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욱의 팔 상처는 깊지 않아 살갗만 약간 벗겨진 정도였다.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을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가 진짜 아파하는지, 아니면 연기인지 봉구안은 금세 분간할 수 있었다.지금은 전자였다.봉구안은 곧바로 군의관을 불러들였다.그러나 소욱은 여전히 강한 척하며 말했다.“짐은 아무렇지도 않다…”군의관은 그의 맥을 짚고, 상처를 다시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이상을 찾지 못했다.봉구안은 군의관을 움켜쥐고 단호히 물었다.“그 화살은! 제대로 보았느냐?”군의관은 잠시 얼어붙었다.“화, 화살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사옵니다…”봉구안은 그를 놓아주고 소욱에게로 눈길을 돌렸다.소욱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고 있었다.이마와 목덜미의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그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숨기려 했지만, 제왕의 위엄이 손상될까 걱정되는 기색이 역력했다.군의관이 더 있어 봐야 무용하다고 판단한 봉구안은 그를 물러가게 했다.군의관이 나가자, 소욱은 고개를 들어올렸다.그의 눈에는 붉은 핏발이 서려 있었다.“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그가 이제 믿을 수 있는 이는 봉구안과 진한길뿐이었다.봉구안도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그는 분명 중독되지 않았는데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그러던 중 봉구안은 문득 남강의 여자들이 죽어갔던 일이 떠올랐다.그녀는 소욱을 향해 불쑥 물었다.“전하, 저를… 원하십니까?”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봉구안의 눈빛은 엄숙하고 단호했다.그 어떠한 정욕적 뉘앙스도 없었다.“제가 의심하기로, 전하께서는 남강의 여자들처럼 진단이 어려운 독에 중독된 것이옵니다.”소욱은 몸속에서 밀려드는 격통을 참고 있었다.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듯 목이 타들어 갔다.“화살에 독이… 있었던 것이로구나…”소욱이 힘겹게 말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리하옵니다.”그녀는 바로 진한길을 불러들이고 당부했다.“폐하를 잘 지키시오!”진한길은 사태를 파악하지
이 순간, 완부옥은 혈기가 잔뜩 끓어올랐다.그녀는 소환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평소에는 입으로만 희롱하며 진정으로 강제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이번에 그녀는 은혜를 빌미 삼아 소환을 곁에 붙잡아두려 했는데, 뜻밖에도 소환이 정말로 응한 것이다.“너…”완부옥은 침을 삼키며 말을 더 잇지 못했다.그러나 봉구안이 허리띠를 풀고 옷깃을 여미자, 그녀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가슴싸개?그녀가 좋아했던 사람이… 세상에, 여인이었던 것이다!완부옥의 얼굴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아… 아니, 어찌…”봉구안은 가짜 목젖을 떼어내고 태연히 인정했다.“맞아. 사실 난 여인이었어.”완부옥은 몸이 굳어져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다.“여인… 네가 여인이라니!”그녀의 손은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봉구안은 다시 옷을 정돈하고 진지하게 강호의 예를 올려 사죄했다.그녀가 진실을 고백한 것은 완부옥의 요구 때문만이 아니었다.완부옥의 진심 어린 집착을 깨닫고 더 이상 그녀를 속이며 시간을 허비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여러 번 자신이 완부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완부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제야 그녀가 완전히 체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너와 나는 오랜 벗이었지. 너에 대한 나의 진심은 결코 거짓이 아니야.”“그러나 짐짓 너를 기만하여 오해를 안긴 것은 내 잘못이 맞아.”“오늘 내가 여인임을 밝힌 것은 용서를 바라서가 아니야. 단지, 네게 무의를 빌리기 위함이지.”“일이 끝난 뒤 마땅히 매를 맞을 테니, 지금 당장은 화를 가라앉히도록 해…”봉구안은 완부옥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완부옥이 이 기만을 용서할 리는 없었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웠다.완부옥은 뻣뻣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그리고 가짜 목젖을 만지며 이를 악물었다.“네가 여인이라니, 정말…”갑자기,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정말 잘됐구나!”“??!!”완부옥의 웃음소리는 매우 기괴했다.그 소리에 봉구안
남대영.눈먼 무의가 장막 안으로 이끌려 들어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진단을 내렸다.“과연 독입니다. 이는 확실히 고독이 맞습니다!”소욱은 눈썹을 단단히 찌푸렸다.통증을 참기 힘들 때마다, 그는 본능적으로 봉구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봉구안은 오로지 무의를 주시하며 물었다.“그대가 독을 진단했으니, 해독할 방도가 있겠는가?”무의는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비록 고독이 맞으나, 이는 제가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독이라 손을 쓸 방도가 없습니다.”이 말을 듣자 곁에 있던 진한길은 분노에 차 외쳤다.“고독이라면 남강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그는 소욱에게 청을 올렸다.“신하가 즉시 군을 이끌고…”“물러가라.” 봉구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진한길은 황제를 걱정하는 마음에 자제력을 잃은 것이었다.“신이 밖을 지키겠습니다.”무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뭔가 들으려는 듯했다.그는 자신이 지금 남제의 군영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봉구안은 이어 물었다.“그대가 고치지 못한다면, 다른 무의들은 고칠 수 있겠는가?”무의는 대답했다.“제가 해독할 수 없는 고독이라면, 남강 전체를 둘러보아도 이를 해독할 이는 없을 것입니다.”봉구안의 표정은 차가웠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를 깊이 숙고하는 듯했다.잠시 뒤, 그녀는 오백을 불러들여 쉰 듯한 목소리로 명했다.“무의를 남강으로 돌려보내거라.”오백은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눈먼 무의는 나이가 많아 걸음이 더뎠다.장막 밖으로 거의 나갔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제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는 음고입니다.”“부인, 남편 분께서 밤을 버티어 내고 내일 아침 해를 본다면, 희미하나마 생명의 불씨가 있을지 모릅니다.”봉구안은 이 말을 듣자마자 진한길에게 명령했다.“뜨거운 물을 데우라! 많이 데우도록 하라!”진한길은 이 시점에 이르러 황후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다.한 시진 뒤, 봉구안은 소욱을 데리고 임시로 마련한 수조로 향했다.거기엔 임시 장막이 쳐져 있었고,
진한길은 차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그는 곁에 찬 패도를 풀어 봉구안에게 넘기고는, 단호히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봉구안은 대신 장막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잠시 후, 장막 안에서 살의가 어린 굵직한 목소리로 물러나라는 외침이 들려왔다.봉구안은 즉시 안으로 들어갔고,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진한길이 물속에서 무릎 꿇은 채, 소욱의 허리띠를 풀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단호히 외쳤다.“멈추거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진한길은 대장부임에도 마치 큰 치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두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황후마마, 마마께서 분명… 폐하를 모시라 하셨사옵니다.”봉구안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내가 말한 것은 그저 폐하 곁을 지키라는 뜻이었지, 손대거나 다른 행동을 하라는 것이 아니었다!”진한길은 이 말을 듣고서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곧장 뒤로 물러나며 다급히 말했다.“그저 지키라는 말씀이셨군요…”알고 보니 그는 방금, 그 일을 마친 후 자결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진한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설명이 불분명했던 탓임을 깨달았다.그러니 진한길이 들어갈 때, 마치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결연했던 것이다.그 순간, 소욱은 진한길에게 받은 충격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힘이 빠진 채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봉구안은 즉각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에 들어가 그를 부축했다.진한길은 머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황후마마, 차라리 신은 밖에서 지키겠사옵니다.”봉구안은 무언가 지시하려던 찰나, 소욱이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그녀는 소욱을 바라보았다.그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마치 서서히 양기를 빼앗기는 사람처럼 온몸이 잔뜩 경직된 채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하지만 아까와 같은 무력감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듯했다.봉구안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소욱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더니 그녀의 귀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너, 왜 날 밀어내지 않는 거지? 혹시 내가… 죽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봉구안은 갑작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소욱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입술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렇다면, 영원히 날 밀어내지 말거라. 아니면, 정말로 죽어버릴 테니 말이다.”그가 그녀 허리 뒤에 둔 손으로 그녀를 조금 더 위로 끌어올렸다.몸에 닿는 무언가를 느낀 봉구안은 깜짝 놀라 크게 몸부림쳤다.잔잔하던 수면이 순식간에 요동쳤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 소욱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다.“내가 맞은 화살, 그건 너를 위해 받은 것이다.”그가 말을 마치자, 품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소욱은 조금 미안한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소장군, 너는 이렇게 정에 얽매이면 안 되는 사람이야.”…한편, 진한길은 항상 장막 밖을 지키고 있었다.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남자의 거친 숨소리, 여인의 억누른 신음소리…이 조용한 밤에 그 소리는 유난히 들썩였다.황제와 황후의 명이 없으니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멀리 떨어질 수도 없었다. 혹여 황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다.그래서,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들었다.장막 밖으로 새어나온, 마치 악마의 낮은 탄식 같은 그 소리를.“단회욱은 이미 죽었어. 내가 네 남편이고, 네 남자야.”“하지만, 왜 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도 싫은 것이냐?”약 한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장막 밖으로 나왔다.그러나 진한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황제가 황후를 품에 안고 나온 모습이었다.진한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황후의 몸은 황제의 외투로 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은 흩어져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으며, 미약한 숨소리를 내뿜고 있었다.반면 황제는 중의만 걸친 차림이었다.
남대영.대군들은 황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손덕방은 속으로 하늘에 감사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폐하께서 군영에서 무사히 돌아가시니, 하늘이 도우셨사옵니다!”그는 격하게 경례하며 소리쳤다.“장수 손덕방, 폐하와 황후마마의 출발을 배웅하겠습니다!”소욱은 올 때는 말을 탔으나, 돌아갈 때는 마차를 타기로 했다.마차 안에서 그는 손수 귤 하나를 까서 반으로 나눠 봉구안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리 좀 먹어보거라.”봉구안은 아무런 표정 없이 얼굴을 돌리며 답했다.“먹고싶지 않사옵니다.”소욱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그래, 짐도 사실 귤 따위는 좋아하지 않지. 시큼한 것은 줄곧 입맛에 맞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황후와 짐의 입맛이 참으로…”그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봉구안은 갑자기 탁자 위에 놓인 귤을 집어들더니 한 입에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자신과 맞서려 한다는 걸 알고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오히려 흥미를 느낀 듯, 미소를 지었다.최소한 어젯밤처럼 냉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때, 마차 밖에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급히 전해드릴 밀서가 있사옵니다!”소욱은 손을 내밀어 밀서를 받아들었다.그러면서 봉구안을 힐끗 바라보며 밀서를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네가 먼저 보겠느냐?”봉구안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무뚝뚝하게 답했다.“그런 농은 그만두십시오. 어찌 중요한 정무를 두고 저와 농을 하는 것입니까?”소욱은 밀서를 열어 훑어본 뒤,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그는 곧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어젯밤 짐이 네게 약조했던 큰 선물, 이미 준비해 두었다.”봉구안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는 그런 건 필요 없사옵니다.”소욱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녀를 제 앞으로 잡아끌더니, 허리를 가로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짐의 사람들이 독을 쓴 그 검은 옷을 붙잡았는데, 이 선물도 필요 없다 하겠느냐?”봉구안은 순간 놀라며 되물었다.“정말이십니까?”“짐이 거짓을 말하
황성.진왕이 군량을 빼돌렸다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증거가 명백했으므로, 서왕은 황제의 밀명을 받아 진왕을 감옥에 가두었다.진왕은 억울함을 외치며, 서왕이 자신을 모함한 것이라 주장했다.이 일은 태황태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하지만 태황태후가 나서도 서왕은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한편, 황제가 이끄는 대군은 반송길에 접어들었고, 사수성을 나선 후 여정이 험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결국 군은 야영을 선택했다.봉구안은 말했다.“소첩은 마차 안에서 지내겠사옵니다.”같은 자리에서 소욱과 함께 지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요며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니 매우 불편했다.소욱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지치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는 이들 부부의 냉랭한 분위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요 며칠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자주 다투시는 듯하네.”“그러게. 얼마 전까지는 화목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그중 한 병사가 조심스레 말했다.“내가 들은 게 있네.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잘못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모두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서 말해 보게.”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어제 말에 물을 먹이러 갔는데, 마차 안에서 황제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사과하는 소리를 들었지.”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거짓말 말게나.”병사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진짜라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직도 화났느냐? 어서 이리 와서 네 작은 손을…’”“닥치게!” 다른 병사가 발로 찼다.농담이라며 대꾸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그 병사는 엉덩이를 만지며 헤헤 웃었다.사실 그들 간의 대화는 그 병사가 지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실제로 황제가 황후에게 사과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하였다.…마차 안.봉구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었다.한밤중, 누군가 마차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긴장하며 몸을
쾅!봉구안의 주먹이 날아들자, 소욱의 턱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다음 날 밤, 또다시 장막을 버려두고 봉구안의 곁으로 몰래 들어왔다.이번에는 행동을 조심하여 그녀에게 손을 대거나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누워만 있었다.그 덕에 봉구안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묵인하였다.하지만, 이내 그의 본성이 또 드러나고 말았다.며칠 뒤, 그들이 묵은 역참에서 사건이 벌어졌다.밖에서는 두 사람이 화목한 부부처럼 보였으나, 문이 닫히자 봉구안은 바로 바닥에 자리를 깔기 시작했다.그러나 소욱이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리며 말했다.“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너는 침상에서 자거라.”봉구안은 단호히 거절했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황제이십니다. 당연히 침상에서 주무셔야 합니다.”그러자 소욱은 느긋하게 반박하였다.“황제와 황후라면 본디 같은 침상을 쓰는 것이 맞지 않느냐. 이후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야되겠구나…”이 말에 봉구안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러자 그녀는 냉랭하게 말했다.“그러하오면, 이 바닥은 폐하께 양보하겠나이다.”소욱은 잠시 벽 쪽을 보더니 천천히 바닥에 누웠다.그는 조용히 누웠으나, 몸을 옆으로 돌려 침상 위의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가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침상에 올라가자, 곧바로 비단 장막이 내려졌다.밤이 깊었고, 봉구안은 편히 잠들었다.그러나 한밤중, 그녀는 누군가 곁에 있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그곳에 누워 있던 이는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쳤으나,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닥에 쥐가 있어, 침상에서 자는 것이 안전하겠다.”봉구안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쥐라니요? 이는 분명 폐하께서 지어낸 거짓말이옵니다!”소욱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정말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봉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쥐가 있더라도, 폐하께서 그것을 무서워하실 리가 없사옵니다.”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섭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
어전.“폐하, 서왕 전하와 왕비마마께서 무사히 구출되었습니다! 서왕 전하께서 지금 궁문 밖에 대기 중이며, 아뢸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이 말을 들은 소욱은 지체 없이 명하였다.“어서 들라.”얼마 지나지 않아, 서왕은 발걸음을 옮겨 어전으로 들어섰다.그는 문턱을 넘자마자 곧장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신, 폐하를 뵙나이다!”소욱은 그 기색을 살피고, 정신이 온전한 것을 확인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무사하다니 다행이로구나.”헌데, 서왕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폐하, 신이 납치당한 이유는… 그들이 신의 피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시던 때가 떠올랐습니다.”소욱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그는 눈빛을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았다.“너의 피를 왜 필요로 한단 말이냐? 그자들이 정말 피를 취하였느냐?”서왕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취하지는 못하였사오나, 그들의 목적이 분명 피에 있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신 그 사건 역시, 이번 일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소욱의 미간이 좁게 모아졌다.그는 전대의 왕부, 곧 서왕의 아버지에 관한 억울한 일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 일로 선황은 오랫동안 후회하며 침식을 잊고 괴로워했었다.그래서 소욱 또한, 이후 누구에 대해 반역 운운하는 소문이 돌 때마다 쉽게 믿지 않았다.선왕이 저지른 실책을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허나 지금 와서 다시금 드러나는 의혹은 그 죽음이 단순한 누명이나 정치적 숙청이 아닌,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소욱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자세히 말해 보아라.”……황성 서쪽.봉구안의 행차가 한적한 관로에 이르렀을 때, 한 일행이 그녀를 막아세웠다.오백이 곧장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으나, 막아선 이들이 익숙한 인물임을 곧 알아보았다.바로 자재각을 지키던 소욱의 친위 호위병들이었다.그들은 마차를 둘러싸며 호위 진형을 갖추었다.“마마,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를 궁으로 모
소욱은 한참을 고심한 끝에,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천명을 믿지는 않았으나, 담대연이 말한 ‘인성’은 부정할 수 없었다.봉구안은 언제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과거 그녀가 이미 단회욱을 마음에서 지웠음에도, 그를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던 일은 지금도 눈에 선했다.서여국은 외환보다 내우가 깊은 나라였다.아무리 소주와 정국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안으로는 여전히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이번에 봉구안이 직접 서여국에 가게 되면, 그 혼란 속에서 국주로 추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녀의 성정상 그 책임을 외면하진 못할 터였다.결국엔 남제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소욱의 가슴을 옥죄었다.담대연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천하통일. 그러나 그보다 무서운 건, 그 길목에서 아내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진한길.”“신, 여기 있습니다!”“황후를 몰래 다시 데려오거라. 사람을 붙여, 은밀히.”진한길은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폐하께서 왜 이리도 갈팡질팡하시는 걸까………한편, 황성 서쪽 교외.담대연이 도착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지하궁의 비밀 통로를 찾아냈다.그가 손을 쓰자 거대한 암석이 옆으로 밀려나며, 숨겨진 지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담대연은 호위들에게 엄중히 이르렀다.“이곳은 함정과 기계장치가 많습니다. 제 발을 따라오십시오. 절대 멋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명심하겠습니다!”……지하궁 내.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서왕과 완부옥은 이미 허기와 피로로 맥을 잃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그 인물은 이전에 죽은 자의 시체를 발견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시체를 끌고 나갈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죽음은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시체를 처리한 뒤, 그자는 곧장 서왕을 데리고 가려 했다.완부옥은 그를 향해 소리쳤다.“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대답은 없었다. 그저 서왕을 밀어내듯 이끌 뿐이었다.하지만, 그들은 이미 내공
그 뱀은 영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슥, 하고 순식간에 주실 안으로 기어들어가더니 어디에 숨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뱀을 잡기 위해선 황후의 물건들을 건드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반드시 폐하께 고해야 할 사안이었다.때마침 소욱은 밤이 깊어도 봉구안이 그리워져 자유각을 찾았다.호위들은 이 일을 곧장 아뢰었다.소욱의 눈썹이 짙게 찌푸려졌다.그는 친히 방으로 들어가 사방을 뒤적이다, 마침내 침상 위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뱀을 발견하였다.그 순간, 그는 뱀의 눈과 마주쳤다.소욱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이놈을 당장 잡아내라…”막 명하려던 찰나, 그는 그 뱀이 어딘가 익숙하단 걸 느꼈다.이 뱀은… 분명 완부옥이 기르던 그 뱀과 닮아 있었다.완부옥과 서왕이 함께 실종된 걸 떠올린 소욱은 곧 심중에 짚이는 바가 있었다.그는 즉시 명하여 뱀을 그물망에 넣게 한 뒤, 서왕부로 보내어 확인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 유화가 그 뱀을 확인하였다.그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억누르며 가까이 다가갔고, 잠시 후 단호하게 말했다.“왕비마마께서 기르던 뱀입니다.”자유각.소욱은 전갈을 받은 후, 이 일에 더없이 의아해졌다.완부옥의 뱀이 어찌 자유각까지 온단 말인가?설령 이 뱀이 길을 안다 하여도, 돌아간다면 당연히 서왕부로 가야 할 터였다.그는 곧 봉구안에게 전령 비둘기를 날렸다.그 시각, 봉구안은 황성을 갓 벗어난 참이었다.편지를 받아든 그녀는 곧장 완부옥의 의도를 알아차렸다.예전에 완부옥이 똑같은 짓을 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곧장 회신을 써서 다시 소욱에게 전했다.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봉구안은 잠시 고심한 끝에, 두 번째 편지를 써 보냈다.그 안엔 한 마디 당부가 적혀 있었다.[폐하, 부디 경솔한 행동은 삼가 주시옵고, 무엇보다 폐하의 안전을 우선으로 삼으소서.]소욱은 첫 번째 편지를 받고 곧장 진한길을 불렀다.“서왕의 흔적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몇 사람을 데려가 뱀을 풀고, 그 자취를 따라가 보아라.”“예, 폐
지하궁은 온통 어둠뿐이었다.완부옥과 서왕은 감금되어 있던 방을 빠져나왔으나, 사방이 캄캄하여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출구를 찾는 것조차 막막하였다.서로 떨어질까 염려된 완부옥은 명령조로 말했다.“제 옷소매를 붙잡아요. 바짝 따라와요.”“알겠다.” 서왕은 그녀의 뒤를 따르는 수행자처럼 움직였다.그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조심하거라. 혹시 저들이…”“쉿. 소리 들리십니까?”완부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그 순간, 어둠 속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둘은 그 자리에서 숨을 죽인 채, 벽에 몸을 바짝 붙여 섰다.다행히도 어둠이 그들의 몸을 감추었고, 다가오던 자는 그들을 발견치 못한 채 멀어져갔다.발소리가 사라지자, 완부옥은 서왕의 귀가에 바싹 다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벽을 더듬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보일 겁니다.”서왕이 대답하였다.“네가 앞장서거라. 나는 네 옷자락을 붙잡으마.”“……”‘참, 한 손가락도 까딱 안 하려 드는군.’예전 소환과 함께 위기에 빠졌을 때는 달랐다.그저 조금 투정만 부리면, 소환은 그녀를 안고서 척척 길을 찾아주곤 했다.‘하… 또 소환이 그리운 하루네.’완부옥은 ‘짐짝’ 하나를 등에 지고서 벽을 더듬으며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한 걸음마다 온몸이 긴장되었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적들의 기척에 늘 귀를 곤두세워야 했다.지나치게 어두운 환경에 눈이 점점 아파왔고, 이윽고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걸음을 멈췄다.서왕은 그녀가 지친 줄 알고 말했다.“내가 앞장서마. 넌 내 옷자락을 붙잡거라.”완부옥은 비웃듯 말했다.“이제야 남자였던 게 기억난 겁니까?”“……”그녀의 말은 확실히 가시가 있었다.그러나 생각해보면, 이 모든 위기는 결국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엮인 결과였다.명색만 아내인 그녀가 이토록 의리를 지닌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다.그리하여 둘은 번갈아가며 벽을 더듬었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게 돌고 돌다가 결국, 처음 그 시체가
완부옥은 지금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자만했던 탓에 전부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서왕은 그저 이름만 걸친 지아비일 뿐, 생사 여부는 그녀와 무관한 일이었다.허나 그를 구하겠답시고 나섰다가 결국 본인까지 덩달아 갇혀버린 셈이었다.“정말이지, 손해도 이런 손해가 또 있을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지금 가장 급한 일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완부옥은 숨을 죽이고 목소리를 낮추어 서왕에게 말했다.“제가 폐하보다 먼저 깨어났습니다.”“이놈의 곳은 온통 함정투성이인데다, 한밤중이면 어딘가에서 귀신 울음소리 같은 것까지 들려옵니다.”“도망치려면 단번에 노려야 합니다.”“그러니 우선 생각해보세요. 대체 어떤 자가 폐하를 납치했겠습니까? 목적을 알아야 그것을 역이용할 수 있습니다.”서왕은 긴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딱히 떠오르는 자가 없다.”그는 평소 온화하고 무던한 성격이었기에 원한을 살 일이 별로 없었다.완부옥은 그런 그를 보며 속이 터졌다.“정말 생각 안 나십니까?”“어찌 되었건 노린 건 폐하였고, 전 구하러 따라왔다가 덤으로 잡힌 겁니다!”서왕은 머리를 부여잡았다.“미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안 되는구나…”완부옥은 이를 갈았다.“그럼 지금 움직일 수는 있습니까? 무기는 있습니까?”서왕은 한숨을 내쉬었다.“전신에 기운이 없구나”“게다가 발엔 쇠사슬까지 채워져 있지. 무기라니, 입궐할 때 무기를 지니는 건 금지 아닌가.”완부옥은 말문이 막혀 한동안 침묵했다.서왕이 조심스레 물었다.“그쪽은 어떠한가. 몸을 움직일 수는 있겠느냐?”“내가 움직일 수 있었으면 진작 나갔다!”완부옥은 못마땅하다는 듯 쏘아붙였다.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혹시 약쟁이 무리의 짓이 아닐까요?”최근 조정에서 집중적으로 수사 중인 사건이었고, 서왕이 맡았던 설가 조사도 결국 그 사건과 맞닿아 있었다.서왕은 반박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그때였다.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하지만 바깥에서조차 한 줄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서왕이 누군가에게 노려질 줄은 말이다.소욱은 곧바로 도성의 모든 성문을 봉쇄하도록 지시하고, 서왕의 행방을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색을 명했다.아울러 도성 안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제보를 구하게 하였다.서왕부의 호위들 또한 사태 발생 직후 각지로 흩어져 수색과 감시를 병행했다.이튿날, 성 외곽에서 한 무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유화를 발견했다.유화는 서왕의 호위무사로, 전날 서왕이 꾀임에 빠져 마차에 올라탔을 때도 곁에 있었다.그가 정신을 차리자 곧 일행에게 상황을 설명했다.“마차가 중간쯤 갔을 때, 방향이 이상하단 걸 눈치채셨습니다. 제가 마차를 세우려 하자, 마부놈이 제게 발길질을 해 마차 밖으로 떨어졌지요.”“그때 왕비께서 뒤따라 오셨습니다. 마마께서는 놀랄 만큼 민첩하게 마차 위로 뛰어올랐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마차가 서쪽으로 향한 것은 분명히 기억납니다.”이윽고 유화는 다급히 물었다.“전하께서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 구하러 가신 분은 있습니까?”……황궁, 어전.소욱의 얼굴은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처럼 어두웠다.서왕을 납치한 자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약쟁이 무리의 소행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그들의 본거리는 이미 파괴되었고 대부분이 체포된 상황이었다.남은 잔당들이 있다 해도, 서왕 같은 인물을 일부러 노리고 데려갈 이유는 부족해 보였다.만약 도망이 목적이었다면, 오히려 짐이 되는 인물을 굳이 데려갈 리가 없었다.무언가, 납득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그날 밤, 자유각.소욱은 발걸음을 옮겨 봉구안이 있는 자유각을 찾았다.하루가 멀다 하고 가까운 인물들이 위험에 처하는 이 시국에, 그의 마음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구안아,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이렇게 궁 밖에 두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하지만 봉구안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빛이 깊어졌고,
궁 밖, 자유각.소욱은 드물게 여유를 낼 수 있는 날이었다.곧장 자유각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는 오늘만큼은 봉구안과 함께 저녁상을 나누고자 했다.헌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있었다.고개도 들지 않고 책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서자, 그제야 봉구안이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폐하,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소욱은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오는 게 싫은 것이냐?”그 말과 함께 그는 주저 없이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직접 의자에 앉은 그는 그녀의 허리를 품에 안고, 손으로 봉구안의 배를 부드럽게 쓸며 아이에게 말하는 척 투정을 부렸다.“들었느냐, 너희 어미는 참 정이 없는 여자다.”“부디 보러 온 아비를 반가워해 줘야 할 텐데 말이다.”봉구안은 그 손을 떼어내며 어이없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싫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폐하께서 상주서를 다 보시지 못하실까 염려되어서입니다.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으시잖습니까.”그녀의 속뜻을 알게 된 소욱은 그녀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입술을 가져가 살며시 입을 맞췄다.그의 눈빛에는 은근한 정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내 걱정은 할 줄도 아는구나.”그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책상 위 책들을 훑었다.“이번엔 또 뭘 보고 있느냐.”“궁에서 은육에게 부탁하여 가져오게 하였습니다.”“혹시라도 모용가 선조들에 대해 알아두면 약쟁이 사건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소욱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몸을 살짝 기댔다.“그럴 필요 없다. 그냥 내게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봉구안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폐하께서… 알고 계십니까?”소욱은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다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용가라면 나도 잘 아는 편이지.”그리고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모용가의 시조는 남산왕과 서왕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공신이었다.”“하지
황성 동쪽 교외.약쟁이 무리의 본거지가 발각되어 관군의 손에 의해 철저히 봉쇄되었다.그곳에 몸 담고 있던 무리 또한 하나하나 사로잡혀 옥에 갇혔다.이어진 엄한 문초 끝에, 그들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약쟁이 무리는 수년간 약쟁이를 만들어 여기저기 팔아넘겨왔다고 했다.그 대상에는 반란을 꾀하던 천룡회는 물론, 동산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문초하던 관리가 다시 물었다.“이 일에 설가가 어떤 연관이 있느냐. 설 대인을 죽인 것도 너희냐.”“예… 저희가 했습니다. 현비마마께서 두 번째로 잡혀가신 이후, 주인어른께서 직접 명을 내리셨습니다. 설가를 제거하라 하셨지요.”“그날 설 대인께서 댁을 나서자마자 손을 썼습니다.”“그가 너희를 고발하려 했던 것이냐.”문초자는 낮게 목소리를 눌렀다.“그렇습니다. 하지만… 설 대인께서 무언가를 알아내신다 하여도 주인어른께서 직접 엮일 일은 없었습니다.”“그분이 아신 건 기껏해야 홍련초와 관련된 일 정도였습니다.”“딸을 살리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으셨습니다.”“설 대인이 알던 건 무엇이더냐.” 관리의 어조가 더욱 날카로워졌다.잡힌 자는 낮게 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그해, 영비마마께서 현비마마를 제거하고자 하셨습니다.”“허나 궁 안의 약물은 태의원이 일일이 기록하여, 함부로 쓸 수 없었습니다.”“영비마마께선 귀가하시는 날을 틈타 독약을 구하려 하셨고, 어디서 들으셨는지 저희 주인어른께서 독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손을 내미셨습니다.”“주인어른께선 처음엔 약을 지어드렸지만, 영비마마께서 제멋대로 약창고에 들었다가 엉뚱한 약을 들고 나왔습니다.”“그 탓에 약쟁이의 독이 세상에 드러날까 주인어른께선 설 대인을 찾아가 경고하셨습니다.”“‘딸을 살리고 싶다면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지요. 대신 해독약을 주셨고, 홍련초를 심게 하여 해독제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동시에 저희도 독을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었지요.”“설 대인께서는 저희를 몰래 추적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