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유니에서 헤어진 지 벌써 일 년 가까이 된 것 같았다.그런데 진섭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손인사를 나누던 모습보다 오히려 더 단단해 보이는 얼굴. 그 사이에도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눈빛과 목소리에 고르게 묻어 있었다.진섭 역시, 지호와의 그 여행이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그녀를 지켜 주고 싶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볼리비아의 새하얀 지평선 아래에서, 지호가 처음으로 숨을 크게 내쉬며 웃던 순간을 그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지호를 보고, 더 안타까웠던 것도 사실이었다.설명할 수 없는 큰 슬픔을 간직해 보이는 그녀는, 자신이 파고들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바닥까지 내려앉은 눈빛은 "여기까지만"이라는 선을 분명히 그어 두고 있었다.그렇기에 진섭은 끝내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이 사람은 아직 자기 슬픔을 다 꺼내지 못했구나.'우유니의 밤 공기 속에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던 순간에도, 억지로 붙잡기보다는, 그녀가 제 발로 돌아갈 길을 비켜 주었다.그렇기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다시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같은 건 제대로 품지 않았다.그냥, 가끔씩 떠올리는 정도였다.'잘 지내고 있겠지.''조금은 덜 외로워졌을까.'그 정도의 막연한 안부만 가슴 한쪽에 묻어 두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진섭이 주저 없이 오디션을 보러 간 건, 단순히 일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우유니 이후로, 조금 다른 작품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대본 위에 적힌 그 이름이었다.극본: 지호.그렇게만 적혀 있었다.심장이 순간 묘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가 아는 그 지호일까. 아니면 그냥 흔한 이름의 다른 사람일까.곧장 검색을 해 봤다. 이 지호가, 내가 아는 그 지호인지.하지만 어
드라마 제작 준비는 놀라울 만큼 수월했다.대본도 막힘이 없었다. 지호는 송경숙을 캐스팅해 앉혀 놓을 장면들을 떠올리기만 하면, 키보드 위에 얹어 둔 손가락이 멈출 줄을 몰랐다.극 중 주인공은 스무 살 시절의 지호, 그 자신의 그림자였다. 평범했던 가정이 아버지의 외도로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상처 입은 딸. 그리고 그 가정을 실제로 무너뜨린 여자에게는, 정반대로 남편을 빼앗기고 가장 깊은 상처를 입은 엄마 역할을 맡겼다. 다름 아닌 송경숙이었다.현실에서는 자신의 엄마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여자. 드라마 속에서는 남편을 빼앗긴 상처 입은 엄마복수와 집착, 사랑과 상실. 오래전 자신의 삶을 찢어 놓았던 감정들을 한 장면씩 재구성하는 일은 고통스럽고도, 묘하게 통쾌했다.'이 사람은 결국 엄마 자리를 연기해야 해.'지호는 대사와 인물의 움직임을 채워 넣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되뇌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몸은 송경숙의 것이지만, 그 대사들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엄마가 버티고 서 있었다.키보드 위의 손가락은 밤늦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한 장면, 또 한 장면. 과거의 한 조각이 조금씩 다른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났다.다른 배우들의 캐스팅도 순조로웠다. 역할과 얼굴이 잘 맞아떨어지는 배우들이 줄줄이 떠올랐고, 오디션장에서도 큰 난관 없이 주요 배역들이 채워졌다.그리고 의외로, 가장 걱정했던 송경숙의 캐스팅마저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휘웅이 꽤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이미 한물간 여배우를 정중하게 대접해 주는 것만으로도, 캐스팅은 뜻밖에 순탄하게 진행되었다.직접 전화를 걸고, 과거의 영광을 인정해 주고, 이번 역할이 단순한 복귀작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인생의 마지막 챕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조심스레 강조하는 사람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송경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수화기 너머로 짧게 대답했다.“그래요. 한 번 해 봅시다.”그 한 문장으로, 지호의 대본과 휘웅의 기획은 현실 쪽으로 한 걸음 더 당겨졌다.캐스팅이 확정되고,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새하얀 지평선이 떠올랐다.우유니. 하늘과 땅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곳. 발밑이 온통 투명한 거울이 되어 오롯이 자신만을 비추던 그 압도적인 순간.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던 진섭의 목소리.볼리비아의 거친 바람 속에서도 늘 지호 옆을 지켜 주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새 작품 〈가면의 집〉 시놉시스를 다시 열어 보고, 송경숙이라는 잔인한 이름에 마음이 붙들리기 시작하면서 진섭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조금씩 멀어졌다.진섭은 끝까지 지호를 붙잡지 않았다. 지호는 미안함과 씁쓸함을 삼키며 제 몫의 현실로 돌아왔다.여행에서 돌아온 지 고작 며칠. 치열했던 우유니의 잔상들 속에서 지호는 오히려 더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쳤다.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오피스텔. 빛이 차단된 암막 커튼 아래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함은 거의 고통에 가까웠다.그래서 결국, 텔레비전을 들여놓기로 결심했다. 이 적막을 메우려면, 타인의 목소리가 담긴 기계라도 필요했다.텔레비전 한 대를 집 안에 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로웠다. 이사 첫날 이후로 누구도 발을 들인 적 없던 이 폐쇄적인 공간에, 낯선 타인들이 줄지어 들어왔다.먼저 인터넷 설치 기사가 벽면을 타고 선을 연결했다. 이어 커다란 박스를 든 배송 기사들이 들어왔고, 뒤이어 새까만 대형 화면을 올려 둘 티비장을 조립하는 가구 업체 사람들까지 잇따라 들이닥쳤다.“선은 이쪽으로 빼 드릴까요?”“네, 편한 데 놔주세요.”가구 조립되는 날카로운 마찰음, 기사들이 오가는 무거운 발소리, 투닥거리는 대화 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집 안이 오랜만에 살아 있는 공간처럼 분주해졌다.하지만 그 온기는 금방 가라앉았다.설치가 모두 끝나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지호는 다시 조용해진 거실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어스름 저녁 빛이 스민 거실. 새로 설치된 거대한 텔레비전 화면은 여전히 검게 고여 있었다. 지호는 리모컨을 쥐지 않았다. 전원이 꺼진 새까만 화면 속에 비친,
노트북 화면 속 〈가면의 집〉 시놉시스를 바라보던 지호는 문득 손을 멈췄다.[작가 : 지호]화면 한쪽에 적힌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내려다봤다.본격적으로 드라마 작가 일을 시작한 뒤부터 지호는 더 이상 성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버린 이름이었다.윤지호.호적에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다.아버지 윤용석은 이혼 후 단 한 번도 지호를 찾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전화 한 통, 짧은 문자조차 한 번 없었다.처음에는 기다렸다. 언젠가는 연락이 오겠지. 그래도 딸인데, 생일 정도는 기억해 주지 않을까.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대는 조금씩 마모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버려졌다는 잔인한 감정뿐이었다.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자를 선택한 사람. 지호에게 '윤'이라는 성은 이제 가족의 의미가 아니었다.그래서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지호입니다.”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그 편이 편했다. 윤지호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과거보다, 지호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지금이 더 자신 같았다.지호는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가면의 집〉.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의 시작은 송경숙이었다. 어머니를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여자. 한때는 텔레비전만 켜면 나왔고, 모두가 사랑했던 대배우.어제 유경훈 CP는 전화를 걸어 대뜸 제작사 사장이 송경숙을 주연으로 캐스팅하겠다고 제안했다는 소식을 전했었다.지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인쇄해 둔 시놉시스를 다시 읽을수록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극 중 주인공과 실제 송경숙의 나이가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송경숙은 더 이상 드라마 전체를 홀로 이끌어 갈 만한 위치의 톱배우가 아니었다.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지호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졌다.“……잠깐.”연필을 쥐고 있던 손끝이 멈췄다. 문득 머릿속에 전혀 다른 그림이 떠올랐다.송경숙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오히려 주인공의 엄마 역할이
책상 위에 놓인 시놉시스 파일을 천천히 넘기던 남자가 낮게 웃었다.“오…….”짧은 탄성이었다.“로맨스만 쓰는 줄 알았는데, 의외네.”창밖으로 겨울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넓고 텅 빈 집무실 한가운데, 검은 소파에 몸을 기댄 남자는 시놉시스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손끝에 걸린 종이 위로 적힌 이름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작가, 지호.눈에 익은 이름이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휘웅은 무심코 종이 위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리고 다시 첫 문장을 읽었다.〈가면의 집〉그녀가 훔친 것은 아빠만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의 영혼, 그리고 나의 평범했던 모든 세계였다.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 여동생'.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청순하고 깨끗한 얼굴로 사랑받는 톱배우. 하지만 그 화려한 가면 뒤에는 남의 가정을 짓밟고 올라선 추악한 과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무너뜨리기 위해 돌아온 딸.입가에 걸려 있던 희미한 미소가 천천히 지워졌다.휘웅은 마지막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당신이 연기하는 그 가짜 인생, 내가 진짜 지옥으로 만들어줄게.”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지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누구보다 솔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녀는 전부 활자로 써 내려가고 있었다.휘웅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오래전, 차마 다시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시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휘웅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병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번져 보였다.침대 위에 앉아 있던 미선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얼굴은 반쪽처럼 야위었고, 손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어져 있었다. 임신 중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쇠약했다.휘웅은 그런 미선을 보며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나도 힘들어요.”처음이었다. 스물다섯 살 인생에
한국에 돌아온 지 사흘째였다.열여섯 시간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던 날, 지호는 캐리어를 현관 앞에 세워 둔 채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우유니 사막의 하늘이 떠올랐다. 소금 평원 위를 천천히 걷던 발걸음, 끝없이 쏟아지던 별빛, 그리고 그 풍경 앞에서 환하게 웃던 진섭의 얼굴까지.꿈이라면 너무 선명했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멀었다.하지만 그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걸 증명하듯, 침대 맞은편 옷걸이에는 볼리비아에서 산 판초와 셔츠, 두꺼운 조끼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지호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충전기를 찾았다. 완전히 방전된 휴대전화를 콘센트에 꽂아 둔 뒤, 그대로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예전 같았으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부터 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아니었다.집이 너무 조용했다.엄마 은주는 아버지와 이혼한 뒤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결국 윤용석과 살던 넓은 집을 정리하고, 지호는 혼자 살기에 적당한 오피스텔로 옮겨 왔다.문제는, 그 집이 지나치게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원래 옵션으로 들어와 있던 냉장고와 세탁기, 작은 전자레인지가 전부였다. 지호가 직접 들여놓은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와 작업용 책상 하나뿐이었다.거실 창문에는 짙은 암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벽에는 액자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소파도 없었고, 적막함을 달래 줄 텔레비전조차 없었다.그동안은 괜찮았다. 오히려 그런 고요함이 편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우유니에서 돌아온 뒤 처음 맞이한 밤은 유난히 적막했다.눈을 뜨면 늘 들리던 진섭의 목소리도 없었고, 아침마다 호텔 복도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도 없었다.그저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와, 멀리서 지나가는 차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지호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티브이라도 하나 놓을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익숙함이 외로움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그 사실이 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