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오늘은 스케줄이 없다며, 진섭이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다.지호의 오피스텔에서 약속 장소인 강남 사거리까지는 차로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진섭의 차를 타고 오는 동안에는 그 시간이 삼십 분이 아니라 삼 분처럼 느껴질 만큼 즐거웠다. 시답잖은 이야기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대한 잡담, 중간중간 터지는 웃음까지. 지호는 그 시간이 편안했다.그렇게 도착한 미팅 장소는 회의실 하나를 통째로 빌린 듯 넓고 조용했다. 이미 감독과 CP, 몇몇 스태프들이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호가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지만, 다행히 예전만큼 낯설지는 않았다. 몇 번 마주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지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유경훈 CP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먼저 다가왔다.“작가님, 죄송합니다. 오늘 대표님이 갑자기 불참하시게 됐어요. 개인적인 사정이 좀 생기셨다고 하시더라고요.”지호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그 이상으로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이었으니까.그런데 옆에 있던 감독이 끼어들며 중얼거렸다.“강 대표님이 이런 자리를 빠지신다고요? 의외네요. 웬만해선 안 빠지시는 분인데.”그 한마디에, 지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강.''강휘웅.''하…… 이런 데서까지 그 사람을 떠올리는 내가 참, 혐오스럽다.'강씨가 세상에 한둘도 아닌데.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지호는 속으로 고개를 젓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자리에 앉았다. 그저 우연히 겹친 성씨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새삼 한심하게 느껴졌다.오늘 미팅에 나간다는 사실은 진섭도 알고 있었다. 스케줄이 없었던 그가 자청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지호는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차 안에서 한참 대본 이야기, 배우들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지호는 오랜만에 먼저 다른 화제를 꺼냈다.“정말 고마워요.”진섭이 슬쩍 시선을 돌렸다.“오늘 저 데려다주는 거요. 그리
휘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10년이라는 말이 입안에서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지호가 그 시간 동안 집 안에서 거의 나오지 않고 살았다는 얘기를, 머리로는 알아들었지만 마음으로는 자꾸 미끄러졌다.'그게 말이 돼?'속으로 그렇게 되물었지만, 곧 스스로에게 물을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 역시 그 10년을 가볍게 흘려보낸 적은 없었으니까.그 역시 같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버텨냈다. 아픈 아이와, 살아갈 힘을 거의 잃어버린 여자와의 결혼. 사랑이 먼저였던 적은 없었다. 서로를 선택했다기보다는, 각자의 벼랑 끝에서 우연히 같은 밧줄을 붙잡은 사이에 더 가까웠다.그래도 미선은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려 애썼다. 살아보려고, 무너지지 않으려고. 그 안간힘을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이 방관자로만 남을 수는 없었다.결혼을 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 곧장 아버지 회사로 들어갔다. 이를 악물고,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듯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쉬웠던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 시간 속에서, 지호를 일부러 떠올리며 살지는 않았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럴 여유도,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명동 거리를 지날 때, 캐럴이 흘러나오는 12월이 다가올 때,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사이로 이유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잘 지내고 있겠지.'거기까지만 생각하려 애썼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면 안 된다고, 스스로 선을 그었다. 그래도 몇 개의 장면만은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환하게 웃던 얼굴. 그 웃음이 유난히 예뻤다는 것.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날,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해 보이던 표정까지도.휘웅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등지지 않았다.미선, 그리고 아이. 이안이. 아버지로서 해야 할 몫은 분명했다. 계절이 바뀌면 여행을 떠났고, 주말이면 박물관이나 수족관, 놀이공원을 찾았다. 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엔 흠잡을 데 없는 가족처럼 함께 움직였다.그 안에서 휘웅은 최선을 다했다
진섭은 리딩이 끝나갈 무렵, 매니저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라도 따라붙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지호를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가게 하고 싶었다.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회의실 문을 나서자마자, 제작사 쪽 사람이 지호를 향해 다가왔다. 지호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고, 끝내 그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다.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지호는 좀처럼 사람의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늘 시선은 비켜가 있었고, 대화는 짧고 조심스러웠다.그런데 우유니에서는 달랐다. 햇빛 아래에서, 소금사막 위에서 지호는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게 얼마나 드문 순간이었는지, 그래서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그런데 오늘의 지호는 다시, 어딘가로 숨어버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잔뜩 움츠러든 채, 작아진 채로.왜 이렇게 된 건지 진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쉽지 않은 시간이 있었겠구나, 그 정도는 느껴졌다.차에 올라탄 뒤에도, 지호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계속 창밖만 바라봤다.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 그걸 따라가듯 시선이 흘러갔다.매니저가 인사를 건넸지만, 지호는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분명했다. 낯가림이 심한 수준을 넘어서, 사람 자체를 어려워하는 느낌이었다.진섭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많이 힘드셨어요?”지호가 잠깐 멈칫했다.“…아, 뭐. 별로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톤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그럼 바람 좀 쐴까요?”“…어디요?”조금은 경계하는 눈치였다.진섭이 가볍게 웃었다.“저 믿어보셔도 됩니다.”짧은 침묵 끝에, 지호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진섭은 곧바로 매니저에게 말했다.“형, 남산으로 좀 가주세요.”차는 방향을 틀었다.도착한 곳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이미 해는 지고, 도시는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빛들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지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잠시 말을 잃었다.“…와.”작게 숨이 섞였
휘웅은 대본 리딩 내내 단 한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호였다.연보라색 대본을 들고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그 모습은 분명 낯설었다. 예전에 알던 지호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아니었다. 집중할 때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 말을 아낄 때의 조용한 표정. 그런 것들은 그대로였다.'왜 저렇게… 멀어 보이지.'손에 잡힐 듯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닿지 않는 거리처럼 느껴졌다. 휘웅은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대사가 오가고, 사람들이 웃고, 분위기가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그의 시선은 계속 한 사람에게 붙들려 있었다. 지호. 그 이름 하나로 충분했다.리딩이 끝나갈 무렵, 휘웅은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짧게라도 말을 해야 한다고.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칠 수는 없었다.하지만 그 생각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리딩이 끝나자마자 지호는 자리를 정리하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이끌리듯 빠르게. 그 옆에는 진섭이 있었다. 들어올 때도 그랬고,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휘웅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망설인 시간만큼 거리는 벌어졌다.“…하.”짧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대로 따라 나갔다. 멈출 생각은 없었다.엘리베이터 앞, 문이 닫히기 직전이었다.“잠깐만요.”손을 뻗어 문을 잡자 센서가 반응하며 문이 다시 열렸고, 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그제야 가까운 거리에서 지호를 마주했다. 정확히는, 마주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작가님.”낮게 불렀다. 지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움찔했다. 하지만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네.”짧은 대답. 그게 전부였다. 시선은 끝까지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호를 바라봤다. 단 한 번이라도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듯이. 하지만 끝내 올라오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지호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손에 쥔
우유니에서 헤어진 지 벌써 일 년 가까이 된 것 같았다.그런데 진섭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손인사를 나누던 모습보다 오히려 더 단단해 보이는 얼굴. 그 사이에도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눈빛과 목소리에 고르게 묻어 있었다.진섭 역시, 지호와의 그 여행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볼리비아의 새하얀 지평선 아래에서, 지호가 처음으로 숨을 크게 내쉬며 웃던 순간을 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지호를 보고, 더 안타까웠던 것도 사실이었다.설명할 수 없는 큰 슬픔을 간직해 보이는 그녀는, 자신이 파고들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눈빛은 "여기까지만"이라는 선을 분명히 그어 두고 있었다.그렇기에 진섭은 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이 사람은 아직 자기 슬픔을 다 꺼내지 못했구나.'우유니의 밤 공기 속에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던 순간에도,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그녀가 제 발로 돌아갈 길을 비켜 주었다.그렇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같은 건 제대로 품지 않았다.그냥, 가끔씩 떠올리는 정도였다.'잘 지내고 있겠지.''조금은 덜 외로워졌을까.'그 정도의 막연한 안부만 가슴 한쪽에 묻어 두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진섭이 주저 없이 오디션을 보러 간 건, 단순히 일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우유니 이후로, 조금 다른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대본 위에 적힌 그 이름이었다.극본: 지호.그렇게만 적혀 있었다.심장이 순간 묘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가 아는 그 지호일까. 아니면 그냥 흔한 이름의 다른 사람일까.곧장 검색을 해 봤다. 이 지호가, 내가 아는 그 지호인지.하지만 어
드라마 제작 준비는 놀라울 만큼 수월했다.대본도 막힘이 없었다. 지호는 송경숙을 캐스팅해 앉혀 놓을 장면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키보드 위에 얹어 둔 손가락이 멈출 줄을 몰랐다.극 중 주인공은 스무 살 시절의 지호, 그 자신의 그림자였다. 평범했던 가정이 아버지의 외도로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상처 입은 딸. 그리고 그 가정을 실제로 무너뜨린 여자에게는, 정반대로 남편을 빼앗기고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엄마 역할을 맡겼다. 다름 아닌 송경숙이었다.현실에서는 자신의 엄마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여자. 드라마 속에서는 남편을 빼앗긴 상처 입은 엄마복수와 집착, 사랑과 상실. 오래전 자신의 삶을 찢어 놓았던 감정들을 한 장면씩 재구성하는 일은 고통스럽고도, 묘하게 통쾌했다.'이 사람은 결국 엄마 자리를 연기해야 해.'지호는 대사와 인물의 움직임을 채워 넣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되뇌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몸은 송경숙의 것이지만, 그 대사들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엄마가 버티고 서 있었다.키보드 위의 손가락은 밤늦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한 장면, 또 한 장면. 과거의 한 조각이 조금씩 다른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다른 배우들의 캐스팅도 순조로웠다. 역할과 얼굴이 잘 맞아떨어지는 배우들이 줄줄이 떠올랐고, 오디션장에서도 큰 난관 없이 주요 배역들이 채워졌다.그리고 의외로, 가장 걱정했던 송경숙의 캐스팅마저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휘웅이 꽤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이미 한물간 여배우를 정중하게 대접해 주는 것만으로도, 캐스팅은 뜻밖에 순탄하게 진행되었다.직접 전화를 걸고, 과거의 영광을 인정해 주고, 이번 역할이 단순한 복귀작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조심스레 강조하는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송경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수화기 너머로 짧게 대답했다.“그래요. 한 번 해 봅시다.”그 한 문장으로, 지호의 대본과 휘웅의 기획은 현실 쪽으로 한 걸음 더 당겨졌다.캐스팅이 확정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