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일부러 우리를 걱정하게 한 건 아니란 걸 알아. 다만 이럴 때 내가 네 곁에 없어서 더 유감스러울 뿐이야.”조현준은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그런데 임재윤은 누구야?”민여진은 잠시 멈칫하다 임재윤에게 잠시 나가야 한다고 설명한 뒤, 더듬더듬 문을 닫고 나와서 대답했다.“막 알게 된 친구예요.”“그 사람은 나에게 큰 거부감을 보이는 것 같더라.”조현준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어딘가 진지했다.“내가 네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민여진이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찰나, 지나가던 사람들의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거 알아? 양성의 박진성이 우리 병원에 있대!”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결혼도 안 했다고 하던데. 소문대로 멋지고 품위 있다면 한번 보고 싶다.”“꿈 깨.”옆에 있던 사람이 놀렸다.“결혼은 안 했어도 곧 할 거 아니야. 약혼한다는 소문 몰라? 여자 친구가 엄청 예쁘고 명문가의 규수라고 하던데.”“약혼이 결혼은 아니잖아. 나 같은 스타일을 좋아할 수도 있지.”“됐어. 그것보다.”여자가 물었다.“박진성은 왜 우리 병원에 온 거래? 여기서 양성까지 차로 두 시간은 걸리는데?”“몰라. 들리는 말로는 양성 병원에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불편하다나 봐. 그래서 여기서 요양 중이래.”목소리는 점점 멀어졌지만, 민여진은 한바탕 찬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떨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박진성이 이 병원에 있다고?’민여진은 박진성의 소유욕과 냉혹함 그리고 입버릇처럼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이가 덜덜 떨리며 몸서리가 쳐졌다.‘만약 박진성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것도 이 병원에 있단 걸 안다면...’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이성을 거의 삼켜버릴 무렵, 조현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돌려놓았다.“여진아? 무슨 일이야?”민여진은 두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일
‘지켜준다고?’박진성을 만난다면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민여진도 잘 알고 있었다.민여진한테 박진성은 기분이 좋으면 웃어주고 기분이 나쁘면 어떻게든 망가뜨리는, 그야말로 자기 마음대로 날뛰는 미친놈이었다. 그런 그를 상대로 자신을 지켜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왜 하필 임재윤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민여진은 손바닥을 꽉 움켜쥔 채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신 뒤에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문지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어제 차에서 잘 못 잤거든요.”그녀의 말에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진시우가 깨면, 쉴 곳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요.”“네.”이 기회를 틈타 민여진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박진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싶었고 그러려면 지금 당장은 박진성이 어느 층, 어느 병실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민여진은 더듬더듬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그녀의 안색을 살피던 간호사 한 명이 환자인 줄 알고 질문했다.“눈이 안 보여서 약을 못 받으시는 건가요?”“아니요.”민여진이 설명했다.“저는 환자가 아니에요.”간호사는 잠시 멈칫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그럼 무슨 일로 오셨나요?”“그게...”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박진성 씨가 어느 병실에 계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민여진의 말이 끝나자, 간호사는 그녀를 출세하기 위해 능력 있는 남자에게 아첨하는 여자로 단정 짓고 표정을 확 바꾸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죄송하지만, 환자분의 프라이버시 문제라 가족이 아니라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가족이라. 사망한 전 부인도 포함하나요?’민여진은 이렇게 말했다가는 미친 사람 취급받을 거란 걸 알고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직접 찾아가서 방해하진 않을 거예요.”“찾아가지 않으신다 해도 답변해 드릴 수 없습니다.
‘1106호? 이건 임재윤의 병실이잖아? 어떻게 박진성의 병실이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임재윤이였는데? 내가 방금까지 그곳에 있었는데? 만약...’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여진은 공포에 눈동자가 확장되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만약 임재윤과 박진성이 같은 사람이라면?’민여진은 넋을 잃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이건 너무나도 숨 막히는 가정이었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임재윤은 처음 나타난 순간부터 계속 벙어리 행세를 해왔고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다.결국 박진성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든지 완벽하게 낯선 사람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알레르기 사건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진성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박진성이 입원했다는 뉴스가 나오자마자 임재윤도 바로 입원했고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민여진은 이 모든 걸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벙벙하게 서 있었다. 고통보다 더 큰 건 속임수에 대한 슬픔이었다.‘임재윤은 가짜였고 그의 다정함도 가짜였구나.’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벽을 짚고 눈물을 참으며 밖으로 나갔다.‘도망쳐야 해!’머릿속에 남은 유일한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멀리 이곳에서 떠나야 했다. 박진성만 없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민여진 씨?”하필이면 휴식을 마치고 돌아온 진시우와 마주쳤다. 그는 민여진한테 다가오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민여진 씨, 여기서 뭐 하세요? 아까 문 앞에서 우연히 보고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어딜 가시려고요?”진시우의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에 오히려 오싹함을 느낀 그녀는 그를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민여진 씨?”민여진의 태도에 당황스러워진 진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하자, 민여진은 바로 뿌리치며 공포에
찢어질 듯 아파져 오는 가슴에 민여진은 눈가가 뜨거워졌다.‘진실을 알고 싶다고? 이 지경이 되어서도 날 속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거야?’민여진은 어지러운 머리를 억누르며 눈을 감았다가 힘겹게 다시 뜨고는 맑은 눈동자로 진시우를 응시하며 물었다.“임재윤, 대체 누구예요?”“임재윤이요?”진시우는 잠깐 멈칫하더니 말했다.“아직도 민여진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임재윤은 당연히 임재윤이죠. 짜개 바지 시절부터 저와 함께했던 친구예요. 그에게 다른 신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민여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간호사실에서 전부 들었어요. 1106호에 박진성 씨가 입원해 있다는데 그곳은 분명 임재윤 씨의 병실이었죠. 즉 그들은 같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맞죠? 임재윤이라는 사람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당신들이 나를 속이기 위해 만든 가짜 신분 아니에요? 진시우 씨, 당신과 박진성은 나를 속이기 위해 정말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군요.”“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진시우는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반박했다.“임재윤과 박진성이 어떻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식이라면 나도 임재윤 그 새끼한테 속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가 사실은 양성 대영그룹의 사람이라고요?”예상치 못한 진시우의 반응에 민여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걸 밝히면 진시우 역시 솔직해질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진시우는 오히려 극도로 화를 내며 그녀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오늘은 임재윤의 수술 준비보다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네요. 따라오세요!”말을 마친 진시우는 민여진을 강제로 끌고 간호사실로 향했다.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희망 때문이었는지, 저항하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간호사실로 찾아간 진시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1106호 병실에 누가 입원해 있죠?”“1106호요?”간호사가 기록을 확인하더니 대답했다.“박진성 씨입니다.”민여진은 속
박진성의 이름과 그와의 관계에 관한 질문에 민여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진시우는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됐어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면 억지로 말하진 마세요.”“고마워요.”민여진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때 간호사실의 한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까 문채연 씨가 오셨을 때 제가 임재윤 씨 병실을 알려드렸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 가서 말씀드릴까요?”간호 실장이 답했다.“괜찮아요. 위층 간호사에게 알려주면 돼요.”“알겠어요.”목소리들이 점차 사그라들자, 민여진은 문채연이 있을 것 같아 다시 임재윤의 병실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술을 깨물고 고민했다.이때, 진시우가 말을 꺼냈다.“민여진 씨, 호텔에서 좀 쉬다가 저녁에 오는 게 어때요?”민여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의도치 않게 진시우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민여진은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진시우 씨는 동진 사람이에요?”“그렇죠.”진시우는 태연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그런데 왜 안진까지 와서 리조트를 지을 생각을 하신 거예요? 너무 멀지 않아요?”“물론 멀긴 하죠. 하지만 저는 외동도 아니고 가족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대우를 받는 위치도 아니에요. 동진의 사업은 대부분 형이 쥐고 있으니, 생계를 위해서라면 새로운 길을 찾아야죠.”민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구나.’그녀는 입술을 깨물다가 또 물었다.“그럼, 임재윤 씨는요?”진시우는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민여진 씨, 혹시 임재윤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렇게 돌려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진시우의 말에 당황한 민여진은 허둥지둥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무심코 여쭤본 거예요.”진시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임재윤도 동진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제가 회사를 나와 독립한다고 그러니까 재
“그래. 조금 늦게 돌아오는 것도 좋겠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길이 다 막혔거든. 진시우 씨와 임재윤 씨가 거기 있어서 나도 걱정은 안 해.”조인화는 민여진더러 안전에 신경 쓰고 사람 많은 데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한참 동안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민여진은 침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다 조현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여보세요, 여진아.”너무 빠른 응답에 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현준 오빠, 왜 이렇게 빨리 받아요?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조현준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대답했다.“몇 시간 자고 지금은 회사로 들어가는 중이야.”민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죄송해요.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도 바쁜데 피곤하겠어요.”조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진아, 전화한 이유가 단지 사과하려는 거라면, 차라리 이 전화를 받지 말 걸 그랬어.”민여진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조현준의 친절함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먹먹해졌다.“여진아,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지?”조현준이 물었다.“내가 뭐 도와줄 거라도 있어?”“역시 현준 오빠는 못 속이겠네요.”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워져 있었다.비록 오늘의 오해는 풀렸지만, 민여진은 임재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임재윤이라는 이름과 말을 못 한다는 것 외에 가족 상황은 어떠한지, 집은 어디에 있는지, 형제자매가 있는지 등등 임재윤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심지어 민여진은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매번 그녀한테 불리한 입장을 안겨주었다.“현준 오빠, 사실 두 사람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서요.”민여진은 긴장하며 휴대전화를 꽉 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후 말했다.“오빠도 동진 출신이시잖아요. 진시우라는 사람을 알아요?”“진시우?”조현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잠시만, 동료에게 물어볼게.”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잇는 조현
“그런 사이 아니라고?”조현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 깜짝 놀랐잖아.”조현준이 다시 말을 이었다.“여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로 상류 사회의 다툼에 끼어들어선 안 돼. 권력도 배경도 없는 우리는 그들한테 아무 위협도 안 되는 사람들이야.”조현준의 말에 민여진은 이 충고를 조금 일찍 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알겠어요. 현준 오빠, 진시우 씨는 안진에 리조트를 건설한다고 자주 다녀서 알게 된 거예요.”“리조트를 건설한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구나.”조현준은 굳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안진에 리조트를 세운다면 물론 수익은 있을 수 있지만, 진시우를 좀 과소평가한 일 아닌가?”“동진에서는 형이 모든 사업을 독차지해서 따로 나와 독립하는 거라고 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며 계속 말했다.“현준 오빠, 한 사람만 더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데요.”“임재윤?”민여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떻게 아셨어요?”조현준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말하지 않아도 조사할 생각이었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너하고도 접촉이 많은 사람 같아서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불안하거든.”“고마워요. 현준 오빠, 이 신세를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여진아, 우리는 이웃이기 전에 친구라는 사실을 잊지 마. 너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아니야.”조현준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넌 일단 쉬어. 나한테 기자인 친구가 한 명 있는데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돼. 조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할게.”“네, 수고해 줘요.”통화를 마치고 민여진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탓인지 마음이 놓이자 이내 눈꺼풀이 무거워졌다.다시 눈을 뜨자 휴대전화 시계는 이미 저녁을 가리키고 있었다.민여진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호텔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 씨, 깨셨나요?”“네. 잠시만
“채연 씨는...”비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비에서 하이힐 소리가 급하게 울려 퍼졌다. 긴장과 걱정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진성 씨!”문채연이 핸드백을 들고 달려왔다.“왜 나와 있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지금은 수술 후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요?”박진성은 변함없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병실에만 있으면 몸이 굳어 버릴 것 같아.”“그래도 저한테는 말했어야죠. 그리고 옷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으셨네요. 감기라도 다시 걸리면 어쩌려고요?”문채연은 핸드백을 비서에게 건네고 예쁜 손가락으로 박진성의 옷 단추를 하나씩 채워줬다. 단추를 모두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오히려 잘됐네요. 진성 씨가 다친 뒤로 우리 오랫동안 데이트도 못 했잖아요. 좀 움직이는 것도 좋아요. 오늘 나랑 같이 저 앞에 있는 레스토랑의 커플 메뉴를 먹으러 가요.”공포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민여진은 구석에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나마 압박감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박진성과 문채연의 대화를 들어보니 두 사람의 관계는 꽤 가까워 보였다. 만약 박진성이 다치지 않았다면, 아마 결혼 계획까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안정적이라면, 민여진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 갈 터였다. 그렇다면 설령 박진성이 나중에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 생각에 민여진은 비록 안도감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억울함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녀의 눈가에는 고통이 서려 있었다.하지만 조현준이 말했듯, 권력과 배경을 전부 가진 사람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여진 씨? 왜 여기 웅크리고 계세요?”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시우는 창백한 얼굴로 화분 뒤에 웅크려 앉은 민여진을 발견했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에요.”민여진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아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망설이던 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현준 오빠, 임재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를 한번 믿어보고 싶어요. 임재윤이 저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진짜 신분이 뭐든 상관없어요.”조현준은 할 말을 잃은 듯 한참 후에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여진아,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길 바란다.”‘이 결정을 왜 후회할 거로 생각하는 거지?’민여진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조현준은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다.그녀는 이 복잡한 감정이 조현준의 배려를 거절한 데서 오는 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민여진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민여진 씨, 저예요!”‘진시우?’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민여진은 당황하며 문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임재윤한테 문제가 생겼대요. 지금 수술실로 들어갔다니까 우리 빨리 병원으로 가요.”민여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어도 눈앞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탁자 위에 걸쳐둔 코트를 더듬어 입으며 물었다.“우리가 병원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요. 갑자기 어떻게 된 거예요?”평소 유머러스하던 진시우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에 섞여 있었다.“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임재윤의 병은 원래 갑작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는 병이었어요. 병원에서는 지금 수술 중이라고만 알려줘서 일단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요.”걸어서 갈 여유가 없던 두 사람은 즉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실 복도에 도착하자, 임재윤은 아직 수술 중이었다.진시우는 민여진을 자리에 앉히고 의사를 찾아갔다. 막막함과 불안함에 민여진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수술실 앞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민여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 없어 보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위중한 상태로 수술실까지 들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손끝에서 차가움이 느껴지더니
민여진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배가 조금 고파서 호텔 레스토랑에서 뭐라도 먹어야겠어요.”진시우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여진이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뒤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전해졌다.“여진아, 얘기 좀 할까?”민여진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얘기?”임재윤은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네가 알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알고 싶은 게 없는데?”민여진은 자기 말이 너무 차갑게 들릴 것 같아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재윤아, 뭐 좀 먹으러 가는 거야. 곧 돌아올게. 그때 다시 얘기하자. 알았지?”임재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진시우는 무슨 재미있는 장면이라도 본 듯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없는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네요.”“별일 아니었어요. 그냥 대화를 조금 나눈 것뿐이에요.”민여진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어서 가죠.”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서비스로 음식이 직접 배달되어 민여진은 레스토랑까지 내려갈 필요도 없었다. 진시우가 미리 말해둔 모양이었다.그녀는 조금씩 음식을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린 후였다. 급히 받아 들자, 조현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바빠?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아니요. 휴대전화를 멀리 두고 다른 테이블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요.”“그랬구나.”조현준은 잠시 침묵하더니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여진아, 그 일은 확인했어?”“무슨 일이요?”잠시 멈칫하던 민여진은 이내 무슨 일인지 알아차리고 말을 이었다. 임재윤의 신분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확인했어요. 임재윤은 원래 진씨 가문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대요. 선천성 심장병에 말도 못 하니까 자주 외출하지 못했던 거고, 나중에 치료를 위해 아버지와 함께 독엔에 갔대요. 아마 그래서 현준 오빠가 못 찾았나 봐요.”조현준은 긴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너는 그 말을 얼마나 믿어?”모든 걸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