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고?”진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옆에 앉은 임재윤을 힐끔 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여진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육감이에요. 누군가 계속 날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뒤에서 자꾸 발소리도 들리고, 내가 멈추면 그 사람도 멈췄어요. 내 귀는 원래 예민해서 틀리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진시우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졌다. “여진 씨, 다음부터 나랑 같이 다녀요. 오늘 밤 재윤의 병실에 침대 하나 마련해 둘 테니까 내가 혹시 늦게 오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요.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요.”"네, 그렇게 할게요."통화를 마친 민여진은 다시 커튼을 닫았다. 빛이 싫은 게 아니라, 혹시라도 맞은편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민여진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말했다. “민여진 씨, 계세요?”호텔 직원의 목소리였다.긴장했던 민여진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시우 씨께서 앞으로 민여진 씨는 레스토랑 이용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식사를 객실로 가져오기로 했어요.”진시우가 준비해 준 걸 알고 민여진은 안도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직원은 식사를 정리하면서 말을 꺼냈다. “민여진 씨는 진시우 씨 외에도 이곳에 아는 분 계세요?”민여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왜요?”“아, 별일은 아니고요. 민여진 씨께서 올라가신 후 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프런트에서 민여진 씨의 방 번호를 물었어요.”쾅!민여진은 손에 들고 있던 소품을 떨어뜨리고 얼굴이 새하얘지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직원이 깜짝 놀라며 반복했다.“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민여진 씨 방 번호를 물었어요.”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근데 걱정하실 필요는
이 소식은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진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민여진은 덜덜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자 침착하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예전에 진시우가 박진성은 중병을 앓고 있어 당분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민여진은 얼굴을 문지르자 손에 눈물이 잔뜩 묻어 있는 걸 알게 됐다.“민여진 씨...”직원이 문가에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프런트 직원을 데려왔어요.”민여진은 심호흡하고 프런트에 물었다.“방금 제 방 번호를 물었던 남자를 기억하세요?”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인식하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네, 기억나요.”민여진은 떨리는 혀를 누르며 물었다.“그 사람 어떻게 생겼나요?”“음... 키 크고 마른 편이었어요. 후드 티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였는데, 인상은 꽤 좋았던 것 같아요.”프런트 직원은 최대한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민여진은 잠시 얼어붙었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은 박진성과 비슷하다. 하지만 박진성은 후드 티를 입은 적 없었다. 그는 늘 정장을 입었다. 박씨 가문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미지를 중요시해 캐주얼한 옷을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민여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 맞다!”프런트 직원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그 사람 턱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었어요. 꽤 오래된 상처 같았고, 고개를 들 때 그 흉터가 유독 인상 깊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민여진은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박진성이 아니었다. 박진성의 얼굴에 흉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런 흠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애초부터 박진성이 아니었다.“민여진 씨!”직원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가슴 한구석의 돌덩이는 떨어져 나간 듯했지만 민여진의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다.그 남자가 박진성이 아니라면, 왜 박씨라고 일부러 말했을까? 분명 박진성이 그녀를 찾고 있다고 오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사람
민여진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 코끝이 시큰해져 훌쩍이며 한참 후 입을 열었다.“휴대폰 두 개 있었어?”“빌린 거야.”임재윤의 답장은 조금 느렸다.“괜찮아?”“뭐가?”“오늘 돌아갈 때 누가 널 따라갔잖아. 시우가 말해줬어. 놀라진 않았어?”민여진은 오늘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분명히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임재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정말?”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임재윤이 말했다.“미안해.”“응?”민여진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시우한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어. 널 혼자 먼저 보내서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그게 왜 너 때문이야. 오늘이 처음도 아닌걸. 나 혼자 호텔로 돌아오는 건 익숙해.”민여진은 단호히 말했다.“게다가 날 걱정해서 빨리 쉬게 해주고 싶었던 거잖아...”“그래도 내가 좀 더 잘 처리해야 했어. 널 따라온 사람 때문에 겁났을 거 아냐.그때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임재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깊은 자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을 것이다.민여진의 기분은 조금 풀렸다.“그렇게 말하지 마. 누가 그럴 줄 알았겠어. 나도 예상 못 했어.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오히려 좋아. 이제 누가 날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수 있게 됐어. 이제 혼자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임재윤은 침묵 속에서 답장했다.“넌 여전히 착하네. 하지만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괜찮아.”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익숙해졌어.”감옥에 있을 때 그녀는 괴롭힘을 당해도 울면 안 됐다.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더 심하게 폭력을 당했기에, 그녀는 말없이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그 습관 내가
민여진은 무려 임재윤과 밤새 통화를 했다. 혹시나 이상한 잠꼬대라도 한 건 아닐지 걱정햇다.“깼어?”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고 민여진은 멋쩍게 대답했다.“나 잠들면 전화 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아침까지 안 끊었어?”“끊기 싫었어.”임재윤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평온하게 자는 소리가 들렸어. 그걸 들으니까 네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까 봐 끊지 못했어.”민여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여진 씨, 일어났어요?”민여진은 머리를 정리하고 급히 문을 열었다.문 앞에 있던 진시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 멈칫했다.“여진 씨, 어디 아파요?”“아니요.”민여진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으세요?”“아프지 않은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요?”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 붉어졌다. 문제는 휴대폰을 아직 끊지 못해 임재윤이 이 상황을 다 들었을 게 분명했다.“그냥 이불 속에 오래 있어서 그래요.”“그래요?”진시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자는 동안은 이불 속에 너무 오래 있지 마요. 안에 공기가 희박해서 산소가 부족할 수도 있어요.”민여진은 더욱 민망해졌다. 임재윤에게 인사도 못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여진 씨, 우선 정리 좀 해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네.”민여진은 문을 닫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왔다.진시우가 말했다.“어젯밤 내가 늦게 돌아와 혹시 자고 있을까 봐 안 들렀어요. 근데 직원이 그러는데, 누가 여진 씨의 방까지 찾아왔다고 하던데요?”“네.”어제 그 사람을 떠올리자 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 사람이 자기 성이 박 씨라고 했어요.”“박? 박진성이요?”“네.”“그럴 리 없어요.”진시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은 병실에서 24시간 감시받고 있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어요. 설령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굳이 자기 성을 밝히겠어요?”“실제로는 그 사람이 아니었
바로 문을 밀고 들어서니 진시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임재윤에게 말했다“컨디션은 어때?” 임재윤은 먼저 진시우의 뒤쪽을 바라보았고 민여진이 보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으로 대답했다.“많이 좋아졌어.” “잘됐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일러. 수술 한 번 더 남았으니 그 수술까지 끝나야 정말 괜찮은 건지 판단할 수 있어.” “알아.”진시우가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 씨, 나가서 아침밥 2인분 사 올 테니까 잠깐 앉아 계세요. 아, 감기약도 같이 사 올까요? 아침에 얼굴이 많이 빨간 것이 열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시 임재윤에게 말했다. “오늘 여진 씨 집에서 나올 때 귓불까지 빨개졌더라고.”민여진은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진시우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의사도 자기 병은 못 고친다는데 여진 씨는 의사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프지 않다고 확신하죠?”이때 병상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임재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대신해 설명했다. “여진이는 오늘 아침 너한테 문 열어주기 직전까지 나랑 통화하고 있었어.”그 말에 민여진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진시우는 뭔가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여진 씨.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괜히 그런 어설픈 거짓말은 왜 해요. 난 또 내 도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잖아요.” 민여진은 확신했다.그녀가 임재윤과 통화할 때 진시우는 분명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을 것이다.이 사람, 생각처럼 착한 사람이 아닌 은근히 속이 시커먼 타입이다.한바탕 웃고 떠든 후 진시우가 밖으로 나가자 민여진이 참지 못하고 해명했다.“나 원래 얼굴이 잘 빨개져.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이래. 그러니까...” “알아.”임재윤은 웃참이라도 하는 듯 타이핑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내 말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임재윤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간호사는 그의 몸을 향해 손을 뻗어 야릇하게 손톱으로 살짝 건드린 뒤 몸을 굽혀 아름다운 가슴라인을 드러냈다.그녀는 임재윤이 반드시 넘어갈 것이라 믿었다. 이렇게 적극적인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까?“꺅!” 하지만 곧 임재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간호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파에 있던 민여진이 곧장 일어나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간호사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이 사람 이런 노골적인 유혹엔 관심이 없나 봐.’ 하지만 간호사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민여진을 힐끔 흘겨보았다. 답을 듣지 못한 민여진은 조급하게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아니에요.” 간호사는 담담하게 대답한 후 임재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임재윤 씨, 상처를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확인하고 회복을 도와드려야 하는 데 이렇게 거부하시면 다음 수술은 어떻게 버티실래요?” 말을 끝낸 간호사는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임재윤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깊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간호사는 반성할 겨를도 없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때 민여진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재윤아, 너 왜 그래? 말 들어. 간호사님이 상처 확인해야지, 그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의 조급하고 걱정 어린 말투에 간호사는 임재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임재윤은 곧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다.‘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거부하더니 고작 저 못난이 한마디 때문에 태도를 바꿨어?’간호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임재윤의 날카로운 눈빛에 더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고 은근슬쩍 그의 몸을 한 번 쓸며 상처를 확인한 뒤에 손을 거뒀다. “다 됐어요. 상처 회복 상태는 양호해요. 휴식만 잘 취하시면 별문제 없을 것 같네요. 약 잘 챙겨 드시고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래서, 해줄 거야? 내가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내 몸에 닿는 걸 아주 싫어해서. 싫다면 어쩔 수 없고.”민여진은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혹시라도 실수로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워.”“괜찮아. 내가 이끌어 줄게.”민여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했다. “응, 좋아.”이후 진시우가 와서 몇 마디 나누다가 나갈 때 말했다. “여진 씨, 잠깐 나와서 짐 좀 들어줘요.”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민여진이 병실을 나와 문을 닫는 순간, 진시우가 다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여진 씨,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찍힌 것 같아요.”민여진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일이죠?”“어제 교차로 CCTV를 확인해 봤는데 역시 누가 여진 씨를 미행하더군요. 상대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계획적으로 접근한 게 분명해요. CCTV에는 상대가 밤에 작은 길로 사라지는 모습만 찍혔고 인적 사항도 전혀 나오지 않아요.”“어떡하면 좋죠...” 민여진은 불안감이 커졌다.진시우가 다시 물었다. “원한 관계인 사람은 없어요?”그 질문에 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박진성 씨도 해당되나요?”“해당되죠. 하지만 상대는 분명 박진성과는 관련이 없어 보여요. 박진성이라면 억지로 여진 씨를 데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두 사람 관계로 보았을 때 내가 막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그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민여진은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떨궜다.“제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그럼 아마 여진 씨가 시각 장애인이라 만만하게 보고 접근한 걸 수도 있겠군요.” 진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니 당분간은 우리 모두 특히 조심해야 해요. 여진 씨도 재윤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마세요. 만약 내가 데리러 오지 못하면 재윤이 옆 병상에서 쉬도록 하세요.”“네…”“오늘은 호텔에 안 가고 그 골목길에서 혹시 그 사람을 본 사람이 있는지 좀 더 조사해볼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진 씨도 우선 병실에 있어요. 재윤이가 곁에 있으면 여진 씨도 안심이 될 거잖아요.”진
“축하드려요, 임신 4주 차예요.”의사의 축하에도 민여진은 전혀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검사가 잘 못 된 건 아닌가요..? 임신일 리가 없는데... 한 번만 다시 검사해주세요.”“혹시 한 달 전에 관계를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있긴 한데...”“피임조치를 했다거나 약을 드신 적은 있으세요?”비가 오던 날, 박진성과 보냈던 뜨거운 밤을 떠올리던 민여진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그러자 의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검사 다시 할 필요도 없잖아요. 관계도 하고 약도 안 먹었으면 원래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데 결과가 잘못됐을 리는 없어요.”의사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민여진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진단서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임신 아니라고 적어주세요 제발...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민여진 씨, 여긴 합법적인 병원입니다. 환자들의 진단서를 마음대로 고치는 건 불법이에요, 다른 용건 없으시면 이만 나가주세요.”“다음 환자분!”미간을 찌푸리며 축객령을 내리는 의사에 민여진은 진단서를 손에 꼭 쥔 채 비틀대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소란스러운 거리 한복판에 서 있던 민여진은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었다.저를 받아들인 것도 박진성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건데 아이까지 가졌다는 걸 알게 되면 당장 지우라고 할 게 뻔했기에 민여진은 이 진단서를 들고 그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다.민여진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킬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박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박진성의 낮은 음성이 귀에 내려꽂혔다.“검사 끝났으면 빨리 집으로 와.”박진성은 인내심이 그리 깊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민여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렇게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서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마침 3층 금지구역에서 내려오는 박진성을 보게 되었다.실크 잠옷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친 탓에 남자의 탄탄한 근육이 그대로 민
“그래서, 해줄 거야? 내가 결벽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내 몸에 닿는 걸 아주 싫어해서. 싫다면 어쩔 수 없고.”민여진은 당황하며 말했다. “내가 혹시라도 실수로 다치게 할까 봐 무서워.”“괜찮아. 내가 이끌어 줄게.”민여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승낙했다. “응, 좋아.”이후 진시우가 와서 몇 마디 나누다가 나갈 때 말했다. “여진 씨, 잠깐 나와서 짐 좀 들어줘요.”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민여진이 병실을 나와 문을 닫는 순간, 진시우가 다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여진 씨,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찍힌 것 같아요.”민여진의 안색이 변했다. “무슨 일이죠?”“어제 교차로 CCTV를 확인해 봤는데 역시 누가 여진 씨를 미행하더군요. 상대의 목적은 모르겠지만 계획적으로 접근한 게 분명해요. CCTV에는 상대가 밤에 작은 길로 사라지는 모습만 찍혔고 인적 사항도 전혀 나오지 않아요.”“어떡하면 좋죠...” 민여진은 불안감이 커졌다.진시우가 다시 물었다. “원한 관계인 사람은 없어요?”그 질문에 민여진은 잠시 멍해졌다. “박진성 씨도 해당되나요?”“해당되죠. 하지만 상대는 분명 박진성과는 관련이 없어 보여요. 박진성이라면 억지로 여진 씨를 데려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두 사람 관계로 보았을 때 내가 막을 수도 없을 테니까요.”“그럼 저도 잘 모르겠어요.” 민여진은 머리가 어지러워 고개를 떨궜다.“제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그럼 아마 여진 씨가 시각 장애인이라 만만하게 보고 접근한 걸 수도 있겠군요.” 진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니 당분간은 우리 모두 특히 조심해야 해요. 여진 씨도 재윤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마세요. 만약 내가 데리러 오지 못하면 재윤이 옆 병상에서 쉬도록 하세요.”“네…”“오늘은 호텔에 안 가고 그 골목길에서 혹시 그 사람을 본 사람이 있는지 좀 더 조사해볼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진 씨도 우선 병실에 있어요. 재윤이가 곁에 있으면 여진 씨도 안심이 될 거잖아요.”진
임재윤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간호사는 그의 몸을 향해 손을 뻗어 야릇하게 손톱으로 살짝 건드린 뒤 몸을 굽혀 아름다운 가슴라인을 드러냈다.그녀는 임재윤이 반드시 넘어갈 것이라 믿었다. 이렇게 적극적인데 어찌 흔들리지 않을까?“꺅!” 하지만 곧 임재윤은 싸늘한 표정으로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간호사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파에 있던 민여진이 곧장 일어나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간호사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어. 이 사람 이런 노골적인 유혹엔 관심이 없나 봐.’ 하지만 간호사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민여진을 힐끔 흘겨보았다. 답을 듣지 못한 민여진은 조급하게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죠?” “아니에요.” 간호사는 담담하게 대답한 후 임재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임재윤 씨, 상처를 방치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확인하고 회복을 도와드려야 하는 데 이렇게 거부하시면 다음 수술은 어떻게 버티실래요?” 말을 끝낸 간호사는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임재윤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은 채 깊고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간호사는 반성할 겨를도 없이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때 민여진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재윤아, 너 왜 그래? 말 들어. 간호사님이 상처 확인해야지, 그러다 덧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녀의 조급하고 걱정 어린 말투에 간호사는 임재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임재윤은 곧 그녀의 손을 풀어주었다.‘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거부하더니 고작 저 못난이 한마디 때문에 태도를 바꿨어?’간호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지만 임재윤의 날카로운 눈빛에 더는 수작을 부리지 못하고 은근슬쩍 그의 몸을 한 번 쓸며 상처를 확인한 뒤에 손을 거뒀다. “다 됐어요. 상처 회복 상태는 양호해요. 휴식만 잘 취하시면 별문제 없을 것 같네요. 약 잘 챙겨 드시고요, 내일 다시 올게요
바로 문을 밀고 들어서니 진시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임재윤에게 말했다“컨디션은 어때?” 임재윤은 먼저 진시우의 뒤쪽을 바라보았고 민여진이 보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으로 대답했다.“많이 좋아졌어.” “잘됐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일러. 수술 한 번 더 남았으니 그 수술까지 끝나야 정말 괜찮은 건지 판단할 수 있어.” “알아.”진시우가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 씨, 나가서 아침밥 2인분 사 올 테니까 잠깐 앉아 계세요. 아, 감기약도 같이 사 올까요? 아침에 얼굴이 많이 빨간 것이 열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시 임재윤에게 말했다. “오늘 여진 씨 집에서 나올 때 귓불까지 빨개졌더라고.”민여진은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진시우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의사도 자기 병은 못 고친다는데 여진 씨는 의사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프지 않다고 확신하죠?”이때 병상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임재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대신해 설명했다. “여진이는 오늘 아침 너한테 문 열어주기 직전까지 나랑 통화하고 있었어.”그 말에 민여진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진시우는 뭔가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여진 씨.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괜히 그런 어설픈 거짓말은 왜 해요. 난 또 내 도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잖아요.” 민여진은 확신했다.그녀가 임재윤과 통화할 때 진시우는 분명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을 것이다.이 사람, 생각처럼 착한 사람이 아닌 은근히 속이 시커먼 타입이다.한바탕 웃고 떠든 후 진시우가 밖으로 나가자 민여진이 참지 못하고 해명했다.“나 원래 얼굴이 잘 빨개져.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이래. 그러니까...” “알아.”임재윤은 웃참이라도 하는 듯 타이핑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내 말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민여진은 무려 임재윤과 밤새 통화를 했다. 혹시나 이상한 잠꼬대라도 한 건 아닐지 걱정햇다.“깼어?”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고 민여진은 멋쩍게 대답했다.“나 잠들면 전화 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아침까지 안 끊었어?”“끊기 싫었어.”임재윤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평온하게 자는 소리가 들렸어. 그걸 들으니까 네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까 봐 끊지 못했어.”민여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여진 씨, 일어났어요?”민여진은 머리를 정리하고 급히 문을 열었다.문 앞에 있던 진시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 멈칫했다.“여진 씨, 어디 아파요?”“아니요.”민여진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으세요?”“아프지 않은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요?”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 붉어졌다. 문제는 휴대폰을 아직 끊지 못해 임재윤이 이 상황을 다 들었을 게 분명했다.“그냥 이불 속에 오래 있어서 그래요.”“그래요?”진시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자는 동안은 이불 속에 너무 오래 있지 마요. 안에 공기가 희박해서 산소가 부족할 수도 있어요.”민여진은 더욱 민망해졌다. 임재윤에게 인사도 못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여진 씨, 우선 정리 좀 해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네.”민여진은 문을 닫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왔다.진시우가 말했다.“어젯밤 내가 늦게 돌아와 혹시 자고 있을까 봐 안 들렀어요. 근데 직원이 그러는데, 누가 여진 씨의 방까지 찾아왔다고 하던데요?”“네.”어제 그 사람을 떠올리자 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 사람이 자기 성이 박 씨라고 했어요.”“박? 박진성이요?”“네.”“그럴 리 없어요.”진시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은 병실에서 24시간 감시받고 있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어요. 설령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굳이 자기 성을 밝히겠어요?”“실제로는 그 사람이 아니었
민여진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 코끝이 시큰해져 훌쩍이며 한참 후 입을 열었다.“휴대폰 두 개 있었어?”“빌린 거야.”임재윤의 답장은 조금 느렸다.“괜찮아?”“뭐가?”“오늘 돌아갈 때 누가 널 따라갔잖아. 시우가 말해줬어. 놀라진 않았어?”민여진은 오늘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분명히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임재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정말?”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임재윤이 말했다.“미안해.”“응?”민여진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시우한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어. 널 혼자 먼저 보내서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그게 왜 너 때문이야. 오늘이 처음도 아닌걸. 나 혼자 호텔로 돌아오는 건 익숙해.”민여진은 단호히 말했다.“게다가 날 걱정해서 빨리 쉬게 해주고 싶었던 거잖아...”“그래도 내가 좀 더 잘 처리해야 했어. 널 따라온 사람 때문에 겁났을 거 아냐.그때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임재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깊은 자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을 것이다.민여진의 기분은 조금 풀렸다.“그렇게 말하지 마. 누가 그럴 줄 알았겠어. 나도 예상 못 했어.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오히려 좋아. 이제 누가 날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수 있게 됐어. 이제 혼자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임재윤은 침묵 속에서 답장했다.“넌 여전히 착하네. 하지만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괜찮아.”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익숙해졌어.”감옥에 있을 때 그녀는 괴롭힘을 당해도 울면 안 됐다.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더 심하게 폭력을 당했기에, 그녀는 말없이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그 습관 내가
이 소식은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진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민여진은 덜덜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자 침착하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예전에 진시우가 박진성은 중병을 앓고 있어 당분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민여진은 얼굴을 문지르자 손에 눈물이 잔뜩 묻어 있는 걸 알게 됐다.“민여진 씨...”직원이 문가에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프런트 직원을 데려왔어요.”민여진은 심호흡하고 프런트에 물었다.“방금 제 방 번호를 물었던 남자를 기억하세요?”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인식하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네, 기억나요.”민여진은 떨리는 혀를 누르며 물었다.“그 사람 어떻게 생겼나요?”“음... 키 크고 마른 편이었어요. 후드 티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였는데, 인상은 꽤 좋았던 것 같아요.”프런트 직원은 최대한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민여진은 잠시 얼어붙었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은 박진성과 비슷하다. 하지만 박진성은 후드 티를 입은 적 없었다. 그는 늘 정장을 입었다. 박씨 가문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미지를 중요시해 캐주얼한 옷을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민여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 맞다!”프런트 직원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그 사람 턱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었어요. 꽤 오래된 상처 같았고, 고개를 들 때 그 흉터가 유독 인상 깊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민여진은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박진성이 아니었다. 박진성의 얼굴에 흉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런 흠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애초부터 박진성이 아니었다.“민여진 씨!”직원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가슴 한구석의 돌덩이는 떨어져 나간 듯했지만 민여진의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다.그 남자가 박진성이 아니라면, 왜 박씨라고 일부러 말했을까? 분명 박진성이 그녀를 찾고 있다고 오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사람
“뭐라고?”진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옆에 앉은 임재윤을 힐끔 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여진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육감이에요. 누군가 계속 날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뒤에서 자꾸 발소리도 들리고, 내가 멈추면 그 사람도 멈췄어요. 내 귀는 원래 예민해서 틀리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진시우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졌다. “여진 씨, 다음부터 나랑 같이 다녀요. 오늘 밤 재윤의 병실에 침대 하나 마련해 둘 테니까 내가 혹시 늦게 오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요.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요.”"네, 그렇게 할게요."통화를 마친 민여진은 다시 커튼을 닫았다. 빛이 싫은 게 아니라, 혹시라도 맞은편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민여진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말했다. “민여진 씨, 계세요?”호텔 직원의 목소리였다.긴장했던 민여진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시우 씨께서 앞으로 민여진 씨는 레스토랑 이용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식사를 객실로 가져오기로 했어요.”진시우가 준비해 준 걸 알고 민여진은 안도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직원은 식사를 정리하면서 말을 꺼냈다. “민여진 씨는 진시우 씨 외에도 이곳에 아는 분 계세요?”민여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왜요?”“아, 별일은 아니고요. 민여진 씨께서 올라가신 후 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프런트에서 민여진 씨의 방 번호를 물었어요.”쾅!민여진은 손에 들고 있던 소품을 떨어뜨리고 얼굴이 새하얘지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직원이 깜짝 놀라며 반복했다.“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민여진 씨 방 번호를 물었어요.”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근데 걱정하실 필요는
“널 기다리는 건 내가 원해서야. 네가 일부러 날 붙잡고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너도 자유롭고 나도 자유로워. 내가 언젠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너와 친구로 지내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아. 그리고 널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정말로 날 받아 줄 마음이 생길 때까지.”임쟁윤의 말은 너무도 담담하고 단단해서 민여진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당황스럽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재윤아, 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길 바라지 않아.”“지금 널 포기하는 게 바로 내가 평생 후회할 선택이야.”임재윤은 핸드폰 너머로 더욱 힘 있게 말하자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얼마 후 간호 실장은 환자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민여진에게 말했다.“일단 돌아가. 시우가 곧 도착한다고 문자 왔어. 늦었으니까 먼저 돌아가서 쉬고 나중에 다시 와.”민여진은 걱정이 되었지만 임재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섰다.그녀는 호텔까지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혼자서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계속 누군가가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 뒤쪽의 발소리도 덩달아 빨라졌다. 마치 시각 장애인 옆에서 일부러 같은 속도로 걷는 사람처럼 매우 교묘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일부러 아니라면 믿기 어려웠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성급히 걸어갔다.“저기요 실례합니다.”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민여진이 갑자기 다가오자 대학생 몇 명은 놀랐다. 하지만 곧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민여진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런 행동이 다소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누군가에게 실례를 끼치는 것보다 위협을 받는 것이 더 두려웠다.“저… 제가 앞이 안 보여서요. 여기가 낯설고 길을 잘 모르겠어요. 혹시 센트럴 호텔까지 함께 가 주실 수 있나요?”학생들은 원래도 심심해 어디 갈지 고민 중이었기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지금 그녀 옆에는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사진을 본 적 있는데, 행복해 보였어. 그거면 돼. 나는 그저 이 실수를 잊지 않고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야.”‘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음성 안내가 살짝 멈춘 듯했다. 마치 민여진을 들으라는 듯이.민여진은 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나에게 존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고, 뭐가 제일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줬어. 아마 이건 하늘이 준 시험이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가장 좋은 모습.’지금의 임재윤은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민여진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재윤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물 있어?”“있어.”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물을 반 정도 채워 임재윤에게 건넸다.“여기.”하지만 임재윤은 컵을 받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진아, 내가 너를 그녀의 대체품으로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닌지, 충분히 내 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처음 극장에서 널 만났을 땐 네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어. 하지만 진짜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너의 온화한 모습과 성격이었어. 그녀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될 만큼 먼 과거라고. 나는 널 그녀의 그림자로 보지 않아.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그의 말은 이미 준비된 듯 타자의 간격 없이 쭉 이어졌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감만으로도 그의 눈동자 속 뜨거운 열망과 희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임재윤의 손은 점점 달아올랐고, 화끈한 열기에 민여진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솔직히 민여진은 임재윤의 마음이 싫지 않았다. 다만...“재윤아, 너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너한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게 있어.”그녀는 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