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어딘가 슬픔이 배어 있었다.그 모습에 여자는 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민여진의 손에 붕대를 다 감아주고는 말했다.“그럼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어차피 우리 애들 둘 다 외지에 나가서 일하고 있고 집에 나 혼자라 심심하기도 하거든. 너 밥도 많이 안 먹잖아, 그냥 수저 하나 더 놓는 셈이지. 나중에 연락할 사람 떠오르면 그때 가서 얘기해.”“고마워요.”민여진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여자는 손을 휘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옆방을 깨끗하게 치워 따뜻한 이불까지 놓았다.“산 아래는 밤에 추워. 일단 이 이불을 덮어. 내일 해 뜨면 장롱에 있는 이불을 다 꺼내 햇볕에 말려서 하나 더 얹어줄게.”“알겠어요.”여자가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이내 방에서 나갔다.민여진은 그 자리에 누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눈을 감기만 하면 임재윤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기 때문이다.임재윤이 어떻게 약속했고 어떻게 고백했고 얼마나 다정했는지 잊히질 않았다.민여진은 가까스레 잠이 들긴 했지만 결국 그날 밤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서 안개 너머에 있는 임재윤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서늘한 눈동자가 점점 뚜렷해졌다.임재윤은 예전처럼 3층에서 내려오며 무심하게 민여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경멸과 탐색이 섞인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민여진.”임재윤이 입을 열었다.“내가 뭐랬어,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못 벗어난다고 했잖아.”민여진은 목이 타들어가는 듯 아팠고 온 힘을 짜내어 간신히 말했다.“도대체 왜 그래? 왜 날 그냥 두지 못하는 거야?”남자는 천천히 다가왔고 싸늘한 눈빛으로 민여진을 내려다봤다.“그건 단순해. 난 널 너무 편하게 살게 둘 수 없거든. 난 네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때 제일 즐겁거든. 이제 나랑 함께 독엔에 가면 그때 내 진짜 정체를 알려줄게. 네가 겁에 질린 얼굴을 할수록 난 더 신나니까. 민여진, 넌 평생 나한테서 못 벗어나. 그게 네가 날 사랑한 대가야.”민여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순간
바위 아래로 떨어진다면 추락사하지 않더라도 물에 빠져 익사했을 것이다.민여진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민여진이 옆에 난 풀뿌리를 잡아당기니 꽤나 튼튼했다.민여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이를 악물며 양손으로 풀을 움켜쥐고 거의 90도에 가까운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손등에는 살이 찢긴 자국이 여러 군데 생겼고 몸 곳곳도 긁히고 찢어져서 상처투성이였다.손바닥은 불에 덴 듯이 따가웠지만 민여진은 한순간도 힘을 풀지 않았다.결국, 덜 가파른 오솔길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손을 놓을 수 있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민여진의 손바닥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민여진은 여전히 이를 악물고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아직도 그 남자가 쫓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조금 앞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민여진의 몸 상태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뛸 기운조차 없었다.얼마나 걸었을까.민여진의 머릿속은 점점 더 흐릿해졌다.그때 갑자기 민여진의 눈앞을 스치는 강한 빛과 함께 누군가의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누구야?”민여진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도와주세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산 아래의 집으로 옮겨졌을 때, 중년의 아주머니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아이고 얘야, 그런 위험한 산에 왜 올라간 거야? 거기서 굴러떨어졌다고? 진짜 천운으로 살아났네. 너 몸을 좀 봐, 멀쩡한 데가 한 군데도 없구나. 얼굴은 또 왜 이렇게...”민여진은 씁쓸하게 웃었다.“얼굴은 원래부터 그랬어요.”“그래?”여자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물을 받아오며 말했다.“상처가 너무 많아서 뜨거운 물 쓰면 아플 거야. 일단 찬물로 대충 닦고 있어. 내가 약 가져올게.”“네...”민여진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옷을 벗고 몸을 물에 담갔다.차가운 물이었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이 민여진을 조금 위로해 줬다.민여진은 고개를 물속에 파묻었다.그리고 갑자기 임재윤과의 기억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질식하
임재윤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며 급히 앞으로 나섰다.너무 성급한 탓에 수술 부위인 복부가 찢어질 듯 아파 임재윤은 몇 차례 기침하며 붉어진 눈으로 물었다.“어디인가요?”경찰이 모니터 화면 오른쪽 하단을 가리켰다.“이쪽으로 끌려가는 여성이 혹시 민여진 씨인가요?”화면에 잡힌 건 여성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옷차림은 정확히 일치했다.임재윤은 손가락을 꽉 움켜쥐며 즉시 대답했다.“맞아요.”“그럼 방향은 제대로 잡은 거네요. 이제 주요 교차로 CCTV만 추적하면 이 검은 차가 어디로 이동했는지 전부 알 수 있어요. 민여진 씨가 어디로 끌려갔는지도 말이죠.”경찰은 바로 전화를 돌리고 다른 화면들을 계속 불러왔다.그리고 마침내 한 지점이 특정되었다.그 지점은 바로 이주로 근처에 있는 산속의 폐가였다.경사도 가파르고 외진 그곳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엔 딱 적합한 장소였다.경찰은 일말의 지체도 없이 구출 작전에 착수했다.임재윤은 그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경찰차가 앞서고 임재윤은 진시우의 차를 타고 그 뒤를 따랐다.그 짧은 시간 동안 임재윤은 독엔행 항공 티켓을 손에서 쥐어짜다시피 하며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민여진이 무사하길 되뇌었다.본래 30분 걸릴 거리를 경찰과 임재윤은 10분 만에 도착했다.경찰은 이미 산으로 들어갔고 임재윤도 뛰어들려 했지만 진시우가 급히 그를 제지했다.“그만해, 이제야 겨우 몸 상태가 진정하기 시작했는데 또 무리하면 이번엔 정말 끝이야. 경찰들이 알아서 구조할 거니까 넌 여기 있어. 우리가 개입하면 오히려 일이 꼬일 수도 있어.”임재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았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산 위로 날아가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임재윤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십여 분이 더 지나자 멀리서 경찰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임재윤은 제지하는 진시우을 뿌리치고 억지로 차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경찰 쪽으로 걸어갔다.선두에 있던 경찰이 임재윤을 보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진시우가 해가 뜨기 전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안엔 한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다.진시우는 그 여자의 이름이 금서연이란 걸 알고 있었다.머리를 든 금서연이 진시우를 발견하자 구세주라도 본 듯 외쳤다.“진 선생님!”“상황은 이미 전해 들었어요. 임재윤은요?”“임 선생님은 이미 경찰서에 가셨어요.”“미친 거 아닌가요? 침대에 누워 회복하기도 부족한 판에 뭘 하는 건가요?”진시우는 얼굴을 찌푸리며 임재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한편으로는 차로 향했다.하지만 전화는 끝내 통하지 않았다.진시우가 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경찰서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 혼자 서 있는 임재윤이 보였다.임재윤은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고 외투는 경찰이 덮어준 걸로 보였다.모든 경찰은 임재윤에게 극도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그중 한 명은 심지어 따뜻한 물을 가져오기도 했다.“선생님, 따뜻한 물 드세요...”진시우는 급히 달려가 임재윤의 팔을 잡았다.“재윤아,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내가 뭐랬어? 이미 사람 보내서 조사하고 있다고 했잖아. 수술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오래 서 있으면 되겠어? 당장 돌아가자.”하지만 임재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병색이 짙은 임재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워낙 눈부신 외모는 이제 지쳐 보였으며 까맣고 깊은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한참 지난 후, 임재윤은 조용히 진시우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반드시 여진을 구해야 해.”임재윤은 쉰 목소리로 한마디를 남겼다.이번엔 휴대폰 자판을 두드려 소리를 낸 게 아니라 직접 입을 열어 말했다.하지만 현장에 있던 누구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때 경찰 한 명이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선생님, 안심하세요. 우리는 이미 CCTV 추적에 들어갔고 수색 인원도 대량으로 투입됐습니다. 조만간 민여진 씨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진시우는 말 없이 임재윤을 바라보았다.오래 알고 지낸 임재윤이었지만 지금은 마치 껍데기만 남은 듯했다.“내가 여진을 해친 거야.”오
“너 뭐 하는 거야?”남자의 역겨운 입술이 민여진의 목덜미에 들러붙자 민여진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민여진은 이내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건드리지 마!”“이 상황에서도 청순한 척이야? 이미 남자들한테 다 뽕 뽑혔으면서 내가 좀 만지는 게 뭐 어때서 그래? 박진성 같은 놈이 널 제대로 만족시켜 줬겠어? 오늘은 내가 진짜 남자가 어떤 맛인지 제대로 알려줄게.”남자의 손은 점점 더 대담하게 민여진의 몸을 훑었다.“와, 냄새가 장난 아니네. 이렇게 향긋하다고?”민여진은 멀미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눈이 멀지만 않았다면 분명 욕정으로 일그러진 짐승 같은 남자의 얼굴을 봤을 것이다.민여진의 옷이 계속해서 거칠게 벗겨지자 절망에 휩싸인 민여진은 차라리 죽고 싶었다.하지만 민여진은 갑자기 몸부림을 멈췄다.“만지고 싶어?”민여진의 목소리는 쉰 듯 떨리면서도 어딘가 유혹적이었다.그 말에 남자는 잠시 멈추더니 음흉하게 웃었다.“당연하지, 너같이 예쁜 여자를 그냥 두는 게 죄지.”“이대로 날 묶어 놓고 할 거야?”민여진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이런 건 서로 즐겨야지. 이렇게 묶어놓고 하면 너도 불편하잖아. 날 풀어 줘. 나 잘하는 게 많거든...”워낙 듣기 좋은 민여진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이 한마디 한마디에 묘하게 끌리는 끝 음이 실려 있어 남자를 귀신처럼 홀렸다.욕정에 눈이 먼 남자는 민여진의 말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흥분했다.“좋지, 당연히 좋지.”남자는 음흉하게 웃으며 허둥지둥 민여진의 줄을 풀었다.“와, 너 진짜 끝내준다. 어쩐지 박진성이 자기 약혼녀를 팽개치고 널 못 잊더라고.”남자는 혼자 중얼대며 민여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손목의 줄이 풀리는 순간, 남자의 입술은 민여진의 몸 근처까지 다가왔다.민여진은 입술을 꼭 깨물며 올라오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몰래 손으로 주위를 더듬었다.민여진의 손끝에 단단한 벽돌이 닿는 순간, 남자는 바지를 내리고 있었고
“못생겼으면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살아야지. 자, 다들 좀 보라고. 이 여자가 어떤 꼴인지.”문채연은 악의 가득한 목소리로 민여진을 조롱하며 그녀의 얼굴에 감긴 붕대를 거칠게 뜯어냈다.민여진은 고통에 머리를 숙였지만 문채연은 민여진의 얼굴을 움켜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왜? 쪽팔려서 얼굴을 못 보여주겠어? 거울이나 들고 네 거지 같은 꼴을 좀 봐.”하지만 다음 순간, 문채연의 목소리가 딱 멈췄다.문채연의 시선이 민여진의 얼굴에 고정된 채,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스쳤다.문채연의 예상대로 민여진의 얼굴은 흉측한 몰골이 아니었다. 물론 곳곳에 심한 상처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미 아물고 있었다.하지만 그런데도 민여진의 얼굴은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민여진의 촉촉한 눈망울까지 더해지니 오히려 문채연보다 더 예뻐 보였다.질투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치가 떨렸다.“너... 네 얼굴은 언제 이 정도로 치료한 거야?”문채연의 눈은 벌겋게 충혈됐다.예전에 표찬이 보내준 사진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고 어두운 조명에 속아 민여진의 얼굴이 여전히 흉측한 몰골인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지금 직접 확인하니 얼굴 상태가 나아지기 시작한 지 꽤 된 것 같았다.문채연의 머릿속에 요란스러운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그동안 성형으로 민여진의 얼굴을 흉내 낸 후 그 우월감을 즐겼던 문채연이었기에 여자 특유의 질투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얼굴은 여자의 목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지금 얼굴 상태가 이런 민여진이 문채연을 압도할 정도인데 민여진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완전히 회복하기라도 하면 환장할 노릇이었다.문채연의 질투심이 기름을 부은 듯 활활 타올랐다.“다들 뭐해? 얼른 칼을 가져와!”이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예전에 사람을 시켜 민여진의 얼굴을 망가뜨렸듯이 지금도 또다시 망가뜨릴 수 있었다.누군가 칼을 들고 다가오자 문채연은 바로 민여진의 얼굴을 가리키며 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