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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作者: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23 17:59:56

“안 걸리게만 하라니까.”

옥자의 목소리가 끊긴 뒤에도 준혁은 화면을 보지 못했다.

재판장은 다음 자료를 확인했고, 나연은 의료 자문 의견서를 꺼냈다.

“원고 측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준혁의 변호사가 고개를 들었다.

“이 사건에서 HIV 감염 사실 자체를 피고의 잘못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준혁이 처음으로 나연을 봤다.

나연은 말을 이어갔다.

“감염은 질환입니다. 도덕성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고, 감염 사실 하나만으로 배우자를 비난하는 것도 이 사건의 취지가 아닙니다.”

의료 자문 내용이 화면에 떴다.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고 의료진의 관리에 따를 경우 건강 상태를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준혁이 바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저 치료받고 있습니다.”

준혁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병원도 계속 가고 있고 약도 먹고 있어요. 저 죽을병 걸린 사람 아닙니다. 서윤도 음성 나왔고요.”

나연이 물었다.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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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제 불능   130화

    준혁은 한강변을 오래 걸었다.어디로 갈 생각은 없었다.주머니에는 현금 몇 장이 있었고, 손에는 병원에서 받은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약은 아직 남아 있었다.진료실에서 들었던 말도 기억났다.꾸준히 치료받으면 건강을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그러니 병이 준혁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아니었다.준혁은 벤치에 앉았다.구겨진 서류를 꺼냈다.이혼 판결문이었다.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몇 번을 읽어도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서윤은 이제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다.옆 주머니에서는 반으로 찢어진 종이가 나왔다.문세라의 청첩장이었다.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세라는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해외로 나갔으며, 마지막 연락까지 법무팀을 통해 막았다.준혁은 청첩장을 다시 접으려 했다.이미 찢어진 종이는 맞물리지 않았다.휴대전화를 켰다.아버지.연결되지 않았다.어머니.받지 않았다.미선.차단.세라.차단.채린.유진.라희.지아.어느 이름을 눌러도 결과는 비슷했다.한때는 연락처가 너무 많아 여자 이름을 헷갈린다고 웃었다.열 명이 넘어서 다섯 명으로 줄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그때는 누군가가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돈을 주면 남았고.선물을 사주면 다시 연락했고.화를 내다가도 호텔을 잡으면 왔다.서윤은 더 쉬웠다.십 년을 만났으니까.결혼했으니까.아이까지 있었으니까.무슨 짓을 해도 결국 집에 있을 사람이라고 믿었다.준혁은 연락처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한서윤.번호는 이미 여러 차례 차단돼 있었다.그래도 전화를 눌렀다.연결되지 않았다.다른 번호를 만들 수도 있었다.또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마저도 이제 법적 문제가 될 수 있었다.준혁은 통화 화면을 닫았다.뉴스 알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리본베이비.해외 계약.상장 추진.대표 한서윤.사진 속 서윤은 자신이 알던 얼굴과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준혁은 기사를 끝까지 읽지 못했다.“나 없는데도 잘 사네.”

  • 통제 불능   129화

    새 본사 출입문에는 아직 보호필름이 붙어 있었다.나는 한쪽 끝을 잡아 천천히 떼었다.유리문 가운데 새 로고가 드러났다.RIBBON BABY.뒤에서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대표님, 축하드립니다.”나는 웃으며 문을 열었다.“들어가요. 오늘부터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하은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갔다.“엄마 회사 진짜 커졌다.”“뛰지 마.”“나 안 뛰었는데?”이미 복도 끝까지 가놓고 하는 말이었다.직원들이 웃었다.나는 품에 안고 있던 둘째를 조금 고쳐 안았다.아이는 사람들이 많아도 잘 잤다.하은은 다시 돌아와 동생 얼굴을 들여다봤다.“얘도 여기 직원이야?”“아니.”“그럼 나도 아니지?”“너도 아니야.”“그럼 왜 데려왔어?”나는 사무실 안을 둘러봤다.처음 리본베이비를 시작했을 때는 직원도 없었다.하은을 재우고 식탁에 앉아 주문서를 뽑았고, 포장 박스가 거실을 차지했다.준혁은 그걸 보면서 언제까지 애 엄마들 물건 팔 거냐고 했다.이제 그 물건을 파는 회사에 수십 명이 출근하고 있었다.“엄마가 어디서 일하는지 보여주려고.”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나 알아. 엄마 사장님이잖아.”옆에 있던 직원이 말했다.“대표님보다 따님이 더 잘 아시네요.”“그러게요.”새 사무실을 한 바퀴 도는 동안 직원들은 하은에게 자기 자리와 맡은 일을 설명해줬다.하은은 디자인팀 모니터 앞에서 가장 오래 멈췄다.“이거 아기들 쓰는 거예요?”“응. 새로 나올 제품이야.”“엄마도 봤어?”“대표님이 제일 먼저 보시지.”하은이 나를 돌아봤다.“엄마 진짜 사장 맞네.”“이제 믿어?”“조금.”그때 비서가 다가왔다.“대표님.”그녀의 시선이 로비 쪽으로 갔다.대형 화환 하나가 들어오고 있었다.나는 리본에 적힌 이름부터 봤다.강준혁 모친 박옥자.걸음을 멈췄다.비서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리본 아래 문구는 더 길었다.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하은 할머니가.나는 한참 보지 않았다.“돌려보내세요.”“보낸 쪽에서 다시

  • 통제 불능   128화

    준혁은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다가 손을 멈췄다.서윤에게 연락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전화번호를 바꿔가며 연락해도 차단됐고, 변호사를 통해 사적인 연락을 중단하라는 통보까지 받은 뒤였다.하은에게도 마음대로 연락할 수 없었다.부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미선은 돈 얘기로 다시 전화하면 받지 않겠다고 했다.남은 이름은 하나였다.문세라.준혁은 휴대전화에서 세라의 대화창을 열었다.마지막 대화가 몇 달 전이었다.다시는 연락하지 마.그 아래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여러 개 남아 있었다.잠깐만 만나자.설명할 게 있어.전화 한 번만 받아.전부 답이 없었다.준혁은 해외에 있는 세라의 현재 번호를 알고 있었다.예전에 비서에게 알아보라고 했고, 연락처를 삭제하지 않은 채 따로 저장해뒀다.새 메시지를 썼다.세라야. 나야.한참 기다렸다.전송 표시가 바뀌지 않았다.다시 보냈다.나 진짜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준혁은 전화 버튼을 눌렀다.연결되지 않았다.다른 메신저를 열었다.검색창에 세라 이름을 넣자 프로필은 떴지만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씨발.”휴대전화를 내려놨다가 다시 집었다.메일 주소가 떠올랐다.누아벨 대표 메일.개인 메일.해외 법인에서 사용한다던 주소까지.준혁은 세 곳에 같은 내용을 보냈다.나 지금 상황이 안 좋아.큰돈 바라는 거 아니야.잠깐만 도와줘.나중에 반드시 갚을게.보내고 나니 자존심이 상했다.몇 년 전만 해도 세라에게 돈을 썼다.호텔비를 내고, 선물을 사고, 회사 인맥을 연결해줬다.세라가 갖고 싶다고 한 게 있으면 가격부터 묻지 않았다.이제는 자신이 돈을 부탁하고 있었다.준혁은 마지막 문장을 하나 더 붙였다.내가 너한테 해준 것도 있잖아.전송.십 분.삼십 분.한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그는 세라의 SNS를 열었다.해외 호텔 테라스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사진 한쪽에는 남자의 손이 보였다.한태경이었다.준혁은 화면을 확대했다.손목시

  • 통제 불능   127화

    병원비를 결제하지 못한 준혁은 결국 지갑 속 현금으로 일부를 냈다.영수증을 받아 들고 나오자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은행이었다.다시 걸자 담당자가 곧바로 본인 확인부터 했다.“강준혁 고객님, 담보대출 관련해서 안내드릴 사항이 있습니다.”준혁은 병원 건물 앞에 멈췄다.“무슨 안내요.”“담보로 설정된 주식 관련 추가 조치가 예정돼 있습니다.”“내 주식 마음대로 건드리지 마세요.”“계약상 조건에 따라 진행되는 부분입니다.”“그거 팔면 갚으면 되잖아요.”상대는 숫자를 차례대로 설명했다.남은 원금.이자.담보 가치.처분 후에도 남을 수 있는 채무.준혁은 중간부터 듣지 않았다.“그래서 내 손에 얼마 남는데요.”전화기 너머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현재로서는 잔여금이 발생한다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준혁이 웃었다.“말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해.”“추가 채무가 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준혁의 웃음이 멎었다.“내가 강림 주주였어요.”“현재 담보 설정된 지분을 기준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통화를 끊자 다른 알림이 들어왔다.퇴직금 관련 계좌였다.회사 손해배상 청구와 채권 절차 때문에 가용 금액이 제한됐다는 안내였다.준혁은 바로 강림 재무팀에 전화했다.받지 않았다.인사팀.연결되지 않았다.예전에 한마디면 회의실을 비우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전화 한 통 받지 않았다.그는 태문에게 걸었다.한 번.두 번.세 번째에 통화가 연결되는가 싶더니 곧 끊겼다.잠시 후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회사 관련 연락은 법무팀을 통해라.준혁이 바로 답장했다.아버지, 나 지금 돈이 없습니다.읽음 표시가 떴다.답은 오지 않았다.대출만 좀 막아주세요.다시 읽음.없었다.준혁은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이번에는 연결되지 않았다.“씨발.”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지만 계기판을 보다가 손이 멈췄다.이 차도 곧 가져가기로 돼 있었다.리스 정산과 미납 비용 때문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준혁은 핸들을 잡은 채 한

  • 통제 불능   126화

    준혁은 예약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감염내과 대기실 의자에 앉은 뒤에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서윤의 번호.차단.하은에게 직접 연락할 수 있는 통로도 막혀 있었고, 부모에게 보낸 메시지는 읽음조차 뜨지 않았다.마지막으로 문세라의 이름을 눌렀다가 화면을 껐다.그 여자 역시 오래전에 자신을 차단했다.“강준혁 님.”간호사가 이름을 불렀다.준혁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는 검사 결과와 이전 진료기록을 확인하고 있었다.“약은 정해진 대로 복용하고 계십니까?”“네.”“빠뜨린 날은 없으세요?”준혁은 잠시 생각했다.“한 번 있습니다.”“앞으로는 임의로 거르지 마세요. 꾸준히 치료받는 게 중요합니다.”준혁은 의자 깊숙이 앉았다.“계속 약 먹으면 되는 겁니까?”“현재 상태에 맞춰 치료를 이어가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러면 정상적으로 살 수 있어요?”의사는 쉽게 단정하지 않았다.“치료를 지속하면서 건강 상태를 관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진료를 미루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준혁은 한동안 책상 위만 봤다.처음 확진 결과를 받았을 때는 병원에 다시 오기 싫었다.결과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싶었고, 다른 병원에서 검사하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믿었다.예약을 취소했다.서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그때는 그게 가장 쉬웠다.자기가 입을 다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선생님.”“네.”“제가 처음부터 치료받았으면 달라졌습니까?”의사가 준혁을 봤다.“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그냥 다요.”준혁은 말을 고르다가 결국 웃었다.“와이프도 안 떠났을까요?”“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준혁의 웃음이 사라졌다.“병 때문에 이혼했습니다.”의사는 기록에서 눈을 떼었다.“이혼 과정은 제가 알 수 없습니다.”“확진 숨겼다고 그 난리를 친 겁니다.”말하고 나서도 준혁은 자기가 왜 설명하고 있는지 몰랐다.“전 무서워서 말 못 한 것뿐이에

  • 통제 불능   125화

    도현은 친자검사 결과를 들은 다음 날에도 반지를 가져오지 않았다.꽃도 없었고, 결혼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대신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이건 뭐예요?”“하은이 딸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그걸 기억했어요?”“어제 세 번 말했는데요.”현관 안쪽에서 하은이 뛰어나왔다.“도현 아저씨!”도현은 아이에게 손부터 흔들었다.“딸기 사 왔어.”“진짜?”하은의 관심은 곧바로 장바구니로 옮겨갔다.나는 그 모습을 보다 도현 손에 들린 다른 봉투를 봤다.기저귀였다.“그건 왜 샀어요?”“필요하다면서요.”“내가요?”“어제 전화할 때 그랬어요. 마지막 한 팩이라고.”나는 기억나지 않았다.출산 뒤 잠이 부족해진 탓인지 말한 것조차 자주 잊었다.도현은 아이를 보러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소파에 앉아 기다렸다.“안 보고 싶어요?”“보고 싶죠.”“그런데요?”“자고 있다면서요.”그는 냉장고에 딸기를 넣은 뒤에도 내 허락 없이 집 안을 돌아다니지 않았다.이 사람은 자기 아이가 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도 갑자기 집의 주인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낯설었다.하은이 딸기를 씻겠다고 주방으로 가자 내가 먼저 말했다.“결과 보고 무슨 생각 했어요?”도현은 잠깐 나를 봤다.“많이 했죠.”“뭐요?”“내가 뭘 해야 하나.”“그래서 답 나왔어요?”“서두르지 말자.”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그를 바라봤다.도현이 웃었다.“청혼이라도 할 줄 알았어요?”“조금은.”“싫어요?”“지금은.”“그럼 안 하면 되죠.”대답이 너무 쉬웠다.나는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아이 도현 씨 아이예요.”“알아요.”“그러면 보통은 책임진다고 결혼 얘기부터 하지 않아요?”“책임이 꼭 결혼식부터 해야 생기는 건 아니니까.”“그럼 뭘 할 건데요?”“필요한 거.”도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지 않았다. 거창한 계획을 늘어놓지도 않았다.“병원 가야 하면 같이 갈 수 있고, 아이 보러 오라고 하면 오고, 돈 필요한 부분은 책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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