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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윤은혜
흑여 핌소를 함께하라는 것인가?

강윤지의 머릿속이 갑자기 하얘졌다.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맞은편에서 유빈이 이글거리는 질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경단 한 그릇을 올린 것만으로도 총애를 다투고 황제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쓴 판에 하물며 침소에 다녀온다면...? 이번에는 후궁을 어지럽힌 화근이란 죄목이 붙을 게 뻔했다.

“마마, 어서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황제께서 재촉하고 계시옵니다!”

어린 환관이 다시 다그치자, 강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저 진화궁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진 전각으로 옮겨가고 싶었을 뿐이다. 황제가 3년 동안 후궁에 발을 들이지 않았는데 고작 한 그릇의 경단 때문에 자신을 부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길을 절반쯤 걸었을 무렵, 그녀는 문득 의문이 스쳤다. 이상하다. 목욕과 단장을 하지도 않았고 모시는 잠자리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봉란춘은차’도 타지 않았다. 황제가 첫 소환을 이렇게 대충 하는 법이 있었나? 그러자 환관이 옆에서 나직이 설명했다.

“마마께서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오늘은 절차가 조금 급했지만 어쨌든 황제의 은총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한 말씀 더 올리자면, 황제의 심기가 편치 않으니 오늘은 말씀과 행동 모두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환관의 눈길에는 은근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오늘 황제는 끝내 태후의 뜻을 꺾지 못하고 내무부에서 올린 머리패를 훑어본 뒤 오직 강 선시만을 지목했다.

예전에는 유빈이 뇌물을 써서 강윤지의 머리패를 아예 명단에서 빼버린 적도 있었다.

이번 밤이 끝난 뒤 그녀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지 아니면 곧장 냉궁으로 떨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원래 성정이 거칠어 노비를 때리거나 죽이진 않았지만 화가 나면 물건을 내던지고 발길질을 하는 것은 일상이었다. 강 선시처럼 여린 몸은 황제의 발끝만 스쳐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잘 새겨듣도록 하지.”

강윤지는 양심전에 들어서도 정신은 여전히 아득했다.

“왔으면 거기서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앞으로 나오거라.”

하림의 낮고 무심한 목소리에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고개를 떨군 채 앞으로 나섰다.

‘귀찮군. 하루가 멀다 하고 후궁을 침소에 들이라고 성화들이니. 배조차 부르지 않은 내가 무슨 힘으로 태후에게 손자를 안겨주란 말이냐?’

‘이번 생은 여기까지겠지. 남자구실은 그만두련다. 강 선시, 경단도 만들어주고 게도 발라주는 걸 보면 사람은 괜찮은 듯하구나.’

‘차라리 핑계를 대서 유빈을 불러, 그녀를 데려가게 하는 게 낫겠군. 내 힘이 없어 미안하구나.’

하림의 속마음을 다 듣기도 전에 강윤지는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황제께서는 어찌 이런 식으로 저를 희롱하시는 것이옵니까?

“황상, 노첩이 죄를 지었사옵니다. 급히 오느라 목욕과 단장을 마치지 못해 옥체를 더럽힐까 두렵사옵니다. 부디 노첩이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쉬시게 만 해 주시옵소서.”

강윤지의 심장은 귀밑까지 뛰어올라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했다. 오늘 밤, 그대로 진화궁으로 돌아간다면 벌서기로 끝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침소를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단지 황제 곁에서 하룻밤을 버틴다면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

‘이 강 선시, 눈치는 있군. 하지만 배가 고프니 여인과 잡담할 기력조차 없다. 그냥 내보내는 게 낫겠어.’

속마음을 듣자, 강윤지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소매 속에 반 시진 동안 숨겨온 세 마리의 게를 꺼냈다.

“오늘 밤 연회에서 건져 온 것인데 드시겠사옵니까?”

세 마리 게가 그녀의 손에 담겨 모습을 드러내자 하림의 눈빛이 확연히 빛을 띠었다.

‘게? 강 선시가 게를 가져왔다고? 게다가 이미 발라 놓았단 말이냐? 그걸 왜 들고 서 있는 것이지? 어서 이리 가져오거라. 아니지 내가 가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

강윤지는 속이 쓰렸다.

폐하, 말씀도 안 하시면서 어찌 제가 그 마음을 알겠사옵니까? 평소에도 한마디 없이 그리 묵묵하게 계시니 어느 노비가 그 뜻을 읽을 수 있겠사옵니까?

그녀는 게를 올렸다. 하림은 느릿느릿하지만 정갈하게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 속내는 요란했다.

‘게가 뭐 어떻다고 못 먹게 하는 것인지... 난 모르겠고 일단 먹어야겠다. 오늘은 한꺼번에 다 먹어 왕덕의 속을 뒤집어 놔야겠구나. 그런데 아쉽게도 세 마리뿐이군. 그래도 아까보단 낫지.’

‘이 넓은 궁에서 나를 먹일 줄 아는 건 강 선시 하나뿐이구나. 언젠가 나머지는 전부 목을 베어내고 말겠다!’

강윤지은 하림이 목을 베겠다는 말을 몇 번째 하는지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물론 그가 홧김에 내뱉는 말일 수 있겠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죽이겠다는 소리는 말단 중의 말단에 불과한 그녀를 여전히 서늘하게 만들었다. 배경도, 장군 아버지도 없는 그녀에게 황제의 환심을 사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게를 다 먹은 하림이 껍질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강 선시는 눈이 멀었나? 손 닦을 생각은 안 하고 뭐 하는 것이냐? 이따가 그냥 내보내야겠군.’

강윤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토록 애써 숨겨온 게를 한 입도 먹지 못하고 모두 황제께 드렸는데 이제 와서 그녀를 내치겠다니.

그녀는 급히 물동이를 들고 와 손을 씻겨 드리고 부드러운 수건으로 물기까지 말끔히 닦아냈다. 그녀는 그제야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노첩이 황상께서 잠드실 때까지 시중을 들고 외전의 작은 침상에서 쉬겠사옵니다.”

그가 내쫓기 전에 스스로 퇴로를 마련한 것이다.

‘강 선시가… 나와 함께하지 않겠다고? 설마 이 궁 안에 이미 마음을 둔 사내가 있는 것인가?’

강윤지는 그 소리에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시침(侍寢)을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니.

“폐하께서는 오늘 정무로 지치셨고 연회에서 술도 많이 드셨사옵니다. 노첩은 미천한 몸, 감히 폐하의 숙면을 방해할 수는 없사옵니다.”

강윤지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전생에 머슴살이하던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이 궁궐에서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곧 목숨을 잃게 될 거니까.

하림의 뜨겁고 날카로운 시선 아래에서 그녀는 속을 태우며 버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외전에 가서 쉬거라. 오늘 밤 있었던 일은 절대 남들에게 발설하지 말거라.”

강윤지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곧장 무릎을 꿇어 감사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걱정 마옵소서. 노첩은 한마디도 하지 않겠사옵니다.”

그녀가 몸을 돌린 채 막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머릿속에서 다시 나직한 중얼거림이 울렸다.

‘오늘 한 번에 게를 세 마리나 먹었으니 왕덕이 알면 태후 쪽에서 또 잔소리가 끊이질 않겠지. 강 선시는 입이 가벼운 것 같진 않지만, 만약 함부로 떠벌린다면 입에 자물쇠를 달아 버릴 것이다!’

강윤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아하, 게를 먹은 사실이 태후 귀에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거였군…

그렇게 외전에서 밤을 지새웠지만 강윤지의 잠은 영 편치 않았다. 밤새도록 머릿속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배고프다고 하질 않나, 또 어떤 때는 후궁의 여자들은 성가시니 모조리 한날한시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질 않나.

그러다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또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해대기 바빴다.

그렇게 밤새도록 뒤척이다 날이 채 밝기도 전 강윤지는 눈 밑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시녀와 환관들이 들어오기 전, 먼저 내전으로 발걸음을 옮겨 하림을 깨웠다.

“폐하, 시각이 되었사옵니다. 조회에 나가셔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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