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장미는 서여국으로 떠나고 싶었다.오직 그곳에서만 마음 편히 숨 쉴 수 있고, 과거의 일들로부터 자신을 조금이나마 놓아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서여국이라면 그녀가 모욕을 당하더라도, 그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남제에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다.이런 마음을 봉구안에게 털어놓자, 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분히 이해했다.봉장미가 보다 안정된 곳에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길 바랐다.그래서 그녀는 동생의 결정을 지지했으며, 다만 송려와 충분히 상의하라고 당부했다.그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고, 봉구안은 몸과 마음 모두에 깊은 피로가 깃들었다.소욱이 그녀를 먼저 궁으로 데리고 돌아갔다.영화궁에 도착해, 곁에서 얌전히 기다리던 아들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문득 아릿해졌다.졸음을 겨우 참아가며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아들을 안아 들고, 봉구안은 조용히 그의 머리 위에 입을 맞췄다.곁에 서 있던 소욱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장미의 병세는 그리 심각하지 않아. 게다가 곁에 송려가 있잖아.”봉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봉가 저택에서는 봉장미의 출국 의사를 들은 송려가 침묵에 잠겨 있었다.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마음이 복잡했다.그는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아 품에 기대게 했다.봉장미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겨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서방님, 전 서여국에 꼭 가야 해요. 만약… 서방님께서 저와 함께 가시기 어렵다면, 그땐…”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송려를 얽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녀가 남제에 억지로 머무른다면, 끝없이 상처받을 뿐이었다.언젠가 그녀의 과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송가는 장주의 명문가 출신이었다.자신이 송가의 명예를 해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그녀에게 큰 짐이었다.그때 송려가 단호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천 리, 만 리… 어디든지 너와 함께 할 거야.”
봉구안의 발길질에 봉안진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씨가 생전에 남긴 수첩을 주워 들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내 잘못이야... 모두 다 내 잘못이야...”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다 주운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문가에 서 있는 어린 딸이 보였다. 작고 슬픈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갔어요?”봉안진은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가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차마 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어떻게 말하겠는가. 자신의 어리석음이 그녀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봉구안이 돌아서서 네댓 살 된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씩 주씨에게 다가갔다.“연아야, 네 엄마는 잠이 들었어. 아주 오래오래 잘 거야.”연아는 멍하니 움직이지 않는 어머니를 바라보다가, 이내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아직 너무도 어린 나이였기에 생이별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어른의 거짓말이 더는 통하지 않았다.어렴풋이 느껴졌다. 엄마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아이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봉안진의 가슴을 더더욱 찢어지게 만들었다.그와 주씨는 부모의 뜻에 따라 혼인을 맺은 사이였다.누구와 결혼했든 서로 예의를 지키며 살아갔을 것이다.그들은 봉구안과 황제처럼 불꽃같이 사랑한 사이는 아니었다.황제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후궁을 해산시켰고, 흉조라 불린 쌍생아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하지만 그는 그저 평범한 남편이었고, 주씨 역시 평범한 아내였다.가문이 어울려 혼인했고, 특별할 것 없는 나날을 함께 보내왔다.요란한 사랑보다는, 그저 오래 함께하는 삶을 바랐다.혼인 초엔 달콤한 시간도 있었다.그러나 연아가 태어난 뒤, 부부는 점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갔다.그는 누구를 깊이 사랑해 본 적 없었다. 주씨는 분명 현모양처였지만, 그의 마음속 깊이까지 들어오지는 못했다.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의 꾀임에 넘어가 하룻밤을 보냈을 때도… 아내가 알게 될까 두려운 것보다, 그 단조로움을 깰 수 있다는 묘
참장부.황후가 도착하자, 하인과 궁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봉구안은 단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본채로 향했다.문 앞엔 봉 부인이 서 있었다. 마치 봉구안이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었다.“마마…”봉구안은 긴 말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태의를 먼저 들여 형수를 진찰하게 하십시오.”태의는 그녀가 직접 대동해 온 인물이었다.봉 부인은 마침내 기대 쉴 곳을 찾은 듯 연달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래야지. 태의가 봐야지. 아까 그 의원은 며늘아가가 가망이 없다느니…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소릴 하더구나…”태의가 안으로 들어가고, 봉 부인은 봉구안을 편채로 이끌었다.문을 닫고 나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사고가 났을 때, 장미가 그걸 눈앞에서 봤어.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까지 의식을 못 차리고 있단다. 송 서방이 곁을 지키고는 있는데… 괜찮다고는 하더구나. 그 애는 놔두고, 난 곧장 여기로 온 거야.”봉구안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그저 서 있기만 해도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그때 오백이 안으로 들어와 아뢰었다.“마마, 모두 파악했습니다. 자객은 다름 아닌 참장 대인의 외실이었습니다. 대인께서 그 여인을 버리고 자식만 거두려 하자, 끝내 몰려 복수를 결행한 것 같습니다.”봉구안의 눈빛이 차디차게 가라앉았다.“범인은 잡았느냐.”“현장에서 자결했습니다.”봉 부인은 얼굴 가득 후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다 내 잘못이다. 네 오라비가 그 여자를 버리고 아이만 거두겠다고 했을 때,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 여자가 이렇게까지는 안 했을 텐데…”하지만 봉구안의 표정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지금 그녀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것은 주씨의 안위였다.그때, 숨이 찬 하녀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들어왔다.“황후마마! 부인께서… 마마를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본채 안.주씨의 호흡은 이제 거의 끊기려 하고 있었다.봉안진은 침상 곁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부인… 부인…
영아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남자가 마당으로 뛰어나왔다.낡고 해어진 옷에는 콩물이 군데군데 튀어 있었고, 얼굴엔 피곤이 가득했다.그는 다름 아닌 봉명헌이었다.야위고 초췌해진 그의 모습에 봉가에서 온 하인은 순간 알아보지 못했다.“한밤중에 무슨 일이지? 혹시 강주에 계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봉명헌은 입으로는 걱정하는 듯했지만, 실상 얼굴에는 별다른 동요이 없었다.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런 일이 아니고서야 봉가 사람들이 자신을 다시 찾을 리 없다고 여겼다.예전에 그가 직접 친어머니가 보낸 하인들을 내쫓으며 이렇게 외쳤던 말이 떠올랐다.“영감이 죽지 않는 한, 나를 귀찮게 하지 마라!”하인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도련님, 작은 마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장미 아씨께서 돌아오셔서 가족 연회를 열 예정이니, 꼭 함께해 주시기를 원한다 하셨습니다.”봉명헌은 콧방귀를 뀌며 말끝을 흘렸다.“봉장미가 돌아왔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썩 꺼져라. 난 내일 새벽에 두부 팔러 나가야 한단 말이다!”그리고는 아내의 팔을 끌어당겨 함께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하인은 황망히 문밖에서 소리쳤다.“도련님! 장미 아씨께서도 도련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마당 안에서는, 영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봉명헌을 붙잡고 말했다.“서방님, 어차피 시아버님도 황성에 안 계시고, 겨우 밥 한 끼 먹는 건데 왜 그리 고집을 부리세요?”봉명헌은 홱 돌아서며 성을 냈다.“머리는 길어도 견식은 짧구나!”“사람은 기개가 있어야 해!”“내가 못나서 누가 나를 무시하는 건 참겠지만, 내 아들만은 멸시받게 두지 않을 것이다!”“영감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데, 내가 왜 굽히며 살아야 한단 말이냐?”“우리가 두부를 팔아도 사람은 기개가 있어야 한단 말이다! 봉장미든 봉구안이든, 그놈들 눈에 난 애초부터 가시였어. 이건 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날 조롱하기 위한 자리일 것이다!”“절대 안 갈거니 그리 알거라!”“가
봉장미는 궁을 떠난 후, 잠시 남편 송려와 함께 봉부에 머무르게 되었다.과거 자신이 납치당했던 일을 이미 알게 된 그녀는 더 이상 그 기억에 사로잡혀 흔들리지 않았다.송려 역시 그런 그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그러나 봉 부인은 이미 이혼을 한 몸이었기에 봉부로 들어가기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봉 부인은 혼자 참장부에 머물며 아들 봉안진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그녀는 아들을 타이르며, 외실 때문에 정실 아내와 딸들에게 소홀히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작정이었다.하지만 봉 부인의 잔소리는 봉안진에게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케 했다.“어머니!”그는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꺼냈다.“저는 그저 아들 하나 갖고 싶을 뿐입니다. 봉가의 혈통을 잇기 위해서요.”봉 부인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들이 필요하면 며늘 아가가 낳으면 되지. 왜 굳이 바깥여자를 들여야 하느냐?”그건 분명, 방탕함을 정당화하는 핑계에 불과했다.봉안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그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의원을 불러 진맥도 받고, 약도 수없이 지어먹였죠. 저 역시 같이 약을 마셨습니다.”“하지만 수년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제가 밖의 여자를 들일 이유가 있었겠습니까?”“저도 외실을 신뢰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 피붙이입니다.”“그 여자를 절대 봉부로 들이지 않을 것이며, 부인의 지위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봉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들 말도 전혀 터무니없는 건 아니었다.“허나 그 여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다. 얼마 전 저택에 들어와 소란도 일으키지 않았느냐?”“그건 어쩔 셈이냐?”그 말을 들은 봉안진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이미 그 여자에게 분명히 경고했습니다.”“아마도 제가 과거에 조금 관대하게 대해준 것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전 그저 아이만 원했을 뿐입니다.”“그럼 그 말을 며
봉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궁중에 떠도는 그런 소문들은 그녀 역시 한두 번쯤은 들은 적 있었다.그러나 단 한 번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황제 소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매일같이 어전에서 산더미 같은 정무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는 그가, 그런 시시한 헛소문에 신경을 쓸 리 없었다.“녕비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야. 그리고 너도 너무 마음쓰지 말고.”봉구안이 입을 열었다.“하지만…” 봉장미는 말을 맺지 못하고 망설였다.봉구안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부드럽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장미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너야.”“너는 이제 그날의 진상을 알게 됐고, 나와 어머니, 그리고 궁 밖의 송려까지… 우리 모두는 너를 걱정하며 네 곁에 있어주고 싶어 해.”“네가 궁을 떠나 송려와 함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기쁜 일이야. 하지만 한 가지만 묻자. 넌 지금 송려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니?”봉장미는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서방님께서는 그 일로 저를 단 한 번도 혐오하신 적이 없어요.”“지금도 여전히 치료해주시고, 제가 회복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계세요.”“그런 분에게 제가 더는 실망을 안겨드릴 수 없잖아요.”“이렇게 진실을 마주하려 애쓰는 것도, 과거의 응어리를 풀고 잡념 없이 그분과 함께하고 싶어서예요.”“언니, 전 준비됐어요.”봉구안은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하지만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서, 몇 사람을 배치해 은밀히 너를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도록.”봉 부인도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게 제일 낫겠구나. 사람 많으면 서로 도울 수도 있고.”봉장미는 망설임 없이 언니를 끌어안았다.“언니, 항상 절 지켜줘서 고마워요.”봉구안은 그녀의 등을 다정히 두드리며 웃었다.“바보 같은 소리. 넌 내 친동생이잖니.”봉장미가 툭 던지듯 말했다.“오라버니는 절대 이렇게 안 해줄 거예요. 그 사람은 머릿속에 온통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