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서재.흰옷을 입고 있는 봉구안에게서 전혀 황후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욱은 이런 봉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봉구안은 무릎을 꿇고 손에 공술서를 높이 들었다.“폐하, 신첩은 억울함을 하소연하러 왔습니다.”내전에는 진한길이 시중들고 있었다.진한길은 공술서를 황제에게 전달했다.한 장 한 장 뒤져보던 소욱의 얼굴에는 광풍이 일었고 먹구름이 뒤덮였다.“황후, 여기에 뭐가 적혀있는지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공손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 보고 계신 것은 산적들의 최초의 진술서입니다. 어떠한 삭제도 추가도 없는 진실입니다.”“그 내용이야말로 신첩이 잡힌 후 실제로 겪었던 일들입니다.”소욱의 동공은 갑자기 수축했다,“궁중의 상궁이 너의 결백을 확인했었다.”봉구안은 분명히 결백한 몸이었다. 그런데 공술서에는 그녀가 납치된 후 능욕 당했다고 적혀있었다.봉구안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신첩은 이역의 금지약물을 복용하여 피부를 한층 탈피해서 흉터들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선 수술도…”“그래서 아무리 경험이 많은 상궁이라 할지라도 신첩이 능욕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탁!소욱은 탁자를 두드렸다. 눈 밑에서 차가운 빛이 번졌다.“그러니, 네가 짐을 속였단 말인가? 봉씨 가문도…”‘봉구안 정말 겁도 없이…’소욱은 봉구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산적들은 이미 처벌당했다. 능연이 배후의 진범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미 귀인으로 강등되어 청허궁에 갇혔다. 그리고 더 이상 총애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황후는 이 모든 일을 덮을 수 있었다. 그런데 쓸데없이 뒤져내서 자신을 망신시켰다.소욱의 시선은 날카로웠다.“네가 계속 짐을 속이고 있었다니…”봉구안의 마음이 가라앉았다.‘중점이 널 속인 거야?’‘중점은 능연이 한 짓이 아니냐?’봉구안은 침착하게 맞섰다.“폐하, 산적의 증언에 따르면 신첩이 능욕 당할 때 능연은 옆에 있었습니다.”“조검의 수찰에는 많은 내용들이 기록
봉구안은 증인이 누구인지 바로 말하지 않고 차분하게 전말을 설명했다.“마구 경기 후, 왕천해가 두 비빈을 말에서 떨어뜨린 진범으로 밝혀졌는데, 왕천해는 능연의 사주를 받아 가빈을 해치려고 한 것입니다. 왕천해가 체포된 후, 능연은 사실이 밝혀질까 봐 궁녀 주아를 보내 왕천해를 죽이려 했습니다…”소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소욱은 왕천해와 주아라는 궁녀는 이미 다 죽었다고 알고 있다.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봉구안의 증인이 되는 일을 없을 것이다.봉구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폐하, 궁녀 주아는 그날 밤에 죽지 않았습니다. 신첩이 비밀리에 주아를 궁 밖으로 보내서 치료받게 하였습니다. 지금 주아는 능연을 지목할 수 있습니다.”소욱은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 표정이 이상하게 잠잠했다.‘정말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고?’소욱은 봉구안의 말을 끊지 않았다.봉구안은 계속 말했다.“조검의 동생 조서가 조씨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데, 그가 능연이 수하들이 보내 조씨 가문 일가를 살해했다고 지목했습니다.”“이것도 부족하다면 능연의 몸종이었던 춘하도 있습니다. 춘하도 증인으로 능연의 각종 죄행을 지목할 수 있습니다.”소욱은 봉구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이 여자가 몰래 이렇게 많은 일을…’‘능연의 몸종 하녀까지…’“폐하, 증거와 증인이 다 있습니다. 신첩 지금 당장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습니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봉구안의 말을 끊었다.“지금 남제와 양나라가 일촉즉발인 상황이라 이런 일을 처리할 시간이 없다. 짐이 그때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때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황후, 이 쓰레기들을 가지고 영화궁으로 돌아가거라. 황후가 짐을 속인 일은 나중에 황후와 분명히 계산할 것이다. 능연이 저지른 잘못도 엄벌할 것이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아직까지도 능연을 보호하고 있군…’봉구안은 황제의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봉구안 눈 속의 공손함과 존경심은 사라진 대신 차갑고 날카로워졌
능연은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고개를 바짝 쳐들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증인 조서는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능연을 쳐다보았다.“폐하, 소인의 형 조검은 황귀비 마마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살기 위해 그 수찰을 썼습니다.”“그런데 황귀비가 이렇게 독할 줄은… 황귀비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저희 일가족을 전부 살해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사람의 도움이 있어 소인은 살아남게 되었습니다.”“그 사람들은 소인의 집에 방화했습니다. 그들은 소인이 몰래 도망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궁녀 주아가 말했다.“폐하, 귀비마마께서 노비에게 왕천해를 암살하라고 시켰습니다.”이들의 자백만으로는 아직 의문점이 남아있었다.예를 들면 조서가 어떻게 그의 일가족을 죽인 사람이 능연이 보낸 사람임을 확신하는지…그래서 춘하의 증언이 특히 중요했다.“마마께서는 조검의 가족들이 뭔가를 알고 있을까 두려워 노비에게 조검의 일가족을 제거하도록 시켰습니다. 산적이 황후 마마를 납치한 것도 마마가…”“닥치거라!”능연은 험악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춘하, 난 너를 박하게 대하지 않았어. 네가 어떻게 거짓으로 본궁을 모독한다 말이냐! 황후가 널 어떻게 매수했어?”“내가 더 이상 총애를 받지 못하니 다른 생각이 생긴 것이냐?”“폐하, 신첩 억울합니다. 신첩은 산적들이 사람을 납치한 일을 전혀 모릅니다. 더군다나 봉장미가 능욕당하고 있는 것을 방관한 적도 없고요… 진정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봉장미입니다. 봉장미는 혼인하기 전에 다른 남자와 어울려 순결을 잃고 산적에게 능욕을 당했다는 거짓말로 신첩을 모함하고 있습니다… 신첩 정말 억울합니다.”능연은 죄를 인정하지 않고 독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천한 년, 도대체 언제부터 그 증거들을 모은 거야?’‘조검의 수찰까지 찾았다니…’춘하는 옛 주인에게 다소 미련이 남아 있었다.춘하는 귀인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많은 죄증 앞에서 귀인
봉구안은 침착하게 소욱의 말에 대답했다.“폐하께서는 황실의 명성을 중요시하고, 신첩도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능연이 저지른 죄만 공개하고 피해자의 신분과 구체적인 경위에 대해서는 생략하시면 됩니다.”이렇게 해도 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소욱은 차갑게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래, 심사숙고했구나…”“짐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공술서들을 황성 전지에 뿌릴 것이냐?”봉구안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부득이하지 않으면 신첩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폐하께서 능연의 죄를 정리해서 세상에 알린다면 요점만 알리 수 있지만, 만약 제가 세상에 알리게 되면 사실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때면 누구에게도 좋지 않을 겁니다.”협박 당하는 기분은 좋지 않았다.게다가 소욱은 한 나라의 군주이다.소욱은 휙 하고 일어섰다. 온몸에 압박감이 휘몰아쳤고 궁전은 차갑고 잔혹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짐은 이미 능연에게 유배형을 처했다. 뭐가 더 불만이냐?”“능연의 죄를 세상에 알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를 수모하려는 건가? 짐을?”총애하는 비빈이 큰 죄를 저지른 배후에는 군왕의 방임도 있었다.똑똑한 소욱은 봉구안이 그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라고 한 목적을 알아차렸다.봉구안도 부인하지 않았다.봉구안은 담담하게 소욱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능연의 잘못도 있지만 능연의 문제뿐만 아니라 황제의 총애가 있어 능연이 그런 짓을 했을 겁니다.”진한길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황후가 지금 황제를 비난하는 건가?’‘황후 정말 대단해!’봉구안은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계속 말했다.“감추고 회피하는 것보다 잘못을 직시해야 합니다.”“황제의 총애가 능연의 의지였습니다. 폐하가 능연을 총애했기 때문에 설지 등 관원들이 떼를 지어 능연에게 달려들었고 그에게 뇌물을 선사했을 겁니다.”“그리고 은총을 독차지하려고 황후 자리까지 넘볼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신첩이 입궁하기도 전에, 신첩이 폐하의 총
곧 명령이 내려졌다.“여봐라! 황후를….”이때, 대전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황후마마를 모셔오라는 태후마마의 명이 있으셨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노려보았다.반면 봉구안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마치 모든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대단한 책사 납셨네.’소욱은 진한 살기가 요동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황후, 평생 태후궁에 살 수 있을 것 같더냐.”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에서 온화한 미소는 사라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변했다.자녕궁.태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황후에게 말했다.“걱정 말거라. 내 평생 널 지켜줄 수는 없겠지만 며칠 시간 끌어주는 것은 가능해. 허나….”태후는 얼굴의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황상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며칠 시간을 끌려는 거라면 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게야. 황후, 더 뾰족한 방법을 생각해야 해.”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하고는 말했다.“감사합니다, 어마마마. 신첩은 이 기간 동안에 출궁을 할까 합니다.”태후와 황제는 그녀가 시간을 끌려고 자녕궁에 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상 그녀는 따로 계획한 게 있었다.자녕궁에 있는다는 것은 핑계고 궁 밖에 나가서 꼭 할 일이 있었다.태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출궁을 한다고?”황후가 몰래 출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봉구안은 더 이상의 설명도 없이 대전을 나가 편전으로 들어갔다.그녀가 떠난 후, 계 상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는 무슨 일로 출궁하려는 걸까요? 태후께서 황후의 출궁을 도왔다는 걸 폐하께서 알면 크게 대노하실 겁니다.”태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황후는 골칫덩어리였던 능연이를 제거해 줬어. 출궁이 아니라 더 무리한 요구를 해도 최선을 다해 도울 거다.”얼마 전, 황후가 갑자기 자녕궁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태후에게 능연이를 제거
말을 마친 소욱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능연이는 바닥에 엎드려 절규했다.“안 돼!”“폐하! 신첩에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왜 이렇게 된 걸까?아무도 해독할 수 없다고 알려진 천수독이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능연이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이대로 유배를 가야 한단 말인가.“안 돼!”자진궁으로 돌아온 소욱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상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황제가 직접 죄명을 나열한 첩지를 공개했고 귀비가 유배를 당했다.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유사양도 마찬가지였다.소욱은 책상 앞에 앉아 속으로 청심주를 읊었다.이것도 그 여자객이 알려준 방법이었다.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시급했다.변방은 여전히 불안정한데 후궁에도 피바람이 불었다.황후를 떠올리면 괘씸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용기에 감탄사가 나왔다.능멸을 당한 후에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밝히려는 여인은 흔치 않았고 그 사실을 자신의 부군에게 알리는 여자는 더더욱 흔치 않았다.세상 여인들이라면 모두 부군의 마음에서 깨끗한 형상으로 남길 원할 것이다.하지만 유독 황후는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밝혀냈다.그녀의 용기는 사내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런 용기가 황제를 기만하고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덮을 수는 없었다.소욱은 반복해서 속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순결을 잃은 황후를 정녕 이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단 말인가?아무리 그녀를 싫어하고 평생 품을 일이 없는 황후라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고 대외적으로 황제의 정실이었다.정녕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묵과할 수 있을까?황후를 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그 후로 그는 또 새로운 황후를 들여야 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다음 황후가 봉장미보다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었다.그녀가 금인장을 잡은 후로 후궁은 질서 정연하게 돌아갔고 그녀처럼 비빈들을 질투하지 않고 조용히 본
봉구안은 먼저 옆방으로 가서 두 관병을 쓰러뜨린 뒤에 그들의 품에서 공문과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 영패를 챙겼다.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소욱은 결국 옛정을 봐서 능연이에게 많은 편의를 주었다. 유배라고는 하지만 결국은 그녀가 신분을 바꿔 다른 곳에서 살아갈 기회를 준 것이다.하지만 봉장미에게는 그런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봉구안은 공문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쓰러진 능연이를 한참 노려보았다.능연이는 인적 없는 무덤가에서 정신을 차렸다.주변에서 시체의 악취가 풍기고 있었고 수풀 속에서 맹수의 눈빛이 언뜰거렸다.주변을 만져보니 뭔가 축축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겁에 질린 능연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악!”그녀는 재빨리 기어일어나서 도망치려 했다.이때, 섬뜩한 검광이 그녀의 눈앞을 스치더니 발목 쪽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능연이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악! 누구야!”등 뒤에 있던 상대가 천천히 돌아 그녀의 앞에 다가와서 섰다.고개를 든 능연이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봉장미! 너였구나!”야행복을 입은 봉구안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능연이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긴 머리는 위로 묶은 상태였고 허리춤에는 검집을 차고 있는 모습이었다.능연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너… 검술을 할 줄 알아?”귀족가에서 곱게 길러진 아가씨가 검술을 알다니!서서히 불안감이 찾아왔다.봉구안은 한쪽 무릎을 꿇고 매서운 눈초리로 능연이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저지른 짓들은 만 천하에 알려졌지만 난 복수를 내 손으로 하는 걸 더 선호해.”능연이가 흠칫 놀라며 뒤로 몸을 젖혔다.그리고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그걸 만 천하에 떠벌렸어? 피해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인 걸 모를 것 같았어? 누군가는 눈치를 챌 거고 그럼 온 나라 백성들이 네가 당한 짓을 알게 될 거야! 넌 날 망친 동시에 너 자신도 망친 거라고! 폐하는 네 황후 지위를 폐할 거고 너 역시 나처럼 만인의 질타
능연이는 겁에 질려 온몸을 벌벌 떨었다.오백이 손을 풀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잠시 긴장을 추스른 능연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봉가는 널 미래의 황후로 키운다고 어릴 때부터 겹겹이 보호했지. 혼례를 올리기 전 가끔 외출하는 것도 비밀에 부쳤어.”“그런 생각은 왜 안 해봤어? 내가 산적을 고용해서 널 해치려 했다고 해도 누군가가 네 일정을 알려주지 않았으면 난 네가 언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봉구안은 싸늘한 눈빛으로 채월을 바라봤다.채월은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마마, 능연이 말이 맞습니다. 나으리께서는 아가씨께 아주 각별하셨죠.”채월은 능연이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말을 돌렸다.“아가씨께서 가끔 외출하실 때면 수행하는 호위는 모두 나으리의 심복이었고 마차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마차를 준비해 주셨지요. 집으로 돌아오는 노선도 수시로 바꾸었고 저택 안에서 심복을 제외한 하인들조차 아가씨의 행적을 알지 못했습니다.”“하지만 그 호위들은 모두 나으리께 충실한 자였고 그들 중에는 비밀을 누설할 사람이 없습니다. 게다가 다 죽고 살아 있는 사람은 소인뿐이고요. 나으리가 비밀을 누설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지요.”봉구안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저택 내부에 밀고자가 있다는 소리였다.“너한테 노선을 밀고한 자가 누구지?”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질문했다.능연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애원했다.“그 전에 기생집에 날 보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그런 곳엔 가기 싫어!”능연이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지만 봉구안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그녀는 다가가서 능연이의 팔뚝에 비수를 꽂고 세게 비틀었다.능연이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이 미친 년!”봉구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넌 나한테 뭔가를 요구할 자격이 없어. 사실을 말하면 편히 죽게 해주지.”능연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이… 이거 놔!”“봉장미, 그날 산적들에게 그냥 널 죽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악!”봉구안은 다시 비수를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