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연으로 내정됐다고요?”서연은 제작사 대표의 얼굴을 똑바로 봤다.대표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업계 단톡방 몇 군데에 돌고 있답니다. 윤도윤 대표가 직접 밀고 있다는 말까지요.”감독의 표정도 굳었다.“누가 시작한 겁니까?”“아직 모릅니다.”서연은 손에 쥔 대본을 내려다봤다.황당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누군가는 도윤에게 잘 보이려고 먼저 길을 깔았고, 누군가는 그 길이 이미 깔렸다고 믿었다.결국 자신이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는 제멋대로 만들어지고 있었다.서연이 말했다.“오디션 계속 보겠습니다.”제작사 대표가 되물었다.“이 상황에서도요?”“그래서 더 봐야죠.”“박서연 씨.”“내정됐다는 말이 사실이면 제가 여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서연은 대본을 펼쳤다.“아니니까 보여드리겠습니다.”감독이 한참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시작하죠.”두 번째 오디션은 전날보다 길었다.감독은 같은 장면을 세 번 시켰다.한 번은 감정을 눌러서, 한 번은 완전히 터뜨려서, 마지막은 상대 배우와 호흡을 맞춰서.서연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정확히는, 시키는 대로만 하지 않았다.상대 배우가 대사를 끊으면 기다렸고,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면 한 걸음 물러났다. 준비한 동선을 버리고 그 순간의 감정을 따라갔다.마지막 대사가 끝났을 때 감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서연은 고개를 숙였다.결과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덜 두려웠다.적어도 방 안에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의 여자도 아니었다.배우 박서연이었다.오디션장을 나오자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세 통 떠 있었다.도윤이었다.서연이 전화를 걸자 바로 연결됐다.-끝났어?“응.”-무슨 일 있어?서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내정설이 돌고 있대.”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뭐?“당신이 나 밀어준다는 소문.”이번에는 침묵이 더 길었다.도윤이 물었다.-제작사에서 뭐라고 했어?
집으로 돌아온 서연은 현관문을 닫자마자 가방부터 내려놓았다.거실에 있던 도윤이 일어났다.“어땠어?”서연은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정말 아무 연락도 안 했지?”도윤의 표정이 굳었다.“안 했어.”“비서한테도?”“아니.”“제작사 사람 아는 척도 안 했고?”“서연아.”도윤이 한 걸음 다가왔다.“네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서연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미안.”“무슨 일 있었어?”서연은 오디션장 복도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윤 대표 사람인데 떨어뜨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말.도윤의 턱이 굳었다.“회사 쪽에서 확인해볼게.”“하지 마.”“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만—”“그것도 하지 마.”서연은 단호하게 잘랐다.“당신이 움직이면 저 사람들 생각이 맞아져.”도윤은 입을 다물었다.서연은 소파에 앉았다.“당신이 아무것도 안 해도 다들 이미 당신을 보고 있어.”“그럼 내가 뭘 해야 해.”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도윤이 도와도 문제였고, 가만히 있어도 이름은 따라붙었다.서연은 한참 뒤 말했다.“아무것도 하지 마.”도윤이 씁쓸하게 웃었다.“그게 제일 어렵네.”다음 날 오전,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2차 오디션.서연은 문자 화면을 몇 번이나 확인했다.합격도 탈락도 아니었다.그래도 다음 기회는 얻었다.도윤에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을 멈췄다.이번만큼은 먼저 혼자 기뻐하고 싶었다.2차 오디션장은 전날보다 사람이 적었다.서연이 접수대에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박서연 배우님, 이쪽 대기실로 모실게요.”안내된 곳은 다른 배우들이 있는 공용 대기실이 아니었다.작은 독립 대기실.서연은 문 앞에서 멈췄다.“다른 분들도 여기서 기다리나요?”직원이 잠깐 머뭇거렸다.“아니요. 배우님은 편하게 계시라고 따로…”“저도 공용 대기실에서 기다릴게요.”“괜찮습니다.”“제가 안 괜찮아요.”결국 서연은 다른 후보들 옆에 앉았다.몇몇 시선이 따라왔다.맞은편 배우가 먼저 인사했다.“
오디션장 문을 열자 서연은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박서연.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아이 엄마도 아닌 이름 세 글자.서연은 접수대에 대본을 내밀었다.“박서연입니다.”직원이 명단을 확인하다가 잠깐 멈췄다.“아… 네. 알고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서연은 모르는 척 의자에 앉았다.대기실에는 이미 배우 여섯 명이 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는 대본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거울을 보며 표정을 고쳤다.서연도 대본을 펼쳤다.이번 배역은 아이를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였다.감정을 터뜨리는 장면보다 참는 장면이 더 많았다.서연이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다.오디션 전날에도 도윤은 딱 한 번 물었다.“제작사 대표 이름은 알아도 돼?”서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알아도 되는데 연락은 하지 마.”“안 해.”“비서한테 확인시키는 것도 안 돼.”“그것도 안 해.”“내가 떨어져도.”그때 도윤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건 내가 제일 싫겠지만, 그래도 안 해.”서연은 그 대답을 믿고 왔다.그래서 더 예민해졌다.도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그의 그림자를 먼저 보고 있었다.자기 실력으로 들어온 자리인지, 누군가가 미리 깔아둔 자리인지 남들이 의심하는 순간부터 증명할 몫은 전부 서연에게 돌아왔다.그녀는 대본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오늘만큼은 단 한 장면이라도 박서연으로 기억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렸다.도윤이었다.-도착했어?서연은 짧게 답했다.-응.곧바로 답장이 왔다.-끝나면 연락해.그게 전부였다.누구를 만나겠다는 말도, 제작사에 확인하겠다는 말도 없었다.서연은 화면을 끄고 다시 대본을 봤다.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우 둘의 대화가 들렸다.“쟤 맞지?”“누구?”“윤도윤.”목소리는 작았지만 이름만큼은 정확히 들렸다.서연의 손끝이 멈췄다.“진짜 여기 오디션을 보네.”“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서연은 고
일요일 저녁.식탁에는 다섯 사람 몫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찌개를 퍼 담았고, 서미란은 밥그릇을 하나씩 밀어줬다.도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웃었다.“왜.”서연이 물었다.“그냥.”“뭐가 그냥이야.”도윤은 식탁을 한번 둘러봤다.처음에는 이 집에 자기 칫솔 하나 두는 것도 조심스러웠다.이제는 장모가 살고, 어머니가 거의 매일 드나들고, 유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서 반찬을 골라 먹고 있었다.“사람 많아졌네.”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싫어?”“아닙니다.”서미란도 물었다.“불편하니?”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익숙해요.”유나가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아빠 이제 안 도망가.”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아빠가 언제 도망갔어.”서연이 웃었다.“시장 갈 때 회사 간다고 했잖아.”“회의 있었어.”“욕실 순서 정할 때도 회사 가고 싶다고 했고.”“그건 말만 한 거야.”서미란이 피식 웃었다.“이사회가 제일 편하다고도 했지.”도윤은 어머니를 봤다.“그걸 아직 기억하세요?”“네가 얼마나 억울한 얼굴이었는데.”서연의 어머니까지 웃었다.“사위가 밖에서는 그렇게 무섭다는데 여기서는 제일 약해.”“제가 약한 게 아니라 두 분이 강하신 겁니다.”“말은 잘해.”식탁에 웃음이 번졌다.식사가 끝나자 유나는 그림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할머니 둘 다 여기 앉아.”서미란이 소파를 가리켰다.“할머니는 여기 앉으면 안 돼?”“안 돼. 바닥.”“왜?”“가족은 같이 앉아야 돼.”서연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바닥에 앉았다.서미란도 잠깐 망설이다 그 옆에 앉았다.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이젠 자연스럽네.”서연이 그의 팔을 툭 쳤다.“당신도 앉아.”“나까지?”“가족이라며.”도윤도 결국 바닥에 앉았다.유나는 다섯 사람을 한 줄로 앉혀놓고 만족스럽게 웃었다.“됐다.”“뭐가?”“우리 집.”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유나를 봤다.“할머니도?”“응.”“외할머니도?”“응.”
“도우미 아주머니예요?”거실 공기가 한순간 멎었다.앞치마를 두른 서연의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들고 있었고, 현관에는 서미란의 지인인 최명희가 서 있었다.서미란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아니.”짧은 한마디였다.최명희가 당황해 웃었다.“아, 내가 실수했나 봐. 집안일을 하고 계셔서.”서미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 사돈이야.”도윤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멈췄다.서연도 대본을 내려놓았다.서연의 어머니는 잠시 최명희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과일 접시를 식탁에 놓았다.“앉으세요. 차 드릴게요.”“죄송해요. 제가 정말 몰라서.”“모를 수도 있죠.”대답은 담담했지만 도윤은 장모의 입가가 조금 굳은 걸 봤다.최명희는 자리에 앉고도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미란이가 요즘 여기 자주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소박하게 사시네요.”도윤의 눈썹이 움직였다.서연의 어머니는 차를 따르며 물었다.“소박하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아니, 좋은 뜻이에요. 요즘은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집도 드물잖아요.”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거슬렸다.서미란이 컵을 내려놓았다.“명희야.”“응?”“말 이상하게 하지 마.”최명희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뭘.”“지금 계속 평가하고 있잖아.”“평가라니. 그냥 다른 생활이 신기해서—”“다르다고 위아래가 생기는 건 아니야.”도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서미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최명희가 헛웃음을 냈다.“미란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멈췄다.도윤도 숨을 죽였다.“맞아.”서미란은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전에는 나도 그랬어.”최명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돈 많이 쓰고, 좋은 집 살고, 사람 쓰는 게 당연히 더 나은 생활이라고 생각했지.”서연의 어머니도 조용히 그녀를 봤다.“근데 아니더라.”“갑자기 왜.”서미란은 주방을 한번 봤다.싱크대 옆에는 직접 씻어 말려둔 그릇이 있었고, 냉장
토요일 아침.도윤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다가 주방 쪽을 흘끗 봤다.이상했다. 너무 조용했다.평소라면 벌써 한 번쯤 말이 붙었어야 했다.도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분 뭐 하세요?”식탁에 마주 앉은 두 어머니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서연의 어머니 앞에는 장보기 영수증이 놓여 있었고, 서미란 앞에는 작은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회의.”“무슨 회의요?”서미란이 수첩을 넘겼다.“집안일.”“그걸 두 분이 왜 회의해요?”“같이 있으니까 정해야지.”도윤은 불안한 얼굴로 서연을 봤다.소파에서 대본을 읽던 서연은 이미 웃고 있었다.“이거 알아?”“응.”“왜 나만 몰라.”“당신은 회사 회의하잖아.”“여기도 내 집인데.”서미란이 바로 말했다.“그래서 너도 앉아.”도윤은 괜히 물었다는 얼굴이 됐지만 결국 식탁에 앉았다.서미란이 읽었다.“첫 번째. 장보기.”서연의 어머니가 말했다.“나는 일주일에 두 번 시장.”“저는 필요한 건 배송.”“그건 안 돼요. 또 냉장고 터져요.”“먹을 만큼만 시키면 되죠.”“사돈이 먹을 만큼을 모르잖아요.”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도윤은 웃음을 참았다.“그럼 시장 한 번, 배송 한 번.”서연의 어머니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윤이 놀랐다.“벌써 합의됐어요?”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두 번째. 청소.”“거실이랑 욕실은 청소하는 분 부르고.”“주방은 내가 해요.”“네.”“유나 방은 유나도 같이.”“좋아요.”도윤은 점점 이상해졌다.“왜 이렇게 잘 맞아요?”서연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맨날 싸우면 좋겠어?”“그건 아닌데.”“그럼 조용히 있어.”도윤은 정말 조용히 했다.세 번째는 식사였다.서미란이 말했다.“아침은 꼭 먹이는 걸로.”“유나는 그렇죠.”“도윤이도.”도윤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저요?”“넌 아침 거르잖아.”서연의 어머니까지 거들었다.“그건 안 좋지.”“저는 배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됩니다.”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