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궁.소욱이 도착했을 때, 봉구안은 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더욱 그녀의 기품을 차갑고 맑게 돋보이게 하여 마치 밝은 달과도 같았다. 그 약은 냄새만 맡아도 쓰디썼는데, 하물며 입에 넣었을 때야 오죽할까. 봉구안은 몸을 일으켜 절을 올리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짐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으니 굳이 예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예, 알겠사옵니다.” 소욱은 자리에 앉아 본래 묻고자 했던 상소문을 떠올리려 하였으나, 그녀의 얼굴이 몹시 창백하고 핏기가 하나도 돌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저 며칠 보지 않았을 뿐인데, 이렇게 초췌해지다니…’ ‘이 영화궁의 하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게야, 주인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고!’ “어의가 와서 맥을 짚어 보았느냐.” 마치 무심히 묻는 듯한 말투로 던졌다. 봉구안은 그저 초췌한 표정으로 소욱을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어의가 왔었사옵니다. 신첩의 몸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연상이 적절하게 말을 보탰다. “폐하, 중전마마께서는 부모님을 그리워하심에 편히 쉬지 못하고 계십니다.” 봉구안은 그 말을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고 온순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소욱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잠시 뒤 무거운 목소리로 반문하였다. “추석 연회가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너는 중궁전의 주인으로서 후궁의 귀비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봉구안의 눈빛 속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예, 신첩도 잘 알고 있사옵니다. 궁궐 안에 들어오면, 원래 가족 인연은 얕아지는 법이옵니다.” 소욱은 이 말을 빌미로 그녀를 추궁하였다. “그 상소문은 그대가 명절 선물에 넣은 것이냐?” 연상은 놀라서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폭군이 그녀의 이상 행동을 볼까 두려워 어쩔 줄 몰라했다. 봉구안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사모님, 저는 단지…”교먹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맹 부인은 재빨리 그 서신들을 챙겼다.그녀는 그것들이 봉구안의 물건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봉투에 ‘내 사랑 구안이에게’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맹 부인은 정색한 표정으로 교먹에게 따져물었다.“지금 뭘 하려고 했던 거지? 이것들을 불태우려고 했었니?”교먹은 옷소매를 꽉 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대낮에 병기를 들고 무예를 수련하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오해세요, 사모님. 저… 저는 단지… 이것들을 남겨두었다가 혹여나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언니의 명성에 누가 될까 봐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맹 부인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참 세심하기도 하지. 하지만 이것들은 네 언니가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불태우기 전에 구안이의 의중은 물어봤느냐?”교먹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사모님, 사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단지 언니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요. 언니는 이제 일국의 황후가 된 몸인데 혹여나 폐하께서 언니가 진작에 사내랑 평생을 약속했던 것을 아신다면…”교먹은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생각이 단순하고 어리버리한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그래서 맹 부인도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고 사랑을 주었지만 지금 보니 이 아이는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단순한 아이가 절대 아니었다.“네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물며, 네 언니는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하는 사람은 구안이어야 한다.”교먹의 두 눈이 순간 어둡게 빛났지만, 이내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왔다.“예, 사모님.”‘언니가 과연 돌아올 수 있을까?’교먹이 또 부주의란 핑계로 봉구안의 물건들을 처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맹 부인은 말했다.“네 언니의 물건들은 내가 직접 보관할 테니 넌 일단 나가 있거라.”교먹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분명 자신의 방인데 주인
태황태후는 대부분 시간을 옥양산에 거주했지만 궁 안에 적지 않은 자기 사람들을 두고 있었다.태황태후가 말했다.“추석연에서 황후는 황상을 위해 목숨을 걸고 화살을 막아냈지. 하지만 아직 아무런 포상도 받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황상은 황후가 입만 열면 뭐든 들어주겠노라고 약속했지. 황후의 오라버니를 만호후에 봉하는 일도 흔쾌히 허락해 줄 수 있다고 하였다.”“하지만 황후는 지금까지 아무런 포상도 바라지 않았다.”모용선은 태황태후의 일깨움을 알아들었다.황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는 법.만약 황후가 모용 가문을 위해 나서준다면 황제는 분명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모용선은 태황태후께 감사인사를 올리고 만수궁을 나가 곧장 영화궁으로 향했다.영화궁.모용선은 내전에서 무릎을 꿇고 한사코 일어나지 않았다.봉구안은 의자에 앉아 느긋한 자세로 약을 마시고 있었다.그녀의 표정은 늘 그렇듯 평온했으며 미동 하나 없었다.“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꿇고 있어도 난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모용걸 같은 사람을 구해줄 이유가 없었다.군량을 횡령했을 뿐만 아니라 겨울에 장령들이 입을 솜옷, 배를 채울 양식까지 횡령한 놈이었다.그녀가 가장 증오하는 부류가 이런 인간쓰레기였다.모용선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마마께서 오라버니의 목숨만 구해주신다면 신첩은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마마 제발…”봉구안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설마 내가 정 귀인 너의 오라버니를 해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모용선은 입을 뻐금거리며 최대한 불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때,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황제 폐하 납시오!”봉구안은 약그릇을 내려놓고 문쪽을 바라보았다.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안정된 걸음걸이로 위풍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폐하를 뵙습니다.”내전 안의 뭇 시종들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모용선은 공손히 예를 행했다.소욱은 옷자락을 잡고 상석에 앉아 싸늘한 눈으로 모용선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재.대리사경이 엄숙한 얼굴로 보고를 올렸다.“폐하, 관병들이 모용걸의 저택에서 수색해낸 장부입니다. 군량만 횡령한 것이 아니라 운성상인들로부터 뇌물까지 받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적우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남제는 홍매강의 관할권을 장악하고 선박과 매매 금지령을 내렸다. 모용걸은 그들에게 관선으로 위장하여 홍매강을 통행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운성 상인들은 고가로 자철광을 적우부에 팔고 모용걸은 그들로부터 3할의 수고비를 받았던 거로 알려졌습니다.”소욱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했다.몰래 자철광을 타국에 내다 팔다니.나라를 팔아먹은 죄로 모용걸은 열 번 죽여도 모자란 놈이었다.오마분시로도 그가 저지를 죄를 처벌하기엔 부족한 것 같았다.당일, 감옥에 수감된 모용걸은 혹독한 심문을 못 견디고 모든 죄를 자백하였다.그의 말에 따르면 운성의 관료와 상인, 도적들이 결탁하여 나라가 운영하는 자철광으로 수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관부에 납부하는 자철광은 대부분 다른 광석으로 채워졌다. 관부의 매수가가 너무 낮다는 것이 이유였다.반면 적우부에 파는 자철광은 상등품이었다.이런 비밀 거래는 이미 선황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사실을 전해들은 소욱은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왔다.“운성이 아주 썩어들어가고 있었구나!”분명 엄격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대리사경이 계속해서 말했다.“폐하, 모용걸 사건을 듣다 보니 몇몇 흠차 대신들의 죽음이 떠올랐습니다.”“선황께서 즉위하셨을 때, 여러 번 흠차 대신을 운성으로 보내 자철광의 채굴 과정을 감독하게 하였죠.”“하지만 그 관원들은 모두 인황산을 경과할 때 벼랑에서 추락하여 숨졌습니다.”“귀안록에 따르면 인황산은 산세가 가파르고 험준한 산봉오리로 이루어져 있어 평소에도 원혼이 자주 출몰한다는 괴담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흠차 대신들이 모두 벼랑에서 추락하여 시신도 찾지 못하게 되었지요.”“그 뒤로 황성의 대신들은 운성으로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
봉구안이 일어서며 말했다.“폐하, 사복 순방은 대외적으로 위장 신분이 필요합니다.”“신변에 호위무사들을 많이 데리고 나가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일부 지방 관료들은 패주 노릇을 하며 각지에 자기 사람들을 풀어 동향을 관찰하게 하지요. 눈에 띄는 외부인이 성에 진입하면 경계를 불러일으킬 것이고 놈들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신첩과 동행하면 폐하의 부인으로 위장할 수 있고 오라버니는 많은 강호인사들과 인맥이 있으니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소욱은 부인이라는 말에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그녀가 이렇게 출궁을 주장하는 이유는 아마 그의 안위를 걱정해서일 것이다.그녀는 내력을 희생해가며 그를 위해 해독을 해주었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를 위해 날아오는 화살을 대신 맞지 않았는가.처음에는 황후가 사복 순방에 동행하겠다고 하였을 때 황당하다고만 생각했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번 출궁은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후는 출중한 무공실력을 지니고 있고 침술로 독을 해독할 수도 있으니 중요한 순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그리고 그녀가 제기한 이유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건 황후가 진짜 봉장미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녀가 어릴 때부터 무공을 연마한 것에 관해서 그는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진길이 조사한 데 의하면 봉장미는 어릴 때부터 가야금과 바둑, 서예와 그림을 배웠고 나중에는 황성에서 손에 꼽히는 여 수재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머리가 비상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하지만 그가 아는 봉장미는 두터운 내공에 각 문파의 무공 초식을 꿰고 있으며 아주 뛰어난 경공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고 그것은 절대 몰래 한가할 때 배워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하필이면 여인이라니!하지만 그녀가 분신술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아마 해내기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분명 그 과정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을 것이다.그는 이번 출궁의
겉보기에는 아주 초라한 방이었는데 침상 위에 온갖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침상 옆의 욕조 주변에는 전신 거울이 놓여 있었다.창가에는 긴 의자가 있었는데 모양이 굉장히 독특했다.객잔 주인은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을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우리 객잔에서 가장 잘나가는 방인데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소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괜찮군.”그는 진길을 시켜 은화를 지불하라고 지시했다.객잔 주인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소욱이 안으로 들어간 후, 봉구안도 당당히 안으로 들어갔다.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오라버니께서 그러셨는데 많은 검은 객잔들이 환각향을 쓴다고 합니다.”소욱은 별로 개의치 않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이때, 봉구안이 갑작스럽게 그를 밀쳤다.“조심하세요!”벽 안쪽에 숨겨진 장롱이 보였는데 건드리기만 하면 화살을 발사할 것 같았다.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한 후에, 소욱은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장롱 안에는 민간인 화가가 그린 춘궁도가 들어 있었다.소욱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불살라 버리라고 한 것들이었다.객잔은 관부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금기된 물건들을 숨겨진 장롱 안에 보관한 듯했다.멀찌감치 서 있던 봉구안이 궁금한 얼굴로 다가오자 소욱은 장롱 문을 닫고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별거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봉구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9월 중순의 기온은 점차 싸늘해지고 있었다.소욱은 방을 봉구안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어딘가로 나가서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봉구안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신경도 안 쓰였지만, 그래도 홀로 방에 있자니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다음 날 아침, 소욱은 진길의 방에서 나왔다.여전히 풍채 늠름한 소욱에 반해 진길의 눈가는 거뭇거뭇했고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문을 열고 나온 봉구안은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폐하는 사실 여인이 아닌 사내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닐까?’소욱은 당연히 그녀가 무슨 생각을
거대한 바위의 위력은 마차를 순식간에 산산조각내 버렸다.진길의 고함이 산골짜기에 울려퍼졌다.위기의 순간에 소욱이 마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옆에 있던 여인은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바깥으로 이끌었다.그녀는 이미 진길이 주의를 주기 전에 바위의 동향을 예측하고 움직였던 것이다.그들이 마차를 벗어난 순간에 마차는 바위에 짓눌려 산산조각이 났다.놀란 말은 미친듯이 질주하다가 벼랑으로 추락했다.3인은 두 개의 거대한 바위 사이에 갇혀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후퇴할 수도 없었다.장검을 빼든 진길은 소욱의 앞을 가로막고 주변을 경계했다.“나리, 분명 놈들이 주변에 숨어 있을 겁니다!”소욱이 시선을 내리자 황후는 여전히 그의 손을 잡은 채, 진길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진길과 다른 점은 진길은 방어에 치중하였다면, 봉구안은 출구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바위가 낙하하던 순간, 그녀는 절대 두 개뿐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고 분명 세 번째 바위가 떨어져 그들의 목숨을 취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험난한 산길에서 전방은 바위에 의해 가로막혔으니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갑자기, 봉구안은 벼랑끝으로 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진길이 비명을 질렀다.“위험합니다!”그는 하도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마마라는 칭호까지 붙일 뻔했다.봉구안은 진길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곧이어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래로 뛰어야 합니다!”진길은 순간 아연실색했다.죽음을 자초하는 길 아닌가!봉구안은 벼랑 아래쪽을 가리키며 계속해서 말했다.“바위벽을 타고 자란 덩굴은 미인가시라는 품종인데 뿌리가 바위벽 내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어 줄기는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뛰어내리면서 덩굴을 잡는다면...”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는 소욱을 끌고 아래로 뛰었다.진길은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를
봉구안은 사내의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나가서 지원군이라도…”소욱이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하지만 그의 손은 봉구안의 손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봉구안은 안간힘을 써서야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손목을 보니 이미 뻘건 자국이 나 있었다.‘얼마나 꽉 잡고 있었던 거야…’봉구안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뜨거운 물을 들고 들어온 노부부가 그녀를 보고 재빨리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아씨!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혹시… 이대로 저 사내를 두고 떠나시려고요?”봉구안은 괜히 찔려서 얼굴을 붉혔다.노부부가 말했다.“아씨! 이대로 가시면 안 되지요! 아씨가 가면 저 안의 사내는… 혹시라도 이대로 죽으면 우리 두 늙은이들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입니까!”그들은 봉구안이 사내를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갈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봉구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최대한 부드럽게 그들에게 말했다.“두고 떠나는 게 아니라 하인들과 함께 동행했는데 그 하인을 찾으러 가는 겁니다. 부군께서는 이미 고비를 넘겨서 걱정하지 않으셔도…”“어쨌든 이대로 떠나시는 건 아니됩니다! 우린 평범한 백성들이고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습니다!”할아버지는 강경한 태도로 대문을 잠가버렸다.할머니는 대야를 내려놓고 봉구안을 안으로 등떠밀었다.어린 손자도 의심의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 문이 밖에서 잠겼다.한 시진 후.소욱은 정신을 차렸다.눈을 뜬 그에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방 문을 바라보고 있는 봉구안의 모습이었다.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봉구안도 침상에서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고개를 돌리자마자 약간은 우울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화살에 부상을 입은데다 높은 곳에 추락하다가 뼈를 다쳤는지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모양이었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