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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통제 불능: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제1화. 결혼사진 속 여자

“저 여자였으면 나도 밖으로 안 돌았지.”강준혁은 거실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올려다보며 남의 아내를 평가하듯 말했다.사진 속 한서윤은 흰 드레스의 허리가 한 손에 잡힐 만큼 가늘었고,광고회사에서 밤을 새운 다음 날에도 원하는 얼굴을 골라 쓸 줄 알았다.결혼식 날 준혁은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여섯 해가 지난 지금 그가 지키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사진 속 여자였다.서윤은 한때 타인의 욕망을 문장으로 팔았다.화장품 광고에는 ‘당신이 선택받는 이유’를,유아용품 광고에는 ‘엄마가 되어도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썼고,그 문구로 상을 받던 해에 임신했다.준혁은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쉬라고 했으나출산 뒤 복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하은을 남의 손에 맡길 거냐고 몰아붙였다.그렇게 복직을 미루는 동안 서윤의 이름은 명함에서 사라지고병원 보호자란과 유치원 비상연락망에만 남았다.그녀가 만든 문장은 광고판에 남았지만,정작 그 문장을 쓴 사람은 만 원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식탁 위 국을 다시 데우던 서윤은 전자레인지 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씻지 못한 머리와 오래 입어 늘어난 티셔츠,출산 뒤 달라진 몸이 검은 유리에 한꺼번에 잡혔다.어젯밤에는 하은이 열이 올라 두 시간마다 깼고,아이가 잠든 뒤에는 빵과 남은 반찬을 혼자 먹었다.먹는 동안만 머릿속이 조용했지만 아침이 되자 준혁은 빈 접시부터 찾아냈다.“또 다 먹었어?”“하은이 재우고 나서 조금 먹었어.”“조금 먹어서 그렇게 됐겠어?”준혁은 카드 내역을 열어 편의점 결제 금액을 보여줬다.“새벽 한 시에 이만큼 샀네. 먹고 싶으면 누구 돈으로 먹는지는 기억해야지.”“생활비로 산 거야.”“그 생활비를 누가 주는데?”퇴사한 뒤 서윤에게 남은 것은 준혁이 한도를 정한 생활비 카드 한 장뿐이었다.그는 편의점 결제까지 따지면서도 자신의 새벽 지출은 접대비라는 말로 끝냈고,영수증을 요구하면 서윤의 병부터 들먹였다.“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아?”“이유가 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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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먹고 토하는 새벽

첫 번째 증거를 저장한 날 밤, 강준혁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오후 여덟 시에 도착한 메시지는 짧았다.―접대 길어져. 기다리지 마.언제 돌아오는지, 하은의 열은 내렸는지, 아내는 저녁을 먹었는지 묻는 말은 없었다.가족카드에는 도심 호텔 라운지 결제가 찍혀 있었지만서윤은 화면만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결제 화면을 캡처할까 고민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립스틱 사진 하나만으로도 자신이 남편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고,준혁이 알게 되면 증거보다 아내의 의심부터 문제 삼을 것이 분명했다.오전에 세 여자의 흔적을 보았고 밤에는 호텔 결제를 확인했는데도,준혁이 거래처라고 말하면 자신이 또 잘못 본 것 같아졌다.그는 설명 하나로 사실을 지웠고, 서윤은 어느새 자기 눈을 먼저 의심하게 되었다.“엄마, 아빠 오늘도 회사에서 자?”해열제를 먹은 하은이 이불 속에서 물었다.“일이 많은가 봐.”“아빠 회사에는 침대도 있어?”서윤은 대답 대신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주었다.거짓말을 만든 사람은 준혁인데,그 거짓말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사람은 늘 자신이었다.“아빠 없으면 엄마가 덜 울어?”“엄마 안 울어.”“거짓말. 어제도 화장실에서 울었잖아.”“물소리였어.”“그러면 오늘은 문 잠그지 마. 엄마 안 나오면 무서워.”“오늘은 안 잠글게.”하은이 잠든 뒤에도 그 약속은 오래 남지 못했다.집이 조용해지자 아침에 본 립스틱 세 자국과 준혁의 말이 다시 돌아왔다.'저 여자였으면 나도 밖으로 안 돌았지.'서윤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반쯤 남은 케이크와 찬밥, 하은이 먹지 않은 소시지가 보였다.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결혼사진 속 여자와 지금의 자신을 계속 비교하게 될 것 같았다.사진 속 자신은 칭찬받았고, 지금의 자신은 먹는 양과 카드 사용액으로 평가받았다.한 조각만 먹겠다고 정했지만 케이크 상자는 금세 비었고,찬밥과 반찬까지 식탁 위로 올라왔다.씹는 동안에는 준혁의 셔츠도 생활비 카드도 떠오르지 않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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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어젯밤엔 나랑 했는데

“아내가 받았네.”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놀라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기다리던 사람이 대신 전화를 받은 것처럼 서윤의 신분부터 확인했고,그 한마디만으로도 준혁과 자신 사이에 아내 이야기가 오래 오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누구세요?”“윤채린이요. 이름은 처음 들어도 사진은 많이 봤어요.”“무슨 사진이요?”“결혼사진. 준혁 오빠가 가끔 보여줘요. 저때는 정말 예뻤다고.”서윤은 거실 벽의 액자를 바라보았다.아침마다 자신을 심판하던 사진이 남편의 외도 상대에게도 구경거리로 넘어가 있었다.결혼사진을 몇 번씩 보여줬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했다.준혁은 아내의 과거를 추억한 것이 아니라,현재의 아내를 깎아내릴 비교 자료로 사용해왔다.“강준혁 씨와 무슨 관계예요?”“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채린은 대답 대신 서윤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사실부터 꺼냈다.“어젯밤엔 나랑 했는데, 요즘 관계는 해요?”침실에서 옷장 문이 닫혔다.준혁은 분명 통화 내용을 들었지만 나오지 않았고,채린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다시 말해봐요.”“남편이랑 아직도 자냐고요. 대답이 이렇게 늦는 걸 보니 안 하나 보다.”“유부남인 줄 알면서 만났다는 거예요?”“준혁 오빠가 나를 원해서 만난 거예요. 순서를 바꾸면 내가 나쁜 여자가 되잖아요.”“이미 나쁜 여자 아닌가요?”“그런 말은 남편한테 먼저 해야죠. 나는 집에서 못 받은 걸 채워줬을 뿐이니까.”채린은 준혁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자기 판단처럼 이어갔다.서윤의 몸이 달라졌고, 부부관계가 끊겼으며,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먹거나 울거나 욕실에 숨는다는 설명까지 나왔다.“그 사람이 내 병을 당신한테 말했어요?”“병이라고 부르면 편하겠죠. 나는 관리 실패라고 들었는데.”“그 사람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요?”“출산을 핑계로 여자를 포기했다고요.집에서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밖에서 위로받는 건 배신이라고 운다던데,그건 좀 우습지 않아요?”채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오빠가 그러던데요. 아내는 돈도 없고 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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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열 명에서 다섯 명

“오빠, 채린이 끝났으면 오늘은 내 차례지?”준혁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서윤이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상대에게 기다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고,화면을 뒤집어 놓은 채 물을 마셨다.이름조차 모르는 여자는 부부 사이에 낀 침묵까지 들으며 자신의 차례를 재촉하고 있었다.“누구야?”“알 필요 없어.”“채린 말고 또 있다는 뜻이잖아.”“방금 들었으면 알겠네.”준혁은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확인했다.들킨 사실보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아내가 더 번거롭다는 태도였다.“몇 명이야?”“지금 남은 건 다섯.”서윤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한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려고 시작한 질문이 숫자로 돌아왔고,그 숫자에는 미안함도 망설임도 없었다.다섯이라는 대답에는 우연히 한 번 선을 넘은 관계가 아니라,고르고 남겨 관리해온 사람들이 있다는 뜻까지 들어 있었다.“남은 게 다섯이라니?”“원래는 열 명이었어.”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곧바로 끼어들었다.“오빠, 그걸 아내한테 말해도 돼?”“언젠가는 알았겠지.”준혁은 내일 연락하겠다며 통화를 끝낸 뒤,오래 고민해 내린 결정을 설명하듯 말을 이어갔다.“여자가 너무 많으면 일정도 꼬이고, 선물이나 호텔 예약도 헷갈려. 그래서 정리했어.”“정리했다고?”“가정을 생각해서 다섯으로 줄였다고.”“그걸 희생이라고 말하는 거야?”“희생 맞지. 내가 원한다고 전부 유지한 것도 아니고, 문제 생길 만한 사람은 끊었잖아.”“열 명 중 다섯을 남긴 게 가정을 지킨 거라고?”“적어도 이혼하자고는 안 했어.”준혁에게 결혼은 충실함이 아니라 아내를 집 안에 남겨두는 제도였다.몇 명과 자든 법적 배우자 자리를 빼앗지 않았으니 책임을 다했다는 논리였고,그 안에서 서윤의 고통은 계산할 필요조차 없는 비용이었다.“채린도 그 다섯 중 하나야?”“이름까지 알아서 뭐 하게?”“내 남편이 누구랑 자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야.”“당신이 알면 달라지는 게 있어?”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돈도, 일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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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시어머니의 체중계

아침 아홉 시,시어머니 박옥자은 며느리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보다 체중계부터 꺼냈다.“올라가.”서윤은 현관에 선 시어머니와 그 뒤의 강태문을 번갈아 보았다.전날 밤 준혁에게 열 명을 다섯 명으로 줄였다는 말을 들은 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옥자는 며느리의 상태가 아니라 허리와 배부터 살폈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아들 바람난 이유부터 알아야 고치지.”“제가 살이 쪄서 준혁 씨가 열 명을 만났다는 거예요?”옥자는 체중계 전원을 켠 뒤 하은의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애 나오기 전에 올라가. 엄마 몸무게까지 확인하게 만들지 말고.”옥자가 방문 손잡이에 손을 얹자 서윤은 먼저 체중계 위에 섰다.숫자가 멈추자 옥자는 그것을 몸무게가 아니라 며느리의 유죄 판결처럼 읽었다.“네가 이 꼴로 살면서 남편이 집만 보길 바랐니?”“이 숫자가 외도 허가증이에요?”“남자는 눈으로 먼저 살아.집에 들어왔는데 아내가 자기를 버린 사람처럼 하고 있으면 밖에서라도 여자를 찾는 거야.”강태문은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펼쳤다.“준혁이 위치에서는 여자도 접대고 인맥이다. 가정만 유지하면 문제 될 것 없어.”“열 명이 접대고, 다섯 명은 인맥이에요?”태문은 놀라지 않았다.“숫자를 들었으면 정리한 것도 들었겠군.”서윤은 그제야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아들의 외도를 뒤늦게 알게 된 부모가 아니라 몇 명인지,얼마나 줄였는지까지 공유받은 사람들이었다.“두 분 다 알고 있었어요?”옥자는 대답 대신 냉장고를 열어 케이크 상자와 소시지 봉지를 꺼내 식탁에 올렸다.“이런 걸 먹으면서 남편이 왜 밖으로 도는지 묻는 게 더 뻔뻔하지 않니?”“제가 뭘 먹는지 검사하러 오셨어요?”“검사라도 해야지. 네 친정에서는 딸이 남편 하나 못 붙잡고 사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하니?”“저 출산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그러니까 돌아가면 되잖아. 못 돌아가는 건 네 의지 문제고.”옥자는 체중계 숫자를 휴대전화로 찍었다.“그걸 왜 찍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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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혼할 돈이 없다

“이혼시키지도 않는다잖아.”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박옥자의 마지막 말은 집 안에 남았다.서윤은 체중계가 놓였던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다 식탁에 노트를 펼쳤다.더는 준혁과 같은 집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심과 출구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보증금.이사비.하은의 유치원비.변호사 상담료와 병원비.한 달 생활비.서윤은 아는 숫자를 적고, 모르는 숫자 옆에는 물음표를 붙였다.결혼 전에는 광고 문구 하나로 수백만 원짜리 계약을 따냈지만 지금 자기 이름으로 들어오는 돈은 없었다.서윤이 쓰는 것은 준혁 명의의 본카드에 딸린 가족카드였다.카드 앞면에는 서윤의 이름이 찍혀 있었지만,이용 한도와 정지 권한은 본회원인 준혁에게 있었다.서랍 깊숙이 넣어둔 통장을 꺼냈다.마지막 거래는 하은이 태어난 해에 멈춰 있었고,잔액은 작은 원룸 보증금에도 턱없이 모자랐다.은행 앱에서는 소득 확인이 되지 않아 대출이 어렵다는 안내가 떴다.보증금이 낮은 집은 하은의 유치원과 병원에서 멀었고, 가까운 집은 월세만으로 생활비가 무너졌다.결혼 전 입던 옷과 가방을 전부 팔아도 보증금에는 닿지 못했다.그마저 준혁과 옥자가 집 안 물건을 수시로 확인해 몰래 처분하기 어려웠다.숫자를 확인할수록 이혼은 결심이 아니라 가격표처럼 보였다.남편을 떠나는 데도 돈이 필요했고, 아이를 데리고 안전하게 살려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엄마, 이거 뭐 써?”잠에서 깬 하은이 식탁으로 와 노트를 들여다봤다.“이사 갈 때 필요한 거.”“우리 이사 가?”“엄마가 알아보는 중이야.”“아빠 없는 집으로?”여섯 살 아이는 설명하지 않은 말까지 알아들었다.“엄마는 하은이랑 안전하게 살 집을 찾고 싶어.”“아빠가 찾아오면?”서윤은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통장 잔액을 본 뒤에는 약속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다.“엄마 돈 없으면 나 못 데려가?”“엄마가 꼭 방법을 찾을게.”오후가 되자 서윤은 이혼 전문 변호사의 전화 상담을 예약하고 소액의 상담료를 결제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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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아빠에게 나는 향기

서윤은 서랍에 남아 있던 현금으로 하은의 해열제를 샀고,아이의 열이 내릴 때까지 밤을 새웠다.아침이 되자 준혁은 카드 정지에 관해서도,하은의 상태에 관해서도 묻지 않은 채 식탁에 앉았다.자신이 막아놓은 카드로 아이의 약조차 사지 못했다는 사실도 궁금해하지 않았다.하은은 우유를 마시다가 아빠의 넥타이 쪽으로 코를 가져갔다.“아빠, 오늘은 꽃 냄새 나.”준혁은 휴대전화를 확인했다.“회사에서 묻은 거야.”“어제는 달콤한 냄새였는데.”“접대 다니다 보면 별 냄새가 다 묻어.”“그럼 접대하는 사람들이 아빠한테 붙어 있어?”하은은 날짜보다 냄새를 먼저 기억했다.어떤 날에는 꽃 냄새가 났고,어떤 날에는 사탕처럼 달콤한 향이 났으며,또 어떤 날에는 엄마에게서 한 번도 맡지 못한 향이 따라왔다.준혁이 접대라고 부른 밤마다 아이는 아빠의 옷을 다시 확인했다.“엄마한테는 맨날 같은 냄새 나.”“엄마는 집에만 있으니까.”준혁은 집에만 있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빼놓았다.서윤이 복직을 말할 때마다 아이를 버릴 셈이냐고 막았고,이제는 밖에 나가지 않는 삶을 능력 부족처럼 사용했다.“하은아, 밥 먹자.”서윤이 화제를 돌리자 준혁이 끼어들었다.“애가 묻는데 왜 말을 막아?”“아이 앞에서 또 나를 깎아내리니까.”“사실을 말한 거야. 당신은 사실만 들으면 공격받았다고 생각하잖아.”하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내가 냄새 말해서 싸워?”“아니야. 하은이 때문 아니야.”서윤이 답했지만 준혁은 곧바로 다른 설명을 붙였다.“엄마가 요즘 예민해서 그래. 하은이가 조심하면 돼.”“아이한테 왜 그런 말을 해?”“당신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 멀쩡하다고 거짓말해?”“내 상태를 아이한테 책임지게 하지 마.”“엄마가 화낼 것 같으면 아빠한테 말해. 괜히 옆에 있다가 놀라지 말고.”그는 안전수칙을 알려주듯 서윤을 위험한 사람으로 정리했다.밤마다 하은의 열을 확인하고 밥을 먹이며 유치원 준비물을 챙기는 사람은 서윤이었지만,준혁의 문장 속에서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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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가장 비싼 상간녀

“오늘은 웃어.”호텔 키를 빼앗아 간 다음 날, 준혁이 서윤에게 건넨 첫 말이었다.침대 위에는 검은 드레스와 구두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메이크업 실장 명함이 있었다.“어제 일은 설명 안 해?”“자선행사 끝나고.”“귀걸이 주인도?”“하은이가 주머니를 뒤진 것부터 가르쳐. 남의 물건에 손대는 버릇 들이면 안 돼.”준혁은 다른 여자의 귀걸이를 가져온 일보다 그것을 찾아낸 아이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오늘은 강림그룹이 주최하는 아동의료재단 기금 만찬이었다.언론 앞에서 아픈 아내를 돌보는 후계자 역할을 해야 했고, 그 옆에는 잘 웃는 서윤이 필요했다.“표정 관리해. 기자들 와.”“내 표정까지 당신 소유야?”“가족 얼굴은 회사 자산이야.”행사 직전 메이크업 실장은 서윤의 눈 밑을 가리고 입술에 색을 덧칠했다.준혁은 거울 속 아내를 확인한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이 정도면 아파 보이지 않겠네.”“안 아픈 게 아니라, 안 아파 보이게 만든 거잖아.”“사람들은 보이는 걸 믿어.”행사장 입구에서 준혁은 서윤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카메라가 사라지자 손도 떨어졌다.그는 부부 인터뷰에서 아내의 건강을 가장 걱정한다고 말했고,서윤에게 마이크가 넘어오자 대신 답했다.“요즘 많이 안정됐습니다. 제가 곁에서 잘 돌보고 있어요.”서윤은 카드가 정지된 채 하은의 해열제를 사러 다닌 밤을 떠올렸다.그러나 준혁은 다음 질문을 받으며 헌신적인 남편의 얼굴을 완성했다.본행사 전 VIP 대기실에 문세라가 들어왔다.준혁은 대화하던 사람을 남겨두고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대표님, 늦으셨네요.”“내 행사가 아닌데 시간을 맞출 이유가 있나요?”세라는 준혁이 내민 손을 보지 않고 서윤에게 시선을 옮겼다.서윤은 태블릿 알림에서 보았던 이름을 떠올렸다.S등급 문세라, 최우선.이름으로만 보았던 세라는 자신이 누구보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한서윤 씨죠?”“제 이름을 아시네요.”“준혁 씨 아내인데 모르면 곤란하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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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완벽한 가족사진

“팔을 더 붙여. 지금 상태로는 보정할 게 너무 많잖아.”사진작가가 자세를 지시하기도 전에 준혁이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내 몸인데 왜 당신이 방향을 정해?”“강림그룹 가족 화보야. 개인 사진 아니야.”자선행사 다음 날, 서윤은 하은과 함께 기업 홍보용 촬영장에 서 있었다.강림그룹 창립기념 특집 기사에 실릴 가족사진이었다.촬영 콘셉트는 ‘아픈 아내를 지키는 후계자와 단란한 가족’이었다.서윤이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생활비 카드가 왜 막혔는지,하은의 약을 누가 샀는지는 기사에 들어가지 않았다.스타일리스트는 서윤에게 허리를 조이는 원피스를 입히고 재킷 뒤쪽을 집게로 잡아당겼다.정면에서는 몸에 맞는 옷처럼 보였지만 등을 돌리면 천이 벌어졌다.“엄마 옷 아파 보여.”“옷은 안 아파.”“엄마가 아파 보여.”준혁이 아이의 말을 잘랐다.“사진 찍을 때는 웃어야 착한 딸이지.”“엄마도 웃어야 착해?”“엄마는 더 잘 웃어야 해.”촬영이 시작되자 준혁은 서윤의 어깨를 감싸고 하은을 가운데 세웠다.사진작가는 하은에게 흰 꽃다발을 안기고 세 사람이 손을 잡은 채 웃어달라고 주문했다.“아빠는 집에서는 엄마 손 안 잡잖아.”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준혁은 아이의 손을 감싸 쥐며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쓸데없는 말 하면 촬영 다시 해야 해.”“그래도 아빠는 집에서 엄마 손 안 잡잖아.”준혁은 카메라 불빛이 들어오자 곧바로 웃었다.아내를 아끼는 남편처럼 몸을 기울이다가 촬영이 멈추면 손을 떼고 모니터 앞으로 갔다.“이 컷은 안 돼. 팔이 너무 크게 나왔어.”“원래 내 팔이야.”“원래대로 내보내자는 사람이 어디 있어.”“나는 있는데.”준혁은 사진작가에게 다음 컷을 지시했다.하은은 웃으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입을 다물었고,서윤은 아이가 더 지치기 전에 끝내려고 카메라가 원하는 표정을 만들었다.두 시간 뒤 보정팀이 1차 시안을 띄웠다.서윤의 허리는 줄었고 팔과 어깨도 다른 사람의 비율로 바뀌었다.눈 밑의 피로와 출산 뒤 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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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다섯 개의 방

사진 선택 링크가 닫히기 전에 서윤은가족사진과 준혁·세라의 비공개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했다.파일 정보와 촬영 시각도 따로 캡처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는 몰랐지만,다시 없던 일이 되게 둘 생각은 없었다.준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재킷도 벗지 않고 물었다.“스튜디오에서 연락 왔어. 비공개 사진 봤어?”“가족사진 고르다가 봤어.”“직원이 실수한 거야. 지웠으니까 당신도 삭제해.”“왜? 가족사진이랑 같은 폴더에 있어서?”“회사 이미지에 문제 생기면 당신도 편할 것 없어.”준혁은 휴대전화를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 하은이 방문을 열었다.“엄마 또 혼나?”준혁은 손을 거두고 아이를 향해 웃었다.“엄마가 남의 파일을 잘못 받아서 그래.”남의 파일이라는 말은 정확했다. 가족사진 속 서윤은 허리도, 팔도, 피로도 지워진 사람이었다.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은 원본은 세라를 바라보는 준혁의 얼굴뿐이었다.준혁이 샤워하러 들어가자 서윤은 사진을 결혼 전 사용하던 이메일 계정으로 전송했다.제목에는 날짜만 적고 본문에는 확인한 사실만 남겼다.[오후 3시 18분. 가족사진과 같은 스튜디오에서 강준혁·문세라 비공개 촬영 확인. 원본 폴더명과 파일 정보 첨부.]메일을 보낸 뒤에는 광고 자료를 보관하던 이동식 저장장치에도 같은 파일을 복사했다.계정이 지워지고 휴대전화를 빼앗겨도 한곳에는 남아 있어야 했다.서윤은 빈 문서를 열어 지금까지의 일을 날짜순으로 적었다.낯선 립스틱, 모르는 여자들의 전화, 요일별 일정, 호텔 키와 귀걸이, 문세라의 이름, 같은 스튜디오의 사진.기억 속에서 뒤엉켰던 일들이 문장으로 옮겨지자 하나의 방향을 가리켰다.호텔.서윤은 가족 태블릿을 켰다.오전에 가족사진 링크를 확인한 준혁의 개인 메일 계정이 로그아웃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받은 편지함에는 재무팀이 전달한 법인카드 정산 파일이 있었다.이틀 전 호텔 이름으로 검색하자 같은 날짜의 결제 건이 연달아 나타났다.정산 파일에는 호텔이 발행한 거래명세서도 첨부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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