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민여진처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은 그 세상에 잘못 빠져들었다간 뼈도 못 추스르는 수가 있었다.지금 이 순간, 민여진은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겪는데 뭐?”민여진의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박진성이 냉소 지으며 말했다.“네가 나와 결혼했을 땐 그 일이 있기 전이었어. 난 한순간도 너에게 소홀한 적 없었어.”“맞아.”민여진이 쓴웃음을 지었다.박진성은 밖에서는 단 한 번도 민여진을 홀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늘 좋은 남편이었고 시어머니인 이정화도 누구보다 민여진을 아껴주었다.박진성과의 결혼생활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딱 하나, 박진성이 민여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말이다.“여기 디저트 있어? 나 배고파.”민여진이 적당한 타이밍에 말을 돌렸다. 물론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다.주위를 둘러보던 박진성이 민여진의 손을 잡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양성이 아니면 박 대표님을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심나연 씨 생일 파티에서 이렇게 만나네요.”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박진성이 눈앞의 중년 남성을 쳐다보았다. 흐릿한 기억으로는 동진 안씨 가문의 사람이었다.“파티를 성대하게 준비한다고 해서 초대장을 받은 김에 구경하러 왔어요.”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안태용이 낯을 가리며 서 있는 여자를 부르더니 박진성에게 소개했다.“여긴 우리 작은딸 안솔이에요. 솔아. 대표님께 인사드려.”쭈뼛거리며 앞으로 다가와 박진성을 힐끔 쳐다본 안솔은 또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박 대표님... 안녕하세요.”안태용이 말했다.“얘가 평소엔 이런 성격이 아닌데 박 대표님만 보면 쑥스러워서 말도 못하더라고요. 박 대표님께서 18살 때 솔이를 구해준 적이 있으시다면서요.”“구해줘요?”박진성이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네요. 까맣게 잊은 걸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이었을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잖아요.”심나연은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당황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심나연의 생일 파티였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투명인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심나연의 취향까지 생각해 선물을 골라준 민여진에 심나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여진 씨는 예쁘시니까 안목도 좋으실 것 같아요. 오히려 선물까지 챙겨주셔서 제가 영광이죠.”민여진이 심나연을 따라 미소 지었다.업무적인 얘기를 주고받는 시간이 이어지자 민여진은 조금의 존재감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박진성의 옆에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박진성과 협업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진시호는 그런 생각을 자주 드러냈고 박진성은 그럴 때마다 깔끔하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진시호가 진시우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제 동생은 아직도 철이 없는 것 같아요. 아이처럼 유치하게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 대표님과 연을 끊고 뒷담화까지 하다니...”그 말에 박진성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저와 진시우는 애초부터 친구를 하기엔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와서 더 할 얘기도 없으니 차라리 연락을 끊는 편이 더 낫죠.”“그러니까요.”박진성의 눈치를 살피던 진시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대표님께서 저와 시우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사실 박 대표님을 굉장히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거든요.”술을 한 모금 마신 박진성이 대답했다.“그럴 리가요. 진시호 씨가 어떤 분이신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능력도 좋으시잖아요. 아니면 어떻게 진씨 가문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왔을 수 있겠어요.”진시호가 일부러 겸손한 척 대답했다.“과찬이세요. 능력으로 따지면 전 대표님 발끝도 못 따라가죠.”이때, 심나연이 다가와 또 다른 손님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진시호가 얼른 박진성에게 말했다.“여진 씨와 마음껏 파티를 즐기세요. 저는 손님이 오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 시간 될 때 다시 얘기 나누시죠.”“네. 그러시죠.”진시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가 사진을 찍으며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박진성 씨, 옆에 계신 여자분은 누구시죠? 처음 보는 분이신 것 같은데요.”“문민서 씨인가요?”“문민서 씨를 본 적 있는데 저렇게 예쁘지 않았어. 게다가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고. 문민서 씨일 리가 없어.”“그럼 새 여자친구겠네요? 하지만 이번 여자친구분 미모가 엄청난 것 같아요. 연예인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아요. 하긴, 그러니 박진성 씨 눈에 들 수 있었겠죠. 박진성 씨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사람이잖아요.”수많은 수군거림을 뒤로 한 채 박진성과 민여진은 파티장으로 들어섰다.민여진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손끝마저도 빨갛게 열이 올랐다.최근 2년 사이, 민여진은 악의가 가득한 말이라면 수도 없이 들었었다. 많은 사람들은 민여진을 추녀라고 부르며 혐오 섞인 눈빛을 보냈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는 민여진의 얼굴을 마주한 후 통곡을 하기도 했었다.그런 상황들이 쌓이고 쌓여 민여진은 이미 외모에 대한 자신감을 전부 잃은 상태였다.‘나도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저 사람들 말이 맞아.”박진성이 갑자기 차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너 예쁜 거 맞아. 그러니까 이제 더는 고개 숙일 필요도 없고 열등감을 가질 것도 없어.”멈칫한 민여진이 저도 모르게 박진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성 씨도 인정한다는 뜻일까?’민여진이 여전히 박진성의 말을 곱씹고 있던 그때,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시호가 반가운 말투로 입을 열며 황급히 걸어왔다.“얼마 전 초대장을 보냈을 땐 못 온다고 하시더니 이렇게 찾아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제가 모시러 갔을 텐데요.”박진성은 거의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처음엔 올 생각이 없었어요. 와이프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잠깐 바람 좀 쐬려고 했는데 여진이가 마침 동진에 와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왔어요.”“실례라니요. 전혀요.”박진성의 옆으로 시선을 돌린 진시호는 그제야 박진성 곁에 있는
한복은 노출 하나 없이 민여진의 몸을 꽁꽁 감출 수 있었다.파티에서 예뻐 보일 수 있는 착장도 아니었고 한복을 입기엔 민여진의 몸매가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강경한 박진성의 태도에 스타일리스트는 어쩔 수 없이 민여진에게 한복을 입어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잠시 후, 한복을 입고 나온 민여진의 모습은 상상 그 이상으로 황홀하기만 했다.검은색 옷감이 민여진의 영롱한 자태를 완벽하게 감싸며 섹시하고 매혹적인 매력을 물씬 풍겼다. 유난히 하얗게 돋보이는 피부에 괜히 아련한 분위기가 흘러넘치기도 했다.눈부시게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빨간 입술, 시스루라 은근히 보이는 속살은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박진성이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예상외의 결과물에 스타일리스트는 칭찬을 금치 못했다.“역시 대표님께서 안목이 있으시네요. 단아한 한복이지만 민여진 씨께서 입으니 오히려 드레스보다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의아한 표정을 짓던 스타일리스트가 물었다.“대표님, 또 무슨 문제라도...? 만약 스타일링이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바로 여진 씨 헤어스타일을 수정할 거예요.”“아뇨.”박진성이 속살이 드러나는 저고리를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뭐라도 더 입혀요.”“더 입히라고요?”스타일리스트는 삐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진심이세요?”‘더울 것 같은데...’박진성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타일리스트가 고민하던 그때. 조용하기만 하던 민여진이 입을 열었다.“진성 씨. 여기서 더 껴입으면 나 너무 더워.”박진성이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양보하며 말했다.“그럼 다른 거로 갈아입혀요.”스타일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다른 저고리를 고르며 스타일리스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유명한 양성의 박진성이 스타일링을 포기하면서까지 파트너의 노출을 막으려 하다니.’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파트너의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진성은...
“이게 무슨...”“아!”하빈이 웃으며 대답했다.“죄송해요. 소개가 늦었어요. 이분들은 민여진 씨를 위해 준비한 스타일리스트 팀이에요.”그 말에 어리둥절해진 민여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저요?”하빈이 대답하기도 전에 욕실에서 나온 박진성이 손의 물기를 닦으며 입을 열었다.“깜빡하고 얘기 못 했네. 오늘 파티에 넌 내 파트너로 참석하게 될 거야.”“뭐?”민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내가?’박진성이 고개를 들고 되물었다.“왜? 뭐 문제 있어?”‘왜냐니. 이건 문제가 있어도 한참 있는 거잖아.’민여진이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했다.“난 앞도 못 봐.”“알아.”박진성이 하빈이 가져온 드레스를 뒤적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네가 굳이 안 알려줘도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야.”“...”민여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그러니까 파티에 날 데려가면 당신한테 피해만 끼칠 게 뻔한데, 왜 굳이 날 파트너로 선택한 거야.”민여진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박진성의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새하얘지기도 했다.오늘 진씨 가문에서 주최한 파티는 일반적인 생일 파티가 아닌 상류 사회만의 사교의 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가 없는 사람은 이 파티에 나타날 자격도 없었고 박진성 정도의 거물은 파티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기도 했다.박진성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물론, 그와 함께 참석한 파트너 역시 그들의 관심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민여진은 가는 곳마다 보살핌이 필요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러니 민여진이 그 파티에 나타난다면 냉대 섞인 눈빛을 동반한 수많은 추측과 비난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박진성은 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네가 예전에 나한테 널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냐고 물었었잖아.”박진성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지금 그 대답을 알려줄게. 널 소개하는 건 네 생각처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언제 어디서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어.”민여진이 멍한 표정을
지금의 민여진은 더 이상 비굴하게 박진성 곁만 맴돌던 사람이 아니었다.그녀에게는 임재윤과 새로운 가족이 있었다.그리고 민여진을 힘들게 했던 그 과거들은 이제 전부 사라질 때가 되었다.박진성은 천천히 잠이 들었지만 민여진은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꽉 움켜쥔 민여진이 통화를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조심스레 임재윤의 번호를 누른 민여진이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하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한 번. 두 번.민여진은 꺼냈던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상한 일이었다.임재윤이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는 항상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었다. 그랬기에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임재윤을 자신이 필요한 순간마다 꼭 나타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임재윤은 지금 독엔에 있었다. 그곳은 지금 새벽일 테니 어쩌면 임재윤은 진작 잠에 든 것일 수도 있었다.다시 자리로 돌아온 민여진의 눈앞에는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민여진이 다가가자 스튜어디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승객님, 조금 전 이분 휴대폰이 계속 울리던데 급한 전화가 오는 것 같던데요.”“그래요?”민여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재윤에게 전화하는 동안 진성 씨에게도 전화가 왔었다고?’곧 생각을 멈춘 민여진이 대답했다.“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깨어나면 전해줄게요.”“네.”스튜어디스가 돌아가자 자리에 앉은 민여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시 후, 비행기는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고 박진성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몇 시야?”10분 전쯤 울리던 시간 알람을 들은 민여진이 대답했다.“아마 11시쯤 된 것 같아.”“그래.”목소리가 잔뜩 잠긴 박진성이 스튜어디스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다.민여진이 말했다.“몇 시간 전에 너한테 전화가 왔었어.”박진성이 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자를 확인한 박진성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민여진이 아무 생각 없이 박진성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