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화. 되찾은 이름법원 앞, 하진은 판결문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태겸의 계약서 위조와 사생활 침해 혐의가 모두 인정된 판결이었다.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엔 두려움이 아니라 벅참 때문이었다."이겼다.""완전히."이재의 목소리가 떨렸다.하진은 판결문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활자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선명했다."원고 저작권, 완전히 제 이름으로 돌아온 거죠?""그래.""이제 그 책, 네 이름으로 다시 나온다."서우가 옆에서 하진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축하한다.""진짜로.""당신 없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아니.""너 혼자 해낸 거다.""나는 그냥 옆에 있었을 뿐이다.""옆에 있어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저는 그게 제일 큰 힘이었어요.""그럼 앞으로도 계속 옆에 있어야겠군.""그래야죠.""계약서에도 그렇게 써 있잖아요."오래전 서명했던 계약서의 조항들이 떠올랐다.출판사에서 재출간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표지 시안도 함께 도착했다.하진은 그 표지에 적힌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화면 속 활자가 눈앞에서 흐릿해질 만큼, 눈물이 차올랐다.이재가 옆에서 그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어때, 마음에 들어?""마음에 든다는 말로는 부족해.""이거 진짜 제 이름 맞죠?""그래, 네 이름 맞아.""이제 아무도 못 뺏어가."[윤하진 지음]그 다섯 글자가 이렇게 벅찰 줄은 몰랐다."강서우 씨, 저 이 순간 평생 기억할 것 같아요.""기억해.""나도 평생 기억할 거니까."이재가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이걸로 진짜 다 끝난 거지?""법적으로는.""근데 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다시 쓰는 거니까.""다음 작품은 뭐 쓸 건데?"하진은 잠시 서우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제 이야기요.""도망치던 사람이, 어떻게 선택하는 사람이 됐는지."서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그 소설, 제목은 정했나.""아직요.""근데 마지막 문장은 정해뒀어요.""뭔데.""그 남자의 형에게 안기면, 네가 잃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27화. 이사회긴 회의 테이블 위로 시선들이 날카롭게 쏟아졌다.서우가 자리에 앉자, 이사들 중 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회의실 공기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강서우 대표, 이번 스캔들로 인한 주가 하락, 책임지실 겁니까?""책임집니다.""대신 스캔들이 아니라 제 선택이라고 정정하겠습니다.""선택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면, 그건 무책임한 선택 아닙니까?"날카로운 질문이었다.서우는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목소리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단기적인 주가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하지만 제 판단력과 경영 능력은, 이번 일과 무관하게 실적으로 증명해왔습니다."오혜련이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섰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회의실 안, 그녀가 발언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제가 한 말씀 드리죠."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오혜련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발언의 무게를 짐작하고도 남았다."저는 처음에 이 관계를 반대했습니다.""집안의 명예, 후계 구도, 여러 이유로요."이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예상 밖의 발언이었다.몇몇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그런데 어제 그 회견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서는 태도,그거야말로 우리 그룹이 필요로 하는 리더십입니다."하진은 그 말을 들으며 숨을 죽였다.오혜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강서우 대표의 후계 자격에 대해 다시 논하고 싶다면,그의 경영 실적으로만 판단하시죠.""사생활 문제로 흠을 잡는 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한 이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그럼 강태겸 씨 쪽에서 제기한 소송 건은 어떻게 처리하실 계획입니까?"서우가 그 질문을 받았다."법원 판결이 곧 나옵니다.""계약서 위조와 사생활 침해, 명백한 증거가 있습니다.""그 결과가 나오면, 이 자리에서도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정적이 흘렀다.이사들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처음의 적대적이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표결하겠습니다."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26화. 어머니 앞에서이사회장 앞 복도, 오혜련이 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진도 함께였다.오혜련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아 훑었다.복도의 조명이 그녀의 표정을 유난히 또렷하게 비추고 있었다."기어이 세상에 다 알렸구나.""숨기는 것보다, 이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그 대가가 뭔지는 알고 있나.""압니다.""그래도 감당하겠습니다."오혜련의 눈빛이 하진에게로 옮겨갔다.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눈빛이었다.경멸 대신, 무언가를 가늠하는 시선이었다."윤하진 씨.""네, 말씀하세요.""어제 그 회견, 봤다.""생각보다 담담하더군.""떨렸어요.""근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두렵지 않았나.""두려웠습니다.""근데 두려움보다, 제 이름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더 컸어요."오혜련이 작게 웃었다."이 집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 오랜만에 보는군.""도망치는 게 습관이 되면, 나중엔 도망칠 곳도 없어진다는 걸 배웠거든요.""누구한테 배웠나.""제 자신한테요.""그리고 강서우 씨한테도 조금.""저 하나 겁준다고 물러설 사람 아니라는 거, 이제 아셨을 거예요.""당돌한 건 여전하네.""당돌한 게 아니라, 정직한 거라고 말씀드렸었죠."오혜련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우가 놀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어머님, 지금 웃으신 겁니까?""웃으면 안 되나.""아니요.""그냥, 낯설어서요.""낯선 게 나쁜 건 아니다.""가끔은 필요하지.""서우야.""네, 어머님.""이사회에서 너를 밀어낼 명분, 이제 없다.""이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버렸으니까."하진의 눈이 커졌다.뜻밖의 말이었다."떳떳하게 나선 사람을 두고, 흠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당당하다.""여론도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고.""저희를 도와주시는 이유, 여론 때문만은 아니시죠.""반은 여론, 반은 내 판단이다.""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며느리로 나쁘지 않다는 판단."며느리라는 단어가 이렇게 낯설고도 벅찰 줄 몰랐다."그럼 이번 이사회, 저희 편이신 겁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25화. 태겸의 발악이사회를 앞둔 저녁, 태겸이 예고 없이 나타났다.이번엔 우산도, 여유로운 웃음도 없었다.흐트러진 머리와 충혈된 눈이,그가 얼마나 몰려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었다."형, 진짜 다 망칠 셈이야?"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서우는 담담하게 마주 섰다.이전처럼 흔들리는 기색이 없었다."망친 적 없다.""오히려 처음으로 제대로 서 있는 거다.""그 여자 하나 때문에 후계 자리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게 제대로 선 거야?""자리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너는 아직도 모르는군."태겸이 웃었다.웃음이라기보다 비웃음에 가까웠다."형답지 않네.""늘 회사 먼저였잖아.""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어?""변한 게 아니라, 원래 중요한 걸 이제야 알게 된 거다.""그 여자 하나가 형을 이렇게 바꿔놨다고?""그 여자가 아니라, 하진이가."태겸의 시선이 하진에게로 옮겨갔다.증오와 미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너 때문에 우리 집안 완전히 흔들렸어.""만족해?""흔든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이에요.""저는 그냥 살아남으려고 했을 뿐이에요.""살아남으려고 형까지 이용한 거잖아.""이용이 아니라 선택이에요.""그리고 그 선택, 저는 후회 안 해요.""너 진짜 뻔뻔하다.""나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어?""당했다고 해서 평생 무너져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저는 다시 일어난 거예요.""일어난 게 아니라, 형한테 기댄 거겠지.""기댄 것과 선택한 것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무슨 말을 해요."태겸이 주먹을 꽉 쥐었다.서우가 그 사이를 조용히 가로막았다."이 이상 다가오면, 이번엔 나도 가만있지 않는다.""형이 뭘 어쩔 건데.""법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끝까지 갈 거다.""네가 그동안 저지른 짓, 이번엔 전부 드러낼 거다."태겸의 표정이 흔들렸다.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치는 얼굴이었다."협박이야?""경고다.""마지막.""형이 진짜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너도 내가 이렇게까지 조용히 참을 거라고 생각하지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24화. 세상의 반응기자회견 다음 날,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걸렸다.하진은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숨을 골랐다.밤새 잠을 설쳤지만, 이상하게 몸은 가벼웠다."댓글, 봐도 될까요.""보고 싶으면 봐.""대신 각오는 해."하진은 스크롤을 내렸다.응원의 말과 비난의 말이 뒤섞여 있었다.[용기 있다. 응원한다.][재벌가 스캔들, 결국 이렇게 포장하는구나.][전 연인의 형이라니, 막장 아닌가.][그래도 당당한 게 낫다. 숨기는 것보다는.]온몸이 떨렸지만, 예전처럼 무너지지는 않았다.낯선 사람들의 말들이 여전히 아프게 다가왔지만, 그 아픔에 잠식되지는 않았다."생각보다 나쁜 말이 많네요.""생각보다 좋은 말도 많다.""어느 쪽에 집중할지는 네가 정하는 거다."이재에게서 전화가 왔다.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하진아, 방송국에서도 인터뷰 요청 들어왔어.""심지어 해외 매체까지.""해외까지?""그렇게 커진 거야?""어제 회견 영상, 벌써 몇백만 조회수야.""특히 네가 말한 그 대사, 완전히 화제야.""어떤 대사?""저는 누구의 추문도 아닙니다, 그 말.""하진아, 너 어제 회견 완전 화제야.""출판사에서도 연락 왔어.""네 이름으로 원고 다시 내자고.""진짜?""진짜.""사람들이 네 이야기 궁금해해.""이번엔 남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네 이름으로.""이재야, 나 무섭기도 한데 진짜 기대돼.""당연히 그래야지.""이건 네가 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잖아.""고마워.""그동안 옆에서 챙겨줘서.""고맙긴.""나는 그냥 네가 무너지지 않게 옆에 있었을 뿐이야."하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오래 기다려온 순간이었다."강서우 씨, 들었어요?""들었다.""축하한다.""축하보다, 당신 덕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내 덕분이 아니라, 네가 버틴 덕분이다."하진은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젖은 채 문을 두드렸던 밤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정문익에게서도 후
Last Updated: 2026-07-09
Chapter: 23화. 이름을 걸고"저는 누군가의 나쁜 소문 속 사람이 아닙니다."하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회견장 전체에 울렸다.정적이 흘렀다.카메라 셔터 소리조차 잠시 멎은 듯했다."제 이름은 윤하진입니다.""강태겸 씨의 전 연인도, 강서우 대표님의 스캔들 상대도 아닙니다.""저는 그냥, 제 이름으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일제히 하진을 향했다.그 시선들 속에서, 하진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담담했다.처음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했을 때의 두려움은, 이미 저 멀리 사라져 있었다."저는 대필 작가였습니다.""제 이름 대신 다른 사람 이름으로 글을 썼고, 그 시간 동안 제 존재는 지워져 있었습니다.""지금은 다릅니다.""제 이름으로 다시 글을 씁니다."기자들 사이에서 짧은 박수 소리가 새어 나왔다가,이내 조심스럽게 잦아들었다.하진은 그 소리에 잠시 목이 메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제가 겪은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이름을 빼앗긴 사람도, 결국 되찾을 수 있다는 걸요."서우가 옆에서 조용히 하진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처음 만났던 밤의 젖은 얼굴과 지금 단상 위의 얼굴이,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기자들 중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윤하진 씨, 재출간되는 원고 제목은 정해졌습니까?""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정해뒀습니다.""공개해주실 수 있나요?"하진은 잠시 서우를 바라보다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오늘이 아니라, 다음에 알려드릴게요.""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할 자리니까요.""강서우 대표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정문익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서우가 마이크를 잡았다."저는 이 사람을 숨기지 않습니다.""새 남자라는 표현은 틀렸습니다.""숨기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사랑한다는 뜻입니까?"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다.회견장 전체가 그 대답을 기다리듯 조용해졌다.서우는 잠시 하진을 바라보다가,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Last Updated: 2026-07-09
Chapter: 제37화. 이름이 경매에 나온다“아델라인.”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참을 수 없었다.에드릭이 부른 내 이름은 족쇄 같았다.아버지가 부른 내 이름은 집으로 들어오는 문 같았다.나는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왜 말하지 않았어요?”처음 나온 말은 원망이었다.아버지는 힘겹게 대답했다.“보냈다.”“편지…… 계속…… 보냈다.”“한 통도 못 받았어요.”“알고 있다.”“그래서…… 늦었다.”나는 화상 자국이 있는 그 손을 잡았다.“누가 제 장례식을 황후에게 팔았어요?”“팔지 않았다.”“빼앗겼다.”그는 짧게 기침했다.“로엔베르크의 장례권 문서…… 황후가 압류했다.”“압류 명분은 무엇입니까?”카엘이 다가와 물었다.헬레나가 대신 말했다.“백작님께서 황실 장례청 거래 기록을 조사했다는 이유로,장례 질서 교란 혐의가 붙었습니다.”“그 혐의로 가문 장례권을 압류할 수 없습니다.”“정상적인 절차라면요.”“하지만 황후의 이름이 들어가면 절차는 나중에 따라옵니다.”“그래서 로엔베르크가 불탔군요.”리비아가 말했다.“절차가 오기 전에 증거를 태우려고.”아버지의 손이 내 손 안에서 약하게 움직였다.“남겼다.”“네 죽음의 값.”헬레나가 책장을 밀자 뒤에 작은 보관함이 있었다.열쇠로 열자 두꺼운 장부 하나와 얇은 계약서 묶음이 나왔다.“아가씨께 드리라는 백작님의 명이었습니다.”장부 첫 장 제목은 황실 장례권 특수 거래 목록.세실리아 모렌, 엘레노라 벨리어드,비비안 벨리어드, 마리안 벨리어드, 그리고 내 이름.각 이름 옆에 금액과 구매자, 보증인이 적혀 있었다.내 이름 아래 적힌 것을 읽었다.벨리어드 공작가 장례권 1차 입찰 실패.리비아 모렌 낙찰.로엔베르크 가족 장례권 황실 압류.황후 이사벨라 관리 전환.총액.숫자를 보았다.내 친정 영지 세 곳의 연간 수익보다 컸다.“이 돈이 어디로 갔죠?”“황실 장례청 특별 계정.”카엘이 말했다.“그리고 일부는 벨리어드 공작가 채무 상환으로 이체.”리비아가 이었다.“공작님이 부인을 죽여서 빚을 갚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36화. 숨은 붙어 계십니다마차가 갑자기 멈췄다.앞쪽에서 말이 울었다.숲 안쪽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와 마차 앞 바퀴 옆에 꽂혔다.니나가 베티 품을 파고들었고 리비아는 바로 몸을 낮췄다.화살 끝에는 짙은 녹색 천 조각, 로엔베르크 색이 묶여 있었다.헬레나가 마차에서 내려 숲 쪽을 향해 손을 들었다.“나다.”“증명해.”숲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헬레나 그레이.”“로엔베르크 내성 집사장.”“백작님께서는 붉은 장미를 싫어하시고,작은 아가씨께서는 열두 살까지 무덤가에서 잠든 적이 있다.”베티가 나를 휙 봤다.“무덤가에서 잤어요?”“길을 잃었어요.”“어릴 때니까요.”“작은 아가씨는 어디 있지?”숲속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살아 있다.”헬레나가 답했다.짧은 공백.숲이 통째로 귀를 세운 것 같았다.곧 사냥꾼 차림의 남자 셋이 나타났다.그중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와 얼굴을 오래 보더니 무릎을 꿇었다.“아가씨.”“정말 살아 계셨군요.”어릴 적 온실 뒤에서 사과를 깎아주던 사냥터 관리인, 도란이었다.더 늙었고 한쪽 눈가에 깊은 흉이 있었다.“도란.”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의 입가가 뒤틀렸다.“백작님 말씀대로였습니다.”“아버지는 어디 계세요?”“묘지에 계십니다.”심장이 세게 뛰었다.“살아 계세요?”도란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숨은 붙어 계십니다.”붙어 있다.살아 있다와는 다른 말이었다.나는 눈앞의 숲이 잠깐 멀어지는 것 같았다.리비아가 바로 내 곁에 섰다.부축하려는 것도, 막으려는 것도 아니었다.그냥 옆에 섰다.그게 도움이 됐다.“화재 때 연기를 많이 마셨습니다.”“몸도 다치셨고…… 오래 버티긴 어렵습니다.”“그럼 왜 저한테 오지 않았어요?”물음이 거칠게 나갔다.“백작님께서 명하셨습니다.”“아가씨가 살아 돌아오기 전까지 묘지를 지키라고.”“아가씨가 죽었어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바보 같고 아버지다운 명령이었다.울면 안 된다.여기는 숲길이고, 뒤에는 벨리어드가 있고, 앞에는 황후가 산 장례식이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35화. 두 갈래로 팔린 장례식황후가 내 장례식을 샀다.그 말을 듣고도 나는 바로 묻지 못했다.어느 장례식이요, 왜요, 얼마에요, 누가 허락했죠.묻고 싶은 말이 입 안에서 서로 엉켰다.“황후 폐하께서요?”리비아가 먼저 물었다.목소리는 얌전했다.그럴수록 위험했다.리비아는 정말 화가 나면 웃지도, 비꼬지도 않는다.헬레나는 재가 묻은 검은 봉투를 내밀었다.“백작님께서 아가씨께 남기신 두 번째 편지입니다.”봉투 가장자리의 검은 가루가 손가락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아버지의 편지는 짧았다.아델라인.첫 번째 편지를 받지 못했다면, 이미 늦었을 것이다.네 장례식은 두 갈래로 팔렸다.벨리어드에서 치를 공작부인의 장례식.그리고 로엔베르크에서 치를 딸의 장례식.하나는 네 남편이 원했고, 하나는 황후가 가져갔다.둘 중 하나라도 시작되면, 네 이름은 둘로 찢긴다.벨리어드의 죽은 아내.로엔베르크의 사라진 딸.그 사이에서 네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뒷장의 글씨는 더 거칠어져 있었다.황후는 로엔베르크의 가족 장례권을 샀다.공식 명분은 몰락 위험 귀족가의 명예 보존.실제 목적은 네 친정 상속권을 봉인하는 것이다.벨리어드가 남편으로서 네 죽음을 소유하고,황후가 친정의 이름으로 네 죽음을 보증하면,너는 법적으로 완전히 죽는다.살아 돌아와도, 네가 설 자리는 없다.죽음에도 안쪽과 바깥쪽이 있었다.남편이 사는 죽음.친정이 보증하는 죽음.그 둘을 위에서 꿰매는 황후의 손.리비아가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이건…….”카엘이 손을 내밀자 리비아는 나를 먼저 보았다.허락을 묻는 눈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베티가 참다 못해 물었다.“뭔데요?”“우리도 좀 알면 안 돼요?”“황후가 로엔베르크 가문의 가족 장례권을 매입했습니다.”카엘이 말했다.“그게 무슨 말인데요?”“죽은 사람 장례식 하나로 부족해서 하나 더 샀다는 거예요?”“돈을 쓴 게 아니야.”리비아가 말했다.“길을 막은 거지.”“공작님이 부인의 장례식을 치르면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34화. 장례식 천 속의 다섯 사람니나가 베티 치마를 붙잡았다.“혼자 있기 싫어.”베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는 니나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가는 길에 무서운 일이 있을 거예요.”“그래도 언니 손 놓지 마요.”“당신이 본 게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어요.”니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마고 부인이 말했다.“세탁물 마차가 곧 나갑니다.”“오늘은 장례식 때문에 예복과 천을 급히 보낸다는 명목으로요.”“제가 지시했습니다.”“하녀장님 진짜 사고 크게 치시네요.”베티가 말했다.“너만 하겠니.”“마고 부인은요?”내가 물었다.“저는 남습니다.”“제가 사라지면 공작님이 바로 눈치챕니다.”“공작님이 알면 죽습니다.”“저는 이 집에서 죽은 사람의 방을 너무 많이 치웠습니다.”“이제 제 방도 누군가 치운다면, 그 정도는 감수하겠습니다.”그녀는 내 흐트러진 앞치마를 바로 잡아주며 말했다.“고개를 너무 숙이지 마십시오.”“오늘은 하녀처럼 보여야 하지만, 너무 작아 보이면 사람들이 밟습니다.”세탁마당에서 검은 천더미 사이로 몸을 넣자 숨이 막혔다.장례식 천에는 향과 먼지, 사람들의 손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니나가 옆에서 웅크렸고, 베티가 붙었다.“숨 크게 쉬지 마.”“먼지 먹으면 기침 나와.”리비아는 반대편에 앉아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다 포기했다.“내 인생에서 이렇게 품위 없는 마차는 처음이네요.”카엘이 마지막으로 올라탔다.감찰관, 애첩, 하녀 둘, 죽은 공작부인.마차가 움직이려는 순간,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멈춰.”오델이었다.마고 부인이 그를 막아섰다.“장례식 천입니다.”“내일 아침까지 세탁소에 도착해야 합니다.”“열어.”“공작님 지시입니까?”오델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비키십시오.”“못 비킵니다.”오델이 손을 들어 경비 둘을 불렀다.니나가 천 아래에서 떨기 시작했다.나는 아이의 손가락을 두 번 눌렀다.기다려.경비가 마차 뒤쪽 천을 잡았다.끝이었다.그때 세탁마당 반대편에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33화. 사망 예정일로엔베르크 저택에 불이 났다는데, 아버지의 편지는 타지 않았다.종이는 멀쩡했다.가장자리도 깨끗했고, 접힌 자국도 반듯했다.불길은 저택을 삼켰고, 편지는 에드릭의 손에 들어갔다.순서가 맞지 않았다.나는 편지를 다시 펼쳤다.아델라인.이 편지를 받으면 즉시 벨리어드 저택에서 나와라.네 남편이 네 장례식을 예약했다.로엔베르크의 이름으로는 더는 널 보호할 수 없다.장례청 기록이 이미 움직였다.네 사망 예정일이 정해졌다.사망 예정일.죽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내가 그날 식탁에 앉기 전부터, 수프를 들기도 전부터, 에드릭은 내가 언제 죽을지 알고 있었다.아버지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나는 마지막까지 내 집에서 가장 늦게 알았다.“마고 부인.”내 목소리가 낯설었다.“로엔베르크 저택에 불이 났다는 말, 정확히 언제입니까?”멀리서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벨리어드 저택은 이제 조용하지 않았다.에드릭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공작부인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된 날 다음 날 새벽입니다.”“공식 보고는 주방 화재였습니다.”“사망자는요?”“하인 셋.”“마구간 아이 하나.”“그리고…… 로엔베르크 백작님은 실종으로 처리되었습니다.”실종.죽음보다 더 나쁜 단어일 때가 있다.죽었다면 무덤이라도 찾는다.실종은 사람을 매일 조금씩 기다리게 만든다.오늘은 돌아오지 않았고, 내일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천천히 사람을 갉아먹는다.나는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결혼식 날을 떠올렸다.예식이 끝난 뒤 그는 내 손을 잡고 말했다.힘들면 돌아와라.나는 웃으며 대답했다.그럴 일이 뭐가 있겠어요.참 어리석은 대답이었다.“그 편지는 왜 지금까지 갖고 계셨죠?”카엘이 물었다.“제가 가진 게 아닙니다.”“공작님께서 보관하던 걸 빼냈습니다.”베티가 입을 벌렸다.“방금 공작님 물건을 훔쳤다고요?”“훔친 게 아니라 잘못 놓인 것을 제자리에 가져온 겁니다.”니나는 아직 베티 품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못했다.아이의 발은 맨발이었다.아까
Last Updated: 2026-07-10
Chapter: 제32화. 로엔베르크에 불이 났다“밖에 나가서 말해요.”나는 에드릭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내 아내라고.”그의 시선이 나를 붙잡았다.“못 하겠죠. 내가 살아 있으면,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한 남자가 되니까.”그의 손이 움직였다.카엘이 한 걸음 나섰다.하지만 에드릭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사람들 앞에서 손을 올리는 일은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였다.대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죽인다.식탁에서, 서류로, 장례식으로.“네가 살아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그가 말했다.“너는 법적으로 죽었다. 네 재산은 정리 중이고, 장례식은 거래되었으며, 유언장은 곧 다시 낭독될 거야.”“제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한 불가능해요.”리비아가 바로 말했다.“소유권은 정지될 수 있어. 장례식 소유자가 절차를 방해하거나 시신 은닉에 가담하면.”그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네 시녀가 범인이 되면 말이지.”여전히 그 수였다.나를 엘린으로 처벌하고, 리비아의 장례권을 빼앗고, 나를 다시 아델라인으로 회수한다.“그럼 이렇게 하죠.”리비아가 장례식 소유권 계약서를 꺼내 한쪽을 펼쳤다.“저는 아델라인 공작부인의 장례식 소유자입니다.”“공작부인의 유품 보호권을 행사하겠어요.”“상복, 관, 유언장, 유품, 사망 후 명예 보존권.”“전부 제 권한이죠.”“시신이 사라진 건 공작가 책임이에요.”“확인이 끝날 때까지 관련된 모든 물품은 보존되어야 합니다.”“여기 있는 하녀 엘린도 마찬가지예요.”“정식 장례 재판에서 하세요.”“조문객과 감찰관, 서기관 앞에서요.”“그때 제가 말할게요.”“공작님이 자기 아내를 아델라인이라고 부르셨다고.”“저도 증언하겠습니다.”카엘이 말했다.“저도요.”베티가 니나를 끌어안은 채 말했다.“저도…… 봤어요.”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날 밤 준비실에서 봤어요.”오델이 이를 갈듯 “니나” 하고 부르자 베티가 소리쳤다.“네가 이름 부르지 마! 내 동생 이름을 네가 부르지 마.”예법도 품위도 없는 말이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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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20화. 아버지의 빚권태겸의 반격은 신문 1면으로 왔다.[단독: 온사율 부친, 태강에 300억 채무… ’복수극’의 실체는 빚 청산용 기획결혼?]기사에는 차용증 사본까지 실렸다.아버지의 서명.태강 계열 금융사의 직인.300억.죽은 아버지가 진 적 없는 빚이, 죽은 뒤에 만들어져 있었다.아침 식탁에서 한미라가 그 신문을 내 앞으로 밀었다.“몰랐구나, 얘.네 아버지가 우리 집에 그런 빚을 지고 있었는지.”“저도 놀랐어요, 어머님.”“이제라도 알았으니...”“돌아가신 분이 새 서류에 서명을 하시다니.이 집 사람들은 죽음도 결재 사항인가 봐요.”한미라의 손이 커피잔 손잡이 위에서 멎었다.나는 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돌려드렸다.“기사 스크랩은 제가 할게요. 증거물은 원래 원본이 좋거든요.”“내 복수를 돈 문제로 바꾸겠다는 거네요.”사무실로 온 도겸에게 신문을 건네며 말했다.“동기를 오염시키는 겁니다.살인 은폐를 추적하는 여자를, 빚 때문에 시댁을 물어뜯는 여자로.”도겸이 차용증 사본을 스캔하며 말했다.그리고 30분 뒤, 그가 모니터에서 고개를 들었다.“서명, 위조입니다.”“확실해요?”“부친 생전 서류 열두 건과 대조했습니다. 획순이 다릅니다.아버님은 ‘온’ 자의 이응을 시계 방향으로 그리셨는데, 차용증은 반시계입니다.그리고 이 차용증 날짜… 사율 씨, 이거 부친 사망 두 달 뒤 서식입니다.금융사 로고가 그해 하반기에 바뀐 신형이에요.”죽은 사람에게 빚을 지우는 집안.죽은 하겸의 이름으로 동의서를 만들던 그 손이었다.이 집의 위조는 필체만 훔치는 게 아니라, 죽은 사람의 시간까지 훔쳤다.그리고 시간은, 훔친 쪽이 반드시 들키는 물건이었다.“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도겸이 다른 파일을 열었다.“차용증을 위조하려면 부친 서명 원본이 필요합니다.그래서 태강이 어떤 서류에서 서명을 따왔는지 역추적했는데… 하겸 씨 관련입니다.”“하겸이요?”“하겸 씨가 사망 전, 태강재단병원 임상시험 피해자 유족들을 인터뷰하고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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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9화. 사라진 유족 명단“명단이 비어 있습니다.”도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하겸 사고 당시,같은 시기 태강재단병원 관련 사망 사건 유족들에게 지급된 위로금 내역.그 수령인 명단을 추적하던 중이었다.서류는 존재했다.지급 총액도 존재했다.12년간 400억.병원 하나가 조용히 지운 목숨들의 가격표였다.그런데 수령인 칸만, 전부 검게 지워져 있었다.“한 명만 빼고요.”“누구죠.”“지워지다 만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문, 자로 시작합니다.그리고 당시 주소지가… 사율 씨, 이거 문예라 씨 옛날 주소랑 같은 동네입니다.”문예라의 과거와, 태강의 위로금 명단.나는 예라의 신상 조사 파일을 다시 꺼냈다.내가 그녀를 고를 때 봤던 서류.부모 없음.보육원 출신.22살까지 반지하.그 반지하의 주소가, 위로금 명단의 주소와 같은 골목이었다.우연이 아니었다.나는 미모와 절박함으로 그녀를 골랐다고 믿었다.석 달을 들여 골랐다고.그런데 그 절박함의 뿌리에, 이미 태강이 있었다면.내 선택지에 그녀가 올라온 경로부터, 누군가의 손을 탔다면.내가 판을 깐 게 아니라, 깔린 판 위에서 패를 고른 것이라면.예라를 옥상 정원으로 불렀다.“문예라 씨.8년 전, 그 골목에서 누가 죽었어요?”예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연기가 벗겨졌다.“…그걸 사모님이 어떻게.”“태강 위로금 명단에 당신 성씨가 있어요.지워지다 만 채로.”“조사하지 마세요.”“대답해요.”“조사하지 말라고요!”예라가 소리쳤다.임신한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다른 손은 주먹을 쥐고.도발도, 교태도 아닌 진실의 목소리였다.“…언니였어요.”“……”“우리 언니. 그 병원에서 죽었어요. 수술 잘못돼서.병원은 돈 주고 입 막았고, 나는 그 돈으로 언니 장례 치르고 반지하에서 나왔어요.됐어요? 이제 만족하세요?”“수술명은요.”“…그게 왜요.”“기억 안 나요?”“난소… 뭐라고 했어요. 어려운 말이라 기억 안 나요.스물몇 살짜리가 그런 수술로 죽는 게 말이 되냐고 물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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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8화. 조작된 친자 확인서예라는 서류를 부채처럼 흔들며 들어왔다.“사모님도 보셔야죠. 가족이 되실 뻔한 사이니까.”유전자 검사 결과지.검사 대상: 태아.대조군: 권이록.결과: 친자 관계 성립 확률 99.98%.“보이세요? 구십구 점 구팔. 이 아이, 권이록 사장님 아이예요.이제 저를 상간녀라고 부르실 수 있는 사람, 이 집엔 없을걸요.”한미라가 그 옆에서 흡족하게 웃었다.“예라야, 몸 무거운데 서 있지 말고 앉으렴. 이제 네가 이 집 후계자의 엄마다.”후계자의 엄마.시어머니는 어제까지 상간녀라 부르던 여자에게 그 왕관을 씌웠다.아이 못 낳는 며느리 앞에서.왕관의 무게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여자에게.“사율아, 너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지. 핏줄 앞에서는 서류가 다 소용없는 법이란다.”“어머님 말씀이 맞아요.”“…뭐?”“핏줄 앞에서는 서류가 소용없죠. 그런데 이 집은 반대잖아요. 서류로 핏줄을 만드니까.”한미라의 웃음이 반쯤 걷혔다.알아듣지 못한 얼굴과, 알아듣기 직전의 얼굴 사이에서.나는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숫자보다 먼저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발급 기관: 태강재단병원 유전체분석센터.용지 하단의 병원 마크.잉크가 살짝 번진 각도까지,5년 전 내 불임 진단서와 같은 프린터에서 나온 인쇄물이었다.오 년 동안 같은 프린터로 사람의 운명을 출력해온 집안이었다.“왜요, 사모님. 숫자가 안 믿기세요?”“아니요. 아주 믿음직한 서류네요.”“…네?”“태강재단병원이 만든 서류잖아요.그 병원이 서류를 얼마나 정성 들여 만드는지, 제가 제일 잘 알거든요.”예라의 눈썹이 흔들렸다.알아듣지 못했지만, 좋은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얼굴.“그리고 문예라 씨. 검사일이 지난주 화요일이네요.”“그게 왜요.”“지난주 화요일에 이록 씨는 해외에 있었어요.대조군 검체는 언제, 어떻게 채취했을까요?”“그, 그건 병원이 알아서...”“네. 병원이 알아서 했겠죠. 늘 그랬듯이.”예라의 손이 결과지를 도로 채갔다.승리의 증서를 쥔 손치고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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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7화. 하겸의 마지막 영상복원 파일이 도착한 것은 새벽 세 시였다.하겸의 노트북 하드에서 건져 올린, 삭제된 동영상.촬영 일자는 죽기 사흘 전.파일명은 숫자 여덟 자리.동생의 생일도, 내 생일도 아닌 날짜였다.나는 서재 문을 잠그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에 동생이 있었다.살아 있는 하겸이.헝클어진 머리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언니.—이 영상을 언니가 보게 된다면, 나는 아마 실패한 거야.심장이 조여들었다.—병원에서 이상한 걸 봤어.—언니 이름으로 보관된 파일이 있어.—언니는 모르는 파일이야.—배아 보관실이라는 데가 있는데, 거기 코드가… S-01이…하겸이 뒤를 돌아봤다.문 쪽에서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다시 카메라를 향한 동생의 눈에 물기가 차 있었다.—언니, 미안해.—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는 게…—언니가 다칠까 봐 무서웠어.—언니 몸에서 없어진 게 뭔지 알면, 언니가 무너질까 봐.—꼭 찾아.—그건 언니 거야.영상이 끊겼다.나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손등을 물었다.소용없었다.일 년을 눌러둔 것이 한꺼번에 터졌다.어깨가 흔들렸고, 시야가 무너졌고, 동생의 이름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장례식에서도 이렇게 울지 못했다.그때는 몰랐으니까.단독 사고라는 네 글자를 믿었으니까.동생이 마지막 사흘을 어떤 무게로 살았는지,그 무게를 혼자 들고 언니한테는 들키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오늘에야 알았으니까.문 잠그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이록이 문가에 서 있었다.그는 다가왔다.손을 뻗었다.그 손이 내 어깨에 닿기 직전—멈췄다.“…만지지 마요.”“안 만져.”“보지도 마요.”“그건 못 해.”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대신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내가 우는 동안, 벽처럼.문처럼.아무 말도 없이.십 분이 지났다.어쩌면 삼십 분.그는 시계를 보지 않았고, 나는 시간을 세지 않았다.이 집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감시받지 않는 울음이었다.지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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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제16화. 역고소와 여론전고소장은 세 장이 한꺼번에 날아왔다.불법 촬영.명예훼손.사생활 침해.태강 법무팀의 반격이었다.세 장 모두 같은 날짜, 같은 법무법인, 같은 폰트.정성이 아니라 물량으로 찍어낸 서류였다.그리고 그 뒤에 예라가 섰다.기자회견장.검은 원피스에 부른 배를 감싼 예라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그 손수건이 하겸의 것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고, 나는 화면을 계속 봤다.“저도… 피해자예요.”“사모님이 저를 고용해서, 사장님께 접근하라고 시켰어요.”“저는 돈이 필요했고, 그게 이렇게 큰일이 될 줄 몰랐어요.”“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상간녀라고, 제 아이까지 모욕하고…”피해자 코스프레.각본은 태강 홍보실, 연기는 문예라.여론이 다시 출렁였다.어제까지 나를 응원하던 댓글창에 ’알고 보니 조종한 건 아내’라는 문장이 상단으로 올라왔다.절반은 사실이었다.그래서 더 위험한 공격이었다.거짓말은 반박하면 되지만, 반쪽짜리 진실은 반박하는 순간 나머지 반쪽을 캐물어온다.“반박 회견 잡을까요?”도겸이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물러날 거예요.”“…물러난다고요?”“여론전은 태강의 홈그라운드예요.”“저쪽은 기자를 사고, 우리는 진실을 파는데, 시장에서는 늘 산 물건이 먼저 팔리죠.”“그 판에서는 안 싸워요.”“그럼 어디서 싸웁니까.”“법정 밖에서요.”“도겸 씨, 명단 하나 만들어줘요.”“최근 십 년간 태강재단병원 상대로 의료소송을 냈다가 취하한 사람들.”“합의금 받고 입 닫은 사람들.”“그 사람들 전부요.”“…피해자들을 모으시려는 겁니까.”“고소장이 날아올 때마다 우리는 서명을 모으는 거예요.”“저쪽이 종이로 때리면, 우리는 사람으로 받아치고.”“시간이 걸립니다.”“입을 연다는 건, 합의금을 토해낼 각오를 한다는 뜻이라.”“그래서 먼저 보여줄 거예요.”“입을 열어도 죽지 않는 사람을.”“제가 그 견본이 될 거고요.”“견본이 부서지면요.”“부서진 견본은 더 잘 팔려요.”“세상은 무사한 고발자보다 다친 고발자를
Last Updated: 2026-07-09
Chapter: 제15화. 이혼 못 하는 이유방송 다음 날, 서재로 서류 봉투가 배달됐다.이혼 합의서.발신인은 태강 법무팀.위자료 란에 적힌 숫자는 평생 쓰고도 남을 금액이었다.숫자 뒤의 영이 몇 개인지 세다가, 나는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저 숫자는 내 값이 아니라, 그들이 느낀 공포의 값이었다.권태겸식 해고 통지서였다.며느리 자리에서 잘라내면, 나는 태강 내부 자료에 접근할 법적 지위를 전부 잃는다.주주총회 방청도, 재단 이사회 기록 열람도, 본가 출입도.혼인 관계는 내 무기고의 열쇠였다.낮에는 한미라가 직접 서재로 왔다.노크 없이.그녀는 봉투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현명한 여자는 나갈 때를 알지.”“어머님은 아세요? 나갈 때를.”“…뭐라고?”“저 서류에 적힌 금액이면, 어머님 오 년 전 진단서 조작 건의 형량도 대충 계산이 되거든요.”“태강 법무팀이 제 침묵에 매긴 값이, 곧 어머님 죄의 값이라는 뜻이에요.”한미라는 문을 소리 나게 닫고 나갔다.품위가 문틈에 끼어 찢어지는 소리였다.봉투 안에는 항공권도 들어 있었다.편도.출발일은 이 주 뒤였다.목적지까지 정해주는 친절한 추방이었다.합의서 마지막 장에는 부속 조항이 붙어 있었다.향후 태강그룹 및 태강재단병원 관련 일체의 발언·출판·인터뷰 금지.위반 시 위자료 전액 반환.그들이 사는 것은 내 퇴장이 아니라 내 침묵이었다.침묵의 가격치고는 후했다.그만큼 감출 것이 크다는 뜻이었다.밤에 이록이 서재로 왔다.그는 합의서를 훑어보더니 옆에 앉았다.“금액은 후하네.”“당신 아버지가 겁먹었다는 뜻이죠.”“부속 조항까지 봤어?”“봤어요.”“저 조항이 본문이고, 위자료가 부속이죠.”“사율아.”그가 나를 불렀다.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이혼하자고 하면, 보내줄게.”“……”“방송까지 했으니 네 목적의 절반은 이뤘어.”“여기서 나가면 최소한 몸은 안전해.”“태강은 이제 너를 며느리가 아니라 적으로 대할 거야.”“이 집 안에서 적이 어떻게 되는지, 너도 봤잖아.”“그래서요. 지금 나 걱정
Last Updated: 2026-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