 했다. 갑작스럽고 곤란한 일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행복아파트.”변도영이 담담히 말했다.그 이름을 들은 양준명은 잠시 놀랐다.평소라면 가는 곳은 대부분 고급 클럽이나 유흥업소였는데 이런 평범한 아파트 단지는 처음이었다.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았다.세어 보듯 잠깐 생각하던 그는 곧 깨달았다.이 아파트는 바로 신지아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었다....낡은 아파트 단지는
급한 마음에 신지아는 고이진이 살아있다는 걸 털어놓고 윤형우의 목숨을 구할 생각도 해봤다.하지만 결국 포기했다.생기를 잃은 고이진의 모습을 두 눈으로 봤기에 그녀가 지옥 같은 상황에서 도망치도록 도운 것이었다.지난번 만난 고이진의 눈에는 미래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었고 오랜만에 웃는 얼굴과 활기찬 모습도 보였다.두 손으로 선물한 희망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윤재혁이 고이진의 죽음만 믿는다면 고이진의 악몽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그러면 미래의 고이진은 자유롭게,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신지아는 윤형우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