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우연일 거야. 어쩌다 한번, 미친 듯이 잘 들어간 거겠지.’
그는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다시 미트를 들었다. 이번에는 바깥쪽 낮은 코스를 요구했다. 제구가 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공을 뿌렸다.
“퍼어어엉-!!!”
또다시 미트가 터져나갈 듯한 굉음. 공은 최성민이 요구한 그 지점, 홈플레이트 바깥쪽 모서리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제구였다.
“미쳤다…”
최성민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세 번째 사인을 냈다. 이현성의 전성기를 상징했던, 악마의 무기.
‘슬라이더.’
이현성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와인드업 후, 패스트볼과 똑같은 폼으로 팔을 휘둘렀다. 최성민의 눈에는 분명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로 날아오는 패스트볼로 보였다. 하지만 홈플레이트 바로 앞에서, 공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옆으로 휘어지며 뚝 떨어졌다.
“휙-!”
“허억!”
최성민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공은 그의 미트를 스치고 뒤로 빠져버렸다. 마치 타자 앞에서 사라지는 마구와도 같았다. 전성기 시절, 수많은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했던 바로 그 ‘악마의 슬라이더’가 완벽하게 부활한 순간이었다.
최성민은 뒤로 빠진 공을 주울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이현성을 바라봤다.
“현성아…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현성은 마운드에서 내려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있는 지훈을 가리켰다.
“저 분이, 제 코치님이십니다.”
최성민의 시선이 지훈에게로 향했다. 처음 보는 젊은 남자. 평범한 옷차림에 선수 출신처럼 보이지도 않는 남자.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평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깊고 고요한 눈빛. 최성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가 바로 기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불펜에서의 충격적인 시연이 끝나고 세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최성민은 여전히 얼얼한 손바닥을 주무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대박이다, 진짜. 이건 그냥 컨디션이 좋은 수준이 아니야. 전성기 때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아직 100%는 아닙니다. 밸런스가 잡힌 몸에 맞춰 투구폼을 더 다듬으면, 구속과 제구 모두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겁니다.”
지훈의 담담한 말에 최성민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도 괴물 같은데, 여기서 더 좋아진다고?
이현성은 조용히 지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담겨 있었다.
“코치님,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지훈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전략가의 그것이었다.
“이제 세상에 증명할 시간입니다. 3일 뒤, 퓨처스리그 등판이 예정되어 있죠?”
“네. 아마 중간 계투로 1~2이닝 정도 던질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선발로 나가야 합니다.”
“네? 그건 감독님이 정하시는 거라…”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지훈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2군에서 잘 던지는 게 아닙니다. 구단이 당장 1군으로 콜업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가 필요해요.”
그는 이현성과 최성민을 번갈아 보며 계획을 설명했다.
“3일 뒤 경기에서, 5이닝을 던지십시오.”
“5이닝이요?”
“네. 투구 수는 60개 미만으로 제한합니다. 그리고 조건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안타도, 단 하나의 볼넷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퍼펙트. 5이닝 퍼펙트를 기록하는 겁니다.”
“……!”
이현성과 최성민의 얼굴이 굳어졌다. 5이닝 퍼펙트. 프로 무대에서, 그것도 몇 년간 부진했던 투수가 달성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훈이 이현성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할 수 있니?’라고 묻는 게 아니었다.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현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운드에서 느꼈던 완벽한 감각. 손끝을 떠나 미트에 꽂히던 공의 짜릿함. 그는 할 수 있었다.
아니, 하고 싶었다. 자신을 끝났다고 말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할 수 있습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좋습니다.”
지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민 씨.”
“네, 네! 코치님!”
최성민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코치님’이라는 호칭에 스스로 놀랐지만,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경기 전까지 모두에게 비밀로 해주십시오. 특히 김민철 실장에게는요. 그리고 3일 뒤 경기에서, 이현성 선수의 공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최고의 공에는 최고의 포수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최성민은 가슴을 치며 대답했다. 그는 이미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이 기적의 증인이자 공모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든 계획이 세워졌다. 3일 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경기장.
그곳은 이현성의 부활을 알리는 무대이자, 강지훈이라는 미지의 분석가가 자신의 가치를 처음으로 증명하는 심판대가 될 것이었다.
지훈은 텅 빈 마운드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3일 뒤, 저 마운드 위에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현성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비웃으며 지켜볼 김민철 실장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김민철… 그리고 GSM. 당신들이 버린 선수가 어떻게 괴물이 되어 돌아가는지, 똑똑히 지켜보게 될 거야.’
고요한 투지가 그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진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기사는 잘 봤소? 우리 김 실장이 좀 유능해서 말이야. 강지훈 씨,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다 알게 됐어. 무자격 의료 행위… 이거, 선수 생명은 물론이고 당신 인생까지 끝장낼 수 있는 범죄인 거 알지?”]최민석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묻어 나왔다.[“내일 아침까지 연락 주시오. 우리와 손을 잡든가 아니면… 이대로 매장당하든가. 선택은 당신 몫이야.”]전화가 끊겼다.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의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등골을 타고 서늘한 칼날이 스쳐 지나갔다.상대의 반격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치명적이었다.* 반격의 연단, 그리고 새로운 인연의 시작[“내일 아침까지 연락 주시오. 우리와 다시 손을 잡든가 아니면… 이대로 매장당하든가. 선택은 당신 몫이야.”]전화가 끊긴 후, 강지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호텔 방의 고요함 속에서, 방금 전까지 느꼈던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의 뜨거운 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등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분노만이 남았다. 김민철을 넘어, GSM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마침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그들의 수는 비열했지만, 치명적이었다. ‘무자격 의료 행위’. 사실관계를 떠나, 대중에게는 자극적이고 위험하게 들리는 단어였다.윤태웅의 재활은 철저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방어할 증인도, 자료도 없었다.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외통수였다.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실수는 상대가 강지훈이라는 점이었다. 스물아홉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공은 1루수와 2루수 사이를 총알처럼 갈랐다. 3루 주자가 여유롭게 홈을 밟았다. 선취점. 라이온즈가 거인 바이퍼스를 상대로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홈런이 아닌, 치밀하게 계산된 작전과 정교한 타격으로 만들어낸 득점이었다. 바이퍼스 덕아웃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한편, 경기가 한창인 시각.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리부트 랩’ 근처. 한 대의 검은색 승합차 안에서, 한 남자가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훈련 시설의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김민철이 고용한 사설 정보원이었다.그의 눈에, 익숙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유도팀의 박진만 코치였다. 그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피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팔에 깁스를 한 듯한 젊은 청년, 윤태웅이 차에서 내렸다. 정보원은 셔터를 미친 듯이 눌러댔다.“잡았다…”그는 사진들을 즉시 김민철에게 전송했다. [목표의 비밀 시설에, 야구선수가 아닌 부상당한 운동선수 출입 확인. 유도 선수로 추정됨.]사진을 받아본 김민철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강지훈… 네놈, 야구 코치 행세를 하면서 뒤로는 불법 의료 행위라도 하고 있었던 거냐?’그의 손에, 상대를 한 방에 침몰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는 즉시 자신이 매수한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새로운 음모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경기는 7회 초, 2:1로 라이온즈가 아슬아슬하게 앞선 채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글쎄요… 그 사람 자체는 워낙 깨끗해서. 하지만, 요즘 이상한 곳을 드나들더군요.”“이상한 곳?”“네. 경기도 외곽에 있는 개인 훈련 시설입니다. 이하준 선수 재활할 때 쓰던 곳인데, 요즘도 일주일에 몇 번씩은 꼭 들르는 것 같더라고요. 혼자서. 대체 거기서 뭘 하는 건지…”김민철의 눈이 번뜩였다. 비밀 시설. 혼자만의 시간. 완벽한 먹잇감이었다.“좋아. 그 시설 주소 알아내. 그리고 사람 하나 붙여. 거기서 뭘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24시간 전부 다 보고해. 사진이든 영상이든, 증거 될 만한 건 모조리.”그는 이미 강지훈이 불법 약물이라도 취급하는 것처럼 스토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의 추악한 집착이, 지훈의 가장 내밀한 공간을 향해 검은 손을 뻗치고 있었다.그날 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릴 잠실야구장이 보이는 호텔 방.지훈은 창가에 서서, 결전의 무대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박진만 코치가 보낸 문자였다.[그가 돌아간 후에도, 혼자서 3시간 넘게 호흡 훈련을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집중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 봅니다. 손끝이 따뜻하다고 아이처럼 웃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지훈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잿더미 속에서, 마침내 작은 불씨 하나가 타오르기 시작했다.그는 유도 관련 메시지 창을 닫고 다
지훈은 7차전까지 이어질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전략을 펼쳐 보였다.“1차전, 선발 이현성. 우리는 정면으로 부딪혀 첫 기선을 제압합니다. 바이퍼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괴물을 내세워, 그들의 자신감을 초반부터 꺾어놓아야 합니다.”“2차전과 3차전에서는 변칙적인 투수 운용으로 상대 타선의 리듬을 완벽하게 파괴합니다. ‘오프너’ 전략을 사용하여 상대의 데이터 분석을 무력화시키고 불펜 싸움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타격 전략은 ‘스몰볼’입니다. 번트, 히트 앤드 런, 적극적인 도루. 우리는 계속해서 주자를 쌓아 상대 배터리를 압박하고 그들의 약점인 중간 계투진을 조기에 끌어내 실책과 볼넷을 유도해야 합니다.”그의 전략은 단순히 한 경기의 승리를 넘어, 시리즈 전체의 흐름을 지배하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베테랑 코치들은 입을 다문 채 그의 브리핑을 경청했다. 한 개인의 재활을 돕던 무명의 청년은 이제 한 팀의 운명을 걸머쥔 야전사령관이 되어 있었다.“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선수들이 증명할 시간입니다.”브리핑을 마친 지훈의 말에, 류승환 감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젊은 참모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그날 오후, 지훈은 잠실을 떠나 다시 경기도의 ‘리부트 랩’으로 향했다. 한국시리즈라는 거대한 전쟁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또 하나의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박진만 코치의 부축을 받으며 훈련실에 들어선 윤태웅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었
이제 한국시리즈까지 단 한 걸음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상대는 리그 최강의 팀이자 라이온즈의 영원한 숙적인 스톰 바이퍼스였다. 이현성의 복귀전에서 완봉승을 거뒀던 상대지만, 단기전에서의 그들은 차원이 다른 팀이었다.플레이오프를 하루 앞둔 마지막 훈련 날.지훈은 류승환 감독과 함께 바이퍼스의 전력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결국, 승부는 빅토르와 최준혁을 어떻게 막느냐에 달려있소.”류 감독이 무겁게 말했다. 지훈 역시 동의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감독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제안?”“내일 1차전 선발, 이현성 선수가 아닙니다.”“뭐라고? 지금 제정신인가? 우리 팀 최고의 에이스를 1차전에 내보내지 않겠다니!”류 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플레이오프 1차전의 승패는 시리즈 전체의 향방을 가를 만큼 중요했다. 최고의 카드를 아낄 이유가 없었다.“이현성 선수의 공은 이미 바이퍼스 타자들에게 노출되었습니다. 그들은 이현성을 잡기 위해 지난 몇 주간 철저하게 분석하고 준비했을 겁니다. 물론 이현성 선수는 이번에도 잘 던지겠지만, 고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그럼 누구를 내보낼 겐가? 대안이라도 있단 말인가?”“있습니다. 바이퍼스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최악의 상성을 가진 투수.”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하지만, 몸을 고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몸의 주인이, 다시 살아갈 의지를 갖는 것.”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병실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해 온 깨끗한 노트와 펜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저는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그의 말은 박 코치가 아닌, 윤태웅을 향한 것이었다.“그때까지, 이 노트에 딱 한 가지만 적어주십시오. 당신이 다시 유도복을 입고 매트 위에 서고 싶은 이유. 단 한 가지면 충분합니다.”그는 윤태웅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올림픽 금메달’ 같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업어치기를 할 때 땀 흘리는 느낌이 좋아서’라거나, ‘스승님의 칭찬을 다시 듣고 싶어서’ 같은 아주 사소한 이유라도 괜찮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이유 하나를 찾아낸다면, 저는 제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다시 매트 위에 세워 드리겠습니다.”그것은 계약이었다. 돈이나 명예가 아닌, 한 인간의 ‘삶의 의지’를 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계약.지훈은 박 코치와 함께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박 코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오열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지훈은 그의 어깨를 묵묵히 두드려주었다. 그의 마음 역시 무겁고 착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