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3화 우스운 생각

Author: 연의 수정
...

문채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서야 아래로 내려온 박진성은 사라져버린 민여진에 미간을 찌푸리며 양경호를 바라보았다.

“민여진은?”

그 질문에 양경호도 어리둥절해 할 때, 박진성은 본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진성아, 넌 이렇게 기쁜 소식을 왜 이제야 전해? 채연이 임신했대, 얼른 집으로 와.”

본가에 도착한 박진성은 소파에 앉아 음식을 먹는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민여진도 자신이 잘못한 건 아는지 박진성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떨구고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 대단하네 진짜.”

가엾은 토끼처럼 굴던 애가 이런 식으로 반항할 줄 몰랐기에 그 분노가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박진성의 분노를 마주한 민여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이정화가 나서서 박진성을 나무랐다.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넌 무슨 애가 말을 그렇게 하니? 채연이가 임신했다는 데 안 기뻐?”

박진성은 이를 악문 채 민여진을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아주 기뻐서 날아갈 것만 같은데요 뭘.”

“그래야지, 이게 얼마나 기쁜 일이니. 결혼한 지 2년 만에 드디어 아기가 생겼으니, 딸이든 아들이든 다 박씨 집안의 경사지. 넌 채연이 잘 좀 챙겨. 혹시라도 애한테 문제 생기면 너한테 따질 거니까.”

말을 하던 이정화를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머, 주방에서 국 끓이고 있는데, 난 가서 좀 봐야겠다.”

“어머님, 저도 같이 가요!”

“거기 서.”

하지만 민여진은 사냥감을 노리듯 번뜩이는 눈으로 한기를 뿜어내며 말하는 박진성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넌 나랑 얘기 좀 해야지.”

이정화는 둘이 사랑싸움을 하는 줄로만 알고 민여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어 보였다.

“채연아, 긴장할 필요 없어. 쟤가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네가 자기 애 가졌다고 엄청 기뻐할 거야. 진성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둘이 얘기 나누고 있어 그럼.”

사랑? 그래, 박진성이 문채연을 사랑하는 건 맞지.

하지만 지금 그를 마주하는 사람은 문채연 본인이 아니라 민여진이다.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민여진은 입술을 꼭 말아 문 채 주방으로 들어가는 이정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하지만 이정화의 인영이 사라지자마자 제 손목을 꽉 잡은 채 들어 올리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할 수 없이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민여진,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봤나 봐. 나약한 줄로만 알았더니 이렇게 반항도 하고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의 분노에 민여진은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성 씨, 난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바라요... 그냥 아이를 지키고 싶을 뿐이에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코웃음을 치며 민여진을 내려다보는 박진성의 눈은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여진, 내가 네 그 우스운 생각을 모를 거라고 착각하지마. 너는 세상에서 민여진이라는 존재가 사라진다 해도 문채연인 척 살아가고 싶어 했어.. 그렇게 내 아내가 돼서 이젠 내 아이도 낳을 네가 때가 되면 알아서 떠나겠다고? 지금도 내 말을 거역하는데 그때가 되면 또 아이를 빌미로 잡아 나를 협박하겠지. 내가 너 같은 여자를 한두 번 본 줄 알아?”

매정하다 못해 날카로운 남자의 말이 칼날이 되어 민여진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민여진은 그저 박진성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뿐인데, 그래서 문채연이 된다 해도 그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결혼까지 한건데...

그게 박진성에게는 그저 우스운 생각으로 보였던 것 같다.

“나는...”

“넌 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지키겠다고? 나 좋아해서, 나중에 나 생각하려고 아이를 낳는 거란 말은 집어치워. 나는 네 생각처럼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라도 살고 싶으면 당장 병원 가서 아이 지워.”

박진성이 얼마나 냉혹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민여진은 두려움에 몸을 떨어댔다.

그때 주방에서 나온 이정화가 떨고 있는 민여진을 보더니 놀라며 뛰쳐나왔다.

“무슨 일이야!”

그에 박진성은 익숙하게 둘러댔다.

“별일 아니에요. 오늘 나랑 좀 다퉈서 본가로 온 것 같은데 아까 다 풀었으니까 이제 집에 돌아가려고요.”

“네가 남편 노릇을 잘했으면 얘가 여길 왜 오겠어? 다 네 잘못이지.”

이정화는 제 아들을 나무라며 민여진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 달래주었다.

“채연아, 저놈 말 듣지 말고 기분 나쁘면 여기서 며칠 있어. 나랑 같이 쇼핑 다니면서 기분전환 좀 해.”

“어머니.”

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을 불안한 눈으로 올려보던 민여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머님, 저 지금은 진짜 집에 가기 싫은데... 본가에 며칠 있어도 될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박진성의 눈빛이 저를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변하는 게 느껴지자 민여진은 점점 숨이 막혀왔다.

민여진이 감히 저를 거역했다는 생각에 화가 난 그가 주먹을 말아쥐자 그 주위의 공기까지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던 와중에 무슨 생각인지 박진성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채연아, 내가 요즘 일 때문에 같이 못 있어 줘서 그래? 그럼 나도 여기 남아서 너랑 같이 있어 줄게. 너 화 풀리면 그때 집에 가자.”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말하는 박진성이 더 섬뜩했던 민여진은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가 다급히 말했다.

“당신 짐도 다 별장에 있고...”

“이틀 정도만 지내면 되는데 뭘.”

매일 밤, 3층으로 가 문채연에게 이런저런 푸념을 하던 그가 그녀를 별장에 혼자 내버려 두면서까지 제 옆에 있겠다는 말에 민여진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낮에는 어떻게든 그를 피한다 해도 밤이면 어쨌든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해야 했기에 민여진은 두려우면서 절망스러웠다.

먼저 들어간 박진성 때문에 민여진은 30분 넘게 망설였지만 결국 다른 방법이 없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실크 잠옷을 입은 채 베란다에 서 있던 남자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은 신경도 안 쓴 채 저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바라보는 맹수 같았다.

“이리와.”

박진성의 말에 민여진이 몸을 파르르 떨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민여진이 박진성 앞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검은 손이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너 진짜 겁이 없구나.”

민여진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지만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박진성의 눈에 그게 보일 리가 없었다.

“말로 하면 알아듣지 못하니까 내가 오늘 몸으로 직접 알려줄게.”

말을 마치자마자 제 옷을 벗겨내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이게!”

“뭐 하는 거냐고?”

박진성은 힘을 주어 민여진을 베란다의 테이블 위에 눕히며 말했다.

“보면 모르겠어?”

반사되는 유리 빛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한층 더 매정해 보였다.

박진성은 민여진의 두 팔을 그녀의 등 뒤로 보내 거칠게 그러잡으며 말했다.

“아이를 낳겠다는 건 나한테 엉겨 붙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이렇게 널 대해달라고 발악하는 거잖아.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빈민 구역에서만 숨 쉬던 너 같은 게 내 눈에 들 수 있겠어?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았어? 매번 나한테 다가올 때마다 이런 걸 꿈꿨겠지. 좋아, 오늘은 내가 네 그 소원 들어줄게.”

이성을 잃은 박진성이 자기를 덮친다면 아이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에 민여진은 두려움에 눈을 부릅떴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8화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것 같아

    방으로 돌아온 민여진은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씻어내렸다.차가운 물이 얼굴을 적시자 멍해졌던 정신은 점점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꽉 막힌 듯 무겁기만 했다. 여전히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그 순간 진시우가 나타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시우가 아니었다면 민여진은 박진성 손에서 도망칠 방법조차 찾지 못했을 것이다.민여진이 휴대폰을 꺼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미친 듯이 임재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영혼을 잃은 듯한 민여진을 집까지 데려다준 진시우가 별장을 나서자 밖에는 검은색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조수석으로 걸음을 옮긴 진시우가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이미 세 대가 넘게 줄담배를 피고 있던 박진성이 피폐한 표정으로 마지막 연기를 내뿜고는 진시우에게 물었다.“여진이 괜찮아?”진시우가 쓴웃음을 지었다.“솔직하게 얘기하길 바라? 널 마주쳤으니 괜찮을 리가. 오는 내내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얼이 빠져 있었어. 쓰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어.”짐작한 일이었지만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또다시 주제도 모르고 통증을 호소했다.진시우가 말했다.“이제야 네가 왜 죽어도 여진 씨에게 네 정체를 숨기려 했는지 알 것 같아. 여진 씨가 이렇게 널 무서워하는 걸 보면, 네가 임재윤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해도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박진성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숨기려고 줄곧 노력해 왔어. 물론 이렇게 갑자기 정체를 들키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지만 들키기 전에 내가 임재윤이라고 인정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야. 아니면...”박진성은 그 후과를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잠시 침묵하던 진시우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정말 평생 숨기기라도 하려고? 낯선 이름으로 살면서 박진성이라는 신분을 버릴 거야? 여진 씨 곁에 있기 위해서?”“나에게 다른 선택이 있긴 해?”입술을 달싹이던 진시우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없었다.박진성은 이미 민여진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줬다. 도무지 그 어떤 방법으로도 민여진의 용서를 바랄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7화 신고해 줘요

    그 말은 정확히 박진성을 겨냥한 것이었다.그러나 지금의 그는, 미안하다고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방금 한 말 취소해.”박진성이 거친 숨을 내쉬며 차갑게 명령했다.민여진이 실소를 터뜨렸다.“전부 당신이 한 짓이잖아. 당신도 그 일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진성 씨도 받아들일 수 없는 거네. 당신도 받아들이기 힘든 잘못을 저질러 놓고 왜 나에게는 용서를 강요하는 거야. 진성 씨, 당신은 대체...”민여진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지만 박진성의 마음은 이미 찢어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민여진의 입술을 머금었다.뜨겁고도 거친 키스였다.마치 그 키스로 민여진의 입을 막고 그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말들까지도 전부 막아버리겠다는 듯이.민여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에 그녀의 머리는 새햐앟게 백지장이 되어버렸다. 곧이어 그녀를 감싸는 건 끝도 없이 밀려오는 분노와 수치심,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역겨움이었다.그녀는 더 이상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박진성의 뺨을 내리쳤다.짝하는 소리와 함께 박진성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검은 눈동자엔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바로 그때, 진시우가 문을 열었다. 박진성과 민여진의 모습을 본 그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두 사람...”그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이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진시우가 미처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민여진이 옷을 부여잡고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시우 씨!”민여진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고집스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도와줘요. 신고 좀 해주세요.”“신고요?”진시우는 곧바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눈앞의 이 남자의 신분은 임재윤이 아닌 박진성이었다...진시우는 곧바로 민여진을 감싸며 진지한 말투로 박진성에게 말했다.“박진성, 대낮부터 여성분에게 이런 짓을 하는 건 사람이 할 짓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6화 죽을 만큼 원망스러워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민여진의 얼굴을 훑던 박진성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아니, 민여진. 우리 사이는 나만 끝낼 수 있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진성이 민여진의 손목을 꽉 잡아 그녀를 차로 밀어 넣었고는 쾅 문을 닫았다.당황한 민여진이 문을 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고 박진성의 향기만 더욱 짙어졌다. 그 짙은 향기에 그녀는 숨이 멎을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에 민여진은 자기를 보호하듯 몸을 웅크린 채 두 눈으로 박진성을 죽어라 노려보았다.“박진성, 뭐 하는 거야?”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공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었다.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한다고, 무너지지 말라고.그런 민여진을 보며 박진성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그는 지금 임재윤이 아니라 박진성이었다. 어떻게든 포악한 박진성의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줘야 했다. 그래야만 박진성에게서 임재윤을 완전히 박리해 민여진의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그랬기에 박진성은 민여진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려 시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우리 부부잖아. 반년이 넘도록 만나지도 못했는데 당연히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좀 나눠야지.”눈물이 고여있던 민여진의 눈은 박진성의 말에 혐오의 기색을 드러냈다.“난 진성 씨와 할 얘기 없어.”민여진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박진성을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다.박진성이 씁쓸한 기분을 꾹 참아내며 민여진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안 그래도 협소한 공간에 바짝 붙어있으니 상대방의 작은 주름마저 똑똑히 보일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박진성이 차갑게 말했다.“민여진, 넌 내가 그렇게 미워? 얘기 좀 나누는 것도 싫을 만큼? 잊지 마. 네가 죽은 척했던 그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널 찾은 사람도 네가 살아있길 바랐던 사람도 나뿐이었어. 나 말고 일편단심으로 널 대할 사람이 또 있을 것 같아?”“그래...”민여진은 그저 실소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5화 누가 널 만질 수 있는데

    이 사람이 임재윤일 리가 없었다. 임재윤은 지금 머나먼 독엔에 있었고 돌아오려고 해도 꼬박 하루를 비행기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니 임재윤이 경찰서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하지만 임재윤이 아니라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실루엣은 왜 이렇게 이상할 정도로 익숙한 걸까?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인 것처럼...손끝을 파르르 떤 민여진이 떠보듯 물었다.“재윤이야?”하지만 민여진 앞에 서 있던 박진성의 얼굴이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민여진이 오늘 경찰서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또 이렇게 마주칠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한 적 없었다.그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쳤다.‘내가 임재윤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그냥 지나가?’바로 그때, 복도의 한쪽 끝에 있던 문채연이 갑자기 발버둥 치며 사무실에서 뛰쳐나왔다. 그녀는 박진성을 향해 절망에 찬 절규를 내뱉었다.“진성 씨, 진성 씨.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나 다시는 그런 짓 안 할게.”문채연은 박진성과 민여진 앞으로 다가가 통곡했다. 비록 경찰들이 곧바로 문채연을 제압했지만 그녀가 내뱉은 모든 말들은 이미 민여진의 귀에 가시처럼 박혀버린 후였다.민여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진성 씨? 박진성?’‘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박진성이라고?’민여진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흐릿하던 안개가 검은색으로 응집되어 온몸을 감싸자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왔다.박진성과 마주치다니!놀란 표정을 짓던 박진성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민여진?”드디어 마음을 진정한 박진성이 복잡한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들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칼날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역시 살아있었네.”그 익숙한 목소리는 마치 가늘고 단단한 실처럼 민여진의 목을 칭칭 감았다. 공포에 질려 두 눈을 커다랗게 뜬 그녀는 몰아치는 질식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4화 얌전히 감옥에나 가

    “내가 왜 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넌 민여진에게 똑같이 했었잖아.”그 말에 문채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잔뜩 당황한 채 서럽게 울며 가여운 모습으로 동정을 사려 입을 열었다.“어떻게 여진 씨와 우리의 8년을 비교할 수 있어? 우린 8년을 만났어. 민여진이 뭔데!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함께했었는지 잊은 거야? 난 그저 작은 실수를 한 것뿐이잖아. 민여진도 무사한데 왜 진성 씨는 고작 이런 실수도 날 용서해 주지 않는 거야?”“고작? 실수?”박진성이 믿기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문채연은 또다시 박진성에게 기대어 울먹였다.“진성 씨,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진성 씨를 너무 사랑해서 질투가 났어. 그래서 잠깐 미쳐서 여진 씨에게 그런 짓을 한 거야. 내가 여진 씨에게 사과할게. 보상도 할게. 진성 씨, 제발. 날 포기하지 말아 줘.”박진성이 차가운 눈으로 문채연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막 박진성의 손에 닿으려던 그 순간, 그가 재빨리 손을 피했다.문채연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모든 인내심을 소진한 박진성이 이곳에 온 목적을 문채연에게 전했다.“민여진이 감옥에서 집단 구타를 당한 것도 네가 지시한 거야?”“뭐?”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문채연의 눈가에 고였다.이미 2년 전의 일이었다. 박진성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진작 잊고 살았을 일이었다.그 일까지 캐낸 것을 보니 민여진 그 여자에게 단단히 홀린 모양이었다. 그는 지난 일을 전부 들출 생각인 것 같았다.“여진 씨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한 게 나와 무슨 상관인데?”손바닥을 꼭 맞잡은 문채연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때 난 여진 씨와 친분도 없던 사이였어. 그런 내가 여진 씨에게 얼마나 큰 원한이 있어서 아이까지 유산시키려고 했겠어. 그럴 리가...”박진성의 두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난 민여진이 감옥에 유산했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문채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말실수했다는 생각에 그녀가 곧바로 변명했다.“내가 추측한 거야. 임신한

  • 첫사랑을 잘못 보고 사랑한 죄   제543화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질투가 났어. 하지만 진성 씨... 내가 여진 씨에게 질투를 느끼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진성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사람은 충동적으로 멍청한 짓을 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난 이미 반성하고 있어.”고개를 든 박진성의 짙은 눈동자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눈앞에서 서러운 눈물을 떨구는 여자의 얼굴이 더는 불구덩이 속의 그 얼굴과 겹쳐 보이지 않았다.이 여자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걸까?“질투 때문에 민여진을 납치하고, 질투 때문에 네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거야?”문채연이 잔뜩 당황한 채 말했다.“난 사람 죽인 적 없어. 민여진 씨 멀쩡하게 살아있잖아. 난 민여진 죽인 적 없다고.”“문채연. 정말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해?”박진성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강렬한 분노를 꾹 참으며 핏기가 서린 두 눈으로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네 돈을 받은 인간들이 정말 널 위해 평생 그 비밀을 간직해 줄 거라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 누구 때문에 널 도와준 건지 잊은 거야?”“문채연, 너한테 너무 실망이야. 넌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야.”“어쩌면 난 처음부터 진짜 네 모습을 몰랐던 걸지도 모르겠어. 너의 위선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속였어. 민여진이 너에게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여진이는 너 때문에 죄를 뒤집어쓴 채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심지어 가짜 죽음으로 자신을 숨겨야 했어.”“하지만 그 모든 짓의 원흉인 넌 여진이에게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 심지어 여진이를 죽이려고까지 했지. 대체... 대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지독할 수 있는 거야.”문채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박진성이 성까지 붙여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순간 문채연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알고 있는 게 분명해... 박진성이 모든 걸 알고 있어.’“민여진이 너한테 그래? 민여진이 고자질한 거지?”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문채연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