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구안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봉명헌이 너에게 직접 혼인을 약속했느냐, 아니면 네 스스로 정실 부인의 자리를 바라는 것이냐?"영이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도령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봉구안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그 아이가 널 정식으로 아내로 들일 수 없더라도, 널 바깥에 거처하게 할 수도 있다.""그것도 싫은 것이냐?"영이의 표정이 얼어붙었다.그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물었다."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외실을 뜻하는 것입니까?"봉구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그러나, 영이의 얼굴은 순식간에 격렬하게 일그러졌다."아니요! 저는 외실이 되는 건 원하지 않습니다!"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단호하게 말했다."황후마마, 저 역시 한때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여인이었습니다.""제가 원하는 것은 정실 부인의 자리입니다!""남몰래 숨겨지는 외실 같은 신세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만추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찼다.'이 여자는 야심이 너무 크군…'단순한 청루의 여인 주제에, 정실 부인의 자리를 탐내다니.봉구안은 깊은 눈빛으로 영이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천천히 말했다."봉명헌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그 아이가 봉가의 후계자로 남고 싶다면, 너를 정식으로 맞이할 수는 없다.""그러니, 네가 그를 고발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영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소녀에게는 도령께서 친히 인장을 찍은 서약서가 있습니다. 도령께서 제게 직접 혼인을 약속한 증거입니다!""이 문서를 절대 무시할 순 없습니다.""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소녀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그녀는 바닥을 머리로 내리치며 외쳤다."소녀는 이곳에서 목숨을 끊겠습니다!"만추는 즉각 앞으로 나서며 호통쳤다."감히 황후마마를 협박하는 것이냐?!"영이는 눈물 젖은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았다."마마, 협박하는 것
오백은 유씨 가문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 봉구안에게 보고했다.“마마, 유씨 가문의 사람들은… 마마의 모친과 이모를 제외하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게다가, 그 분들은 원래 초상화를 남기는 습관이 없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초상화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봉구안은 차분하게 말했다.“동방세를 데려가라.”“유씨 가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묘사하게 하도록 하여라.”오백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맞다!'왜 이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을까?“즉시 실행하겠습니다, 마마!”……궁 밖.봉명헌은 영이를 바라보며, 마치 원수를 보듯 이를 악물었다.“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하지만 영이는 후회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우리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도령께서 봉가의 후계자가 아니어도, 전 상관없어요.”“저는 봉 도령이 좋습니다. 평생 도령 곁에 있을 거예요.”그녀의 눈빛에는 가족이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아아아아아…!!!”그러나, 봉명헌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봉부.임씨는 울상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아들아, 궁에 가서 무얼 했느냐?”“혹시 황제 폐하께서 너를 등용하시려는 것이냐?”그러나, 봉명헌은 이를 악물며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뭐라고?!”임씨는 충격을 받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궁 안.다음 날이면 무애산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소욱은 출발하기 전까지 남은 국정을 정리해야 했다.그날 밤, 어전의 등불은 새벽까지도 꺼지지 않았다.그는 봉구안이 봉명헌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듣고 한쪽 눈이 떨렸다.'이렇게 강직한 사람이…'그녀는 혈육이라 해도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그런 사람이, 과연 무애산의 '규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소욱은 왠지 불안해졌다.다음 날.조정의 아침 회의가 끝난 후, 소욱 부부는 무애산으로 향했다.그들을 배웅하던 서왕은 어딘가 근심스러워 보였다.그는 왕부로
하늘을 찌를 듯한 무림의 성지, 무애산 수무대.그곳, 깊은 고요 속에서 한 명의 백발 노인이 좌선하고 있었다.그는 바로 무애산의 주인이자 소욱의 스승인 현릉풍이었다.수무대 입구.한 제자가 조심스레 다가와 공손히 예를 올렸다.“스승님,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도착하셨습니다.”“지금 바로 뵙기를 원하시는데, 어찌 하시겠습니까?”세속의 규율대로라면, 황제가 직접 찾아왔다면 마땅히 문 앞까지 나가 맞이해야 했다.그러나 현릉풍은 속세를 초월한 은둔 고수였다.황제라 해도, 그에게는 예외가 아니었다.그렇다고 손님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잠시 후,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그리고 평온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들을 들여보내거라.”“예, 스승님.”수무대 밖.봉구안은 높은 곳에서 끝없이 펼쳐진 산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봉우리 위로 구름이 바람에 흩날리며 마치 신선의 거처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소욱이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아름다우냐?”봉구안은 시선을 멀리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그야말로 인간계의 신선경이라 할 만하군요.”소욱은 가만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는 버려진 아이였다.아버지에게 미움받고, 황궁에서 내쳐진 채 이 산에 던져졌다.그에게 무애산은 절망과 고립의 상징이었다.그는 무애산을 증오했다.그러나 지금 그는 이곳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너와 함께 이곳에 서 있다니… 감회가 새롭구나.”그는 조용히 손을 더욱 꽉 쥐었다.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안아, 스승님은 인자한 분이지만, 규율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야.”“정말로 그분을 설득할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봉구안은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제가 언제 이 곳에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습니까?”소욱의 이마가 순간적으로 찌푸려졌다.“무슨 뜻이냐?”그때, 제자가
고요하던 수무대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현릉풍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사라졌다.방금… 황후가 뭐라고 했는가?황제의 몸에 이상이 있어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니?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황제의 몸 상태는 완벽했다.그 어디에도 문제가 없었다.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소욱이었다.그는 봉구안이 한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내 몸이… 문제였다고?”한순간 혼란스러웠다.그러나 곧 깨달았다.부부는 하나다.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는 두 사람의 문제이다.그리고, 봉구안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이해하는 순간, 소욱은 즉시 반응했다.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그는 바로 스승을 향해 말했다.“스승님, 제 몸을 진찰해 주십시오.”그 순간, 현릉풍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허…”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거, 참…”제자와 황후. 어쩜 이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지.그러나, 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현릉풍이 이 진료를 거부하지 않을 것임을 말이다.그가 이미 두 사람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었다면?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보내 직접 마중하게 했다면?그것은 이미 치료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다만, 무애산의 규율이 걸림돌일 뿐이었다.잠시 후. 현릉풍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허허허!”그는 흰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그의 눈빛이 번뜩이며 소욱을 바라보았다.“겉으로는 황제를 위한 치료라니…”“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구나!”그러나, 소욱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얼굴로 봉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에는 혼란이 가득했다.현릉풍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보아하니, 저 애송이는 전혀 모르고 있었군.’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황후의 단독 계획이었다.그녀는 이미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승부를 결정지어 놓았던 것이다.소욱을 키우며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현릉풍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제자가 완전히 당하
오양련은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에 단호한 기백을 담고 있었다.“황제께서는 숙연과 닮지 않았습니다.”“한 명은 어머니를, 한 명은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셨지요.”“하지만 오늘 직접 확인해 보니, 저 아이는 황제 폐하의 부친을 닮은 모습이 전혀 없습니다.”“그 아이는… 가짜입니다!”정전 안이 한순간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모신 상궁은 주춤하며 머뭇거렸다.“대인, 오늘은…”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숙연 대인을 찾은 날입니다.”“오늘 하루 황제께서 기분이 유독 좋아 보이셨고, 덕분에 병세도 호전될지 모릅니다.”“그런데 이렇게 바로 숙연 대인의 신분을 의심하신다면…”그러나, 황제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손을 들었다.그 순간, 모신 상궁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오양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폐하, 저는 알고 있습니다.”“폐하께서는 그 아이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시지요.”“그러나, 그럴수록 그녀의 진짜 정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부디 신중히 조사하신 후,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황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좋다. 그렇다면 그 반쪽짜리 옥비녀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오양련은 한순간 말을 잃었다.그 비녀가 진짜라는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였다.황제는 비녀가 가짜일 리 없음을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단호한 이유는 단 하나.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었다.황제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 옥비녀는 진짜다.”“그렇다면, 저 아이가 진짜 숙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지.”오양련과 모신 상궁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황제는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녀는 일부러 아무런 의심도 드러내지 않고, 유영을 받아들였다.이유는 단 하나였다.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진짜 숙연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오양련은 한숨을 내쉬었다.“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해 두셨군요.”그러나 그 순간
무애산에 지내는 제자들은 서른 명 남짓.그중 다수는 소욱과 함께 자란 이들로, 서로 거리낌 없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였다.이날, 드물게 방에서 나온 소욱은 정면에서 한 사형제를 마주쳤다.상대는 약을 들고 있었는데,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폐하, 약은 따뜻할 때 드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참자.’소욱은 묵묵히 약을 받아 들었다.그러나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사형제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폐하, 그래서 그동안 후사가 없었던 거였군요. 진작에 스승님께 오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순간, 소욱의 이성이 흔들렸다.그가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 그 사형제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저 놈들이 감히!!”이를 악문 소욱은 살기를 삼키며 방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방 안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봉구안이 있었다.소욱은 즉시 얼굴을 부드럽게 풀며,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었다.“구안아, 약 먹을 시간이구나.”겉으로는 자신이 먹을 약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봉구안은 주저 없이 약 그릇을 들어 올렸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숨에 마셔 버렸다.소욱은 예전에 이 약을 맛본 적이 있었다.상상 이상으로 쓴 약이었다.그녀가 매일 이렇게 삼켜야 한다는 사실에 소욱은 속이 쓰려왔다.“괜찮느냐?”그러자, 봉구안은 덤덤하게 말했다.“약이 쓰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겠지요.”그러고는 바로 물었다.“소군주 역시 한때 한냉증을 앓았다고 들었습니다.”“그 아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적은 없으십니까?”소욱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당시 태의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기에, 먼 길을 오지 않았다.”“그리고, 소아의 병세와 너의 병세는 달랐다.”“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약재는 무애산에는 없었지.”“결국,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소욱이 그렇게 말하며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 순간, 그는 천지설산에서 있었던 그녀의 일을 떠올렸다.그의 시선이 깊어졌다.그
서녀국 황제의 밀서에는 유영에 대한 모든 의혹이 담겨 있었다.봉구안은 조용히 서신을 읽었다.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소욱을 바라보았다.“서녀국에서도 유영이 진짜 숙연이 아닐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이 예상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며칠 전, 그녀는 이미 유씨 가문의 초상화를 받아보았다.동방가문이 각종 정보를 취합해 그려낸 초상화 속 유씨 부부와 죽은 막내아들이 있었다.봉구안은 초상화를 면밀히 살폈다.유영과 그녀의 남동생은 부모와 어느 정도 닮아 있었다.그러나 유영의 어머니만은 달랐다.그녀는 유씨 가문의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었다.왜냐하면, 유영의 나이는 숙연과 정확히 일치했다.과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분명, 이 안에는 숨겨진 진실이 존재할 터였다.봉구안은 조용히 서신을 접었다.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황궁 내부.정희는 궁을 거닐며 어머니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어머니, 다들 그러던데요.”“황제 폐하께서 황위를 어머니께 넘기실 거라고요!”유영은 미소를 머금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이미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서녀국 황제는 젊은 시절 심한 부상을 입었고, 그로 인해 태중의 아이를 잃었다.그 후로 병이 깊어져 더 이상 후사를 볼 수 없었다.그렇기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면, 서녀국을 이을 자가 아무도 없었다.유일한 후계자는 동생 숙연 뿐이었다.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위해 재능 있는 자에게 왕좌를 물려줘야 했다.그러나, 그 어떤 황제도 스스로 권좌를 포기하지 않는다.결국 서녀국의 황위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될 터였다.그녀는 그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유영은 차를 천천히 마시며, 정희에게 단단히 당부했다.“이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내선 안 된다.”“특히, 네 이모 앞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정희는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아요, 어머니. 성급하게 굴어선 안 되죠.”“폐하께서 직접 선포하기 전까지는 신중
남제 황성.봉부.임씨는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었다.“내 아들의 명예가 이렇게까지 추락하다니!”그녀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그런데 그 옆에서 봉명헌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어머니, 전 죽은 것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임씨는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소리쳤다.“네가 봉가를 떠나, 청루의 여인을 맞아들인다고?!”“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봉명헌 역시 답답한 심정이었다.그러나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영이는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이제 그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이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겉으로는 봉가에서 쫓겨난 신세지만, 그의 몸에는 봉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언젠가 그가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면, 아버지와 형이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터였다.그렇게 그는 스스로를 납득시켰다.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통곡하고 있었다.임씨는 머릿속이 하얘졌다.‘이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서방이 떠나기 전, 그녀에게 내명을 맡기며 가정을 잘 다스리고 아들을 보살피라고 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한단 말인가?이제 그녀의 봉가 정실 부인이 될 꿈은 더욱 멀어진 듯했다.……강주의 관청을 순찰하던 봉 대인은 집에서 온 서신을 받아들자마자 눈이 뒤집혔다.“이 놈 자식이! 감히 청루 출신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내가 죽은 줄 아느냐!”하지만 그는 강주에 있는 이상, 직책을 벗어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그날 밤, 봉 대인은 급히 서신을 써서 봉안진에게 보냈다.장남에게 꼭 이 혼사를 막아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봉안진 역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참장부.부인 주씨는 봉안진의 옷을 정리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서방님, 오늘 둘째 도련님의 혼례 초청장이 도착했어요. 자희도 가야 할까요?”봉안진은 묵묵히 책상 위의 초청장을 바라보았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빛에는 한숨과도 같은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