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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윤은혜
지금 중궁은 주인이 없어 매달 한 번 태후 침전에 문안 드리는 날을 빼면 강윤지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일어나는 게 예사였다.

아, 맞다. 가끔 유빈이 위세를 부리겠다며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불러 무릎 꿇게 하고 훈계를 늘어놓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회 시간이 이르다 보니 강윤지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셈이었다.

하림을 깨웠을 때, 그의 두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용상에 걸터앉은 잠옷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날카로운 눈매에는 피곤이 어른거렸다. 그 표정에는 세상만사를 꿰뚫은 듯한 냉담이 깃들어 있었다.

‘하... 또 빈속으로 조정에 나가야 하다니. 내가 어떻게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지 의문이군.’

강윤지가 그의 용포를 매만져 주고 있을 때 절망에 가까운 속마음이 귓가에 울렸다. 역대 황제의 규율은 조회가 끝난 뒤에야 아침을 먹는 법. 즉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홉 시가 되어서야 첫 끼를 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강윤지는 그가 참 안쓰러웠다. 하림이 방금 양치를 마치자 그녀는 외전 탁자 위에 있던 살구꽃 떡을 몰래 치워 손수건에 싸서 품에 넣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궁으로 돌아가 몰래 간식으로 삼아 먹을 예정이었다. 양심전의 떡이라면 자기 전각보다 훨씬 나을 테니.

하지만 방금 전 왕덕의 감시 때문에 떡을 쳐다보기만 할 뿐 먹지 못하고 있는 하림이 눈에 밟혔다.

“폐하, 이 조황이 약간 비뚤어진 듯합니다.”

강윤지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왕덕의 시선을 가리고 손수건에 싸둔 살구꽃 떡을 슬며시 하림의 손바닥에 밀어 넣었다.

“조회가 길 터이니 폐하께서는 부디 보중하시옵소서.”

뜬금없이 들릴 만한 말이었지만 부드럽고 따끈한 떡이 손에 쥐어지자 하림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졌다.

‘이게 뭐지? 설마 살구꽃 떡인가? 강 선시, 네가… 제법 마음에 드는구나! 그 시끄러운 대신들이 헛소리하는 틈에 살짝 먹을 수 있겠군. 오늘 아침은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겠다. 좋군!’

하림의 속마음에 깃든 느닷없는 기쁨에 되레 놀란 것은 강윤지였다. 고작 떡 몇 조각에 이토록 기뻐하다니 그간 얼마나 굶주렸던 것일까?

“강 선시를 상재로 칭하고 ‘장’이라는 봉호를 내리거라. 그리고 내무부에서 상을 넉넉히 보내도록.”

강윤지가 손을 거두자마자 좋은 소식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론 품계가 올라가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지만 상재 정도라면 그리 높지 않아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이었다. 그것만 있다면 앞으로 사는 날이 한결 나아질 터였다.

“황은에 감사드리옵니다!”

강윤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면서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림이 조회에 나서며 등을 돌리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을 내렸으니, 앞으로는 알아서 먹을 것을 가져오겠지? 그런 눈치도 없다면 오늘 밤에 품계를 다시 깎아내리겠다.’

강윤지는 속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어쩜 이 황제의 머릿속에는 온통 먹을 것뿐이지?

“장 상재, 경사로군요. 황상의 첫 임어를 받은 후궁이 되었으니 경하 드리옵니다.”

왕덕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하림이 강윤지를 특별히 대하는 것을 보고 책봉식도 끝나지 않았는데 바로 호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내 외전 탁자 위의 빈 접시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살구꽃 떡은 방금 막 들어온 것 같은데 왜 벌써 비어있는 것이지?”

강윤지는 어색하게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아까 제가 좀 배가 고파서 먹어 치웠사옵니다.”

왕덕은 수상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띠었다.

“장 상재께서 입맛이 좋으시군요. 좋아하신다면 어선방에서 더 준비하도록 지시하겠사옵니다.”

“그럼 부탁드리옵니다. 왕 내관.”

그녀는 비록 총애를 받는 후궁은 아니지만 어쨌든 황상의 첫 침소를 함께 한 여인이었다. 대총관이 먼저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는데 이런 호의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훗날 하림의 관심이 식으면 이런 대우를 다시는 받지 못할 것이니 지금 마음껏 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그날 전각으로 돌아올 때, 강윤지는 가마에 실려 귀환했다. 지나가는 길의 궁인들의 눈빛은 차갑게 날이 서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껍질을 벗겨 버릴 듯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었지만, 상재로 승진한 소식은 이미 궁 안에 퍼질 대로 퍼져 있었다.

입궁한 지 3년 동안, 그들은 강윤지를 세 해 내내 만만하게 보고 조롱했다. 각자 머리를 쥐어짜 총애를 얻으려 했건만 결국 황제의 침소에 오른 이는 가장 하찮게 여겼던 강윤지었다.

그녀는 단 하룻밤 만에 품계를 올리고 봉호까지 받았다. 이 상태로 황제 곁에 몇 번 더 얼굴을 비추기라도 한다면...

진화궁.

아침부터 유빈은 가 귀비에게 불려가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결국 내용은 뻔했다. 그녀가 다스리는 전각이 허술해 작은 선시 하나가 황제의 눈에 띄게 했다는 것이었다.

유빈은 궁 안의 시종들을 물리고 침전에서 사납게 앉아 강윤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가 귀비는 이미 그녀에게 분부를 내렸다. 오늘, 강윤지를 제대로 가르쳐 주라고 말이다.

“상재 강씨, 유빈 마마께 문안드리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황제를 모신 다음 날, 규례에 따라 곧장 주위 마마께 문안을 드려야 했다. 지금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살기를 품은 유빈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품계도 올랐고 명색이나마 총애를 입은 빈비가 되었는데 설마 아직도 괴롭힐 생각인 것일까?

“좋다, 강윤지. 본빈이 그간 몰랐는데 네게 이런 요망한 수완이 있었구나!”

어젯밤만 해도 강윤지를 벌주고 있던 찰나 황제의 한마디 부름에 그대로 침전으로 불려간 일이 아직도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있었다. 게다가 새벽부터는 가 귀비에게 호되게 질책까지 들었으니 이 쌓인 울분을 풀 대상이야 당연히 강윤지일 터.

“유빈 마마,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노첩은 감히 그럴 수 없사옵니다.”

강윤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품계가 올랐다는 게 전혀 체감이 되질 않았다.

“취영, 우리 장 상재에게 규례가 무엇인지 똑똑히 가르쳐 주거라.”

유빈이 이를 악물고 명하자 취영이 손목을 주무르며 다가왔다. 순간 강윤지의 온몸이 자연적으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비록 책 속으로 들어온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원래 몸의 주인이 겪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예전 유빈이 기분이 나쁠 때면 바로 저 취영을 불러 강윤지를 마구 때리며 울분을 풀곤 했다는 것.

그래서 강윤지는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얌전하게 지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빼앗기거나 가끔 무릎 꿇는 벌을 받긴 했지만 손찌검까지 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취영이 코앞까지 다가오기 전에 소민이가 불쑥 팔을 벌려 그녀를 감싸듯 막아섰다.

“유빈 마마, 부디 신중하시옵소서. 우리 장 상재께서는 조금 뒤 황상께 먹거리를 올려야 하옵니다. 이 모습이 황상의 눈에 들어가게 된다면 변명하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강윤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소민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말은 알지만, 조금 전 전각으로 돌아오는 길에 황제께 드릴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겠다고 흘리듯 말한 것이 그녀에게 진심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말투로 얘기한다면 영락없이 위협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유빈의 눈빛이 살기로 번쩍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히 본빈을 협박하는 것이냐? 겨우 한 번 모셨다고 이제 황제 곁에서 눈에 띌 생각을 하는 것이냐?”

유빈은 좌우로 잠시 훑어보더니 아예 취영을 밀쳐내고 직접 나섰다. 손끝에는 묵직한 호갑을 끼운 채 두어 번 힘껏 뺨을 때렸다.

순간 강윤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장 상재, 총애를 얻었거든 얌전히 굴어야지. 이런 꼴로 황상 앞에 설 생각을 하다니. 오늘 이 일은 가 귀비께서 친히 내리신 명이다.”

그러고는 차갑게 명했다.

“알리거라. 본빈의 허락 없이는 강윤지를 진화궁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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